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든 소동이 끝나고 해가 저물어가는 늦은 오후. 엘리스와 릴리는 길드 근처의, 한적한 카페 구석진 자리에 마주 앉아 있었다. ​ 이곳은 릴리가 좋아하는 카페. 향긋한 커피 향과 재즈 음악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 릴리는 눈앞의 엘리스의 새빨개진 얼굴을 보며 귀엽다는 듯, 붉은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그리고, 친절하게 다시 한번 정리해 주었다. ​ “그러니까~” “같은 종의 수인이랑 같은 집에서 살면….” ​ - 끄덕끄덕. ​ “서로의 페로몬에 영향을 받아서 발정기도 같이 올 수가 있다~ 이 말씀인 거지~” ​ - 끄덕끄덕끄덕. ​ 엘리스는 목덜미까지 새빨개진 얼굴로 끄덕거리는 것이 전부였다. ​ 아침에 그녀에게 상담은 했으나, 대해의 공략 소식으로 인해 긴급상황에 대처하느라 잠시 이야기가 미뤄졌었다. ​그리고 지금 모든 상황이 끝나고, 그녀 둘은 카페에서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이었고. ​ 릴리는 턱을 괸 채 고혹적인 미소로 덧붙였다. ​ “아마 지금쯤 그쪽도 똑같은 일로 속 좀 앓고 있을걸?” ​ 엘리스는 결국 발정기의 이유를 적나라하게 알아버렸다. ​ 어쩐지 언니답지 않게 새벽부터 일찍 일어나서 빨래를 하더라. 그때 발정기 전조증상이 온건 그녀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 어떻게 해야 할까. ​ 당황스럽다. ​ 곰곰이 생각을 해봤다. 오늘 아침, 엘리스가 꿈을 꾸면서 온몸으로 열심히 받아냈던 남성은… 선생님이었다. ​ 엘리스는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호, 혹시… 그, 대상도… 같을 수가 있나여?” ​ 릴리는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 “똑같지.” ​ 이런. 그녀는 친절한 성교육 선생님처럼 설명을 덧붙였다. ​ “애초에 대상이 똑같지 않으면 페로몬이 서로 반응을 안 할 거야. 약간 경쟁 신호 같은 거니까.” ​ “…….” ​ 엘리스는 뭔가 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 “아니이… 그러면 그 소리는….” ​ 나랑. 언니랑. ​ 같은 사람을…? ​ 그러니까, 선생님을…? ​ 릴리는 그런 그녀의 복잡한 얼굴을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똑똑하네, 우리 토끼 씨.” ​ 부정할 수는 없었다. 사실 선생님을 향한 이 마음. 연심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건 완벽한 거짓말. ​ 자신의 가장 깊은 비밀인 그 보육원에서 그를 만났던 그 순간부터. 엘리스는 이미 그에게 마음을 빼앗겨버렸으니까. 그 이후에도 몇번이나 그를 보육원에서 볼 수 있었다. ​ 그렇게 비밀을 보여주고, 공유하는 상대에게 나쁜 마음을 품을 수는 없다. ​ 그래. 그럼…. ​ ‘나야 뭐 그렇다 치고….’ ​ 하지만 문제는 언니였다. ​ 루나 언니랑 선생님은 환자와 상담사의 관계다. 자세히 아는 것은 아니지만, 상담사와 내담자의 연애는 불가능하다고 들었다. ​ 그리고 무엇보다 선생님이 그런걸 어길 리가 없어 보였고. 완전 프로페셔널한 분이셨으니까. ​ 그러면 언니는 불가능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인데. ​ ‘언니랑 같은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 ​ 이건 문제가 안 된다. ​ 그녀가 특별한 게 아니고, 애초에 뛰어난 수컷이 두 암컷을 품에 두는 것과. ​ 자매로서 같은 남성을 섬기는 것, 이것은 수인 사회에서는 흔한 일이었다. ​ 다만, 어디까지나 이룰 수 있을 때의 이야기. 이룰 수 없는 꿈을 품고 사는 것은… 다르다. ​ 언니의 가여운 꿈을 이루어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 엘리스는 고민했다. ​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 분명, 있을 것이다. ​ ​ ​ ​ ​ ​ ​ *** ​ ​ ​ ​ ​ ​ ​ 상담은 쾌속으로 이어졌다. ​ 오염의 전이가 되지 않는다는 것은 확인. 