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다시 허름한 객실이 자리 잡은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일부러 낮게 말을 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떻게든, 쟁천무회장(爭天武會場)에 무사히 도착할 수 있도록 모시겠습니다. - 고마워, 형로. 벽 뒤편에서 이뤄지고 있는 대화였지만, 기감을 펼치면 충분히 들을 수 있었다. - …하지만 대리인(代理人)으로 세우려고 했던 무성락이 죽어버렸으니, 대리인을 다시 구해야만 합니다. 아가씨께서 직접 대결에 나서는 일만은 피해야 하니까요. 그들의 대화가 끝난 직후. 내 눈앞에 알림창이 떴다. 『서사(敍事)의 진상에 도달했습니다!』 예상대로, 퀘스트와 직접적으로 연관된 사람들이었다. 『퀘스트 : 호북연가(湖北燕家)의 장녀 연설아의 안전을 확보하시오.』 『퀘스트 실패의 기준은 연설아의 사망입니다.』 『본 퀘스트의 실패시 중원 무림에서 30일간 생존하기' 퀘스트로 전환됩니다.』 기감을 더 세밀하게 펼쳤지만, 추적자들로 보이는 자들은 없었다. '배 안에는 없다.' 그렇다면, 범선이 정박하는 위치에 추적자들이 기다리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호북연가의 연설아. 단말기를 꺼내 글을 빠르게 썼다. 제목 : 호북연가의 연설아를 보호해내라는데. 작성자 : ㅇㅇ* - 호북연가. 이곳도 선배들이 겪은 무림에 있었음? 여기 장녀가 부하 하나 데리고 도망치는 중인 듯. 연설아 사망 시 퀘스트 실패. 이건 실패하면 재도전 기회나 다른 루트 같은 거 없고. 그냥 내가 30일 생존해내야 하는 퀘스트로 전환되는 거 같고. ㄴ ? ㄴ ?? 연가 자제 놈이 도망을 쳐? ㄴ 그놈들이 가문 위세나 덩치로 따지면, 탑 무림 세계관 오대세가 바로 밑에 자리 잡고 있는데 왜 도망을 쳐? ㄴ 대에에에-호오오북 연가의 사람들이 도망을? ㄴ 뭐 이계 쪽이 몇십 년은 흘렀으니 무림계도 그만큼은 흘렀을 거고…그럼, 연가가 망한 것도 말은 되겠지. ㄴ 天魔) 그 말대로다. 멀쩡하던 가문이 망하는 건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는 일이지. ㄴ 시궁창검성) 여기 산증인이 있지 않은가. 화산도 거의 망했었네. 대문파도 꽤나 손쉽게 망할 수가 있어. ㄴ 자학 유희 보소 ㄷㄷㄷ ㄴ 화산파 장문인 "대문파도 생각보다 쉽게 망한다." ㄴ ㅇㅇ*) 검성 선배 화산은 어떻게 멸문에 가까워졌음? ㄴ ? ㄴ 등반자 이새끼…인성이? ㄴ 수왕) 친구야!!!! 그게 무슨 소리니!!! 그런 질문은 개같이 망한 식당의 주인에게 이 식당이 망한 이유가 뭐냐고 묻는 거나 다를 바가 없지 않냐!!!!!!! ㄴ 그 의도로 질문한 게 맞는 것 같은데? ㄴ 어허, 이놈도 생각보다 똑똑하게 잘 맥이는데? ㄴ 시궁창검성) 문파가 망하는데 생각보다 거창한 이유는 필요가 없다. ㄴ 시궁창검성) 난세가 도래하고. 굳건하던 가문이 그렇게 파생된 모종의 일로 흔들리는 일은 흔하다. 그리고 한 번 흔들린 가문을 계속 노리고 있던 놈들은 신이 나서 쳐들어가는 거지. ㄴ 무녀) 하와와, 탑 무림 세계관상 호북에 멀쩡히 자리를 잡은 가문은 그 지리적 위치만으로 먹음직스러울만 한 것이와요. ㄴ 무녀) 하와와, 뭔가 다른 이유가 있겠지만 말이와요. ㄴ 창왕) 뭐 다른 말들은 없더냐? ㄴ ㅇㅇ*) 쟁천무회장, 대리인. ㄴ 창왕) 아. ㄴ 무녀) 하와와, 연가 쪽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하는지 예상은 되는 것 같사와요. ㄴ 절대군주) 그렇군. 