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카메르 제국의 바다 앞에는 신화에 가까운 입지적 인물이 살고 있었다. 10년 전, 갑자기 나타나 바다를 가득 메웠던 괴수와 마수를 홀로 쓸어버린 사내. 그리고 그는 바다의 무역을 방해하는 해적들도 깨부쉈다. 【개척자】 금발 녹안의 사내, 베르딘은 바다 저편을 바라보았다.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반 이네르." 그 이름을 잊은 적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던 생명의 은인이었으니까. *** 개척자, 과거. « 하드 난이도 16층, 등반자 - 베르딘 » « 현재 위치, 10층계 단위 교류회. » 베르딘의 귓가에 험악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새끼, 이상한 놈이야. 몬스터는 제대로 척척 썰어댔으면서 사람은 상대를 잘 못 한다니까." 콰드득! 등에서 강한 고통이 치밀어올랐다. 베르딘은 이를 갈았다. 양쪽 발목이 참혹하게 베여 걷지도 못하는 상태였다. 당장 숨통이 끊어져도 이상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희망의 불씨 따윈 진작에 꺼졌다. 정신은 이미 지옥에 한 발을 담그고 있었다. 옆에 있는 노멀 난이도 등반자, 하이르겐을 믿었다. 썩 친절하게 굴었으니까. 하지만 그 친절은 만만한 먹잇감을 찾기 위한 작업의 일부였다. 던전 형 교류회였다. 교류회답게, 던전의 난이도 자체는 그다지 높지 않았다. 고작 고블린. 보스 몬스터로 고블린 로드를 앞두고 있긴 하나, 현재 교류회 인원수인 여덟 명에서 충분히 공략 가능한 적이었다. 베르딘은 특수 재질의 구속구로 묶여버린 양팔을 흘겨보았다. 3위계. 육체의 바깥으로 마력을 흘려보낼 수 있는 단계. 그래서 마력을 내보냈지만, 구속구는 풀어지지 않았다. 하이르겐은 숏소드를 든 오른손을 내질렀다. 베르딘의 옆에 누워있는 플레이어의 목에 숏소드가 파고들었다. 플레이어의 몸이 경련하듯 떨리더니, 이내 축 늘어졌다. 죽은 플레이어가 뱉어내는 큐브가 시신 옆에 데구르르 떨어졌다. "카르낙, 이놈은 네가 죽여. 경험치는 공정 분배해야지?" "아이템은 뭐 쓸만한 거 있었냐?" "어, 저놈 고블린 상대할 때 썼던 검만 해도 뭔가 다르긴 했어. 저렇게 형편없이 누워있어도 너랑 같은 하드 난이도 등반자거든, 저놈." "알겠다." 베르딘은 놈들의 목소리와 피 냄새가 한 데 섞여, 아주 기분이 불쾌해짐과 함께 절망적인 감정이 올려오는 걸 여실히 느껴야 했다. "하드면 뭐하냐, 노멀한테 이렇게 뒤지는데. 가만 보면 난이도 같은 건 부질 없어. 그치? 몸부림치면 골치 아파 질 수도 있으니까 먼저 발목부터 자르고 시작해야겠다." 카르낙의 말이 끝난 직후. 셋 모두에게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야, 당신 왜 그러고 누워있어?" 카르낙과 하이르겐의 고개가 동시에 오른쪽으로 움직였다. 은발 머리카락에 벽안의 눈동자를 가진 여성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방금 고블린들 잡을 때 보니까, 저 둘 본다는 당신이 더 싸울 줄 아는 것 같던데?" 여성은 진심으로 베르딘이 왜 제압된 상태인지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카르낙과 하이르겐으로서는 그저 어이가 없었다. 신경조차 쓰고 있지 않았던 존재가 갑자기 다가와서 누가 더 강하니 마니를 말하고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베르딘은 바닥에 쓰러진 상태로, 다가오는 여성의 이름을 떠올려냈다. '반 이네르.' 