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통상적으로 이방인에게는 ‘기수’라는게 존재한다. ​ 약간 대학생의 학번이나, 훈련소의 기수 같은 느낌이라 보면 될 것이다. ​ 보통 비슷한 시기에 낯선 세상에 던져진 이들끼리 묶어서 교육을 받고 적응을 하다 보니, 하나의 기수가 되는 것이다. ​ 평균적으로 3개월에 한 번씩 배출이 된다. 비슷한 시기에 떨어졌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우리는 동기가 되었었다. ​ 함께 교육받고, 함께 이 세계에 적응하며 서로의 위안이 되어주고는 했다. 지금이랑은 느낌이 좀 다르다. 지금은 협회가 완벽히 정립한 시스템과 여러 가지로 인해 다소 삭막해졌다. ​ 설유월만 보더라도 타 이방인과의 관계가 줄어들었으니까. 어쨌든, 그때는 그랬다. ​ 아마 설유월의 기수는 31- 3기. 2031년도의 3번째 기수. ​ 그리고 나는… 25-4기였다. 어느 정도 체계는 잡혔지만, 여전히 혼란스러웠던 과도기 시절에 넘어온, 살아있는 화석이라 봐도 무방했다. ​ 그리고. ​ 그때 그 시기. ​ 나의 동기 중 한명. ​ 메어리. 그녀는 지금 TV에서 던전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 그때 그 시기. 25-4 기는 황금 기수라 불렸다. 유독, 재능이 뛰어난 이방인들이 많이 쏟아져 나왔던 기수. ​ 대충 집어도 A급 헌터라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유례없는 헌터 풀을 가지고 있었다. ​ 사실, 내가 해태 길드에 그나마 쉽게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었다. 그때는, 황금기수 출신이라면 길드들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잡고 보던 시절이었으니까. 나 또한 정신없이 그 계약서에 사인을 했었다. ​ 뭐, 결과적으로 위재완 팀장에게는 미안하게 됐지만…. ​ 지금 와서 보면 25-4기에서 이방인은 유일하게, 나만 꽝이었다. 적어도 전투 요원으로서는. ​ 다른 동기들은 지금 거의 대부분 완벽하게 자리 잡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못해도 A급 헌터. 잘되면 10대 길드의 에이스 정도. ​ 그리고 그 동기 중, 가장 눈부신 두 명이 바로 지금 TV 화면 속에 있었다. ​ 메어리. 그리고 최시혁. ​ 최시혁은… 그다지 친하지 않았지만, 적어도 메아리랑은 친분이 있었다. 뭐,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 각자의 길드로 돌아가 할 일들을 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좀 멀어졌던 것 같다. 연락이 끊긴 건 아니었어도. 거리감이라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니까. ​ 나는 TV 화면 속, 지금의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의 사람이 되어버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볼 뿐이었다. ​ 그러나 이내 고개를 저었다. 분명… 언젠가는 꿈꾸던 자리였지만, 이제는 괜찮다. ​ 할 수 있는 걸 하기로 결정했으니까. ​ “친구야.” ​ 나는 시스템에게 말을 걸었다. ​ [네! 부르셨습니까?] ​ “너 쟤 기억하지?” ​ [!] [네! 물론입니다! 사용자님의 동기, 메어리 헌터!] ​ 사실상 완전 날 것의 상태인 내 능력을 처음으로 겪었던 대상이기도 하다. 그때는 이게 옳은 선택지인지 나쁜 선택지인지 구분도 못 하고 얘가 하라는 대로 다 했던 것 같다. ​ 지금이라면 거절했을 선택지들 같은 것들도 전부 다. ​ 다행히 그때도 내가 봤을 때의 결과는 좋았고. 그래서 현재의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 거기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 메어리는 이방인이지만…. 규정된 세계가 좀 특이했었다. ​ 아니지, 불우하다고 봐야 할까. ​ 어쨌든 그녀도 쉽지만은 않았을 것이다. ​ - 띠링. ​ 그때, 메세지가 도착했다. ​ [진세아]: 선우야, 미안. 지금 던전 브레이크 때문에 소집이 걸렸어. [진세아]: 다음에 만나자. ​ 진세아에게도 메세지가 도착해있었다. ​ 이건 사실 아까 재난 문자를 봤을 때부터 당연한 수순이라 여기긴 했었다. 던전의 공략이 끝나면 마력 역풍은 거의 반드시 일어난다. ​ 던전의 등급에 따라 역풍의 크기에 차이가 있는 편이다. ​ 그 거대한 마력에 반응하는 타 던전이 붕괴할 수도 있고. 혹은 필드의 마수들이 반응하여 도심지로 달려올 수도 있다. ​ 따라서 이럴 때는 근처 길드들의 헌터들이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원칙이었다. ​ [유선우]: 응 고생해. 답변은 안 해도 돼 ​ 아마 지금 진세아는 정신없이 바쁠 것이다. 나는 최대한 간결하게 답했다. ​ “어으.” ​ 비상대기. 생각만 해도 싫다. ​ 다행히도 나는 이제 헌터가 아니다. 내 할 일이나 하자. ​ 나는 상담소 책상 앞에 앉아, 새로 설치된 비대면 상담 프로그램을 실행시켰다. ​ 그러나.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다. ​ “……아.” ​ 애초에 헌터들이 전부 비상대기면. 상담을 신청할 사람이 없었다. ​ 사태가 수습되기까지는 적어도 몇 시간. 어쩌면 오늘 하루 전부가 될 수도 있다. ​ “…….” ​ 나는 졸지에 휴일이 된 셈이었지만…. 