나도 예상은 된다. 무림 세계 쪽 선배들을 제외하고도 나머지 선배들도 호북연가의 사람들이 무슨 행동을 하려는 건지 예상이 가는 모양이었다. 하긴, 하드 난이도 탑에서도 '무림'을 다들 경험했을 거다. 무림 출신이 아니라고 해도 이 세상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겠지. ㄴ 대마법사) 약조를 받아내려는 거겠지. ㄴ ㅇㅇ*) 약조? ㄴ 당하연) 쟁천무회(爭天武會)는 정파에서 가장 큰 무투회임다! 1위를 하면 적어도 정파들 사이에서는 절대적인 규율을 하나 내세울 수가 있는 검다!! ㄴ 당하연) 어떻게 절대적일수 있는가! 무림맹주와 오대세가가 약속에 대한 공증을 서주기 때문임다!! ㄴ 당하연) 아마도 현재 연가에 적당한 무인이 없으니, 대리인을 내세워 우승하고!! 호북연가가 5년간의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명분을 세울 생각인 검다! 약속이라. 근데 이계만 생각해도 약속 같은 건 무력에 따라 쉽게 짓눌러버릴 수 있을 것 같은데. ㄴ ㅇㅇ*) 근데 약속해 봤자, 그거 깨고 공격 들어가면 되는 거 아님? ㄴ 당하연) 그 말이 맞슴다!! 역시 등반자 공! 아주 똑똑하심다!! 제갈가(家)가 감탄할 정도임다! ㄴ ? ㄴ ? 역대급 억빠 무엇?? ㄴ 역시 사회생활은 이리저리 달라붙는 박쥐형 생존의 가문 사천당가!!!! ㄷㄷㄷㄷㄷ ㄴ 나도 이제 슬슬 탑 친화적 사고를 이룩하기 시작한 부분에선 좀 감탄을 했다. ㄴ ㄹㅇㅋㅋㅋㅋ 탑에 걸맞은 성정이 되어가고 있구나. ㄴ 당하연) 그저 믿음으로 행해지는 일임다! 하지만 그럼에도 대부분의 경우 지켜지는 게 게 사실임다. 무림맹과 오대세가가 천명하는 약조는 무게가 아주 무겁기 때문임다!! 최강의 공증! 5년간의 안전 확보가 가능한 최선의 방법이라는 건 잘 알겠다. ㄴ ㅇㅇ*) 근데 퀘스트는 그 쟁천무회인가 뭔가를 1등 먹으라는 건 아니야. 연설아의 안전이 핵심. 그걸 안전을 어떻게 확보할지까지는 제시를 안 해주네. ㄴ ㅇㅇ*) 내가 어떤 행동을 취하는 게 가장 성공 확률이 높겠음? 쟁천무회란 곳에서 1등을 할 확률이 높을까, 아니면 그냥 호위 대상인 연설아 데리고 도망치는 게 살릴 확률이 높을까. ㄴ 밀실론자) 조금이라도 연설아의 생존 확률이 높은 건 놀랍게도 쟁천무회에 참여하는 쪽이다.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빛의검) 내 생각도 같다. 의견을 먼저 내놓은 선배들은 친절하게 설명을 덧붙였다. ㄴ 밀실론자) 쟁천무회에 참여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상당한 위험부담을 지는 선택이지만, 적어도 그 대회의 진행 중에는 안전을 확보할 수 있지.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빛의검) 맞다. 그리고 일단 기거하고 있는 위치가 확실해지니, 예상치 못한 위협에 대비하기에도 변수가 그나마 덜하다. ㄴ 당하연) 이목이 쏠리는 만큼, 그 시선이 끌리는 동안은 안전을 확보할 수 있는 검다!! 쟁천무회장에서 나가지만 않는다면 말임다! ㄴ 절대군주) 호북연가가 왜 다른 곳에 노려지고 있는가, 그건 궁금하구나. 나도 그건 궁금했다. 그 이유가 뭐든, 설령 호북연가가 쫓기고 있는 이유가 정당하더라도 내가 호북연가의 측에 서서 연설아를 보호해줘야한다는 사실이 변할 리는 없겠지만. 곧 물어봐야겠지. 난 내 옷을 내려다보았다. 교류회에서 정체를 숨기기 위해 구매했던 검은색 코트였다. 그나마 눈에 덜 띄는 옷을 고른 건데, 그래도 눈에 띄었다. 