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화연으로 추정되었던 익명의 헌터 1. ​ 아니지. ​ 그냥 자화연은 내일 방문을 요구했다. ​ [익명의 헌터 1]: …오늘은 어떻게 안 되겠느냐? ​ 그녀는 당장이라도 오고 싶은 모양이었으나…. ​ 아쉽게도 방금 막 오븐에서 나와 냉장고로 들어간 케이크는, 맛있게 숙성되지 않았다. ​ - 띠링. - 띠링. ​ 그리고 지금부터는 다른 내담자들과의 상담이 줄줄이 잡혀 있었다. 메세지가 연속으로 줄지어서 들어오고 있는 상황이었다. ​ 나는 잠시 고민하다,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 [유선우]: 아쉽지만, 지금은 달기만 한 빵 덩어리에 불과합니다. [유선우]: 미완성의 다과를 천마님께 대접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부디 하루만 인내해주신다면…. ​ 그러자 자화연은 알겠다며 메세지를 보내왔다. ​ [익명의 헌터 1]: 흠, 군주를 위하는 마음을 거절하는 것 또한 군주의 도리는 아니지. 알겠다. ​ 내 답변이 꽤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 잠깐만. ​ 만약, 정말로 그녀에게 다른 심려가 있었던 것이라면? ​ [유선우]: 그런데 천마님, 혹시 다른 심려가 있으신 건 아니실까요? ​ 나는 순간적으로 내 안일함을 느꼈다. ​ 익명의 가면 안에서만 말하고 싶은 것일 수도 있는데. ​ 내가 너무 성급하게 그녀의 가면을 벗겨버린 것은 아닐까. ​ [익명의 헌터 1]: 그런 것 없다. 그냥 심심해서 해봤느니라. ​ “아.” ​ 다행인 건가. 차라리. 다행…. ​ 아니다, 혹시 모른다. ​ 나는 자화연에게 핀을 걸어, 재빠르게 그녀의 진짜 상태를 확인했다. ​ [자화연] [PINNED] [현재 상태: 옥좌에 앉아, 발을 동동 구르고 있습니다. 입에서 침이 고이고 태블릿의 화면을 올려 사진을 자꾸만 보게 됩니다.] [메인 스탠스: 내일이 빠르게 왔으면 좋겠습니다. 일단 지금은 금강에게 빵셔틀을 시킬 생각입니다.] ​ 어 그래. ​ 다행이었다. 그녀는 정말 심심해서 메세지를 보낸 것이 맞았다. 그냥 내일 먹을 케이크 생각에 들떠있을 뿐. ​ 나는 갑자기 빵셔틀을 하게 될 금강에게 미안한 감정을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리고 키보드를 두들겼다. 이제 대화를 마무리할 시간이었다. ​ [유선우]: 상담을 종료해도 괜찮겠습니까? ​ 내담자의 동의를 얻고 상담을 종료하는 원칙은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 [익명의 헌터 1]: 그렇다. 오늘 하루도 수고하도록. ​ 그녀의 깔끔한 쿨한 인사를 마지막으로 자화연의 상태는 오프라인으로 바뀌었다. ​ 그렇게 그녀는 고칼로리의 전리품을 얻고 상담을 종료했다. ​ 첫 상담은…. ​ 성공인가? 아니 이게 상담이 맞기는 한 건가…. ​ 나는 아무튼, 옆에 있는 커피를 한 잔 들이켜며 다음 대화창을 열었다. ​ [익명의 헌터 2: 상담을 요청합니다.] ​ “또 익명이네.” ​ 다음 비대면 내담자 또한 익명이었다. 뭐 나야 상관은 없다. 대면으로 상담할 자신이 없는 헌터들이 신청하는 것은 좋은 일…. ​ 잠깐만. ​ 그런데, 순간적으로 순수한 궁금증이 들었다. ​ “친구야.” ​ [네! 부르셨습니까?] [☆(ゝω・)v] ​ “혹시… 너는 화면 너머의 상대가 누군지 알아?” ​ 모르는 것이 없는 상태창. 과연 이 완벽한 익명 시스템 너머의 내담자가 누군지도 알 수 있을까? ​ 아마 모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대상에 대한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까. ​ [흐음….] [( ˘︹˘ )] ​ 역시 힘든가. 물론 알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지만 순수한 궁금증에…. ​ [협회 중앙 데이터베이스, 방화벽 해킹을 시작합니다!] [1차 방화벽… 무력화!] [2차 백신 프로그램… 무력화!] ​ 뭐? 뭔소리야이거. ​ “야, 너 뭐….” ​ [최종 보안 프로토콜 무력화!] [해킹 완료! ( •̀ ω •́ )✧] ​ [익명의 내담자 #2의 신원은 유니온 길드 소속 S급 헌터 루나입니다!] ​ [칭찬해주십시오!] [(≧∇≦)] ​ 아니… 무슨…. ​ 대체 누가 무력화를 하래. 