교류회 진입 초반에 함께 싸운 사람이었다. 거주 층계는 12층계. 저산의 입으로 밝히기엔 2위계라고 했다. 2위계 치고는 움직임이 깔끔하다고 생각했지만, 2위계를 한참 웃도는 무력을 보여준 적은 없었다. 분명, 지금 이 상황에서 끼어들 만한 무력은 아니었다. "재들이 뒤통수를 쳤구나?" 촤악! "크악!" 카르낙은 베르딘의 어깨를 칼로 베었다. "잠시 기다리고 있어라, 저년을 먼저 죽이고 너를 처리해야겠으니." 스릉! 하이르겐이 창을 꺼내 들었다. "미친년이 적당히 미쳤으면 이런 식으로 덤벼들지 않았을 텐데, 아주 제대로 정신줄을 놨나 보구나." 반 이네르는 천천히 둘과의 거리를 좁혔다. 반 이네르의 오른팔이 움직였다. 검의 궤적이 카르낙과 하이르겐이 들고 있던 검과 도끼를 스쳐 지나갔다. 콰지직! 으직! "어…으어?" 하이르겐의 입에서 멍청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하이르겐의 목 우측에서 핏줄기가 뿜어졌다. 카르낙의 심장에는 반의 검이 관통된 상태였다. "플레이어 몇 명 죽었으니까, 역으로 이렇게 죽는 것도 각오는 했지?" 그게 하이르겐과 카르낙이 생전에 들은 마지막 목소리였다. 베르딘은 겨우 반 이네르의 움직임을 봤다. 반 이네르는 검에 오러조차 두르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검기를 일으킨 카르낙이 뭘 하기도 전에 즉사를 시켜버렸다. 그리고 연속으로 하이르겐의 숨통도 끊었다. 압도적인 실력의 격차가 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 베르딘은 자신의 옆에 다가온 반 이네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계속 수련해, 죽여야 할 놈은 죽이고. 당신 꽤 가능성이 충만해. 그냥 선원 출신인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철컹! 반 이네르는 베르딘의 양손을 묶고 있는 구속구를 검기를 휘감은 검으로 잘라 내버렸다. "…감사합니다." "어, 이건 좀 감사하긴 해야지." 베르딘은 쓰게 웃었다. 반은 히죽 웃었다. "아주 적절한 팔의 각도, 고블린의 약점만 본능적으로 치밀하게 공략하는 움직임. 그거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게 아니거든. 당신, 재능은 있는 거야. 충분히." 베르딘은 한숨을 돌린 뒤, 얼굴에 피가 묻어있는 반 이네르를 응시했다. "당신은 왜 힘을 숨긴 겁니까?" "얕보고 덤비고 들어오는 놈 죽이려고. 근데 그런 놈들이 당신한테 먼저 달려든 거 같네." "친구 추가, 받아줄 수 있습니까?" "왜?" "목숨값은 갚아야지 싶어서 말이죠." 반은 피식 웃었다. "오, 다음 회차 교류회에서 갚아주려고?" "예." "기대할게." 베르딘은 진심으로 궁금해서 참을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정말 제게 재능이 있어 보입니까?" 반은 베르딘의 질문에 피식 웃었다. "어, 왜 안 믿겨?" "네, 사실 그렇습니다." "믿어, 귀에 딱지가 앉을 정도로 천재라는 소리를 많이 들은 인간의 눈이거든?"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뭘 감사를. 아, 나이 비슷한데 다음에 만나면 반말 쓰고.” 은인에게 말을 놓으라는 것이 내키지 않은 베르딘은 뒤통수를 긁적였다. “…예.” 판데모니엄. 