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층. 20층은 내게도 의미가 컸다. 탑의 5분에 1에 도달했다는 그 수치 자체로서의 의미. 그리고 일단 해당 층계를 끝으로 성좌들을 원천 차단하려고 정해놓은 층계였다. 어떤 변수가 생기면 차단을 풀게 될 수도 있지만. 유종의 미라도 거두라는 걸까. 퀘스트 형 스테이지가 걸리면 마지막이고 뭐고 그냥 차단한 상태로 내버려 두려고 했었는데. 『판데모니엄 난이도 20층은 던전 형입니다.』 이번 층계도 던전 형이었다. 『해당 던전, '타오르는 관'을 클리어하십시오.』 던전 이름 한 번 무식하게 음산하구만. 왜 던전 이름이 타오르는 관인지는 곧바로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열기가 바닥에서 치솟아 올랐다. 난 호신강기를 펼쳐, 치고 올라오는 불꽃과 열기를 막아냈다. 일단 이 던전의 구조부터 파악해야 했다. 기감을 펼쳤지만, 당장 알 수 있는 건 아주 좁디좁은 공간에 처박혀있다는 것밖에 없었다. 기감은 투시 같은 능력이 아니다. 기를 구조물이나 풍광에 흘려보내 대략적인 위치를 파악하고. 그 기에 반응하는 생명체를 대략적으로 파악할 뿐이다. 그것 또한 충분히 대단하다고 할 수 있겠지만, 투시라고 할 정도의 정확성은 아니라는 뜻이다. 기감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단번에 끝이 나기도 하고. 지금 손에 쥔 검은 13층 달성 보상으로 얻은 아이템. [연사비광(燕絲飛光)] 무림계 층계 달성 아이템답게 중원 무림의 검이었다. 난 [연사비광]을 [문둠 엑스팅귀트]와 번갈아 사용하고 있었다. 콰아아아앙! 검에 검강을 일으킨 상태로 폐쇄된 던전의 벽면을 내리쳤으나,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내부에서 부술 수 없는. 말 그대로 안에서 공략해야만 하는 던전으로 보였다. 성좌 차단을 풀기 전에. 먼저 초월갤 선배들에게 질문을 먼저 던지기로 했다. 제목 : 뭐 이런 데 갇힌 적 있는 선배 있음? 작성자 : ㅇㅇ* 던전 이름은 타오르는 관…일단 기감으로 살펴본 것만 말하자면 직선의 공간임. 바닥에서는 열기랑 불길 좀 치솟음. 호신강기 없었으면 바로 불에 전신이 타들어 갔겠는데. 빨리 탈출해야겠어. ㄴ 폐쇄형에 특수 구조물이구나 ㅇㅇ 빨리 탈출해야 하는 게 맞다. ㄴ 대마법사) 음, 불꽃의 색이 어떻지? 그야 당연히 붉은…색인 줄 알고 그렇게 댓글을 쓰려던 순간, 내 발밑에 일렁거리는 검은 불꽃을 확인했다. 난 두둥실 떠 있는 자판을 빠르게 두드렸다. ㄴ ㅇㅇ*) 검은색인데? ㄴ 대마법사) 흑염(黑炎)이네…골치가 좀 아픈 종류의 불꽃인데. ㄴ ㅇㅇ*) 왜. ㄴ 얼음여왕) 꽁! 흑염은 상성인 물이나 얼음이 잘 통하지 않아요! ㄴ 얼음여왕) 물론, 제 얼음은 통해요…! 꽁…! 얼음여왕 선배가 이번 층계에 필요한 아이템을 줄 수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ㄴ 수왕) 하지만!!! 차원 간 거래는 쿨타임이지이이잇!!!! 그래. 차원 간 거래는 빌어먹을 쿨타임이다. ㄴ 대마법사) 필드에 흑염이 깔려있다면, 보스 몬스터는 같은 놈은 흑염을 제대로 써먹을 텐데. ㄴ ㅇㅇ*) 아마도 그렇겠지. 그건 20층의 층계를 경험한 나로서도 이제 유추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ㄴ 대마법사) 방법이 있긴 해. 네가 가진 것들로 해결할 방법이. 대마법사 선배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난 대마법사 선배에게 그 방법을 듣고 납득을 했다. 초월자 갤러리를 종료하고 단말기를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 콰지직! 검은 화염이 허공에 짙게 일그러졌다. 조금 전에 성좌들의 차단을 풀어놓은 상황이었다. ['불멸의 영광을 지닌 황제'가 반갑다며 손을 흔듭니다.] ['천 개의 눈을 가진 심판자'가 현 위치가 판데모니엄 20층계 스테이지임을 확인합니다.] ['별을 따르는 길잡이'가 그닥 좋지 않은 곳에 떨어졌다며 당신을 비웃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아주 친숙한 곳이라고 말을 합니다.] 그래서 우측 하단에 성좌들이 보내는 알림들이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이 층계의 보스 몬스터는 자신의 권능이 없다면 클리어할 수 없을 거라고 말합니다.] 