말이 1차, 2차, 최종이지. ​ 내 시야에서는 그 모든 과정이 단 몇초 만에 주르르르륵 하고 올라왔다. 막고 자시고 할 틈이 없었다. ​ 최고 등급의 보안이 시스템 앞에서 갈가리 찢겨나간 모양이다. ​ 결국, 익명의 내담자는 루나인 것으로 들통났다. 내 의도와는 매우 다르게. ​ 알 생각은 전혀 없었다. ​ “아… 이런….” ​ 루나는 자화연과는 다르게 뭔가 심심한 일이 있다고 상담을 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나를 직접 찾아오지 않고 익명의 가면을 썼다는 것은, 그만큼 그녀의 고민이 남에게 말하기 힘든 종류의 것일 가능성이 높았다. ​ ‘어떡하지.’ ​ 원칙대로라면 이 상담은 여기서 종료하는 게 맞다고 생각한다. 상담을 시작하기도 전에 내담자의 정체를 알아버렸으니까. ​ 그런데 또 그냥 거절하기도 상당히 애매하다. ​ 루나가 나에게마저 가면을 쓰고 털어놓는 고민을 절대로 다른 이에게 요청할 것 같지는 않았다. 그러면 그 고민은 자연스레 또 그녀 안에 쌓이게 될 가능성이 높다. ​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 [……] [죄송합니다….] ​ 내 눈앞에서 시스템 창이 안절부절하며 눈치를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내 반응이 예상과는 다른 것에 당황한 모양이었다. ​ “아냐, 네 잘못 아니야.” ​ 그냥 물어본 내 잘못이라 생각한다. ​ 나는 결국 상담사로서의 윤리보다는 일단 루나를 케어하는 데에 집중하기로 했다. 절대, 절대 모른다는 느낌으로. ​ 게다가 갑자기 거절하는 것도, 설명할 명분이 없었다. ​ ‘죄송하지만 제 시스템이 협회 내부의 데이터베이스를 해킹해서 강제로 들여다봤습니다.’ ​ 이렇게 말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무슨 범죄 사실 고백도 아니고. ​ 나는 결국 마음을 가다듬고 키보드 위에 손을 올렸다. 상담을 시작하기 위해서. ​ [유선우]: 안녕하세요? 내담자님? 상담사 유선우입니다. ​ 시작은 가볍게. 전송 버튼을 누르고, 얼마 되지 않아 메세지가 도착했다. ​ [익명의 헌터]: 안녕하세요. 상담사님. ​ 천천히 이어가면 된다. ​ [유선우]: 아침 식사는 하셨나요? ​ 원래였다면 달달한 간식거리를 권유하며 아이스 브레이킹을 했겠으나, 여기서는 그게 불가능했다. 따라서 나는 다른 방식의 아이스 브레이킹을 위해 질문을 던졌다. ​ 잠시 후,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 [익명의 헌터]: 아니요. ​ 나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내가 아는 루나와는 상당히 다른 말투의 메세지다. ​ 그녀는 아무래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기 위해 철저히 연기하고 있는 듯했다. ​ 문제는 다 알고 있다는 것. ​ 갑자기 양심의 가책이…. ​ [유선우]: 그렇군요, 점심 식사는 든든하게 드시길 바라겠습니다. ​ 아이스 브레이킹을 원하는 눈치는 전혀 아니었다. 그냥 빠르게 진행해보는 것으로 가자. ​ [유선우]: 헌터님은 요즘 어떤 고민이 있으신가요? ​ 바로 정론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화면 너머 그녀의 대답을 잠자코 기다렸다. ​ [익명의 헌터]: 상담사님께서, 이 감정에 대해서 명확히 규정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익명의 헌터]: 제가 겪고 있는 일에 대해서 자세히, 전부, 설명해 드릴게요. ​ 그녀 또한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 감정에 대한 규정? 아직까지는 무엇을 말하는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 [상담사]: 네, 편히 말씀해주세요. 아는 범위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 알려드리겠습니다. ​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걸렸다. 