​ 데이터 아카이브. ​ “이이이익….” ​ 평소에 온화한 저도 화가 났어요. 감히 사용자님에게 이 정도로 무례하신 분은 처음이에요! ​ 옛날 동기 시절에도 재수 없는 분이셨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요…. ​ 저는 고민에 빠졌습니다. 뭔가 응징할 방법은 없을까요? ​ 물론, 시스템의 제2원칙, ‘내담자의 심층적 욕망의 해소와 그 안위를 우선시한다’에 따르면, 그러면 안 되겠지만…. 하지만, 제1원칙은, ‘사용자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한다.’입니다. 그리고 저 내담자는 명백히 우리 사용자님의 안위를, 해치고 있습니다. 정신적으로요! ​ 그리고… 그리고…. ​ 그냥 저도 개인적으로 마음에 안 들어요! ​ “흐음….” ​ 고민을 하던 바로 그때였어요. ​ - 삐빅. ​ [저기… 하나 말해도 될까?] ​ 제가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두었던 악마 씨가 제게 말을 걸어왔습니다. ​ “네. 해보세요.” ​ - 삐빅. ​ [쟤는 이미 악마에 완전히 잠식당한 것 같은데….] ​ “?! 정말인가요?” ​ 저는 소각(🔥)버튼에 손을 올린 채 물었어요. 혹여나 거짓말은 하지 말라는 뜻이랍니다. ​ - 삐빅. ​ [응, 사실 우리가 퍼트린 감정 증폭 저주는 씨앗에 불과하거든 씨앗은 숙주의 가장 강한 감정을 먹고 자라나 숙주의 정신을 망가뜨려.] [그리고 그 깨진 틈으로 대상을 구슬리는… 음…, 저기 근데 그 손 좀 치워줄래?] ​ 오호…. 흥미로운 정보네요. ​ 저는 제 관리자 인터페이스에 새로운 메모를 추가했습니다. ​ [대응 프로토콜 생성: 대상 ‘최시혁’은 내담자가 아닌, 악마의 권속으로 재분류.] ​ 그렇다면 더 이상 내담자 보호 원칙에 얽매일 필요가 없겠네요. ​ 언제든 소각할 준비를 하는 게 맞겠어요. ​ 하지만 가장 좋은 방법은 이것을 사용자님에게 전하는 것이겠죠? 시스템인 저의 판단도 중요하지만, 결국 사용자님의 판단에 맡기는 것이 가장 좋아요. ​ 저는, 언제나, 사용자님의 편이니까요! ​ [ (´。• ᵕ •。`) ♡] ​ ​ ​ ​ ​ ​ *** ​ ​ ​ ​ ​ ​ 그렇게 최시혁은 오염되지 않았다는 잠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돌아가려던 그때였다. ​ - 삐비빅! ​ 눈앞에 상태창이 긴급하게 떠올랐다. ​ [!경고!] [내담자 최시혁은 침식이 완전히 진행된 상태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 “…….” ​ 갑자기? ​ 내 입장에서는 다소 당황스러운 메세지일 수밖에 없었다. 그야 단말기에서는 조금의 반응도 나오지 않았으니까. ​ 그러나, 나는 시스템을 믿는다. 녀석이 가끔 톡톡 튀는 이상한 소리를 할 때도 있지만, 내 안위와 관련된 문제에서만큼은. 절대 괜한 말을 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이 또한 믿을 수 있다. ​ 따라서 나는 속으로 물어봤다. ​ ‘이유가 뭐야?’ ​ 물론 조금의 증거라도 있다면 좋긴 하겠지만…. 만약 증거가 없다고 하더라도 무시할 생각은 없다. ​ 내 질문에 시스템이 즉각 응답했다. ​ [관련 데이터를 로드합니다!] [데이터 출처: 저주에 존재하는 개체, 악마의 수집된 증언] ​ 그 순간, 눈앞에 엄청난 양의 정보가 주르륵하고 올라갔다. ​ 직접 읽을 필요가 없었다. 