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스는 유니온 길드의 꼭대기 라운지, 구석진 곳에 놓인 공용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 임무가 없는 오후는 지루하다. ​ 퇴근까지는 아직 한참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 그녀는 턱을 괸 채 컴퓨터의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 무엇을 보냐고? ​ “…….” ​ 그녀는 진중한 표정으로 검색창에 천천히 키보드를 두드렸다. ​ [헌터 갤러리.] ​ 저번에 언니가 첫 상담 때 선생님을 통해 존재를 알게 된 인터넷 공간. 당연히 자신이 뭇 남성들에게 인기가 많으리라는 것은 알았지만…. ​ 그때 보았던 그 정도의 노골적이고, 원초적인 욕망이 들끓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녀에게도 꽤나 신선한 충격이었다. ​ 따라서 가끔 엘리스는 그 사이트에 들어가 구경하고는 했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 엘리스는 망설임 없이 엔터키를 눌렀다. ​ ----------------------------- ✪ 이번 분기 최신 길드 랭킹 [221] 작성자: ㅇㅇ | 조회: 98,139 | 추천: 1156 | 댓글: 221 ----------------------------- 저번주쯤에 나온 분기별 길드 랭킹임 10대 길드 자체는 변화 없는데 안에서는 순위가 좀 바뀐 듯? [1위][대해(大海)] [2위][군주] …… [5위][유니온] [6위][에스더] [7위][해태] …… [10위][창천맹] ----------------------------- ​ 엘리스는 자신의 길드인 유니온이 5위에 랭크되어있는 것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직전 분기 6위였던 것을 생각하면 꽤나 괄목할 만한 성장이었다. 10대 길드 내부의 서열은, 한번 정해지면 좀처럼 바뀌지 않는 경향이 있었기에 길드 내에서도 축하 파티가 열렸던 기쁜 소식이었다. ​ 루나와 엘리스의 활약이 좋았다. 라고 정보팀 쪽에서 판단했다고 하더라. ​ 그런데, 해태 길드가 7위까지 추락한 것은 의외라면 의외였다. ​ 물론 최근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기는 했지만… 아무래도 헌터의 전력에는 크게 지장이 없었고. ​ 압도적인 S급 헌터 진세아와 그 외의 탄탄한 A급 라인업을 고려하면 쉽게 떨어질 만한 랭킹은 아니었기 때문. ​ 엘리스는 턱을 괸 채 화면을 아래로 내렸다. ​ 그리고 그런 궁금증은… 댓글 창에서도 아주 활발하게 논의되고 있었다. ​ ----------------------------- ​ - ㅇㅇ: 신 대 해 - 구조대원함: 근데 해태는 뭘 쳐 하지도 않았는데 왜 자꾸 랭킹이 꼬라쳐박는거임? └ ㅇㅇ: 길드에서 납치 범죄자가 나왔는데 뭘 하지도 않은 게 맞냐? 해태 주식샀음? └ 구조대원함: 알아서뭐하게씨발아 └ ㅇㅇ: 아 ㅈㅅ ​ - 분석가: 백시은 사건도 이유긴 한데, 해태가 진세아 원툴이잖음? 근데 최근에 내부 팀 개편이 ㅈ같았나봄 공개 스크림 보니까 평균 멤버는 전보다 나아졌는데 팀끼리도 계속 합이 안 맞더만 └ 분석가: 그리고 평균 멤버는 애초에 의미가 없는게 진세아 원툴이라 얼마나 진세아 서포트 얼마나 잘하냐 마냐라서 지금 팀이 걍 더 별로라고 봐야 할 듯? └ luka14: 팀을 갑자기 왜바꾼거임? └ 분석가: 나야 모르지 ​ - 퍼리가아니라수인: 걍 꼴림 순위대로 정상화 되는거지 애초에 수인밭인 유니온이 1등이맞음 ​ - ㅇㅇ: 창천맹주 젖탱이가 세상을 구한다 ​ ------------------------------ ​ ​ 엘리스는 고개를 갸웃했다. ​ ‘스크림을 공개했는데….’ ​ 오히려 평가가 안 좋았다고? ​ 공개 스크림. 길드 내에서 모의 던전 공략을 리플레이로 녹화하는 것을 말한다. ​ 물론 주요 공략 스크림 같은 경우는 극비에 부쳐지지만 때로는 길드의 주가 부흥이나 위용을 과시하기 위해 일부 공개하기도 한다. ​ 나름, 해태 길드 입장에서는 새로운 팀을 꾸린 것에 대해, 자신만만하게 내놓은 영상일 텐데…. ​ 엘리스도 아직 직접 보지는 못했었다. 그녀는 망설임 없이 동영상 사이트를 켰다. ​ [해태 최신 프론트라인 공개스크림] ​ 가장 위에 익숙한 해태 길드의 로고와 함께 영상 하나가 떠 있었다. 그녀는 마우스를 움직여 재생 버튼을 눌렀다. ​ 웅장한 배경음악과 함께, [HAETAE'S NEW FRONTIER]라는 인트로가 떠올랐다. 화면이 전환되며 모의 던전의 입구 앞에 서 있는 헌터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 영상은 빠르게 진행됐다. ​ 늘 그렇듯 진세아의 압도적 캐리. 그녀가 휘두르는 번개가 던전을 쓸어버리고. 