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유성은 얻은 심상에 대한 갈무리를 끝내고 숙소의 문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드르륵- 몸을 일으키고 문을 여는 순간. 한유성은 앞에 있는 사람을 보고 옅게 웃었다. “아직 네 목이 날아갈 걱정은 마. 계속 주시하고 있으니까. 내 말대로 네가 일정 거리를 잘 유지하고 있고.” 연설아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네….” 한유성은 겉보기엔 연설아에게 별 신경을 쓰고 있지 않았지만, 최대한 할 수 있는 방비는 해둔 상태였다. 아이템. 14층을 클리어하고 보상으로 획득한 아이템인 파명전가부(把銘轉嫁符)를 연설아에게 준 상태였다. 전가부의 효과는 소지자가 공격을 받았을 때, 미리 정해놓은 대상이 그 공격을 대신 받으며 그뿐만 아니라 공격을 전개한 존재마저 대상의 앞으로 전이가 되는 것이다. 척 봐도 쓰임새가 정해진 물건이었다. 위험한 존재 둘을 상대할 때 한 놈에게 대상 지정을 하면, 그 강적 둘을 격돌하게 할 수 있는 아이템. ‘아마도 그렇게 써먹으라고 준 아이템이 맞겠지.’ 하지만 한유성은 이 아이템이 가진 10회의 전이 횟수를 모두 자신에게 발생하도록 설정했다. 눈앞에 있는 연설아를 안전하게 지키기 위해서. 파명전가부가 일차적으로 만들어놓은 방어선. 2차 방어선으로 구성한 건 단순히 육체에 방어막을 치는 아이템. 글라벨 실드. 하지만 그래봤자 글라벨 실드는 B+등급 아이템. 5위계 이상의 무인이 전력으로 공격을 하면 몇 차례 버티지 못할 터였다. 2차 방어선까지 도달하게 내버려 둘 생각은 없었다. 1차 방어선. 자신에게 적들이 전이되었을 때 무조건 끝낼 생각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겠지만, 한유성은 그런 행운으로 점철된 전개가 자신에게 주어질 거란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바, 방금 벌이신 대전 때문에 정말 쟁천무회 제일인이 저희 호북연가의 대리인이 될 수 있지 않을까 진심으로 상상하기 시작했잖아요.” 한유성은 호들갑을 떠는 연설아를 보며 피식 웃었다. “침착해, 아직 한참 멀었으니까,” 네 번은 더 이겨야 우승이다. 이길수록 적들의 수준은 점점 더 높아질 거고. 한유성은 아직 많은 위기가 들이닥칠 거라고 예상을 했다. 숙소를 나선 한유성과 연설아는 비무대의 앞쪽으로 걸어갔다. 한유성은 자신에게 쏟아진 시선을 느꼈다. “…점창파의 석이준을 쓰러트린 자다.” “이름이 한유성이라고 했나?” 한유성은 조금 전에 눈앞에 나타났던 알림창을 떠올렸다. ‘이름이 알려졌다라….’ 중원 무림에 이름 석 자가 알려졌다. 득도 있겠고. 실도 있을 것이다. 이계가 배경이었던 세계에서도 그랬듯이, 이 탑의 이야기는 단일 층계로서 끝이 나지 않는다. 다음에 무림 테마의 층계가 걸린다면, 지금과 시간 선이 이어질 확률이 높았다. 이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연 단위로 시간의 흐름이 뛸 가능성 또한 존재했다. 다른 이들의 경기를 눈으로 보려고 나온 의도도 있었지만, 초월갤 선배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촬영할 사진이 있었다. 한유성은 관객석의 최상층에 있는 이들을 단말기로 촬영했다. 바로 오대세가의 가주들을 촬영한 것이다. 허공에 팔을 뻗는 모습으로 보일 뿐이었으니, 이상하게 생각하는 이들은 없었다. 다시 숙소로 돌아온 한유성은 초월자 갤러리에 무림맹에 소속된 오대세가 가주들의 얼굴이 담긴 사진을 첨부한 게시물을 올렸다. 제목 : 자, 선배님들이 원하는 무림맹 소속 가주들의 얼굴임. 작성자 : ㅇㅇ* 첨부파일 : 128310923829038.jpg 그리고 일단 본선 진출하고 1승은 달성함. 