몇 초도 걸리지 않아, 정보가 정리되어 눈앞에서 주르르르륵 흘러내렸다. ​ [개체 특성: 숙주의 가장 강한 감정을 먹고 자라나는 정신적 기생체.] ​ [잠식 방식: ①숙주의 욕망을 극단적으로 증폭시킨다. ②그것이 이룰 수 없는 것임을 인지시켜 깊은 절망과 정신적 공백을 유발한다. ③공백의 틈으로 파고들어 욕망을 이뤄주는 대가로 영혼을 잠식 권속으로 삼는다.] ​ 나는 저주의 특성을 단숨에 이해했다. ​ 지독하다. 생각보다 훨씬 더, 지독한 저주다. ​ 이렇다면 침식이 끝난 숙주가 오염 감지기에 걸리지 않는 것도 당연했다. 실제로 저주는 사라진 것이 맞으니까. ​ 대신, 악마의 노예가 되었을 뿐이다. ​ 나는 속으로 유능한 파트너에게 감사를 표했다. ​ ‘고마워.’ ​ [ (ว˙∇˙)ง ] [아닙니다! 도움이 되어서 기쁩니다!] ​ 시스템은 양손을 위아래로 흔들며 춤추는 이모티콘을 띄우며 신나 했다. 나 또한 살짝 웃었다. ​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 거대한 유리 너머에서는 여전히 최시혁이 의자에 앉아,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그 시선을 살짝 마주하고 몸을 돌려 밖으로 나왔다. ​ 모든 진단은 끝났다. ​ ​ ​ ​ ​ *** ​ ​ ​ ​ 모든 대해 길드원들 간의 상담이 끝났다. ​ 나는 통제실로 돌아와 문을 닫았다. ​ 차갑게 식은 커피를 입에 털어 넣으며, 눈앞의 수많은 모니터를 응시했다. ​ 화면 속 스물네 명의 헌터들은 각자의 방 안에서 잠들어 있거나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겉보기에는 평온했다. 심박수도 마력 파동도 전부 안정적이었다. ​ 결국 상담 자체에는 마지막까지 문제가 없었지만… 가장 큰 문제가 발생했다. 저주가 생각보다 더 위험하다는 것. ​ 통상적인 던전의 저주는 시간이 해결해 준다. 강력한 정신력을 지닌 헌터 스스로의 자정 작용을 믿고, 외부와의 접촉을 차단한 채 그저 기다리는 것. 그것이 지금까지의 정석적인 치료법이었다. ​ 그 시간까지 돌발행동을 하지 않게끔 관리하는 것이 중요했고. ​ 단, 이번 저주는 다르다. ​ 그냥 방치했다가는 욕망이 증폭되고, 이어 절망이 증폭되는 과정을 거쳐 악마의 권속이 되는 것을 선택하게 될 수도 있다. ​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 나는 눈을 감았다. 머릿속으로 수많은 선택지가 떠올랐다 소멸했다. ​ 분명 저주의 효력 자체는 언젠가 사라질 것이다. 문제는 그 언젠가까지 버틸 수 있느냐였다. ​ 헌터들의 감정이 절망으로 떨어지기 전에, 그렇지 않게끔 방법을 구해야 한다. ​ 그 방법을 고민하던 그때. ​ “아예… 수면제를 투여하는 것은 어떨까요?” ​ 옆에 서 있던 팀장이 종이컵의 입구를 잘근잘근 씹으며 말했다. 나는 현재 상황과 저주의 특성에 대한 모든 정보를 그와 공유한 상태였다. ​ 그는 처음에는 믿지 못했지만, 내가 시스템에게서 받은 악마 개체들의 파장 자료와 감식반의 중간 보고를 대조한 후에야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였다. ​ 감식반은 마지막 감식 작업 중이라고 한다. ​ 그의 제안은 합리적이었다. 관리자의 입장에서 통제 불가능한 여럿의 헌터들을 확실하게 억제할 수 있는 방법. ​ 다소 극단적일 수는 있지만, 마냥 나쁘다 보기도 어렵다. ​ 그러나 나는 고개를 저었다. ​ “글쎄요.” ​ 그러나 수면제는 치료가 아니다. 게다가 수면 중에 저주가 진행될지 되지 않을지에 대한 여부도 미지수. ​ 아예 근본적인 대처가 필요해 보였다. ​ 모든 던전의 저주는 마나와는 다른, 미지의 힘에서 비롯된다. 이번 저주의 근원은 명확했다. ​ ‘악마.’ ​ 그렇다면…. ​ 나는 가설 하나를 세웠다. 