난 그럭저럭 깔끔한 옷을 옆에 두고 있는 사내를 향해 다가갔다. "남는 옷 같은 거 있나?" 머리카락이 심히 헝클어진 사내는 가늘게 뜬 눈으로 날 위아래로 훑었다. "…입고 있는 옷이 특이하긴 하구려, 그래서 옷을 달라?" "그냥 달라는 건 아니고." 난 인벤토리에서 황금 조각을 꺼내 사내에게 내밀었다. 일전에 싸웠던 골레트라에게서 나온 부산물이다. "이 정도면 값이 될 거 같은데." 사내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보였다. "큼큼! 그 옷이라도 달라고 할까 싶었지만, 확실히 그게 더 쓸모가 있겠구려. 옷이 얼마나 필요한 것이오? 지금 내가 입고 있는 것까지 다 주는 건 안 되고." 탐욕이 스멀스멀 올라온 게 보였다. 황금 조각 300개가 인벤토리에 있는데 급할 때는 충분히 화폐 역할로 써먹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냥 가장 멀끔한 옷으로 두벌." "어어, 통이 큰 형장이었구려?" 옷을 들고 내가 소환되었던 객실로 들어갔다. *** 옷을 갈아입고 바깥으로 나온 한유성은 갑판 위로 올라와 있는 연설아와 형로의 대각선에 앉았다. 그리고 존재감을 완전히 죽였다. 연설아와 형로. 둘은 나름대로 얼굴을 애써서 가리고 있었지만, 한유성의 눈에는 둘의 머리 위에 떠 있는 이름 창이 보였다. [NPC – 호북연가 장녀 4위계 연설아] [NPC – 호북연가 4위계 무사 형로] 배는 육지에 서서히 가까워지고 있었다. 쿠구구궁… 부두에 닻이 내려졌다. 장강(长江)을 건너, 장강 남안의 진강을 지나 이어지는 수로의 끝자락에 도달한 끝에. 목적지인 소주(蘇州)에 도착한 배였다. 한유성은 저 너머 지면에서 스멀스멀 올라오는 살의를 관측했다. '5위계 무인 둘.' 그리고 4위계의 무인이 넷. 나머지는 떨거지들이 일곱. 육지의 끄트머리까지 나선 사람은 5위계 둘이었다. [NPC - 5위계 낭인무사 양가명] "얌전히 우릴 따라오시오. 성심을 다해 초빙한 대리자도 이미 죽어버리지 않았소?" [NPC - 5위계 낭인무사 등정] "순순히 응해준다면 피를 볼 일은 없을 겁니다. 맹세하지요." 위압적으로 말하는 무인과 타이르듯 말하는 무인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특징은 둘 다 가공할만한 살기를 짙게 내뿜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가 이 배의 몇몇 사람과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나머지는 빠르게 하선하도록 하시오." 사람들을 배에서 내리게 만드는 건 그 말이면 충분했다. 무림인 간의 싸움에 휘말려 피를 보고 싶은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승객과 선원들이 우르르 내렸다. 연설아와 형로를 제외하면, 남아있는 건 한유성 밖에 없었다. '그냥 승객들 뒤따라서 같이 내려버릴까 싶었다만.' 그건 그것대로 변수가 발생할 확률이 있었다. 갑자기 쇠뇌를 쏘거나, 암기를 던지고. 그게 연설아의 숨통을 끊어버릴 가능성도 충분히 있었다. 연설아는 고개를 뒤로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당신은 왜 안 내렸죠?" "발에 쥐가 났어." 연설아는 한유성의 태평한 말에 입을 멍하니 벌렸다. 한유성은 말을 덧붙였다. "빨리 내려, 당신들이 내려야 내가 쓸데없는 일에 안 휘말릴 거 아니야." 연설아는 한유성에게서 시선을 떼고 형로를 바라보았다. "가자." "제가 미끼가 되어 시간을 벌겠습니다." "안돼. 허망하게 죽는 꼴을 보고 싶지 않아. 