물론 한유성은 그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대마법사 선배에게 들은 대 흑염 대처법은 아직 써먹고 있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 급이 아니라서, 본래 하던 공격대로도 충분히 처치할 수 있었다. [‘심연 속을 유영하는 감시자’가 당신의 위계를 6위계로 추측을 합니다.] [‘검은 태풍의 검귀’가 당신의 성장 속도에 경악합니다.] [성좌들이 당신의 성장 속도를 보고 경계합니다.] 힘을 3할 정도는 숨겨두고 있음에도 6위계로 추측을 하니. 이 정도면 예측을 잘한다고 해야 할지 못한다고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초월갤 선배들 말대로라면 ‘악령’에 가까운 형태의 몬스터인 잔향의 유령은 매서운 불빛을 뿜어냈지만, 생각보단 쉽게 소멸이 되었다. 호신강기를 유지한 채 첫 번째 불의 장막을 꿰뚫고 앞으로 나아갔다. 연기가 자욱하게 일렁였다. 그 다음 계속 마주한 몬스터는 두 종류였다. 첫째는 생긴 건 잔향의 유령과 비슷하나, 실체가 또렷하고 몸에 달라붙어서 폭발하려고 하는 몬스터 스콜드. 삐빗-! 콰아앙! 스콜드는 썩 앙증맞은 소리 뒤에 우렁차게 터졌다. 스콜드의 폭발은 호신강기를 유지하는 것만으로 막아낼 수 있었다. 둘째는 ‘불의 감시자’라는 몬스터였다. 해골의 머리를 가지고 있는 병사가 양손으로 든 창을 앞으로 내질렀다. 창에 담긴 불꽃은 6위계가 발현할 만한 강기와 비견되어 보였다. 불의 돌풍이 옆구리 옆을 스쳐지나갔다. 츠츠츠츳! 튀는 불똥 사이로 한유성의 검로가 짓쳐들었다. 해골 머리통이 으깨졌다. 한유성은 마지막 장소로 들어섰다. 바로, 보스룸이었다. 문처럼 생기지 않은 거대한 문을 열어젖혔다. 던전의 이름 때문일까. 말 그대로 관짝의 문을 열어젖히는 기분이었다. 열기가 끝도 없이 흘러나왔다. 이제까지 보았던 몬스터들과 달리, 흑염의 농도가 확실히 짙어져 있었다. [BOSS MONSTER] [레브나르(Revnarr)] 한유성의 몸체와 별반 다르지 않은 덩치를 가진 몬스터였다. 검은 불꽃이 차곡차곡 쌓인 형상의 악마였다. 거대한 덩치가 양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양손으로 쥔 망치가 땅에 수직으로 떨어졌다. 콰아아앙!! 검은 불꽃이 공중에 자욱하게 퍼져나갔다. 간발의 차이로 몸을 뒤로 쭉 뺀 한유성의 눈앞에 알림창이 떠올랐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보스 몬스터 레브나르는 자신의 권능을 부여받지 않고서는 처치할 수 없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당신에게 권능을 부여받을 것을 제안합니다.] -흑염의 약점은 속성상 상성인 물 부류가 아니라, 흑염보다 더 강한 불꽃이다. 성좌,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하는 확신이라는 것은. 초월갤 선배도 앞서 말했던 이 부분을 근거로 삼고 있을 것이다. 이번엔 성좌 퀘스트 알림창이 떠올랐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걸었나 싶었는데. 퀘스트를 등록한 것은 예상 밖의 성좌였다. 『성좌 퀘스트 발생! '빛을 쫓는 성녀'가 퀘스트를 등록했습니다. 퀘스트 : 어떠한 성좌에게도 권능을 받는 등의 도움을 받지 않고 해당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십시오. 추가 조건 : 없음. 보상 : 아이템 – 회복의 용골』 ‘음, 일단 보상이 권능 같은 게 아니라 아이템이라 합격….’ ‘빛을 쫓는 성녀’는 초월자 갤러리 선배들에게 몇 달 전에 따로 이야기를 들었던 성좌였다. ‘애매한 성좌라고 했었지.’ 한유성 자신에게 완전히 적대적인 위치에 서 있는지, 아니면 성좌라는 입장 때문에 적일 수밖에 없는 존재일지. ㄴ 대마법사) '빛을 쫓는 성녀'는 아마도, 베디스 마르니아…말 그대로 성녀야. 일단 힐러 포지션이고…탑 끝자락에 다다르면 결국 혼자 등반해야 하는 상황에선 조금 더 불리할 수밖에 없었겠지. ㄴ 절대군주) 음, 베디스에게 단 한 번이라도 도움을 받지 않은 하드 난이도 등반자는 드물 거다. ㄴ 수왕) 스스로 무한 회복하면서 몬스터들 두들겨 패던 피 칠갑 성녀인데 무슨 말을 하는 거냐앗!! 재가 나보다 더 강할 때도 있었다아앗! 