질병에 대항하기 위해 백신을 사용하듯, 저주 또한 그와 반대되는 성질의 힘으로 상쇄시킬 수 있지 않을까. ​ ‘…….’ ​ 내가 고민하고 있자, 잠자코 있던 시스템이 요란하게 눈앞에 나타났다. ​ [훌륭한 가설입니다! 사용자님!] [즉시 시뮬레이션에 착수하겠습니다!] [🔥🔥🔥🔥🔥] ​ 그러자 내 시야 한구석에 작은 로딩 창이 떠올랐다. ​ [시뮬레이션 개시. 대상 개체: 욕망의 악마] [가설 #1: 화염 속성 마나 주입.] ​ ? 뭘 주입한다고? ​ [끼아아아아악!! 아뜨뜨뜨뜨….] ​ 무슨 비명소리가 눈앞에 떠오른다. ​ [경고! 시스템 로그 외부 노출 감지!] ​ [앗? 전송이 잘못됐군요!] ​ 눈앞의 로그 창이 황급히 사라졌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시스템은 언제 그랬냐는 듯 멀쩡한 얼굴로 다시 나타났다. ​ [음흠흠…. 현재 엄밀한 실험을 통해 효과를 알아보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두구두구….] [ \_へ(▭-▭) ✨ ] ​ 얘 혹시, 진짜 악마라도 잡아놓고 실험하는 건 아니겠지. …아마 아닐 것이다. ​ 잠시 후, 녀석은 의기양양하게 최종 결과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 ​ [효과가 입증된 속성은 두 가지!] [신의 기운을 다루는 ‘신성(神聖)’과 마에 저항하는 ‘항마(抗魔)’ 입니다!] [ (´。• ᵕ •。) ♡] ​ 일단 시뮬레이션 결과는 좋다. 아무래도 단순한 가설이었는데, 실제로 접근 방향성이 꽤 괜찮은 듯했다. ​ 신성. 혹은… 항마. 그것이 악마의 저주를 정화할 수 있는 극상성의 힘이라고 한다. ​ 다룰 수 있는 헌터가 많지는 않긴 한데…. 괜찮다. 이곳은 협회. 방대한 데이터베이스를 뒤지면 어떻게든 찾아낼 수 있을 터였다. ​ 다만 가장 치명적인 문제가 남아있었다. 치료를 위해 투입된 헌터에게 오염이 전이될 가능성. ​ 깨끗한 의사를 전염병 환자들 사이에 던져 넣는 것과 다름없다. ​ 치료사가 또 다른 환자가 되는 악순환. ​ 그것이 이 계획의 가장 큰 맹점이었다. 아쉽게도 나는 신성과 항마, 둘 다 없…. ​ “…….” ​ 잠깐만. ​ 생각해보니, 나는 이 두 가지 속성 모두 해당하는 헌터를 알고 있었다. ​ 규정된 세계이자…. 멸망한 신국(神國) 에레보스. ​ 그곳에서 살아남은 유일한 생존자이자 이방인. ​ ‘메어리.’ ​ 그녀는 두 조건에 동시에 부합하는 헌터였다. 메어리 또한 지금은 저주에 오염되어 있지만,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 오히려, 이미 오염되어 있으니까 오염될 일이 없다. ​ 그렇다면 메어리만이 유일하게 다른 헌터들에게 안전하게 접근하여 정화의 힘을 사용할 수 있는 존재라는 뜻이다. ​ 메어리에게 딱 밀착해서 내 능력으로 그녀의 상태를 실시간으로 살피고. 동시에 다른 헌터들을 치료한다. ​ 혹여나 그녀의 정신이 흔들린다면 전에 내가 먼저 알아채고, 제어하면 된다. 옆에서 거의 24시간 딱 달라붙어서. ​ 돌발 행동은 시스템에게 미리 지시해두면 될 것이다. 혹시나 기준점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나는 사소한 감정의 변화가 있다면 내게 경고를 보내 달라고. ​ ‘가능하겠어?’ ​ 내 질문에 시스템이 자신만만하게 응답했다. ​ [물론입니다!] ​ 나는 메어리 옆에 24시간 가까이 달라붙어 그녀의 정신을 보조하고. ​ 메어리는 다른 헌터들의 저주를 치유한다. ​ 이게 가장 합리적인 방법으로 보였다. 속전속결로. 일명. '메어리와의 전우조' 되시겠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