형로랑 나, 무공 고하 차이가 얼마 나지도 않잖아." 연설아는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잡히면 홀로 분투하고 있는 아버지에게 폐가 될 뿐이야." "…알겠습니다." 정박 장소에 이미 대기인원을 배치하고 있을 거란 예상은 했다. 마지막 발악을 하겠다고 다짐한 연설아가 오른손에 쥔 검에 검기가 피어올랐다. 절망적 상황이었지만, 나서지 않으면 더한 상황에 치닫게 된다. 등정이 결국 자신들을 향해 달려드는 연설아를 보며 입가를 비틀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려 부하들에게 말했다. "옆에 있는 호위는 죽여도 상관이 없다. 목표인 연설아만 제대로 확보하도록." "뒤에 한 놈이 더 있습니다만, 모르는 얼굴입니다.“ 그들의 시선은 한유성까지 닿았다. ”일행이거나, 아니면 게을러터진 나무늘보겠군. 어느 쪽이든 죽여라.“ ”올라옵니다. 연가의 장녀.“ 연설아는 땅을 밟자마자 앞으로 쇄도했다. 연설아의 검로는 날카로운 궤적을 그렸다. 하나, 양가명의 검에 손쉽게 막혀 버렸다. 연설아와 형로는 4위계. 5위계인 양가명과 등정의 무력을 쉽사리 극복할 수 없었다. 한유성은 나타났다. 신속한 보법으로, 연설아와 양가명의 사이에. 촤아아악! 오른팔이 대각선으로 뻗어 나갔다. 유연파공결과는 상이한 체계의 권로였다. 투박하고 파괴적인 권(拳). - 天魔) 뒤쪽에 부록처럼 적어놓은 부분은 보았겠지. - 天魔) 앞부분만 빼면 된다. 파공결. 살기가 짙은 직선의 권로가 양가명의 상체 정중앙에 틀어박혔다. 양가명이 입을 쩍 벌리며 뒷걸음질 쳤다. 양가명은 살기 위해 검을 휘둘렀다. 후웅- 하나, 검기가 휘감긴 검은 허공을 베는 데 그쳤다. 몸의 균형이 무참히 뒤틀려버렸다. 방금 맛은 단 일격에. 한유성의 양손은 다시 섬전처럼 움직였다. 콰드득! 양가명의 복부와 어깨에서 무언가 붕괴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콰앙! 양가명의 몸뚱이가 뒤로 넘어갔다. 쿵! 등정은 양가명을 내려다보았다. ‘죽었다…!’ 무언가 확인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숨통이 끊어진 게 명확했다. 단 세 번의 타격 만에 양가명을 죽인 사람. 한유성을 향해 모든 이의 시선이 쏠렸다. "뭐하는 놈이냐…!" "어떤 일에 끼어들고 있는지는 알고 있는 것이오?" "야, 양형이 이렇게 손쉽게…!" 다양한 말들이 들렸지만,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유성은 연설아를 바라보았다. "탈출하려면 힘 조절할 여력은 없어." 연설아가 멍한 얼굴로 반문했다. "네?" "적당히 부술 거다." 싸늘한 시신이 된 양가명이 아니라, 추격조 전체를 빗대어 한 말이었다. 당장 눈에 보이는 추격조를 다 죽여버리는 건 시간을 길게 끌면 가능할지도 모르나, 그럴 시간은 없었다. 그리고 저게 전부일 것 같지 않았다. 적당히 죽이고 상황을 파악한다. 추격이 침체 될 정도의 피해를 입힌다. 그게 한유성이 내린 결론이었다. "탈출 방향은 네가 잡아야지. 난 초행이거든." 한유성은 한 발자국 더 앞으로 갔다. 일단, 등정까진 무력화를 시켜야 했다. 추격조는 몸을 움찔거리며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아가씨, 빠져나갈 기회입니다." 형로의 말에 한유성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연설아는 그제야 사고를 굴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