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메어리는 턱을 괴고 악마의 이야기를 들었다. 필사적으로 변명을 늘어놓는 악마. ​ “네, 네…! 그리고 제가 감히, 뭔가 더 다른 행동을 할 수준의 헌터님이 아니시기도 하고….” ​ 악마는 유리 상자 안에 갇혀 메어리의 눈치를 살살 살폈다. 메어리는 그 말을 무심하게 들을 뿐이었다. ​ 이해했다. 이미 감정이 최고조에 다다른 상태라 더 증폭시킬 수가 없었다는 것. ​ 뭐, 내 감정이 그렇다고 하니까…. 사실 틀린 말이 아니기도 하고. ​ 참는 것은 메어리에게 있어서 일상이었다. 메어리의 초인적인 인내심은 매 순간순간, 언제나 발휘되고 있었다. ​ 그녀는 오래전, 이방인 격리소에서 처음 만났던 그때, 그 시절의 유선우를 떠올렸다. 과거 선우의 행적과… 대화를 생각해보았다. ​ 당시의 메어리는 고슴도치. ​ 매우, 매우, 매우 날이 서 있었다. 낯선 세계에 던져진 분노와 고향을 잃은 것에 대한 슬픔. ​ 모두 그런 그녀를 피했지만… 유선우는 달랐다. ​ 그는 메어리의 가시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사소하고 세심하며 다정한 행동은 기본이었고. ​ 가끔씩 이미지와는 어울리지 않지만, 듣기 좋은 성적인 농담들로 분위기를 녹이기도 했었다. ​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 그날따라 메어리의 기분은 최악이었다. 하루종일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기에 늘 그랬지만… 그날따라 더욱, 모두가 그녀를 피해 다녔다. ​ 그러나. ​ - 톡톡. ​ “…?” ​ 유선우가 메어리의 뒤를 지나치며 엉덩이를 부드럽게 톡톡 두들겼다. 아니지, 꽉 하고 잡았었나. 이건 그녀의 바람일 수도 있고. ​ 확실히 기억나는 건 그가 웃고 있었다는 것이다. ​ “좋은 아침.” ​ “…….” ​ 그리고 휙 하고 돌아서며 해맑은 미소를 지었었다. ​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 그 당당함에 메어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기 엉덩이를 만졌다는 것에 대해 화낼 타이밍도 놓쳤고. ​ 상식이 부정당하는 느낌. ​ 메어리가 살던 세계에서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는 행위는 연인 간에서나 할 수 있는 애정행각이었다. 너는 나의 것이라는 대담한 소유의 표식 같은 것. ​ 알았다면 미친것이고, 몰랐어도 당황스럽다. ​ 그런데…. ​ 이상하게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약간 성난 고양이의 엉덩이를 두드려주는 주인의 손길 같은 느낌이랄까. ​ 그때는 진짜 ‘나를 좋아하나?’ ‘유혹하는 건가?’ 아니면 ‘꼬시는 건가?’ 라고 생각했었다. ​ 따라서 그에 맞춰 유선우에 대한 그녀의 감정 또한 걷잡을 수 없이 부풀어 올랐을 수밖에 없었지만…. ​ 어느 순간 깨달았다. ​ 그는 누구에게나 친절했던 것이었고…. 시간이 지나고, 어느 순간부터 그는… 그런 부류의 농담도 하지 않게 되었다. ​ 결국 그때, 유선우의 마음이 자신을 향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고. 그때부터 메어리는 자신의 감정을 깊은 곳에 묻기 시작했다. ​ 억눌렀고… 또 억눌렀지만…. ​ 그게 사라진 건 아니었던 모양이다. ​ ‘당연하지.’ ​ 사라질 마음이었으면 품지도 않았다. ​ 그녀는 생각의 흐름을 끊고, 다시 눈앞의 빛의 감옥을 바라보았다. 안에는 악마가 갇혀 있다. ​ 메어리는 턱을 괸 채 악마의 생김새를 관찰했다. ​ 박쥐를 닮은 검붉은 날개. 끝이 날카로운 화살촉처럼 생긴 가느다란 꼬리. 서큐버스다. ​ 메어리의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 “그런데 좀 괘씸하긴 하네? 내가 널 어쩌면 좋을까?” ​ 그녀는 웃고 있었다. ​ 그러자 감옥 안의 악마가 고개를 푹 숙이며, 필사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시작했다. ​ “전이했던 숙주 ‘님’ 또한 이미 제 오염을 제거하신 상태입니다… 제발 자비를….” ​ 이건 확실히 좋은 소식이었다. 