반을 친구 추가한 베르딘은 반이 판데모니엄 난이도의 등반자라는 걸 알게 되었다. "판데모니엄의 난이도는 어떻습니까…? 하드 난이도 위에 또 다른 난이도가 있다는 게 아직 믿기지 않는데." 베르딘의 말에 반은 한숨을 내쉬었다. "뒤지게 힘들지. 난이도 그 자체도 힘들지만, 그보다 더 뭣 같은 건 뭐냐면, 옆에 동료가 없다는 거야. 동료가. 그냥 혼자 쭉 올라왔어." 베르딘은 반 이네르가 겪는 난이도를 예상도 할 수도 없었다.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난 살고 싶거든." 베르딘은 기억했다. "무의미한 죽음은 싫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을 잇는 반 이네르의 모습을. 그리고 교류회가 끝난 며칠 뒤. 친구 창에 있던 반 이네르의 이름 칸이 회색이 되었다. 그건 즉 그녀의 죽음을 뜻했다. *** 바다를 바라보며 과거에 관한 생각에 잠겨 있을 때,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장, 왕국과 제국을 동시에 오가며 양쪽에 둘 다 요주의 적으로 점지한 해적 놈들이 해상에 나타났습니다." 초월자 갤러리 활동명 【개척자】, 베르딘은 자신의 오른팔이라고 할 수 있는 6위계의 검사 마구스의 말에 입을 천천히 열었다. "예상 위계는." "앞서 대치하고 있는 부하들의 말에 따르면 7위계로 예상된다고 합니다. 괴상한 짓을 하는 인간 치곤 너무 높은 것 같아 의심되기는 하지만 말입니다." 베르딘은 부하들이 판단한 걸 의심하지 않았다. 7위계를 이룩한 놈 중에서 정신 이상자가 많다는 건 탑을 등반하던 시절에 이미 톡톡히 경험했다. "원래 고위계일수록 정신 나간 놈들이 많다. 갔다 오지." 마구스는 베르딘의 신형이 갑자기 사라진 것에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베르딘이 이렇게 사라진 경우가 한 두 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베르딘이 다시 나타난 곳은 바다. 바다의 위였다. 세 척의 배가 나란히 전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뭐냐?" 중앙 쪽, 제일 큰 배의 위에 서 있는 해적, 7위계의 전사 겔포드가 베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겔포드의 미간이 와락 구겨졌다. 함부로 입을 놀리기엔 새하얀 코트를 펄럭이며 배를 내려다보고 있는 베르딘이 풍기는 기운이 심상치가 않았다. "너희들이 지금 억류하고 있는 이들의 신원은." 베르딘의 시선은 배의 앞머리에 꽁꽁 묶여있는 남녀들을 향해 있었다. 겔포드는 뺨에 있는 기다란 흉터가 꿈틀거릴 정도로 짙은 웃음을 지었다. "약탈한 이들을 파는 건 침략자들의 권한이 아닌가." "손이 한 짝씩 없는 것 같은데." 겔포드는 베르딘의 말에 턱을 쓰다듬었다. "말을 듣지 않는 자들의 손을 자르는 것도 침략자들의 권리 아닌가." 베르딘의 감정은 요동치지 않았다. 9위계라는 경지에 이르면서 많은 것이 통상적인 인간과는 달라졌다. 분노라는 감정은 어지간한 일로는 표출되지 않았다. 정확히 말하자면, 지금은 이런 일에 쓸 분노의 총량은 바닥이 나버렸다. 이미 다른 쪽에 분노를 하고 있었기에. 겔포드는 말을 이었다. "이 대해의 주인이라는 작자를 찾고 있었다. 9위계의 괴물이라는 헛소리를 들어서 말이다." "나다." 베르딘의 단촐한 고백에 겔포드가 헛웃음을 흘렸다. "아주 잘 됐구나, 주인이라면 이 심해에 처박혀도 날 원망하진 않겠지?" 겔포드가 서 있는 배의 양현에서 물줄기가 하늘을 찢을 기세로 솟구쳤다. « 고유영역, 레비아탄. » 해류가 치솟아올랐다. 