백리세가나 그놈들이랑 연합한 걸로 보이는 하북팽가 측에서 연설아를 언제까지 가만히 놔둘지 모르겠네. ㄴ 창왕) 흐으음, 가주들의 이름이 죄다 아는 놈들이랑 다른 걸 보니 아예 한 세대가 지나간 게 맞는 것 같구나. ㄴ 당하연) 저희와 함께했던 무인들은 뒷방…아니닛, 원로원에 있을 검다!! ㄴ 밀실론자) 내가 경험한 바로는 무림계도 겉으로 막 나서는 양반들보다 흑막처럼 암약하는 놈들이 더 강한 구석이 있었지, 원로원도 그 범주에 들어간다. - 이 세상은 거대한 밀실로 이루어짐 ㄴ 무녀) 하와와, 맞아워요오오. ㄴ 天魔) 대가 끊어지고 다른 놈이 가주가 되지는 않은 모양이구나. 늙은이들의 얼굴에 늙은이들의 면면이 남아있어. ㄴ 대마법사) ㄹㅇ 그렇네. 모용세가 가주가 그나마 좀 젊구나. ㄴ 절대군주) 무림맹주…이름이 남궁원이라고 했나? 저놈이 십 대 후반일 때 본 것 같기도 하구나. ㄴ 마룡왕) 벨투이- 벨투이도 만났던 것 같아요오. ㄴ 天魔) 제갈가의 가주놈이 6위계 밖에 되지 않는구나, 무재(武才)가 부족하군…그래도 전대 가주는 7위계 중위까지는 이루어 냈던 놈이었는데. ㄴ 창왕) 뭐, 저놈들은 정치질과 인맥과 전통으로 살아남는 놈들이잖소. ㄴ 얼음여왕) 꽁꽁…! 등반쟈가 계속 무림계를 등반하다 보면 반가운 얼굴들을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ㄴ 수왕) 그럴 것 같다!! 육신이 거의 늙지 않는 놈들도 있으니까 말이야. ㄴ 무녀) 하와와, 소녀와 친구를 먹은 이들도 어딘가에선 살고 있을 것이와요. 한유성은 무림계가 이계보단 선배들의 등반 시기보다 시간이 더 많이 흘렀음을 알게 되었다. *** “점창의 둘째가 벌써 패배할 줄은 몰랐군.” 사천당가의 가주 당명허의 말에 모용진천이 입꼬리를 올렸다. “강한 신인이 등장했지 않은가.” 무림맹주 남궁원이 하북팽가의 가주 팽무일을 바라보며 낮게 속삭였다. “부디 가문의 일을 쟁천무회까지 끌고 오지 말기를 바네.” 남궁원의 말에 팽무일은 미간을 좁혔다.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이시오?” 남궁원은 고개를 저었다. “알지 않은가? 자네를 믿지만, 그저 맹주로서 하는 경고일 뿐이야.” 남궁원도 알고 있었다. 하북팽가와 백리세가가 긴밀한 관계인 건 중원에서 알만한 사람들은 아는 사실이지만, 하북팽가가 직접 나서지는 않을 거라는 사실을. 한유성이라는 애송이를 죽이려는 의지는 있어도, 동맹 관계 정도라고 할 수 있는 백리세가를 움직일 터. 남궁원은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시헌을 바라보았다. 오대세가 가주 중 유일하게 6위계에 머무르고 있었지만, 제갈세가가 가지는 입지는 흔들릴 리는 없었다. 무림맹의 전반에 강대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었으니. “진법에 문제는 없소?” 남궁원의 질문에 제갈시헌이 고개를 숙였다. “물론입니다. 이름을 올린 맹원 분들을 제외한 7위계 이상의 무인들은 결코 쟁천무회장의 땅을 밟지 못할 겁니다.” 남궁원은 턱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그래도 7위계 이상의 적들은 등장하지 않을 테니, 그나마 그자에겐 숨 쉴 틈이 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한유성이라는 애송이가 온전히 호북연가의 여식을 지켜낼 수 있을 거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백리세가 측에서 결승이 시작되기 전에는 손을 쓸 것이다.’ 남궁원은 이 쟁천무회가 끝나기 전, 그 전에 한유성의 목숨이 끊어질 거라고 예상했다. 확신에 가까운 예상을. ** 5일이 흘렀다. 한유성은 본선 진출 후 있었던 첫 번째 승리 이후, 두 번의 대결에서 더 승리했다. 