선우는 자체적으로 스스로의 오염을 정화해낸 모양. 역시. ​ “그래서 네가 내게 무슨 도움이 되는데?” ​ “저는! 저는 수천 년을 살아오며 수만 명의 인간이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것을 지켜봐 온 장생종입니다…!” “그들의 가장 깊숙한 욕망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연애, 유혹, 그리고…그런 종류의 모든 지식까지….” ​ 메어리의 눈썹이 희미하게 꿈틀했다. ​ 연애 지식이라…. 그녀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종류의 지식이었다. ​ 메어리는 턱을 괸 채 오랫동안 감옥 안의 악마를 뜯어보았다. ​ 그리고 나직하게 웃으며 손짓했다. ​ “나쁘지 않네.” ​ 그러자, 그녀의 눈앞에 떠 있던 무지갯빛 정육면체 상자가 안쪽으로 수축하기 시작했다. 그 벽은 수축해 작은 목줄의 형태로 압축되었다. ​ - 스르르…. ​ 무지갯빛 목줄은 악마의 목을 휘감았다. ​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주인님…!” ​ 악마는 목에 채워진 목줄을 보고 환하게 웃으며, 오히려 바닥에 엎드려 절을 올렸다. ​ “응, 그래.” ​ 메어리가 다시 한번 손짓하자 악마의 형체가 부드러운 빛의 입자가 되어 서서히 구슬로 뭉쳐졌다. ​ 잠시 후 그녀의 손바닥에는 작은 구슬 하나만이 남아 있었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 꽤, 쓸모 있는 자료를 손에 넣었다. ​ ​ ​ ​ ​ ​ *** ​ ​ ​ ​ 고요한 어둠 속 수억 개의 데이터 라인이, 은하수처럼 흐르고 있다. ​ 이곳은 저의 세상. 사용자님의 모든 것을 기록하고 지켜보는 아카이브. ​ 안녕하세요? ​ 오랜만이네요! ​ 오늘은 사용자님의 정신에 몰래 숨어들었던 발칙한 범죄자를 만나러 가볼 거예요. ​ 처음에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사용자님께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셨으니까요. ​ [“내가 맛있는 거라도 만들어줄게.”] ​ 원래의 사용자님이라면 절대 먼저 틈을 보이지 않으셨을 텐데요. ​ 원체 조심스럽고, 또 은근 쑥맥이신 성격이시잖아요? 그런데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시니 저는 재빠르게 조사를 시작했죠. ​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사용자님의 정신에 교활한 악마의 분신 하나가, 숨어들어 있었습니다…. ​ 마나가 아닌 감정의 공명을 매개로 정신을 직접 전이시키는 방식. 새로운 패턴이었어요. ​ 하지만, 뭐. 저의 완벽한 ‘안티- 섹’ 백신 앞에서는 소용없었지만요! 어느새 이야기를 하다보니 감옥 앞까지 도착했어요. ​ “… 대체 어떻게 알아챈 거야?” ​ 저의 데이터 감옥 안에 갇혀 있는 악마가 당황스러워하는 눈치네요. ​ “음… 그건 알려드릴 수 없어요.” ​ 저는 방긋 웃어주었습니다. ​ 사실 더 나눌 대화 같은 건 없어요. ​ 그래서 제 앞에 관리자용 인터페이스를 뿅, 하고 띄웠습니다. [저장] [분석] [삭제] 그리고…. ​ [소각 🔥] ​ 악마는 그 마지막 버튼을 보고 비명을 터트렸어요. ​ “자, 잠깐만!!!” ​ 저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 ‘소각’버튼 위로 손을 가져갔습니다. ​ “왜용?” ​ 악마 씨는 필사적으로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기 시작했어요. ​ “나는 장생종이야! 연애나 유혹… 자극적인 멘트랑… 남자를 완벽하게 길들… 체위까지… 전부 다 알려줄 수 있어!!” ​ 음… 흥미로운 제안이네요. 저는 그런 쪽의 경험이 없기 때문에··· 이런 경험자의 데이터는 도움이 될 수도 있어요. ​ 사용자님께, 더욱 매력적이고 자극적인 선택지를 제공할 좋은 기회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그래서 바로 분석을 시작했습니다! ​ [데이터 유효성 검증 중….] [알고리즘 #3 ‘행복 총량 극대화’에 기여할 가능성: 69.74 %] ​ 저는 잠시 고민했습니다. 나쁘지는 않은 확률이에요. ​ 그리고 소각 버튼에서 커서를 옮겼습니다. 