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층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다리를 움직였다. 나는 천천히 앞으로 걸어가 앞에 보이는 의자에 앉아, 몸을 앞으로 기울여 앉았다. "……." 식은땀이 이마에 맺혔다. 아무런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두통이 점점 영역을 넓혀갔다. 감각은 점점 둔해지고, 세상이 멀어지는 것 같았다. 몸은 여기 있는데, 정신은 어딘가 깊은 수렁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이질감이 들었다. 시야가 검게 물들었다. 왜. 왜 반은 날 위해서 결투를 포기한 걸까. [13층 돌파 보상으로 2000코인을 부여합니다.] [판데모니엄 13층 돌파 보상으로 아이템이 지급되었습니다. '인벤토리'를 확인하세요.] ['플레이어 - 한유성' 13층 스테이지의 점수를 집계합니다.] 본래는 스테이지를 클리어한 직후. 그곳을 벗어나기 전에 눈앞에 나타났던 알림창들이 이제야 떠오르기 시작했다. 기존 13층 랭킹창이 시야 구석에 떠올랐다. 1위 - 연합장 : 956점 2위 - 흑성 : 901점 3위 - 검은손 : 879점 4위 - 추적중 : 841점 5위 - 싱클레어 : 813점 ⋮ ⋮ 물론, 늘 그렇듯 타인의 랭킹 점수에는 관심이 가지 않았다. [한유성 : 5,786점] 지금은 내 점수창도 그저 쓸모없는 숫자 놀음으로 보일 뿐이었다. [13층 랭킹 점수를 등록하시겠습니까?] [Y / N] 잠깐의 고민도 없이 거절을 눌렀다. 12층 이후부터는 랭킹 순위에 따른 보상도 없다고 한 상황. 굳이 랭킹창에 이름을 닉네임과 점수를 띄울 필요가 없었다. 인벤토리에서 마른 수건을 꺼내 땀을 닦았다. 조금 전, 2급 관리자 플리셰크와 나눴던 대화가 머릿속을 휘젓고 있었다. 13층은 혼자 클리어하는 게 절대적으로 불가능한 층계라 반 이네르를 그 층계 한 정으로 살려낸 거다? 그 말 자체가 오류투성이였다. 애초부터 생환율 0%의 난이도를 가진 탑, 판데모니엄. [판데모니엄]이 혼자서는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어려웠던 건 이번 13층계만이 아니라, 13개 층계 전부였다. 그런 내 반응에. - 하긴, 그 말씀이 맞죠. 플리셰크가 그 말이 맞다고 맞장구를 친 뒤 덧붙인 말들. 그 말들이 계속 뇌리를 맴돌았다. 그 말들을 곱씹었다. - 이 13층 [리뉴얼]의 명령을 내린 것도. 그 오류의 수정을 위해서 필요한 공략 성공의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라며 지난 기수의 플레이어인 반 이네르 님을 13층계만을 한정하여 조건부 부활시킨 것도. -이 [판데모니엄 탑]이 직접 내린 결정입니다. - 저희도 놀랐죠. 탑이 적극적 의사 표현을 하는 건 지극히 드문 경우인지라. - 저 같은 일개 관리자가 최상층부도 쩔쩔매는 탑의 자체적인 결정을 어떻게 거부하겠습니까. 탑. 이 같잖은 알림창들을 내뱉고 있는 것도 탑 자체의 시스템이겠지. 이제까지는 아무렇지 않게 보아왔던 알림창의 문장마저 역겹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대체, 뭘 위해서 날 이 빌어먹을 탑에 불러낸 거냐. 양손을 움직일 힘이 분명 있음에도. 무언가를 할 의지가 생기지 않았다. 반. 고작 며칠 함께했을 뿐인데. 왜 날 위해서 다시 살아갈 기회를 포기한 거냐. 물론, 그 시간은 내게도 소중했다. 찰나도 버릴 수 없을 만큼. 하지만 사람은. 사람이라면 본인의 목숨이 중요하지 않나. 문득, 반 이네르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녀와 나눈 대화와 함께. 대화를 나눈 건 이틀 전이었다. - 유성, 같이 위로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해? - 여섯 번째 뿌리, 하나 남았잖아. 같이 올라가야지. 그때 보였던 네 웃음은 그냥 기분이 좋아서 그랬던 건 줄 알았는데. 지금 생각하면 그런 종류의 웃음은 아니었던 것 같았다. - 응, 그래야지. 같이 올라가야지. 내게 어깨동무를 하며 이렇게 대답을 했던 너는. 여섯 번째 뿌리를 성공적으로 격퇴 시켜도, 함께 할 수 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겠지. 