이제 두 번의 승리를 더 거두면 쟁천무회의 우승을 쟁취할 수 있었다. 한유성은 두 번의 승리 뒤에 레벨 1을 또 올릴 수 있었다. 이번에도 경험치 상승의 이유는 중원 무림에 이름을 떨쳤다는 이유였다. 소림파 출전자 자선은 밝게 웃었다. “내 예상대로 여기까지 올라오셨구려, 시주.” 비무대 위에 두 사람은 서있었다. 쟁천무회의 규칙. 6위계는 대전 중에서 ‘권역’을 사용하지 못한다. 물론, 한유성은 자선이 권역을 펼친다고 해도 자신이 패배할 거란 생각은 하지 않고 있었다. “검을 아주 잘 쓰시오. 이번에도 검을 쓰시는 게 좋을 듯하군.” 자선의 주먹에 금빛 권기가 휘감겼다. 자선의 걸음은 가벼웠다. 관객석에 있는 이들의 시선이 서로를 향해 격돌하는 한유성과 자선에게 쏠렸다. 한유성과 마찬가지로 전신에 호신강기를 씌운 자선이 한유성에게 쇄도했다. 한유성의 검이 허공을 베어냈다. 자선의 주먹도 대기를 갈랐다. 서늘한 격차. 찰나의 간극. 둘은 서로의 수준을 알아보듯, 공격들을 교차시킨 둘은 다시 맞부딪혔다. 츠츠츠츠…! 촥 펼쳐진 자선의 오른손에 금빛의 기류가 휘감겼다. 관음청강수(觀音靑剛手). 대기의 흐름이 자선의 손짓에 의해 꺾여나갔다. 한유성은 백색검기를 맺은 검으로 그 찬란한 공격을 막아냈다. 자선의 움직임은 끝나지 않고 물결처럼 흘렀다. 백보신권(百步神拳). 백보 바깥에 있는 적이라도 격살하는 권. 소림의 대표적인 무학이 자선의 손에서 펼쳐졌다. 한유성은 고강한 검기를 뽑아냈다. 피엘뷔르트 4식. 경검(傾劍). 쩌어어어어어엉! 주먹의 형상으로 퍼져나가는 강맹한 기파를 검격의 궤적이 파절시켰다. 한유성이 펼친 횡 베기가 자선이 뻗은 권로(拳路)의 균형을 뒤튼 것이다. 한유성의 몸뚱이 너머에 풍경이 와락 일그러졌다. 조금만 늦었다면, 몸뚱이가 으스러졌을 터. 한유성은 자선의 양손을 바라보았다. 권기가 권강(拳罡)의 형태로 치환되었다. 권기는 엷게 퍼져 팔에 넘실거리는 불꽃 같았다면, 권강은 그 불꽃을 응집한 결집체였다. 권강. 기가 강으로 치환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이미 초월갤 선배들의 댓글에서 본 바가 있었다. 반 이네르가 줬던 피엘뷔르트 검법서의 초장에 적혀있던 부분이기도 했다. - 창왕) 네가 검강(劍罡)를 출수할 수 있는 단계는 6위계부터다. - 天魔) 검강이 검기보다 우월하다고 할 순 없다. 검강은 정해진 형태가 있는 게 아니라, 검기를 극한으로 조율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섰다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 빛의검) 6위계부터는 육신에 방호용으로 펼치는 호신강기도 공격형으로 치환할 수가 있다. - 현자) 결국, 중요한 건 시전자의 역량이라는 뜻이오. 한유성은 자신을 집어삼키듯 뻗어 나오는 금빛 섬광들을 직시했다. 쾅! 콰과광! 유구한 역사를 지닌 권격들을 검을 휘둘러 맞받아쳤다. 물론, 막아내지 못한 공격도 더러 있었다. 타격을 허용한 몸 곳곳에서 묵직한 고통이 치밀어올랐다. 한유성은 무시했다. 쩌어어어엉! 자신의 호신강기에 균열을 내며 복부를 강타해버린 권격을. 한유성은 순식간에 거리를 좁혔다. 자선은 오른손을 정면으로 펼쳤다. 자선의 전신에서 서려 있던 호신강기가 출렁이더니, 모조리 한유성을 향해 쏘아졌다. 천수여래장(千手如來掌). 한유성은 자세를 낮추며 무수한 권격들의 간격 내로 들어섰다. 카가가각! 카가각! 자선의 의지대로 꺾이는 수십 갈래의 장을 튕겨냈다. 거리는 충분히 좁혔다. 이제 결판을 낼 차례였다. 그 생각을 하는 건 자선도 마찬가지였다. 자선의 양손이 대기를 훑었다. 둘이 서 있는 비무대에 서늘한 기파가 퍼져나갔다. 금강복마권(金剛伏魔圈). 공백을 뒤덮은 회색의 권강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자선이 권역을 펼친 것도 아닌데 그에 비견되는 중압감이 내려앉았다. 