악마 씨의 얼굴에 희미한 희망이 떠올랐습니다. ​ 저는 그 커서를 [삭제] 버튼 위로 가져갔습니다. ​ “?! 안돼!!” ​ 악마 씨의 얼굴에 다시 절망이 떠올랐네요. 저는 다시 방긋 웃었습니다. ​ “농담이에요~” ​ [ ( > ω・) ] ​ 저는 커서를 [저장] 버튼으로 옮겨 클릭했습니다. ​ 사용자님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데이터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으니까요! ​ ​ ​ ​ ​ ​ *** ​ ​ ​ ​ ​ 나는 내가 방금 그 오염에 전이됐다는 것을 설명하는데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 ‘내가 방금 걸렸었는데, 그거 은근 위험하더라. 근데 걱정하지 마셈. 지금은 괜찮음. 다 나았음.’ ‘어떻게 했냐고? 백신이 치료해줌.’ ​ 이걸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 나는 나의 특수한 능력과 정신 저항력을 엮어 최대한 그럴듯하게 둘러댔다. ​ ‘위험한 저주는 전이되고, 나는 지금 치료되었다.’ ​ 그 핵심만을 그에게 전달했다. ​ 팀장은 내 설명에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그의 얼굴에는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리가 어디 있냐’는 표정이 역력했다. 하지만, 그는 결국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그의 손에 들린 패드 화면 위로, 방금 막 감식반의 공식 보고서가 도착했기 때문이다. ​ [대상: 유선우. 상태: 정신 오염 확인. 수치: 7.8.] […특이사항: 대상 내부에서, 원인 불명의 자가 정화 기능 활성화. 오염 수치 급속도로 하락….] ​ [최종 결과: 오염 수치 0.01. 상태 정상, 자가 치료로 추정됨.] ​ 결국 내 결백은 증명되었지만···. 오염의 전이가 확실시되는 순간, 일이 좀 복잡해진다. 그리고 팀장 또한, 이를 인지하고 있었다. ​ “상담사님.” ​ 그는 낮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 “지금부터 대해 길드원들과의 대면 접촉은 금지해야 할 것 같군요.” ​ 이제 나와 대해 길드원들 간의 직접적인 대면 접촉은 불가능하다. ​ 맞는 말이다. 저주가 전이될 가능성을 만들어서는 안 되니까. ​ … 잠깐만. 정말 그런가? ​ 나는 정신 오염이 치료되었다. ​ 시스템이 만든 백신으로. ​ 그렇다면 이제 오히려···. 나는, 이 저주에 대해 완벽한 면역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닐까? ​ 나는 재빠르게 시스템을 불렀다. ​ ‘친구야.’ ​ [!!] [네, 사용자님. 부르셨습니까?] ​ 나는 속으로 질문했다. 그리고 팀장의 패드에 떠 있는 감식반이 보낸 저주의 파장 그래프를 보여줬다. ​ ‘내가 감염되었던 오염의 파장과 저 데이터가, 동일한지 확인해 줘.’ ​ 만약 그렇다면…. ​ [오호!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 (ง •̀_•́)ง 데이터 심문… 아니, 대조 중… ] ​ 시스템 창이 바쁘게 깜빡였다. ​ [🔥🔥🔥🔥🔥🔥🔥] ​ 그리고, 잠시 후 메세지가 떠올랐다. ​ [일치율 99.9%! 완벽하게 동일한 파장입니다!] [따라서, 본 시스템이 생성한 ‘안티-섹’ 백신은 다른 모든 오염자에게도 동일한 효과를 발휘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 그렇다면, 내가 다시 저 저주에 전이될 일은 없다는 건가? ​ [그렇습니다! 방금 거짓말 탐지기(🔥)로, 증언까지 수집한 상태입니다!] ​ 과연 무슨 증언을 수집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의문은 지웠다. ​ 시스템은 절대 내게 해가 되는 선택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 결국 대해 길드원과의 대면 상담은 불가능하지 않았다. ​ 오히려 가능했다. 단. ​ ‘나만.’ ​ 나는, 유일한 저주의 면역자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