다른 팀원은 잔해를 정리하는 청소부에 가까워 보였다. ​ “…….” ​ 뭔가 이상했다. 공략 자체는 문제 될 것이 없지만… 어딘가 기묘하게 삐걱거린다. ​ 엘리스는 바로 해태 길드의 과거 공개 스크림 영상을, 재생했다 ​ “…… 그러네.” ​ 확실히 다르다. 새로운 팀과 예전의 팀. 두 영상의 흐름 자체는 비슷했다. 진세아의 원맨 캐리. ​ 그러나 예전의 팀은 진세아를 중심으로 하나가 되어 움직이는 유기체 같다면…. 그에 비해 새로운 팀은, 진세아라는 거대한 말이 이끄는 짐마차처럼 보였다. ​ 엘리스는 두 개의 영상을 띄워놓고 그 차이의 이유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 “엇?” ​ 그리고 잠시 후, 그녀는 발견했다. 예전 팀의 영상. ​ 그 전선의 가장 중앙. ​ A급 탱커와 S급 헌터 사이에 자연스레 섞여 있는 한 명의 남자. ​ 그는 화려한 어빌리티도 압도적인 무력도 보여주지 않는다. ​ 동료들의 뒤에 서서 간결한 손짓과 함께 쉴 새 없이 입을 움직이며 무언가를 계속 지시할 뿐. ​ 그리고 그는. ​ 선생님이었다. ​ “선생님이….” ​ 헌터였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해태 길드 소속이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 그러나 이런 중요한 역할을 하셨을 줄은 몰랐다. ​ 그녀는 화면 속 전투복 차림으로 전투하는 그의 모습을 계속 바라보았다. ​ “… 멋있당….” ​ 이건 집에 가서 다시 봐야겠다. ​ 엘리스는 아쉬운 마음으로 영상을 끄고, 다시 갤러리 화면으로 돌아왔다. ​ 뭐, 해태의 랭킹 하락 원인은 대충 알겠다. 아마 시간이 지나 팀의 합이 맞게 되면 돌아오지 않을까…. ​ 아니어도 뭐, 딱히 상관은 없고. ​ “다음 글은….” ​ “엘리스 헌터님!” ​ “네?” ​ 바로 그때, 라운지 밖에서 누군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길드의 매니저였다. ​ “저번에 찍으셨던 화보 건으로 미팅 연락이 왔어요! 지금 바로 가보셔야 할 것 같은데….” ​ 저번에 찍었던 수영복 화보. 그곳에서 연락이 온 듯했다. 엘리스는 귀찮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 “바로 갈게여~” ​ 그녀가 가벼운 발걸음으로 라운지를 나서려던 순간. 문이 열리며 루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 루나가 엘리스에게 물었다. ​ “어디 가?” ​ “아, 언니. 나 화보 미팅 좀. 금방 다녀올게.” ​ “응. 잘 다녀와.” ​ 엘리스는 언니에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대로 복도 너머로 사라졌다. 홀로 남은 루나는 라운지의 소파에 앉으려다가…환하게 켜져 있는 모니터를 발견했다. ​ “얘도 참….” ​ 전원은 끄고 가야지. 루나는 컴퓨터의 전원을 끄기 위해 그쪽으로 향했다. ​ 그러나. ​ [헌터 갤러리] ​ - 흠칫. ​ 모니터에 떠 있는 그 두 단어에, 루나의 뻗었던 손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그녀는 고개를 돌려 주변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 그리고 이 넓은 라운지에 자신 외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 천천히 그 자리에 앉았다. ​ 저번에 본 적이 있다. 아니, 엘리스에게 강제로 시청 당한 적이 있다. ​ 그때는 면역이 전혀 없어서 그대로 기절해버렸지만…. ​ 지금은 다르지 않을까. ​ 선생님은 그녀에게 새로운 세상을 보여주었다. 이것도 어찌 보면 치료의 일환일 수도 있다. ​ 루나는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마우스를 잡았다. ​ 그리고 스크롤을 천천히 내렸다. ​ 그때, 루나는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목을 발견했다. ​ ​ ----------------------------- ✪ 헌터 전문 상담사 납치사건 분석 [75] 작성자: ㅇㅇ | 조회: 51,441 | 추천: 956 | 댓글: 75 ----------------------------- 이번에 새롭게 생긴 상담사 한 명 납치당한 건 알거임 근데 정보도 아예 없고, 그냥 구출됐다더라~ 정도로만 아는 애들이 많던데 그거에 대해서 좀 자세히 이야기해볼까 함 기본적으로 용의자는 다들 알다시피 헤스티아 출신의 해태 길드원 백시은인데… 결론만 말하자면… 진짜, 조금만 구조 늦었어도 좆될뻔했음 ​ 그러니까 헤스티아는 애초에 여초 세계인데…. ----------------------------- ​ ​ 글의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루나는 