한유성의 움직임에 망설임은 여전히 없었다. 활로로 삼을 여백 따윈 없었다. 한유성은 5일 전, 석이준과의 전투가 끝난 당일 밤 그에게 물어보았다. 마지막 일격을 전개할 때 어떤 방식으로 검기를 운용했느냐고. 석이준은 말 그대로 미친놈 보듯 한유성을 바라보았다. - …지금 네가 한 문파의 비기를 어떻게 쓰는 건지 물어보고 있다는 건 인지하고 있는 거냐? 석이준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알려줘도 문제없는 요건들은 썩 상세하게 알려주었다. 한유성은 일순간 그때 자신을 마주하고 있던 석이준의 공격 자세를 떠올려냈다. 오른팔을 뒤로 당겼다. 해를 쏘는 검. 그게 심상의 원천이라고 했다. ‘하지만 난 그런 거창한 심상을 그려낼 능력이 아직 없다.’ 한유성은 목표를 간단하게 세웠다. 저 주먹의 영역을 부순다. 그리고 자선의 목에 닿는다. 쿵- 한유성이 오른발을 내디뎠다. 심상은 그리지 못하지만, 얻은 개념을 섞을 수는 있었다. 두 눈으로 본 사일검법과 용살검의 2식, 히야르타그니르를 겹쳐낸다. 검에 맺힌 백색빛이 수십 번 점멸했다. 주변의 풍광이 뒤로 훅 밀려났다. 공간이 뚫렸다. 금강복마권이 만들어낸 반달 모양의 기파가 모조리 일그러졌다. 키이잉. 검 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자선의 목에 한유성의 검이 겨눠져 있었다. 자선은 멍한 얼굴로 상황을 파악한 뒤, 아주 인자한 미소를 그리며 입을 열었다. “시주의 승리오.” 쟁천무회장이 조용해졌다. 앞선 한유성의 승리들도 파문은 일으켰지만, 이번의 경우는 파급력의 차원이 달랐다. 소림파의 자선은 신진 고수 중 세 손가락 안에 꼽히는 무인이었기 때문이다. *** 한유성과 소림파 자선의 대결 후. 3시간가량이 흘렀다. 연설아는 화산파의 유화윤과 함께 있었다. 기감의 탐지가 닿는 숙소의 바로 앞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었기에 놔두었다. 한유성은 유의미한 성과를 얻고서, 눈을 천천히 떴다. 그 순간, 바로 앞이 소란스러워졌다. 몸을 일으킨 한유성의 눈에 보이는 건. 치지직! 쩌저적! 정면의 대기에 일어난 공간의 균열이었다. 총 일곱 번의 균열. 공간에서 튀어나와 땅에 발을 내디딘 흑의의 사내들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전이?” “분명히 그 계집의 몸에 손을 대려는 순간 이렇게 되었다.” 쿵- 일곱명 중 가장 거대한 체구의 사내가 성큼 걸음을 내디뎠다. “네놈, 계집의 몸에 어떤 사술을 펼쳐놓은 것이냐?” 한유성은 대답을 하지 않고 복면을 쓰고 있는 이들을 훑었다. 머리 위에 뜨는 알림창에 따르면, 5위계가 다섯, 6위계가 둘이었다. ‘모두인가.’ 연설아에게 손을 쓰기 위해 들이닥친 자들, 그들이 모조리 다 전이 된 게 분명했다. ‘파명전가부’의 효과로. [NPC – 6위계 무인 홍기륜] “쯧, 뭐 잘됐다. 이놈은 결국 죽여야했으니.” 홍기륜이 턱짓을 했다. “진법을 펼친다. 아무런 변수가 없도록.” 홍기륜은 검에 검강을 맺었다. ‘그래도 소림파의 자선을 꺾은 놈이니까.’ 홍기륜은 뒷말은 내뱉지 않았다. 곧 죽일 놈의 콧대를 세워 줄 필요는 없었다. 홍기륜은 한유성의 눈을 바라보았다. 세차게 흔들려도, 눈물을 뚝뚝 흘려도 모자라지 않은 상황에. “…….” 저놈은 지나치게 고요한 눈빛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옅은 위화감은 무시했다. 저놈, 한유성이 여기서 살아나갈 가능성은 조금도 없다고 여겼다. 5위계 한 명을 죽일 때 쓰기엔 과한 진법까지 펼쳤으니까. “시작해라.” 일곱 명의 무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중앙에 서 있는 한유성의 목을 베어내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