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R 기기를 이용한 게임은 대체로 핵에서 컴퓨터보단 자유롭다. 기본적으로 몸에 직접적인 영향이 가다 보니 컴퓨터에 비해 규제와 보안이 훨씬 빡빡하니까. 하지만 당연하게도 그렇다고 해서 핵쟁이들이 제 버릇을 버릴 리가 없었다. 수많은 온라인 경쟁 게임이 으레 그렇듯 VR로 플레이 하는 게 주가 된 LOC조차 핵의 마수는 벗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공급이 생겼으니, 록에서 그런 핵쟁이들을 찾아내길 바라는 수요 또한 늘었다. 그리고 몇몇 스트리머들은 그 수요를 잘 포착했다. 멀티냄비라는 닉네임을 쓰는 스트리머는, 그런 종류의 스트리머들 중 깔끔하게 판정하기로 소문난 사람이었다. “진짜, 이건 너무 수상한 점이 많아요.” 확신에 찬 얼굴이 캠 화면에 비춰지자 도파민을 원하는 시청자들은 이번에도 씹고 뜯고 즐길 핵쟁이가 대체 무슨 짓을 했을지 기대했다. “자, 일단 제보 영상을 보시면 초반부터 약간 이상하죠?” 계속해서 이어지는 스탑무빙. “VR로 게임을 하면 아무리 보정이 있어도 사람이라 몸을 움직이는게 자연스러운 거라 움직임이 계속되기 마련이거든요? 그런데 이 사람은 그런 게 전혀 없어요.” 스킬이 닿을 수 있는 한계 사거리 바로 밖에서 기계적으로 제보자인 암살자 챔피언과 거리 유지를 하는 모습은 누가 보기에도 부자연스러워 보였다. “그리고 또 여기서는 움직임 예측이 너무 빨라요. 여기 분신이 네 개나 있는데, 고민도 안하고 바로 제보자님이 나타나는 방향으로 쏘잖아요?” 물론 한 번이면 우연일 수도 있지만, 풀영상을 돌려본 그는 상대방의 CC기가 적중하지 않은 적이 손에 꼽다 못해 한두 번 찾아낸 게 고작이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ㅅㅂ 다 맞추네 —저거 투사체 속도 느려서 보고 피하는거 될텐데 —저기 마스터 구간인데 설마 제보자 피지컬이 너보다 딸리겠냐 —걍 분신으로 이동할 때만 쏴서 못피하는 듯 —저게 어케되누? —예측의 신이면 가능 —저게 되면 걍 로또 사러 가라ㅋㅋㅋ 물론 메이지 장인들은 이 험난한 뒤틀린 협곡에서 조차 상대 암살자를 압살하고 다니긴 하지만, 그건 이름이 알려진 프로를 포함해 극소수일 뿐이다. 대다수는 저런 플레이 방식을 핵이라 인지했다. 그리고 그 중에서 가장 큰 이유는 단연. “잔무빙이랑 스탑무빙이 방금 영상으로 끝이면 모를까, 그냥 너무 많아요.” 록을 업으로 삼는 이들조차 플레이해 본 적 없는 극 초창기의 게임 환경이라면 몰라도, 대다수가 VR로 게임을 하는 게 기본이 된 시대에 부드러운 곡선 무빙은 기초 중의 기초였다. VR 기기 보정이 들어가면 시야 기준에서 피할 때 생기는 회피 판정이 후하기 때문에, S자를 그리며 움직여서 시야에서 스킬을 약간이라도 벗어나게 하는 게 상식이었다. 하지만 그런 상식을 깡그리 무시하듯, 저 메이지 챔피언은 직선적이고 툭툭 끊기는 이동 방식과 더불어 표창과 스킬을 스탑무빙을 이용해 한끗차이로 비하는 곡예를 밥 먹듯이 보여주었다. 스킬샷이야 말할 필요도 없이 완벽했고. “제가 어지간해서는 닉네임 공개까지는 안 하는데, 이건 공개하겠습니다.” 그는 주저하지 않고 리플레이 화면을 조정해 챔피언 위에 닉네임이 뜨도록 다시 설정했다. “트루 샵 실버 님. 핵 쓰시면 재미있으세요?” 대놓고 비난하라고 공개한 닉네임이다. 그는 시청자들의 광기 어린 채팅을 보기 위해 시선을 채팅창으로 틀었다. 