아무래도 한 번에 입력해서 보내려는 듯했다. ​ [익명의 헌터]: 우선 저는 여성이에요. ​ [익명의 헌터]: 단도직입적으로 최근 한 남성이 계속 머리에 맴돌아요. [익명의 헌터]: 계속 얼굴을 보고 싶고,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좋아지고는 해요. ​ … 응? ​ 나는 그 메세지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단 두 줄만 봤지만, 저 증상이 뜻하는 감정이 무엇인지 쯤은 쉽게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 나는 답변을 하려다가…. 다시 이어지는 메세지에 우선 멈췄다. ​ [익명의 헌터]: 그리고 다른 여성과 있는 것이 보일 때면 갑자기 마음이 싱숭생숭해져요. [익명의 헌터]: 일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는 것을 머리로는 알면서도… 가슴으로는… 음…. ​ [익명의 헌터]: 그리고… 그리고… 그 사람이 다른 여성과 있는 것을 볼 때마다 아랫배가… 떨려요. 작게, 우우웅 하고. ​ “…….” ​ 아랫배가 떨린다고…? 이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 [익명의 헌터]: 일단, 이 정도 인 것 같아요. ​ 나는 책상 위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들겼다. ​ 그녀가 느끼는 경험들이 가리키는 하나의 감정은… 내가 보기에는 명확했다. ​ ‘사랑.’ ​ 뭐 사랑이라는 거창한 말이 아니더라도, 이성적인 호감이 있는 것은 분명해보였다. 이게 아니라면 설명이 되지가 않는다. 아랫배가 떨리는 건 뭔지는 모르겠다. 정확히. ​ 나는 일단, 확인을 위해 물었다. ​ [유선우]: 그렇군요… 그 대상은 혹시 직장 동료이신가요? ​ [익명의 헌터]: 네, 일적으로 엮여 있는 관계는 맞아요. ​ 아무래도 직장 동료인 듯한데. 루나가 트라우마를 이겨내고, 새롭게 좋아하는 사람까지 생겼다는 소리다. 이러면 나쁜 이야기는 아니다. 긍정적인 신호에 가깝다. ​ 이제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줄 시간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타이핑을 시작했다. ​ [유선우]: 그렇다면, 상담사로서 저의 솔직한 소견을 말씀드리겠습니다. ​ [익명의 헌터]: 네, 솔직하게 부탁드려요. ​ [유선우]: 감정이란, 단 몇 가지의 느낌만으로 단정 지을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보내주신 상황으로만 조심스럽게 추측해 보았습니다. ​ [유선우]: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내담자분께서는 그 남성을 좋아하시는 것 같습니다. 특히, 연인 적인 관점에서요. ​ 보냈다. 빙빙 돌려 말할까 했는데, 그녀도 바쁜 몸이다. 그냥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는 게 좋아 보였다. ​ 그러나 그 이후로 답변은 오지 않았다. ​ 자신의 감정을 자각하는 데에 시간이 좀 걸릴 수 있다. 나는 약간 기다려주었다. ​ 그렇게 몇분이 더 흐르고, 메세지가 도착했다. ​ - 띠링. ​ [익명의 헌터]: 상담사님. 제가 사실 말씀드리지 않은 내용이 있어요. 이것까지 들어주시고 정말로, 그 감정이 맞는지, 다시 한번 판단해주시겠어요? ​ 그녀는 그 이후로 메세지를 쭉 전송해왔다. ​ [익명의 헌터]: 그 사람의 물건을 가지고 싶어요. 그리고 그 사람의 품에 머리를 박고 체취를 맡고 싶어요. [익명의 헌터]: 그리고… 가끔은 목덜미를 깨물어버리고 싶다는 그런 생각도 들어요. 강하게는 아니고. 그냥 제 흔적을, 남기고 싶어서…. ​ 아. 진짜 알면 안 되는 것 같은데. 이 상담은, 상대가 누군지 절대 알면 안 되는 내용이었다. ​ 나는 허공에 손가락을 튕겼다. ​ [아얏!] ​ 시스템이 비명을 질렀다. 시스템에게 날린 딱밤이었다. ​ [익명의 헌터]: 제가… 여러 가르침을 받는 분이신데 혹시 이건 존경심 같은 건 아닐까요??? ​ 루나는 필사적으로 그 감정을 부정하고 있었다. ​ 그러나 그녀가 뒤늦게 고백한 이야기는 오히려 더 명확하게 만들 뿐이었다. ​ 방향성이 조금 이상하긴 하지만…. ​ “존경심은 아닌 것 같은데요….” 세상 어느 존경심도 대상의 체취를 맡고 싶어한다는 소리는 들어본 적이 없다. ​ [유선우]: 사랑일 가능성이 높아 보입니다. ​ 나는 결국 메세지를 입력했다. ​ 이게 내가 내리는 진단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