정확히 헤스티아가 어떤 세상인지는 잘 몰랐다. ​ 하지만 글쓴이가 분석한 헤스티아의 문화와 그들의 약탈혼이라는 풍습, 그리고 그들의 능력에 대한 설명을 읽었을 때. ​ 선생님이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널 뻔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 마우스를 쥔 루나의 손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순수한 분노 때문이었다. ​ 루나는 댓글도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 ----------------------------- ​ - 완장: 헤스티아 출신 헌터들 대부분 서포터잖아 능력도 도핑 계열이고. 걍 존나 위험했던 건 맞는 듯? ​ - Xmas: 글 자체가 헌들갑, 내가 헤스티아 출신 헌터랑 사귄적있는데 딱히 그 정도 아님 └ dasbade: 아 ㄹㅇ? 지금은 헤어짐? └ Xmas: ㅇㅇ 지금은 내 주인님임 └ dasbade: 뭔 개소리야 이 미친새끼야 └ KAL: 이새끼 컨셉 아닌데? 싸지른글 보셈. 진짜 좆될뻔한거같다 └ Xmas: 몇분만 지나면 걍 기분 좋아질수잇던데 ​ - 유아독존: 윗댓글보고 확실히 이해했다 ​ ------------------------------ ​ 글? ​ 루나는 ‘Xmas’라는 아이디를 클릭했다. 그가 과거에 썼던 글들의 목록이 화면 위로 떠올랐다. ​ 처음에는 연애가 잘 풀리지 않는 것에 대한 하소연 글이었다. [Xmas: 요즘 여친이랑 자꾸 싸우는데 ㅈ같네걍] [Xmas: 결국 헤어지기로 했음 니들은 이방인이랑 연애하지 마라] ​ 그러다가, 어느 순간부터. ​ [Xmas: 요즘 저녁마다 좀 피곤한데 비타민 뭐먹어야되냐?] [Xmas: 잠이 존나온다] ​ 결국. ​ [Xmas: 내가 잘못했던 거였음… 요즘 걍 깨달은 게 있다] [Xmas: 니네 남자가 사는 목적이 뭐같냐?] [Xmas: 내가 무슨 삶을 살고싶어했던건지 알겠어] [Xmas: 기분ㅈㄴ좋아] 루나는 더 읽는 것을 포기했다. 거세게 고개를 저었다. ​ 그래. ​ 선생님은 무사히 돌아왔으니까. 이제,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끔 루나 또한 신경을 써야만 한다. ​ 선생님을 보호해야 한다. ​ 마음 같아서는, 그 백시은이라는 여자를 지금 당장이라도 찾아가…. ​ “후….” ​ 루나는 뜨거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그리고 애써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눌렀다. ​ 그녀는 다음 글로 시선을 옮겼다. ​ ----------------------------- ✪ 엘리스 수영복 화보 B컷 공개 [121] 작성자: 완장 | 조회: 86,995 | 추천: 1012 | 댓글: 121 ----------------------------- (사진) (사진) ----------------------------- ​ 그곳에는 엘리스의 수영복 차림이 있었다. ​ 저번에, 그녀가 이벤트로 촬영했었던 그 잡지와는 또 다른 사진들이었다. 아마 잡지에 실리지 못한 B컷들인 듯했다. ​ 이번엗도 역시,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 ----------------------------- ​ - ㅇㅇ: 잘썻어요 ​ - ㅇㅇ: 손잡이 튼실하네 ​ - 가니안: B컷이 아니고 G컷 아님? └ dasbade: ㅋㅋㅋ 미친새끼 ​ ​ - mercy: 여성 헌터들 성상품화 걱정되긴 하네 ㅠ └ dasbade: ㅗ └ ㅇㅇ: 지랄말고 헌갤에서 꺼지셈 └ ㅁㅁ: 남자라면 싫어할 수가 없잖아 ​ ------------------------------ ​ ​ 남자라면 싫어할 수가 없다고? ​ 그렇다면 선생님도 남자인데…. 만약 선생님도 엘리스의 저런 모습을 보면…. ​ “……” ​ ‘나도 찍어야 하나…?’ ​ 루나는 깊은 고민에 빠졌다. ​ 물론 만인에게 공개되는 저런 노골적인 화보 같은 것 말고…. 선생님에게만 살짝 보여줄 수 있는 그런…. ​ 루나는 고개를 돌렸다. 아까 엘리스가 미팅하러 갔었던 게 생각났다. ​ 과거 그 화보사에서는 루나에게도 똑같은 제안을 했었다. ​ 이벤트성이라 공개를 안 해도 좋으니, 찍을 수만 있게 해달라고. ​ 전 직원이 여성이니 편안하게 촬영할 수 있었다며, 엘리스가 무척이나 좋아했었던 것도 기억한다. 하지만 그때는 단칼에 거절했었다. ​ 누군가에게 사진이 찍힌다는 것 자체가 끔찍했으니까. ​ 그런데 지금은…. ​ 사진 몇 장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그것도 선생님 전용이라면…. ​ “미팅… 끝났으려나…?” ​ 그녀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