하지만 반응은 기대와는 영 딴판이었다. —?????? —뭐냐??? —눈나가 왜 여기서 나와 —헤으응 —ㅋㅋㅋㅋㅋㅋㅋ —트루야 니가 핵쟁이랜다 —빨리 와서 해명해 —얼공도 같이 —ㄹㅇㅋㅋ —근데 저거 나흘 전 솔랭 아님? 영상 다 남아있을텐데 —멀티냄비쉑 개헛다리 짚었네ㅋㅋㅋ —핵쟁이 판정 전문 스트리머 바보 만드는 대 트 루 “잠깐, 잠깐만요. 이분 스트리머신가요?” 뭔가 일이 이상하게 흘러가고 있는 걸 눈치챈 그는 상황 파악을 시작했다. —ㅇㅇ —록 방송 시작한 지 한 달도 안 됐는데 거의 그마 찍음 —ㄴㄴ이제 그마됨 —ㄹㅇ이누 —30초전 그마 승급ㄷㄷㄷ —아니 진짜네 —타이밍 지리누 “근데 왜 다들 핵은 무조건 아니라고 확신하세요?” 그 말에 채팅창 화력이 더 커졌다. —ㅅㅂ걔 얼굴 빼고 몸 다 나오는 캠방이라고 —몸 다 나온다고? 야하네요 —ㅋㅋㅋㅋㅋㅋ —손 진짜 개 얇고 하얗더라 —헬퍼 의심 여지가 없음 그냥. 걔 VR도 안 쓰고 키보드 마우스 쓰는 년임 —ㄹㅇㅋㅋ —족쇄달고도 헬퍼의심받는 새끼... —정 확인하고 싶으면 지금 걍 방송 보러가셈 —방장 걱정은 트평ㅋㅋㅋ —실시간 시청자수 떡상중ㅋㅋㅋㅋㅋ —족쇄 달고 처음으로 그마찍었는데 어케 안떡상해 멀티냄비는 슬슬 이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어지럽기만 했다. * * * 마스터 휘장이 크고 웅장한 그랜드 마스터 휘장으로 변화한다. "시작은 어제 했지만...그래도 그마 달성했네요." —ㅊㅊㅊㅊㅊ —캬 —이걸 진짜 가네 —챌까지 화이팅 —가즈아아아아아 오랜만에 순수하게 응원과 축하의 채팅이 채팅창을 가득 채웠다. 얼마 못 가긴 했지만. “응?” 오늘의 세 번째 솔로 랭크 게임이 막 끝난 시점부터 시청자수가 너무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었다. 이번 판을 이겨 그랜드마스터로 승급한 만큼 시청자들이 모이는 게 엄청 이상한 일은 아니지만, 정도가 과했다. —여기가 핵쟁이 방송인가요? —족쇄 차고 그마 실화임? —(개잘)핵 —ㄹㅇㅋㅋ —트루냄비가 인정한! —진짜 여중생임? —록갤 일동은 족쇄 찬 여중생의 그마 승급을 축하합니다 —와캬파허농쭈우우욱 —퍄퍄 —이 좋은거 왜 니들만 보고 있었음? —솔랭 존나게 잘하시네요 —ㅅㅂ 트루 인베당하고 있네 —응 끝났어 니들 이미 다 따였어~ 아까와는 달리 평소보다 더 난잡한 채팅창은 덤이었고. “저 무슨 논란 터진 거 있어요?” 내 기억 상 저번에 트롤러한테 욕한 거 빼고 딱히 없는데, 이상하다. —님 핵쟁이 의심받음 —핵쟁이(실시간캠 상시 on) —ㅋㅋㅋㅋㅋㅋ —VR이면 의심이라도 해보지, 그냥 대놓고 입력장치를 보여준다고! —ㄹㅇㅋㅋ “그러니까, 누가 저를 핵이라고 했다는 거죠?” 대충 상황은 이해했다. 아무래도 내 무빙이 핵으로 의심받았나 보다. “뭐, 기분 좋네요. 넘어가요 넘어가.” 게이머에게 있어 최고의 극찬은 두 가지다. 하나는 ‘게임 좆같이하네.’. 다른 하나는 ‘님 핵쟁이임?’. 트롤러를 이기고 전자를 선물로 받았고, 오늘 후자를 들었으니 이번 생에도 보람찬 게이머 인생을 살았다 할 수 있겠다. “근데 제가 어딜 봐서 핵쟁이래요?” 이렇게 된 거, 나를 핵쟁이로 의심했다고 하는 그의 유튜브를 확인해 핵 유저와 정상인의 무빙 차이에 대한 강의를 시청했다. “...오.” 확실히 록 그 자체에 대한 개념이야 비슷하지만, 이런 잔무빙이나 움직임은 VR이 접목된 만큼 나도 배울 게 좀 있었다. “확실히 1인칭 시점 관해서는 저도 모르는 게 많네요.” 뭐, 그래도 이 정도면 나쁘지 않다. 