갑자기 눈앞에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붉은 레이어의 알림창이 떴다. [주의! '플레이어 - 한유성' 감정 - '우울감' 수치가 급격히 상승했습니다.] [판데모니엄 14층 이후부터 진행되는 플레이어 멘탈 케어 서비스가 있습니다!] [감정 치료 관리자가 층계 대기실에 파견됩니다.] 이게 무슨 개소릴까. 알림창이 사라진 직후. 치지지직! 허공에서 균열이 일어났다. [3급 관리자 - 유에리트] 조금 전 결투장에서 내 앞을 가렸던 방어막과 유사한 방어막에 둘러싸인 존재가 모습을 드러냈다. 겹겹으로 뒤덮인 방어막은 그 내부에 있는 존재의 형체마저 완전히 가리고 있었다. 내 손은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관리자'. 그 빌어먹을 단어에 반응을 해버렸다. 콰아아앙! 뻗은 오른손 주먹에 방어막이 파편을 흩뿌리며 부서졌다. 조금 전의 빌어먹을 벽과는 달리, 썩 손쉽게. 내부는 아직 드러나지 않았다. 쩌어엉! 왼손으로 하나의 방어막을 더 부수고 나서야, 부서진 방어막 속에 있던 존재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눈가를 새하얀 천으로 된 안대 같은 것으로 가리고 있는 여성이었다. 분홍색 긴 머리카락이 휘날리는 게 보였다. "뭐냐, 넌." "판데모니엄 14층계 이후부터 파견이 가능한 감정 치유 관리자입니다. 주로 플레이어님들의 우울증이나 트라우마를 치료하기 위해 파견됩니다." 유에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현재 한유성 플레이어님에게 권장되는 것은 약물적 치료입니다. 첫 진료는 무료로 이루어집니다. 스마일 콤파운드를 추천해 드립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행복 수치가 모든 감정 수치를 웃돌게 됩니다." 스마일…뭐? 나는 어이가 없었다. "…어떤 기준으로 약을 처방하는 건데?" "전 한유성 플레이어가 어떤 일을 겪었는지 모릅니다. 현재 겪고 계신 감정 수치만으로 계산하여 그에 맞는 약을 처방해드릴 뿐입니다." 유에리트라는 관리자는 일정하게 낮은 음정으로 말을 이었다. "처방을 거부하셔도 상관없습니다." 기계적이라고 느껴질 정도로. "감정은 결국 시간의 흐름에 따라 희석이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더 불쾌해졌다. 나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관리자를 붙잡고 시간을 끌 이유는 없었다. "꺼져." 유에리트는 고개를 숙였다. "첫 파견이라 플레이어님의 의사 존중 없이 소환된 점, 죄송합니다. 코인 상점의 우측 하단에 14층부터 새로 생긴 감정 치료 요청 버튼을 누르시면, 언제든 저와 면담을 할 수 있습니다." 이 관리자란 작자가 정보를 얼마나 가지고 있는지, 그건 궁금해졌다. "그럼, 그딴 거 말고. 다른 걸 좀 물어봐도 되나?" 유에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 제게 감정 치유 건을 제외한 대화를 나누는 건 불가능하지만 한유성 플레이어는 주목 등급 특급의 플레이어이기에 어느 정도의 문답은 가능할 것 같습니다." 유에리트가 말을 덧붙였다. "21세기 지구의 관점에서 보면 VVIP 회원에 속하신다는 겁니다. 제가 아는 선에서 답변할 수 있겠지만요." 명칭이 뭐든, 주목도가 높다는 게 딱히 좋게 들리진 않았다. "첫 번째 질문, 관리자를 죽이는 건 가능한가?" "네." 유에리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테이지에서는 죽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층계 대기실에선 불가능합니다. 공격을 직격 당해도 고통을 느끼지도 않죠." 스테이지에서는 죽일 수 있다. 본인과 관련된 정보를 참 아무렇지 않게 알려주는구나 싶었다. "탑 자체가 살아있는 존재가 맞다면, 올라가다 보면 그놈과 대화가 가능하다는 소리냐?" "제 영역을 벗어난 질문입니다만, 등반을 계속하면 알게 되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모호한 답변이었지만, 가능하단 소리에 가까웠다. 난 본래 하려던 질문을 세 번째에 꺼내 들었다. "죽은 플레이어를 부활시킬 방법 같은 게 있나?" 유에리트의 대답은 직전과 같이 곧바로 들려오지 않았다. "제 권한 밖, 지식 밖의 이야기입니다." 