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전 11시. ​ 다소 이른 점심을 먹을 시간. 진세아는 해태에서 S급 헌터인 그녀에게 지급한 스포츠카를 타고 유선우의 상담소로 향하고 있었다. ​ 깜짝 방문이다. ​ 나타나면 좋아하지 않을까? ​ 창밖으로 쏟아지는 햇살이 눈부셨다. 햇살도 쨍쨍한 게, 선우랑 밥 먹기에 딱 좋은 날씨였다. ​ 원래는 어제, 그가 유니온 길드로 왕진을 가기 전에 불쑥 찾아가려 했다. 하지만 그의 첫 공식 업무를 방해하고 싶지는 않아, 오늘까지 꾹 참았다. 그 인내의 대가로 그녀의 기대감은 더욱 부풀어 오른 상태였다. ​ 진세아는 그가 새로운 어빌리티를 각성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자신에게 시험 삼아 사용했던, 그 어설프고 귀여운 시도를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피었다. ​ 궁금했다. 그와 그리고 그의 새로운 능력에 대한 모든 것이. ​ ‘먼저 물어볼 필요는 없지롱.’ ​ 그는 분명 내가 따로 묻지 않아도, 혼자 끙끙 앓으며 죄책감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나를 보자마자, 먼저 안절부절못하며 몰래 능력을 사용한 것에 대해 사과를 하겠지. ​ 유선우는 그런 성격이다. 지독하게 착하다. 그래서 가끔은 걱정되기도 한다. ​ 고민을 하다 보니 어느새 건물 앞까지 도착했다. 그녀는 차를 대충 세워두고 건물로 들어섰다. ​ 그러나 그때. 마침 유선우의 상담실이 있는 층의 코너를 돌던, 바로 그 순간 ​ - 끼익! ​ 상담실의 문이 거칠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거의 튀어나오듯 복도로 뛰쳐나왔다. 새하얀 머리카락에, 선명한 붉은색 브릿지. ​ 진세아도 아는 얼굴. 유니온 길드의 이방인, 루나였다. 누가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얼굴 전체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물든 채 오직 앞만 보며 복도를 가로질러 뛰어갔다. 바로 옆에 진세아가 서 있다는 사실조차 전혀 모르는 듯했다. ​ 그러나, S급 헌터 진세아는 들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듣고 있다. ​ - 쿵! 쿵! 쿵! 쿵! 쿵! ​ 금방이라도 터져 버릴 것처럼 미친 듯이 뛰는 루나의 심장소리를. 진세아의 모든 감각이 루나에게서 터져 나오는 소리를 판독하고 있었다. ​ “…….” ​ 진세아의 얼굴에서 방금 전까지의 장난기 어린 미소가 서서히 사라졌다. 사라지는 루나의 뒷모습과, 굳게 닫힌 상담실 문을,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무표정으로 번갈아 보았다. ​ 그녀의 금빛 눈동자가, 영역을 침범한 다른 암컷의 흔적을 발견한 포식자의 눈동자처럼 차갑게 빛났다. ​ 인지는 했다. ​ 그가 정식으로 상담사가 된 시점부터 여성 환자와는 접촉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것을. 그러나, 적어도 진세아가 느끼기에 방금의 심장소리는…. ​ 그러나 그때. ​ - 끼익. ​ 다시 한번, 상담소의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 “어?” ​ 남성의 목소리. 유선우였다. ​ 진세아는 그 목소리가 들린 0.1초의 찰나 즉시 표정을 바로잡았다. ​ 차가웠던 눈매는 반달처럼 부드럽게 휘어지고. 굳게 닫힌 입술은 사랑스러운 미소를 만들어 낸다. 모두가 알고 있는 ‘진세아’로 돌아왔다. ​ “연락도 없이 무슨 일이야?” ​ 복도를 살피러 나온 듯한 유선우는, 그녀를 발견하고 반갑다는 듯 웃으며 말했다. ​ “밥 먹으러 왔어!” ​ 진세아는 활짝 웃으며, 똑같이 반겼다. ​ ​ ​ ​ ​ ​ ​ *** ​ ​ ​ ​ ​ 분홍색 가구가 가득한 방. 파스텔 톤의 벽지에 솜사탕 색의 커튼. ​ 그리고 침대 머리맡에는 그녀의 키만 한 거대한 당근 모양의 인형과, 그녀의 유일한 친구인 토순이 양이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 이곳은 언제나 바깥세상의 모든 위험과 시선으로부터 그녀를 지켜주는 그녀의 토끼굴이었다. ​ 루나는 그 토끼굴의 가장 깊숙한 곳, 푹신한 침대 위에 누워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 다름 아닌 노트북. ​ 그녀도 이곳에 온 지 꽤 오랜 시간이 흘렀고, 이제는 이 기묘한 인터넷이라는 것도 다룰 수 있게 되었다. 