배우고 적용하는 건 잘 하는 편이니까. 프라우드가 인정한 부분이니 반박은 안 받는다. “그나저나 저 그렇게 인지도 없었어요?” 이래 보여도 나름 실시간 시청자수가 천은 넘는데 좀 슬프다. 유튜브 채널이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그냥 방송 시작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아직 체급이 작은 게 실감난다고나 할까. —멀티냄비가 못 알아본 거 보면 아직 개하꼬죠? —팩트)다 —체급 더 키워라 트루야 —사실 체급은 충분한데 지방이 다 한쪽으로... —[블라인드 처리된 채팅입니다] —아오 유입시치들 제발 공지 좀 읽어라 —여기서 말 잘못하면 우리 방장이 봐줘도 훅 가요 아재들아 —ㄹㅇㅋㅋ —나만 아니면 돼~ 가끔은, 어쩌면 좀 자주. 방제 개떡같이 짓고 이상한 똥겜을 해도 최소 만 명이 봐주던 그 시절이 그립다. 이제 슬슬 과거—미래—의 영광을 되찾으러 갈 필요가 있어 보였다. 다행스럽게도 마침 준비는 어느 정도 끝났다. 지금 내 책생 밑에 있는 게, 그 시작이 될 거다. —부스럭. 날짜가 넘어가면서 동시에 그랜드마스터도 찍었으니, 시청자들이 십시일반 모아준 돈으로 구매한 최신형 VR 기기를 써볼 때가 됐다. “자, 이제 그랜드마스터를 달성했으니 족쇄는 풀겠습니다.” 나는 책상 밑에서 아직 포장도 안 뜯은 최신형 VR 기기 상자를 꺼내 들었다. —?뭐? —???ㅁㅊ —이건배신이야 —키보드버려?마우스버려?키보드버려?마우스버려?키보드버려?마우스버려? —ㅋㅋㅋㅋㅋ키보드견들 정신이 들어? —핵쟁이 의심받자 바로 정상화 —대트루 참트루 “그, 죄송하지만 저는 방송하면서 평생 키보드랑 마우스만 쓴다고 한 적이 없어요.” 그랜드마스터까지 키보드랑 마우스만 이용해 랭크를 올린 건 프로들이 가진 티어 높은 슈퍼 계정같은 게 없어서 VR연습을 하기에 좋은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지, VR을 배척해서가 아니다. 애초에 이 세상에서 프로 하고 싶으면 눈앞의 기기와 나는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가 되어야 하니까. 물론 몇몇 시청자들 입장에서야 배신이 맞을수도 있긴 하겠지만, 그것까지 내가 신경 쓸 수는 없는 노릇이다. —뭐뭣? —냉정한 손절은 역시 트평 —ㅋㅋㅋㅋㅋㅋ —크아아악 —내 여중생쟝이...타락했어? —제발돌아와다오...... —미션 다시 걸면 되는 거지? —딸피들 좀 가라 냄새난다 —ㄹㅇㅋㅋ —캬 드디어 진정한 록을 하는구나 —이게 맞지 그리고 덤이긴 하지만, 기왕 논란이 터졌으니 알차게 이용해 줘야겠지. “그 저 저격하신 분께 말 좀 전해주세요.” —헉 —ㅋㅋㅋㅋㅋㅋ —지금 방종하고 잠수탈까 고민중인 멀티냄비면 개추 —나 멀티냄빈데 이 말이 맞다 —빨리 지금이라도 튀지 그러냐ㅋㅋㅋ —팩트는 지금 멀티냄비가 그냥 이 방송을 보고 있다는 거임 —처음 켜자마자 시선 고정될 뻔 하다가 중학생이라는 공지보고 정신 차리는 거 개처웃기네 —ㅋㅋㅋㅋㅋㅋ —걱정마셈 우리도 그랬어 —엄ㅋㅋㅋ “보고 계시면 이야기가 더 쉽겠네요.” 원래 인맥은 예기치 못한 순간에 생기는 법이다. “용서해드릴 테니까 챌린저로 아홉 명만 포지션에 맞게 모아주세요. 미드 한 자리 빼고요.” 기왕 이렇게 된 거 최대한 써먹어야지. 하루 종일 써먹을 수 있는 연습용 초고급 봇을 무료로 얻을 기회를 놓칠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