바다가 없더라도 바다를 창조할 수 있는, 현실 개변형 고유영역. 지금은 본래부터 공간이 바다인 상황. 고유영역의 힘은 말 그대로 극대화된다. 레비아탄의 능력 중 하나인 해류 조종의 범위는 대략 150m. 그 해류 속에 담기는 것은 겔포드가 쌓아 올린 오러였다. 물의 형태 가짓수는 가히 무한에 가깝다. 표면에 떠오르는 작은 물방울부터 휘몰아치는 해류 소용돌이. 그리고 어떤 검격보다 더 날카로운 물의 참격이 바다에서 솟구쳐 올랐다. 쿠구구구구구구! 고강한 살상력(殺傷力)을 지닌 수백 형태의 해수가 베르딘을 향해 쇄도했다. 베르딘에게 쏘아진 공격은 고유영역 레비아탄을 기반으로 한 해수 공격뿐만이 아니었다. 4위계 넷과 5위계 하나가 쏘아낸 원거리 참격도 베르딘을 향해 쏘아졌다. 나머지 하위계 부하들이 쏘아낸 잔잔한 공격도. 그 모든 위력이, 마치 천벌처럼 베르딘을 향해 직격하려는 그 순간. 겔포드의 동공이 확장됐다. “…이게.” 무언가 잘못되었다. "무슨─.“ 바다가. 그의 바다가, 움직이지 않는다. 하다못해, 물방울 하나도. 레비아탄의 영역 전반을 덮어버린 이질적인 존재감. 해류 한 줄기, 물 한 방울조차 겔포드의 의지에서 벗어나 있었다. 베르딘이 오른손 검지를 천천히 움직였다. 촤아아악… 해수가 움직였다. 고유영역 레비아탄을 펼친 겔포드가 아니라, 베르딘의 의지대로. « 고유영역, 유랑(流浪). » 베르딘의 9위계 고유영역이 레비아탄의 영역 위를 완전히 뒤덮은 상태였다. 베르딘은 겔포드의 영역인 레비아탄의 구조를 간단히 이해했다. 그리고 베르딘이 고유영역 ‘유랑’을 발동시킨 상태에서 타인의 영역을 이해한다는 건. 자신보다 하위 위계의 고유영역. 그 영역의 권리를 박탈한다는 것을 뜻했다. 치솟아 오른 해류가 일제히 항로를 반대 방향으로 틀었다. 모든 해류가 반전되었다. 콰과과과과과광! 콰과과과과광─!! 드높게 솟구친 거대한 파도가 배를 삼켰고, 겔포드의 선원들은 갈가리 찢겨 붉은 피를 흘리며 바다로 침전했다. 그 피를 흘린 이들 중, 인질이라 할 만한 자들은 없었다. 두둥실… 놈들에게 잡혀있던 인질 스물네 명이 몸이 한참 전부터 허공 위에 있는 베르딘의 옆에 떠올랐다. 어떠한 피해도 없이. 베르딘이 극도로 세심한 마력의 조율로 이들을 들어 올린 것이다. "어어어…." 남녀는 허공에서 방향을 잡으려는 듯, 엉거주춤한 자세를 취했다. "가만히 있어도 된다. 중심은 내가 잡고 있다." "예, 예…." "네!" 그들은 떨리는 목소리로 감사를 전하며 베르딘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베르딘은 마력을 응집시켜, 비교적 온전한 동쪽의 배 위로 그들을 옮겼다. 스스스스- 배 위에 스물넷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커헉! 쿨럭!" 몸을 살짝 하강시켜 갑판 위에서 피를 토하고 있는 겔포드를 내려다보았다. "아직 숨은 붙어 있구나." 하지만 곧 죽을 것이다. 오러가 휘둘러진 온갖 형태의 해류에 몸이 꿰뚫린 상태였으니. 말 그대로, 도륙 당해버린 몸뚱이였다. 그나마 멀쩡한 건 머리통밖에 없었다. "어…떻게 한 것." "위계의 차이를 극대화한 거다." "네…세계의 끝이 보이지 않았다." "그건 아직 네 눈이 얕아서 그렇게 보이는 거다." 겔포드의 눈은 여전히 의문에 가득 차 있었다. 쿨럭- 한 번 더 피를 쏟아낸 겔포드의 고개가 축 늘어졌다. 여전히 그 의문에 잠식된 채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인질들은 몸을 파르르 떨며, 아직 하늘에 땅을 딛고 있는 베르딘을 올려다보았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 신이시여…." 