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루나] [메인 스탠스] [’헌터’ 루나라는 존재에 대한 자긍심이 소량 생겨났습니다. 그러나 아직 새싹과도 같은 자긍심입니다. 어르고 달래고, 물을 주며 소중히 키워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정도면 괜찮네. 우선 첫 번째 과제는 잘 넘긴 듯하다. 자기혐오와 자조로 가득 차 있었던, 루나의 자존감 펌핑 작업은 어느 정도 성공했다. 씨앗도 심어놨고. ​ 쉽지가 않았다. 능력도 오늘따라 제멋대로고. 과거에는 몇 번 이러긴 했는데, 내 숙련도도 늘었고, 시스템도 철이 들면서 자연스레 사라진 줄 알았다. ​ 근데 그게 아니었던 건가? ​ 아무튼 나는 목이 타는 듯한 기분이 들어, 눈앞의 아메리카노를 들이켰다. 씁쓸한 액체가 머리를 차갑게 식혀준다. ​ 이제 어떻게 할까. ​ 상담을 끝내기 좋은 타이밍이긴 하다. 이대로 끝내면 그녀는 긍정적인 경험을 안고 돌아갈 수 있다. ​ 그러나… 솔직히 말해 이대로 보내기에는 또 조금 애매하기도 했다. ​ 시스템의 문구처럼, 막 피어난 자긍심의 새싹은 너무나도 연약하다. 다시금 길드 내부 제국인들의 차가운 시선이나, 사소한 스트레스 하나에 쉽게 꺾여버릴 수 있다. ​ 그리고 한번 꺾인 새싹은, 다시 피어나는 데 훨씬 더 많은 노력이 들어갈 것이다. 최소한의 비바람을 막아줄, 작은 온실이라도 만들어주어야 한다. ​ 결국 내가 생각하는 루나와의 상담에서 이뤄야 할 궁극적인 과제는 간단했다. 그녀가 가진 두 개의 정체성을, 하나의 온전한 정체성이 되게끔 인도해 주는 것이다. ​ 그렇다면 첫 번째 정체성. 제국의 일원이라는 정체성을 강화해 주는 것은 어떨까? ​ ‘이건 별로….’ ​ 나는 곧바로 그 생각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하책에 가깝다. ​ 그녀가 아무리 제국의 귀족처럼 행동하고, 그들의 법도를 따르려 노력한들, 그들이 잡종이라 멸시하는 그녀를 진정으로 받아줄 리가 없다. 닿을 수 없는 목표를 향해 달리게 만드는, 잔인한 길이다. ​ 무엇보다 제국의 귀족이 되는 것은, 루나에게도 그다지 좋은 방법은 아닐 것 같았다. ​ 그들의 방식대로라면 그녀는 무투를 천한 것이라 여기며 멀리하고, 마법에만 매달려야 한다. ​ 하지만 루나가 가진 헌터로서의 역량은, 무투와 마법 두 가지가 절묘하게 섞였을 때 나타난다. 무투의 길을 버린다면 큰 손실이다. ​ 즉, 여러모로 제국의 일원의 정체성을 일깨워 주는 것은 하책이다. 그렇다면… 수인이라는 정체성으로 굳히게끔 인도하는 것은 어떨까. ​ “…….” ​ 솔직히 말해 단점을 찾기가 어려웠다. 이 세계에서 수인은 기피 대상보다는 오히려… 애호와 인기의 대상으로 여겨지니까. ​ 그럼 그렇게 해보자. ​ 내가 마음속으로 결심을 굳히자, 기다렸다는 듯, 눈앞에 하나의 창이 떠올랐다. ​ [적합 답변] [만족 적합률 79%] [수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시키는 것은 어떨까요?] 갑자기 웬 질문? 평소처럼 하십시오~ 거리는 명령형 말투가 아니었다. 자꾸 선택지를 무시하니까 회유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드는 건 기분 탓이겠지. ​ 사실 내 생각도 비슷하긴 했다. ​ 나는 그녀의 붉은 눈을 마주 보며 입을 열었다. ​ “루나님.” ​ 내 부름에, 그녀의 어깨가 희미하게 움찔했다. 넋을 놓고 있던 그녀의 초점이 서서히 내게로 맞춰졌다. ​ “네… 선생님.” ​ 과연 수인으로서의 자긍심을 고취시킬 수 있는 방법에는 뭐가 있을까? 정답은, 그 종족의 장점에 대해 인지시키는 것이다. 잡종의 저주가 아니라, 수인이라는 종족이 가진 축복으로. ​ “그런데, 수인이라는 종족은 정말 우수한 것 같습니다. 평범한 인간인 제가 봤을 때는요.” ​ “네?!” ​ 루나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는 눈을 크게 떴다. ​ “제국에서는 수인의 본능을 천한 것이라 멸시한다고 하셨죠. 하지만 이곳에서 그 본능은, 적의 살기를 감지하고 동료의 위험을 예측하는 초감각이라 부릅니다. 