물론… 의도적으로 자신에 대한 정보를 찾는 것은 자제했지만. ​ 두려웠으니까. 수인이라는 단어를 검색했을 때 쏟아져 나올, 제국에서 들었던 것과 같은 혐오와 경멸이 가득한 글들을 마주할 용기가 없었으니까. ​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하고 말 것이다. 정말 선생님의 말이 옳았는지. ​ 루나는 떨리는 손가락으로, 검색창에 어제 그가 보여주었던 영상의 출처를 검색했다. ​ [헌터 갤러리] ​ “엔… 터….” ​ 그녀는 마른침을 삼키며, 아주 작게,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속삭였다. ​ - 딸깍. ​ 클릭 소리와 함께 화면이 바뀌었다. 그리고 그곳에서는 루나가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세상이 펼쳐져 있었다. ​ [제목: 헌터 각성 기원 119일차.] [제목: 이방인은 앞으로도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는 거 아님?] [제목: 자꾸 남자 헌터 사진 쳐올릴 거면 남헌갤로 꺼져씨발] ​ 이곳은 인종도, 국경도, 계급도, 신분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무질서한 자유. 살아 숨 쉬고, 글자를 쓸 수 있다면 그 누구든 자신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공간. ​ “아….” ​ 루나는 자신도 모르게 탄성을 내뱉었다. 기묘한 자유로움이 느껴진다. ​ 그리고 화면 한쪽에, 돋보기 모양의 아이콘이 눈에 들어왔다. 돋보기에는 '검색'이라는 단어가 붙어 있었다. ​ 루나는 조심스럽게… 그 작은 공간, 자신의 평생을 옭아매었던 단어를 입력했다. ​ ‘수인.’ ​ 엔터. ​ 그러자, 수없이 많은 글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 [제목: 엘리스 헌터 꼬리 움찔움찔 모음. gif] [제목: 늑대 수인이랑 연애 후기] [제목: 수인 발정기가 365일이라는 추측 반박글] [제목: 현시점 수인 이방인 헌터 랭킹 정리] ​ 형태도 방식도 다양하지만 수인에 대한 안 좋은 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굳이… 따지자면 오히려 애호하는 쪽에 가까웠다. ​ 그러나. ​ [제목: 그런데 솔직히 수인들 피지컬 때문에 순혈 헌터들 경쟁 힘들어지는 건 팩트 아님?] ​ 루나의 심장이 순간적으로 덜컹했다. 흐름상, 자국민의 입지를 좁히는 수인 헌터들에 대한 비난이 있을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까. 그녀는 마음을 굳게 먹고 글을 눌렀다. ​ [작성자 ㅇㅇ] [조회수: 212314] [추천: 1971] 본론만 말하면 기존 순혈 각성자 헌터들, 내 휴지 도둑 입지가 굉장히 줄어들었음. ‘…휴지 도둑?’ ​ 루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해할 수 없는 단어였다. 왜 기존 헌터의 입지를 논하는데, 휴지를 훔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거지? 그녀는 혼란스러운 마음으로 스크롤을 내렸다. 진짜 미안한 말이지만 수인들 피지컬이 걍 말이 안 됨. 토끼 수인인 엘리스부터 시작해서 여우 수인 엘레나까지. 몸매가 이미 씨발 ㅋㅋㅋ gg 그리고 그 아래에는, 그녀의 쌍둥이 동생 엘리스와, 다른 여우 수인 헌터의 수영복 차림의 터질 듯한 화보 사진들이 여러 장 첨부되어 있었다. (사진) (사진) (사진) 빠아아아아아앙 ㅋㅋㅋㅋㅋ 못 참겠다 으르르… 그 마지막 문장을 보는 순간, 루나는 모든 것을 깨달았다. 휴지 도둑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입지가 뜻하는 바를. 피지컬과 몸매를 운운하던 이유를. 루나의 얼굴이, 다시 한번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붉어졌다. ​ “서…선생니임….” ​ 그녀는 자기 자신도 모르게,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않은 선생님을 뜨거운 숨결이 섞인 목소리로 불렀다. 