베르딘은 미간을 좁혔다. 그닥 유쾌한 호칭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9위계. 9위계를 이룩한 '초월자'는 신에 가깝다. 초월자가 아닌, 다른 이들이 보기엔. 아마도, 객관적으로 봐도 그럴 것이다. 초월자가 지닌 바 힘은 신에 가깝다. 하지만 진정 그럴까. 다른 초월자들은 몰라도, 개척자 본인은 결국 신은 아니라고 여기고 있었다. 필멸을 벗어났다고 해서 그게 신으로 정의될 수 있는가. 신에 정말로 가까운 건 베르딘의 머릿속에 셋 정도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의 기준에서 10위계라는 영역에 들어섰다고 짐작되는 건 셋. 대륙의 인원들에게 ‘첫 번째 신’이라고 불리는 빛의검. 그리고 아직 공개적으로 힘을 드러낸 적은 없으나, 이 땅의 질서에 공헌한 주딱. 그리고 이젠 다른 세상에 있으니 볼 수는 없는 천마. 하나, 솔직히 말하면 그 셋도 신에 필적한 건 맞지만. 완벽한 신이라할 수 있는가는 의문이었다. 베르딘은 다시 반 이네르를 떠올렸다. 참으로 빌어먹을 일이다. 그녀의 손에 목숨을 구원받은 자신은. 자신보다 뛰어난 동급 난이도의 등반자들이 판단을 착오해 죽고. 만용을 부리다 죽는 것을 다 목격하면서, 결국 그들의 시체를 지나 끝까지 올라왔다. 하지만 반 이네르는 죽었다. 반 이네르보다 훨씬 강해졌다. 먼 과거. 교류회에서 자신의 구원자가 되어준 반 이네르의 무력은 이제 손가락 하나만으로 짓누를 수 있을 정도였다. 세계는 너무나도 불공평했다. 자신보다 더 재능이 뛰어난 자였는데. 소환된 난이도가 '판데모니엄'이라서 죽어야 한다니. 반 이네르가 적어도 하드 난이도에 소환되었다면 분명히 살아남았을 것이다. 판데모니엄의 13층에 부활하여, 한 번 더 죽을 일도 없겠지. 그리고 지금의 자신보다 훨씬 더 강해진 상태로 탑에서 나왔겠지. 이마저도 무의미한 망상에 불과하다. 그러나 씁쓸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다만, 간절히 바랄 뿐이다. 언젠가 반 이네르가 자신에게 말했던 것처럼. - 무의미한 죽음은 싫어. 스스로, 무의미한 죽음이라고 느끼지 않았기를. *** 초월자 갤러리를 사용할 수 있는 단말기. 이걸 내가 1층에서 가질 수 있도록 설계한 건 대체 누굴까. 관리자 플리셰크의 입에서 나왔던 최상층부. 그 최상층부에 있는 존재 중 하나인 걸까, 아니면 판데모니엄 탑 그 자체일까. 그것도 아니면 또 다른 외의 존재인가. 생각할 가치는 있는 주제였지만, 고심한다고 답이 당장 나올 주제가 아니었다. 이제는 이놈의 탑은 나를 위로 이끌려는지, 아래로 끌어내리려는지도 구분이 되질 않지만. 어쨌든, 위로 올라가야 했다. 올라가야 할 이유가 점차 늘어나고 있었으니까. 나는 체내의 마나를 운용했다. 6위계. 그것에 대한 갈피를 잡기 위해서. 몸의 중심축을 잡고 있는 오러 회로 옆의 기둥. 세 번째 기둥을 만드는 데 성공하는 것이 즉, 6위계에 들어서는 것을 뜻했다. 하지만 6위계로 향하는 길은 험난했다. 나는 5위계라는 그릇을 먼저 완성해야 한다는 걸 여실히 깨달았다. 피를 흘리고. 꺾여가면서 얻어낸 성취들을 한 데 모아, 오롯한 그릇을 단단하게 만들었다. 빛의검 선배의 검법서, 용살검에 적힌 문장들이 뇌리를 스쳤다. - 특별한 마나 운용법은 없어. - 어차피 너만의 운용법을 만들어야 도달할 수 있어, 6위계부터는. 모든 나를 알아야 한다. 무력한 나도. 강인한 부분이 있는 나도. 고뇌의 시간은 찰나처럼 흐르고. [탑 교류회를 시작합니다.] 교류회가 또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