적어도, 전 기수 등반 당시에는 평판이 멀쩡했던 모양이다. ㄴ 대마법사) 나도 마르니아에게 도움은 꽤 받았지…근데 그렇다고 ‘빛을 쫓는 성녀’가 된 그녀를 온전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이야. 어쨌든 플레이어의 입장에서 성좌는 적일 수밖에 없으니까. 한유성의 생각도 대마법사와 같았다. 성녀는 성좌 차단 안 하고 층계를 클리어하는 조건을 걸지 않았다. 일부러 그런 건지, 깜빡한 건지 구분이 되지 않았지만. 잘된 일이었다. ‘이제까지 성좌들에게 마법을 보인 적이 없다.’ 숨길 수 있다면 숨기는 게 나았다. 어차피 20층계 이후로는 어떠한 변수가 발생하지 않는 이상, 성좌 차단을 풀 생각이 없었으니. 레브나르의 얼굴은 눈코입이 없는 그저 불꽃 그 자체였지만, 시선이 느껴졌다. 츠츠츠츠……! 검에 검기가 피어올랐다. 그 검기는 곧, 검강(劍罡)으로 변화했다. 조금 전, 대마법사 선배에게 들었던 조언의 핵심이 떠올랐다. ㄴ 대마법사) 흑염은 물 속성 공격에는 별 영향을 받지 않아. ㄴ 대마법사) 그런데 더 강한 같은 화염 계열의 공격으로 맞대응하면 무력화시킬 수 있어. ㄴ 대마법사) 할 수 있겠어? 반드시 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서 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해볼 만해서 할 뿐이었다. 검에 검강을 피워올린 상태로 왼손으로는 마법 술식을 그려냈다. 불 속성 계열 마법. 엘드르(eldr). 오러와 마법의 동시 전개. 그리고. 융합(融合). 검강에 무언가 한 겹이 더 뒤덮였다. 백색의 검강 속에서 홍염이 일렁였다. ‘됐다.’ 마력이 가파르게 꺾이는 게 느껴졌지만, 잔여 마력은 충분했다. 마법을 개별적으로 발현시키지 않고. 검강과 마법을 일체로 뒤섞어버리는 기행. 차단을 당해서 못 보는 성좌들이 봤다면 이 장면을 보았다면 경악을 했을 터였다. 그들은 초월갤의 대마법사 선배가 오러회로를 통한 마법을 발현할 수 있는 방법을 개발해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으니까. 물론, 초월자 선배들도 봤다면 썩 놀랐을 것이다. 오러회로로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고 있다고 해도. 검기와 마법의 혼합을 수차례의 시행착오 없이 단번에 해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상식적으로도. 한유성은 그걸 단번에 해내었고. 한유성은 검을 수직으로 내리쳤다. 불꽃이 보스 몬스터 레브나르의 몸이 양 갈래로 베어냈다. 한유성의 시야를 다시 알림창이 뒤덮었다. [레벨이 상승했습니다!] [Lv.82 → LV.84] [20층 스테이지를 클리어하셨습니다.] ['플레이어 - 한유성' 20층 스테이지의 점수를 집계합니다.] 기존의 20층 랭킹 점수 창이 나타났다. 1위 - 연합장 : 1,129점 2위 - 자명천녀 : 1,112점 3위 - 흑성 : 914점 4위 - 추적중 : 893점 5위 - 삶은고통이기본값이다 : 891점 ⋮ ⋮ [점수 집계가 완료되었습니다.] [한유성 : 5,410점] 성좌 차단을 풀었다. 차단은 풀어야 보상을 받을 수 있었으니. 반으로 잘린 채 재와 연기를 흩뿌리며 소멸하여가는 모습이 성좌들의 눈에 들어온 모양이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자신의 도움 없이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린 것을 쉽사리 믿지 못합니다.] 한유성은 저 알림은 좀 어이가 없었다. ㄴ 빛의검) 근데 검강을 최대로 끌어올린 상태로 지속해서 두들겨 팬다면, 굳이 ‘흑염’을 공략하는 관점으로 접근하지는 않아도 될 거다. 사실 빛의검 선배가 달았던 댓글대로 검강과 마법을 융합하지 않았어도, 순수하게 힘을 더 끌어올린 검강만으로 해치울 수 있을 것 같았으니. 검기와 마법의 융합을 실행해보기 위해 조금 더 수고를 들인 것뿐이었다. [‘혈마’가 성좌가 입이 그렇게 가벼워서 쓰냐며 어떤 성좌를 크게 비웃습니다.] [‘붉게 타오르는 창성자’가 거대한 분노를 표출합니다.] 『'빛을 쫓는 성녀'가 등록한 성좌 퀘스트를 클리어했습니다.』 『보상 : '회복의 용골'이 지급됩니다. 6층 층계 대기실에서 수령하십시오.』 ['빛을 쫓는 성녀'가 당신에게 고생하였다고 합니다.] 이 알림창을 끝으로. 21층 층계 대기실로 소환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