그리고, 루나의 손이 천천히 올라와 자신의 어깨를 더듬기 시작했다. 오늘 오전에, 유선우가 ‘꽈악’ 쥐었던 바로 그 자리. 그러나 루나는, 자신이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 인지하지조차 못하고 있었다. ​ 그러니까 이 글은 수인이 기존 헌터들의 일자리를 빼앗아간다는 뜻이 아니었다. 수인이 기존 헌터들을 대신해 남성들의 욕정의 대상으로서의 자리를 빼앗아 간다는 그런… 소리였다. ​ 그녀가 그런 혼란스러운 광경을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바라보고 있던, 바로 그때였다. ​ - 콰앙! ​ 아무런 노크도 없이 방문이 거칠게 열렸다. ​ “언니!!! 뭐해!!” ​ 그녀의 유일한 안식처인 토끼굴에 허락 없이 들어올 수 있는 유일한 존재. 쌍둥이 동생이자 또 다른 토끼, 엘리스였다. ​ - 푸욱! ​ 그녀는 말과 동시에, 침대 위로 이불을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는 루나의 위로, 그대로 몸을 날려 덮쳤다. ​ “히익?!” ​ 갑작스러운 무게에, 루나가 놀라 비명을 질렀다. 엘리스는 그런 루나의 반응이 재미있다는 듯, 까르르 웃으며 이불을 확 걷어냈다. ​ “혼자서 뭘 그렇게 재밌게 보고 있…… 어라라?” ​ 이불 밖으로 드러난 것은 얼굴이 시뻘겋게 변한 언니토끼 루나와, 노트북 화면에 떠 있는 S급 헌터들을 주제로 한 패션 매거진. 수영복을 입은 채 아이스크림을 핥고 있는 엘리스 자신의 화보 사진이었다. 저번에 이벤트로 한 번 찍었었다. ​ “이거는 머지이이?” ​ 엘리스가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더 들이밀었다. 그녀의 짓궂은 시선이, 자연스럽게 노트북 화면 아래의 댓글 창으로 향했다. ​ “……?” ​ 엘리스는 그것들을 읽기 시작했다. 그러다 잠시 눈을 동그랗게 뜨는가 싶더니, 이내 배를 잡고 웃음을 터뜨렸다. ​ “아하하하하! 뭐야 언니? 내 화보 보고 있었어? 이런 음흉한 댓글들도 읽고?” ​ “아, 아니야! 그, 그냐앙… 진짜인가 해서….” ​ 루나는 필사적으로 노트북을 닫으려 했지만, 엘리스가 더 빨랐다. ​ 그녀는 바둥거리는 루나의 허리를 꽉 껴안아 움직임을 봉쇄하고는, 그대로 그녀의 귓가에, 뜨거운 숨결과 함께, 악질적인 댓글들을 하나하나 작게 속삭였다. ​ “아~ 토끼는 역시 귀를 꽈악… 붙잡고… 못 움직이게 한 다음에 이렇게… 으럇… 으랴앗…….” ​ “아냐! 아냐!! 그거 아니야!!” ​ 루나가 거의 울먹이며 바둥거리기 시작했으나 엘리스는 더 강하게 그리고 더 즐겁게 그녀를 껴안을 뿐이었다. 언니가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이는 것은 오랜만이라, 엘리스도 신이 올랐다. 그리고 그 상태로 다음 댓글을 낭독했다. ​ “자 다음은~ 어디 보자… 길가에 얼굴 빨개진 토끼 수인 보인다? 걍 100%임 그대로 끌고… 우와…… 얘네 장난 아니네?” ​ 그녀는 큭,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 엘리스는 제국의 귀족들이 보내는 음흉한 시선이나, 팬들이 보내는 시선에 섞인 희롱에는 익숙했지만, 이토록 원초적이고 날것 그대로의 욕망은 또 오랜만이었다. ​ 그녀는 품 안의, 이제는 저항을 멈춘 언니. 루나를 내려다보았다. ​ 루나는 이미, 과열된 엔진처럼 얼굴이 새빨갛게 익은 상태로 엘리스의 품에서 미동도 없이 축 늘어져 있었다. 정신이 반쯤 날아간 듯, 붉은 눈동자의 초점마저 흐릿했다. ​ 엘리스는 마지막 한 마디를 준비했다. 이제야 세상을 향해 한 발자국 나아가려는 언니의 등을 떠밀어줄 가장 강력한 마지막 한 마디. ​ “오… 근데 여기에도 제대로 된 정보는 하나 있다. 그치 언니?” ​ 루나가 멍한 눈으로,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엘리스는 그런 루나의 귓가에,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 “우리 종족 본능 발현기… 마음만 먹으면 365일 내내인 거….” ​ “…….” ​ “얘네… 어떻게 알았지?” ​ 그 말을 끝으로, 루나는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