내가 면역자라는 것이 확인된 이상, 더 이상 지체할 이유는 없었다. ​ 나는 재빠르게 대해의 길드원들의 상태를 체크했다. 오염의 정도가 가장 약한 길드원들부터, 차례대로. ​ 단순히 배고픔을 호소하는 등의 오염 정도가 약한 길드원들부터. 슬픔 같은 비교적 통제할 수 있는 감정이 증폭된 이들까지. ​ 그러나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 ‘…….’ ​ 정도가 심한…. 던전 내에서 공개적으로 거사를 치렀던 부부들이었다. 참고로 둘은 한 방에 몰아넣었다. ​ 팀장에게 듣기로는 처음에는 두 사람을 다른 방에 분리했다고 한다. ​ 그러나 둘은 서로를 갈망하는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방을 전부 박살 내놨다고 하더라. 결국 이게 가장 합리적이라고 여겼다. ​ 내가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생각보다, 두 사람의 상태는 멀쩡했다. 단, 하나만 제외하면. ​ ‘네, 그때가 가장 기분이 이상했어요.’ ​ ‘다행히 지금은 좀 괜찮은 느낌?’ ​ 둘은 이성적이고 또렷한 목소리로 내 질문에 대답했다. 던전에서 겪었던 일부터, 지금 느끼는 감정까지 상세하게. ​ 다만, 그 모든 상담이 침대 위에서 위아래로 격렬하게 들썩이는 하얀 이불을 상대로 진행되었을 뿐이다. ​ - 삐걱, 삐걱. ​ 나는 애써 침대에서 나는 삐걱거리는 소리와 신음을 외면했었고…. 일단, 그 기억은 넘기자. ​ 이제 마지막 길드원만이 남았다. ​ ‘최시혁.’ ​ 내 과거 동기이자, 메어리의 동료. ​ - 똑똑. ​ 나는 노크와 함께, 격리 상담실로 들어갔다. ​ “…….” ​ 침실에는 한 남성이 뒤를 돌아보며 서 있었다. 익숙한 뒷모습이다. ​ “안녕하세요. 상담사 유선우라고 합니다.” ​ 아는 사이였기는 하지만… 그다지 사이가 좋지는 않았던 걸로 기억한다. … 딱히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그냥 사람 간의 궁합이 좋지 않았다. ​ 사적인 감정은 지워낸다. 지금은 그의 동기가 아닌 상담사니까. ​ 나는 매뉴얼대로 입을 열었다. ​ 내 목소리에 최시혁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 그의 눈동자는 비어있지는 않았다. 오염이 강하게 나타난 것은 아닌듯하다. ​ 대부분 침식이 강하게 된 이들은, 동공이 혼탁했으니까. 이러면 다행일 수도 있다. ​ “사슬지옥에서 발생한 정신 오염으로 인해, 확인차 상담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던전 안에서 느끼셨던, 특이사항이나….” ​ 하지만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 “흐.” ​ 그러나 그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 “옷 잘 어울리네.” ​ 그리고 자리에 앉아 계속해서 훑었다. ​ “야, 축하한다. 어울리긴 한다. 상담사.” ​ 목소리에는 조소가 가득했다. ​ “이야기는 들었어. 헌터 그만뒀다는 거. 잘한 결정이야. 워낙 재능이 없으면 살아남기 힘든 판이니까.” ​ “감사합니다.” ​ 나는 그 뻔뻔한 무례에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 나는 최시혁과 잘 맞지 않았던, 그 이유를 다시 한번 상기했다. ​ 바로 이런 이유였다. 그는 언제나 남을 깔보는 듯한 행위가 기저에 깔려 있었다. ​ 이것처럼 정도가 심하지는 않았지만…. ​ 지금은 그 정신 오염 때문에, 그런 성향이 더욱 증폭된 것으로 보인다. ​ 감정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는다. ​ 나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우선 간단히 질문부터 드리겠습니다. 오염을 처음으로 감지한 것은….” “됐어. 봐서 뭘 알기나 하겠어? 저주인데.” ​ 그가 내 말을 잘랐다. “나는 괜찮으니까.” ​​ [!!!! 무례하고 버릇없는 내담자입니다!! ヽ( `д´*)ノ] ​ 나는 그런 그를 아무 말 없이 마주 보았다. 