소수의 선택받은 헌터들만 가질 수 있는 모두가 선망하는 능력이죠.” ​ 억지로 쥐어 짜내는 칭찬이 아니었다. 실제로 내가 최근 수인에 대해 공부하며 품게 된 생각이었다. 초감각은, 노력만으로 얻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었으니까. ​ “그… 그건….” ​ 루나의 하얀 뺨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반박할 틈을 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 “그뿐만이 아닙니다. 제국에서 야만적인 것이라 부르는 수인의 완력과 각력은, 모든 헌터들이 부러워하고, 또 선망하는 최고의 신체 능력이죠.” ​ “아니… 아니에요….” ​ 나의 칭찬 공세에, 루나는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고개만 저었다. 그녀의 볼은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 그리고 마지막. 이제 그녀가 눈으로 직접 확인할, 결정적인 증거가 필요했다. ​ “게다가.” ​ 나는 태블릿을 들어, 어젯밤 찾아낸 하나의 영상을 틀었다. ​ [제목: 게이트 클리어 후 팬 서비스 하는 엘리스 헌터] ​ 얼마 전, 커뮤니티를 뜨겁게 달구며 엄청난 이슈가 됐었던 영상이었다. 화면에는 루나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그녀의 쌍둥이 동생 엘리스가 나오고 있었다. ​ 루나와 달리 길쭉한 잿빛 귀와 솜털 같은 꼬리를 전부 자랑스럽게 드러낸 그녀는, 게이트 토벌이 끝난 직후 팬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그녀의 인기는 아이돌이 부럽지 않을 정도로 절정이었다. ​ 엘리스는 기분 좋게 웃으며, 한 꼬마 여자아이를 번쩍 들어 목마를 태워주는 팬 서비스를 시작했다. ​ 그러나 이 영상이 이슈가 된 진짜 이유는, 바로 다음 순간이었다. ​ 목마를 탄 꼬마 아이가, 순수한 호기심에 엘리스의 쫑긋한 귀를 향해 작은 손을 뻗었다. 그러나 엘리스는, 아이를 보지 않고서도, 그 손길을 본능적으로 느꼈는지. ​ - 쫑긋, 쫑긋. ​ 잿빛 귀가 아이의 손길을 피해 아래, 위로 춤을 추듯 가볍게 움직였다. 아이가 꺄르르 웃으며 다시 손을 뻗자, 이번에는 귀를 앞으로 살짝 접으며, 장난스럽게 회피했다. 왼쪽 오른쪽을 번갈아가며 쫑긋쫑긋. ​ 그 무해하고 사랑스러운 광경에, 영상 속의 팬들은 물론 영상을 보는 모든 이들이 열광했다. ​ 나는 화면 속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루나를 보며, 영상 아래의 댓글 창을 스크롤 했다. 대부분 엘리스에 대해 우호적이고 좋은 댓글이었다. 전부 보여줄 것이다. 그녀가 품은 긍정적인 감정을 확신으로 바꿔주기 위해. ​ “보세요, 루나님. 이게 루나님을 그리고 수인을 바라보는 이 세계 사람들의 진짜 시선입니다.” ​ 나는 가장 반응이 좋은 댓글들을, 그녀가 잘 볼 수 있도록 화면을 띄워주었다. ​ 그러나, 루나의 시선이 댓글로 향하는 순간, 그녀의 표정이 이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붉은 눈이 빙글빙글 돌기 시작하더니, 이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태블릿 화면은 물론 내 얼굴조차 쳐다보지 못한 채, 무릎 위의 손을 어쩔 줄 모르겠다는 듯 꼼지락거릴 뿐이었다. ​ “서… 선생니임….” ​ 그녀가 애처롭게 떨리며 달뜬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 ‘뭐지…?’ ​ 뭐로 봐도 감동한 표정과 반응은 아니었다. 루나의 기묘한 반응에 나도 재빠르게, 그녀가 보고 있는 댓글들을 확인했다. ​ [SD_par]: 진짜 엘리스 귀 꽉 쥐고 존나… [choi_142]: 으럇으럇 내 아이를… [aqsx95]: 유니온길드S급흑백듀오사이좋게포개서 [room_78]: 손잡이커버 복슬복슬하네 이런 개 미친. ​ 나는 사색이 되어, 거의 본능적으로 태블릿을 빼앗아 화면을 꺼버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 ​ “…….” ​ 상담실 안에서는 정적만이 흘렀다. 