이번에는 모호함도 벗어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걸로 족했다. 아예 불가능하다는 말이 튀어나오는 것보다는 저런 식의 대답이 나았다. 지금으로서는. "더 이상의 질문이 없으시면 이만 물러나도록 하겠습니다." "어, 가라." "층계 대기실에 계실 때는 언제든 저를 부르실 수 있습니다." 유에리트는 저렇게 말하고서도 아직도 안 사라지고 서있었다. "우울감이 분노로 급속도로 치환되는 게 수치로 확인됩니다." 간다고 했으면서 계속 떠들어 댈 용건이 생각 나는 모양이었다. "분노는 단기간의 우울 극복에는 효과적이지만, 그게 계속되면 자신을 갉아먹게 될 겁니다." 유에리트는 그제야 공간을 찢고 사라졌다. 우울을 분노로 치환하고 있다라. 그 지적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실제로 그랬으니까. 하수구에 처박히는 감정을 끌어올리기 위해선 목표를 세워야만 했다. 일단 올라간다. 계속 올라가서, 그 살아있는 탑이란 새끼랑 대화를 좀 해봐야겠다. 난 인벤토리의 앞쪽에 자리 잡고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다. 그건, 화살통이었다. 반 이네르가 자신에게 준 화살통. 툭. 그 화살통을 들어 안을 살폈다. 화살통 안의 화살들을 하나씩 건드렸다. "뭐야." 화살이 아닌,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화살통의 구석 모퉁이에. 그 잡힌 걸 꺼내 들었다. 새하얀색의 아주 작은 주머니였다. [소형 아공간 주머니] 매듭을 풀면 주머니 속 아이템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나는 이런 물건을 화살통에 넣은 적이 없었다. 애초에 아공간 주머니 같은 걸 획득한 적도 없었으니까. - 야, 화살통. 내가 선물로 줬는데 잘 챙겨야지. 어차피 안 쓸 거라고 너무 막 흘리고 다니는 거 아니냐. 여섯 번째 뿌리에 진입하기 전에 이 화살통을 반이 가져다주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나는 주머니의 매듭을 풀었다. 그러자, 주머니가 열리며 안에 있던 아이템들이 쏟아져나왔다. 안에 든 가장 눈에 띄는 아이템은 서적이었다. 반 이네르가 사용했던 검술인 피엘뷔르트의 검법서. 검법서의 첫 장을 펼쳤다. 그 첫장에는 글이 적혀져 있었다. - 한유성. - 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할 거야. 이 두 줄이. 글의 전부였다. 헛웃음이 절로 흘러나왔다. 저렇게 말을 하는 장면이 떠오를 정도로 선명한 문장이었다. 이 글을 쓴 게 반이 분명할 정도로, 반 이네르다운 문장이라고 생각했다. "모르겠다. 아직." 왜 네가 살아남을 확률이 있었던 결투를 그렇게 쉽게 포기했는지. 첫 장에 무언가 남겼다면, 끝장에도 있을까. 그 직감은 들어맞았다. - 포기는 하지 마. "어." 물론이지. 홀로 13층의 전투를 복기했다. 계속 반 이네르라는 존재가 머릿속을 맴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사고하는 것을 주춤거릴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계속 곱씹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하루가 지나고 아침이 되었다. 자고 일어나도. 머릿속이 그렇게 개운해지진 않았다. 인벤토리에서 꺼낸 야구공을 매만졌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나아간다. 다시 나아가야한다. 이제야 슬슬, 초월자 갤러리 단말기를 꺼낼 생각이 들었다. "개판이네." ─살아있냐???? 등반자야?? ─14층? 14층? 14층? 삶? ─ㄹㅇ 일단 제목이랑 내용에 .만 찍어도 되니까 글을 올리렴, 착하지?? ─ㅅㅂ 나와, 죽은 게 아니라면 나와아아ㅏ아아악!!!!!!! ─호에에에에, 호에에에 여기 사람이 있어요. 글들의 제목은 하나같이 내 생사를 궁금해하고 있었다. 글을 쓰기 시작했다. 이번 글은 여러모로 두서가 없었지만, 그래도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은 잘 알아먹을 거다. 생각보다는 섬세한 내 상담가들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