마냥 기뻐할 수만은 없었다. ​ 할 일이 없다면. ​ 나는 대비를 하면 된다. ​ 몇 달 동안 집을 떠나 생과 사의 경계를 넘나든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정신적으로도,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 육체가 지치면, 정신이 무너져 내리는 것은 한순간이다. 높은 확률로 그 인원들 중 다수가 조만간 내 상담실의 문을 두드리게 될 것 같았다. ​ 그들을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 “자료나 받으러 가자.” ​ 나는 비슷한 사례의 자료들을 조사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섰다. 협회의 자료실로 향하기 위해서. ​ “…….” ​ 물론, 그들이 모두 괜찮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내 상담소를 두드리는 자가… 메어리는 아니었으면 했다. ​ 그녀는 내 자랑스러운 동기였으니까. 무사했으면 해서. ​ 그건, 나의 동기로서의 작은 바람이었다. ​ ​ ​ ​ ​ *** ​ ​ ​ ​ ​ 던전의 공략 완료로 인해 발생한 마력 역풍. ​ 그것이 잠잠해질 무렵 가장 먼저 경계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근원지였다. ​ 그곳에서는, 예측 불가능한 새로운 던전이 열리거나 혹은, 또 다른 전이가 발생할 수도 있었으니까. ​ 따라서 해태의 비상 전력인 진세아 또한, 그곳으로 향했다. ​ 진세아가 보기에는 현장은 이미 거의 정리되는 상태였다. 대해 길드의 후발대가, 장기간의 공략으로 인해 피로해진 선발대 멤버들을 부축하며 잔해 너머에서 걸어 나오고 있었다. ​ 그러나 그들의 상태는 하나같이 좋지 않았다. ​ ‘… 뭐지?’ ​ 눈에 띄는 상처는 없었다. 상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장비나 무구의 상태 또한 매우 괜찮았다. S급 던전 치고는 상당히 양호한 상태. ​ 그러나, 다들 눈동자가 맛이 가 있었다. 기운이 없어 보이고 조금… 아니, 많이 퀭한 느낌. ​ 육체의 피로보다는 정신적인 피로가 상당해 보였다. 급하게 파견된 헌터의 의무팀 또한 고개를 저었다. ​ 치료할 수 있는 상처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헌터들의 상태는, 분명 좋지 않았다. ​ 그러던 중. ​ 진세아의 눈에 유독 다른 한 사람이 들어왔다. ​ “…….” ​ 다른 이들과는 달리 누구의 부축도 받지 않은 채 홀로 서 있다. 빛의 각도에 따라 오로라처럼 색이 변하는 신비로운 연보랏빛 머리카락. ​ 그리고, 진세아 또한 아는 사람. ​ 유선우의 전 동기이자, 대해 길드의 헌터. ​ 메어리였다. ​ 그녀는 그들 중에서는 거의 유일하게 멀쩡해 보였다. ​ 하지만, 바로 그때였다. ​ 지친 몸을 이끌고 의무대에 다가가던 한 헌터가, 메어리의 등 뒤에서 멈추고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그렇게 몇 초간 그녀를 뚫어져라 바라보더니…. ​ 메어리에게 달려들었다. ​ “잡아!!!” ​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현장에 울려 퍼졌다. ​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메어리는 고개를 돌리더니. ​ - 쾅! ​ 손짓 하나로 자기에게 달려들던 헌터를 땅에 꽂아버렸다. A급 헌터를 한 손으로 찍어 눌러버린 것이다. ​ “카메라 꺼! 당장 안 꺼!?” ​ 부 마스터인 해왕 강민호는 카메라를 치켜든 기자들에게 고함쳤다. ​ 진세아는 그 혼란을 무심하게 지켜봤다. 달려든 남성의 눈빛은 확실히 맛이 가 있었다. ​ 입에서는 침을 뚝뚝 흘리기까지 한다. ​ 분명… 뭔가 있다. ​ 대해 길드는 온전히 공략을 마친 것이 아니다. ​ 그러던 중. 진세아와 메어리의 눈이 허공에서 마주쳤다. ​ 메어리는 자신을 바라보는 진세아를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 방금 자신에게 한 남성이 달려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전혀 상관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 ​ 그리고 그녀는,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 진세아 또한 그런 그녀를 향해, 똑같이 고개를 숙여 화답했다. ​ 그렇게 끝난 줄 알았다. 그러나 메어리는 천천히 진세아쪽으로 다가왔다. ​ 진세아 또한 피하지는 않았다. ​ 메어리가 가까이 와, 진세아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두 사람의 거리는 불과 한 뼘이 채 안 됐다. ​ 그리고 마침내 나직하게 물었다. ​ “선우는… 잘 지내나요?” ​ 메어리가 진세아에게 다가와 처음으로 물은 질문은, 유선우의 안부였다. 인사도, 소개도 아니었다. ​ 진세아의 입꼬리가 살짝 올라갔다. ​ “너무 잘 지내죠.” ​ 그리고 부드러운 목소리로 덧붙였다. ​ “특히, 요 몇 달 간 아주 많이요.” ​ 진세아 입장에서는 늘. 언제나. 메어리는 가장 까다롭고 거슬리는 상대였다. ​ 선우가 이 세계에 와서, 처음으로 만났던 여자. 그녀가 모르는 선우의 과거를 알고 있는 존재. ​ 따라서 유선우라는 존재를 소중하다고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그녀의 존재는 존재만으로도 매우 거슬렸었다. ​ 그러나. ​ 그것도 한순간이다. 오래전의 이야기일 뿐이다. ​ 메어리와 유선우가 함께했던 시간보다… 이제 진세아와 함께했던 시간이 더 길다. ​ 진세아는 장담할 수 있었다. ​ ​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