뭔가 말로 드잡이질할 생각은 없다. 그건 피곤한 일이다. ​ 백 마디 말보다 빠른, 그의 상태를 열었다. ​ [최시혁] [메인 스탠스] [나는 완벽하다. 나는 틀리지 않았다. 유선우에게 동정이나 진단 따위는 받지 않는다. 절대로 저 녀석 앞에서 약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 상당히 방어적인 내면이 눈에 들어왔다. ​ 일단 스탠스 자체는 이해가 간다. 어딘가에 갇혀있고, 그 사유도 그다지 유쾌하지 않으니 자기방어적인 태도가 나타난 것일 것이다. ​ 스탠스 자체는 이해가 가는데…. ​ 아, 맞다. ​ 나는 주머니에서 팀장이 넘긴 간이 오염 감지기를 꺼내 들었다. 뭐 이것저것 논쟁할 필요가 없다. ​ 소리가 나면… 안 괜찮은 거고. 소리가 안 난다면, 정말 괜찮은 것일 수도 있고. ​ 나는 단말기를 유리벽 너머의 최시혁에게 갖다 댔다. ​ - ……. ​ 그런데 단말기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나지 않았다. 오염이 되지 않았다? ​ 감지기에서 적발되지 않는다면, 당연히 그는 오염된 것이 아니다. ​ 내가 그랬으니까.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자연스러운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추측. ​ 최시혁은…. ​ 오염되지 않았다. ​ ​ ​ ​ ​ ​ *** ​ ​ ​ ​ ​ ​ “으응… 그렇구나. 그럼 너희들의 목적은 뭔데?” ​ 메어리는 카메라가 없는 자신의 침실 침대 위에 편안한 자세로 누워 있었다. 그녀는 손바닥 위에 올려둔 작은 무지갯빛 구슬을 들여다보며 대화를 나누고 있다. ​ - 저희는 숙주들의 정신 오염이 목표…. ​ 메어리는 하품을 하며 말을 잘랐다. ​ “구슬 깨버릴까?” ​ - 아닙니다! 주인님! 전부 전부 말씀드리겠습니다! - 저희의 궁극적인 목표는 모든 인류의… 악마 권속화입니다! ​ “권속화?” ​ - 넹…. ​ 추상적인 표현이다. ​ “조금 더 자세히 설명해볼래?” ​ - 알겠습니다…. ​ 악마는 울적한 목소리로 설명을 이어갔다. ​ - 기본적으로, 정신 오염이 시작되면 해당 숙주는 자신의 가장 깊은 욕망을, 맹목적으로 추구하게 됩니다. ​ “응.” ​ - 하지만 그 증폭된 욕망이 크면 클수록, 숙주는 그것을 이룰 수 없는 자신의 무력함에 더 큰 절망을 느끼게 되지요. 그게 바로 두 번째 단계입니다. ​ - 바로 그때. 그 약해진 정신의 틈을 비집고, 저희 혹은, 저희의 주군께서 그들의 눈앞에 나타나 권속화를 제안하는 겁니다. 그들의 욕망을 이뤄줄 힘을 주는 대가로, 그들의 영혼을 받는 것이지요. ​ 메어리는 그 모든 설명을 조용히 듣고 있었다. ​ “되게 무서운 짓이네?” ​ 그녀는 그렇게 생각했다. 감정을 고조시켜 욕망을 추구하게 하고. ​ 그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대상이 절망에 빠졌을 때…. ​ 매력적인 선택지를 제시한다. ​ 하지만 메어리는 바로 그 계획의 맹점을 짚어냈다. 모든 인류의 권속화. ​ 그럼 빠르게 많은 사람들에게 전이시키는 것이 최우선이다. ​ “그런데 너희. 지금 다 격리당했는데, 이미 실패한 거 아니야?” ​ - …… 맞습니다… 사실 저희도 인류가 이 정도로 방비를 했을 줄은 몰랐습니다. ​ 메어리는 고개를 으쓱했다. ​ 그렇다면 상관없다. 대해 길드원들이야… 알 바가 아니다.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으니까. ​ 관심사는 하나뿐. ​ “알았어.” ​ - 짝. ​ 메어리는 손뼉을 한번 쳤다. ​ “그럼, 재미없는 이야기는 거기까지 하고.” ​ 그녀는 베개 위에 둔 구슬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는 기대감에 가득 찬 목소리였다. ​ “하던 이야기나 마저 할까? 아까 어디까지 했지?” ​ - 아까… 218번째까지 말씀드렸습니다…. ​ “오케이, 다음 거 큐.” ​ - 네… 그러면 남자를 보내버리는 테크닉, 219번째 시작하겠습니다…. ​ 메어리가 악마의 권속이 되는 일은 없었다. ​ 대신··· 새로운 권속을 손에 넣었다. ​ 그것도, 꽤나 유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