진짜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완벽한 빌드업이었는데 내 손으로 시원하게 말아먹었다. ​ 어떤 커뮤니티인지 확인부터 좀 할걸 진짜. ​ 그때였다.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 새끼가? ​ 눈앞에 시스템이 현 상황을 비웃었다. 마치 내 말을 안 따라서 이렇게 된 것이라는 듯. 오늘 아주 갈 때까지 가는구나. ​ 뭘 웃어 심각해 죽겠는데 지금. ​ 그러나, 그 요란한 비웃음과 함께 현 루나의 상태가 다시 드러났다. ​ [루나] [메인 스탠스] [수인은 이곳에서도 멸시받는 짐승인 줄로만 알았는데, 지구에서는 성적 대상으로도 소비될 만큼, '여러' 방향성으로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약간의 기묘한 자긍심을 느끼고 있습니다.] ‘…와.’ ​ 이거 진짜야? 루나 씨 보기보다 개방적인 성격이네. ​ 그래도… 정말 다행이었다. ​ 그들의 저급한 진심이, 그녀에게 닿기는 한 모양이다. 성희롱이 그들 나름의 관심을 표현하는 방식…? 아 그건 아닌 것 같기도 하고. ​ 일단 사과는 하자. ​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했어야 했는데.” ​ “… 아니에요.” ​ 즉시 돌아온 답변이었다. 루나는 붉어진 얼굴로 손을 내저었다. 그리고 잠깐의 정적 이후. ​ “그…제가 오늘… 동생이랑 약속이 있어서… 이만… 다음에 또 뵐게요 선생님….” ​ 루나는 더 이상 내 얼굴을 쳐다보지도 못한 채, 거의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자리에서 엉덩이를 슬쩍 뗐다. ​ “아 그럼요. 오늘 상담 고생 많으셨습니다. 다음에… 또… 뵙게….” ​ 내 대답이 채 끝나기도 전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문 쪽으로 거의 도망치듯 향했다. 시뻘게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그녀는 문고리를 잡는 손마저 삐끗하더니 황급히 상담실을 빠져나갔다. ​ “…….” ​ 나는 그 요란한 퇴장을 쓴웃음과 함께 지켜봤다. ​ ‘핀.’ ​ 나는 도망치는 토끼의 상태를 재확인했다. ​ [루나] [PINNED] [현재 상태: [경축] 인생 최고 심장 박동수 돌파! 자신의 심장소리가 선생님에게 들릴까 봐 도망치는 중.] [메인 스탠스: 엘리스가 나온 영상의 출처(헌터 갤러리)를 정확히 기억했음.] “…….” 대체 헌터 갤러리는 왜…. 혹시 법적 대응이라도 하려고 그러시는 건가. 루나가 과연 다시 올까? ​ 솔직히 오늘 내가 한 짓을 생각하면 헌터 갤러리보다 오히려 나를 먼저 고소한다고 해도 할 말은 없겠다. ​ 결과가 어찌 되었든… 루나의 1차 상담은 끝났다. ​ 그렇다면 이제, 남은 건. ​ “야.” 나는 아무도 없는 상담실 허공을 향해, 낮고 서늘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 오늘 갑자기 왜 그래. 철든 뒤로는 안 그러는 거 아니었어?” 그러나 아무런 응답도 나타나지 않았다. ​ “안 들리는 척하지 마. 거기 있는 거 다 아니까.” ​ 내 경고에 마침내 눈앞에 반투명의 시스템 창이 떠올랐다. ​ [본 시스템은, 언제나 가장 좋은 방향성의 선택지만을 제시합니다.] ​ 저항이었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아이를 혼내듯 말했다. ​ “혼난다 진짜.” ​ [사용자의 피드백을 반영하여, 알고리즘을 수정 중입니다. _〆(。。) ] [본 시스템은 언제나 사용자를 위합니다! 진심으로 사과의 말씀을 드립니다!] [ヽ(●゚´Д`゚●)ノ゚ ] ​ 또 저렇게 이모티콘으로 사과를 하니, 방금 전까지의 분노가 사라지며 측은한 마음마저 들었다. 그래, 뭐… 돌이켜보면 녀석의 제안이 나쁜 결과로 발전한 적은 없었으니까. ​ “… 앞으로 잘하자.” ​ 그러자, 시스템 창이 환하게 빛나며, 마지막 메시지를 띄웠다. ​ [٩( ゚ヮ゚)و] ​ 나는 그 해맑은 이모티콘에 결국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