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세트 경기 시간 46분 01초. 일반적으로 경기 시간이 한 세트당 30분 언저리인 점과, 방금 게임에서 용 처치 속도가 퍽 빨랐다는 걸 감안하면 말도 안 되게 긴 시간이었다. “얘들아. 이거 우리 이렇게까지 끌릴 경기 아니었다. 맞지?” “...넵.” 옥스와 스트라이크는 진중한 표정으로 감독님의 쓴소리를 받아들였다. 사실상 바텀과—벨은 준수했으나 원래 원딜과 서포터는 한 몸인 법이다—헌터가 팀을 코스피처럼 흔드는 걸 나와 플루크가 겨우 봉합했다. 우리가 이니시 걸 사람은 마땅치 않아도, 딜 자체는 충분했기에 옥스가 마지막의 마지막에 두 번째 엘더 드래곤을 스틸한 것으로 게임은 끝낼 수 있었다. “일단 후반 동선, 전령 쪽으로 한 번 꼬았던 건 좋았는데. 그 뒤에 생각 안 했지?” “상대 궁극기 좀 소모시키고 빠져나가면 용 싸움도 이득 볼 거 같았거든요.” 세상에나. 옥스가 감독님께 근거를 대면서 어필하다니. 확실히 무언가 바뀌긴 했다. “대신 네 궁도 빠졌잖아. 밸류로 따지면 상대 궁 두 개보다 헌터인 네 궁이 조합적인 측면에서 더 중요해. 그래서 당장 다음 용 싸움에 앞 포지션 과감하게 못 잡으니까 그대로 스틸당한 거고.” “...그렇죠.” 물론 근거를 대는 것과 그 플레이가 최선인지는 다른 얘기니 넘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본길이.” “네, 네?” “남작 스틸은 생각 잘했는데, 라인전 집중력은 올리자. 지금 라인 스왑 하는 것도 아니고 굳이 초중반에 탑까지 볼 필요는 없지?” “알겠어요...” 안재훈 감독님의 말이 틀린 거 하나 없었다. 프로 경력과 더불어 코치, 감독 경력도 길다 보니 선수 개인 화면전환도 다 체크하고 계신 모양이었다. 그리고 확실히 저런 부분은 같은 선수가 말하는 것보단, 감독님이나 코치님들이 조언하는 게 효과적이긴 했다. “그리고 은설이랑 지환이.” 다른 코치님이 저 셋을 데리고 컴퓨터 화면 앞에서 기타 피드백을 하는 사이, 감독님께선 우리를 대기실 구석으로 데려갔다. “잘 버텨줘서 고맙다.” “아니, 뭐. 그 정도까지는.” 플루크가 약간 부끄러워하며 머리를 긁자, 감독님은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그런 의미에서 한 세트만 더 버텨줄래?” “......” 우리가 동시에 침묵한 이유는. 어째 오늘 경기가 끝이 아닐 것 같아서였다. * * * [자, 과장 좀 보태서 한 시간 동안 1세트를 한 ST와 KTT.] [정말 격한 싸움 끝에 엘더 드래곤을 먹고 끝난 첫 세트에 이어, 이번에는 ST의 매치포인트인 상황에서 2세트 밴픽 시작하겠습니다!] “탈리아랑 미호 밴할게.” 레드에서 시작한 우리는 상대의 밴 카드를 보고 주저 없이 미드에 밴 카드를 추가로 사용했다. [아, 맞대응합니다.] [이건 트루가 대놓고 자신감을 보이는 겁니다.] [그런가요?] [네. 너랑 나랑 똑같이 미드 밴 많이 하면 누가 유리할까? 그냥 대놓고 자존심 싸움을 건 겁니다.] 당연하게도 상대 챔피언 풀이 나보다 넓을 리가 없다. 결국 상대는 남은 밴카드를 전부 미드에 쓰지는 않았다. 후반을 볼 수 있는 비원딜 챔피언 직슨과, 그럼에도 풀어놓기 껄끄러운지 상대는 안 쓰고 나는 쓸 가능성이 있는 아제르를 밴했다. “쟤들은 왜 저걸 아직도 밴할까?” 직슨이야 그렇다 치고, 저 아픈 닭둘기 친구는 왜 엄한 데 꺼내오는지 모르겠다. “너 빼고 다 알걸.” “......” 아니, 솔직히 말해서 지금 상태로는 내가 문제가 아니라 전성기 안재훈 감독님이 오셔도 못 쓸 상태의 비둘기다. 애초에 애꾸눈에 사지랑 날개까지 없으니 새라고 불러줘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꽁으로 밴 카드 하나 뺐으니 기분은 좋았다. 아무튼 그렇게 마지막으로 애시를 밴하며 밴 시간이 끝나고, 본격적인 픽창이 우리 눈앞에 떠올랐다. [아, 더 이상 밸류는 못 준다! 1세트에서 당한 KTT가 트리스타를 가져옵니다!] [사실 미드 챔피언도 몇 안 남아서, 1픽으로 가져오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이거 혹시 원딜로 돌리려나?” “바텀에서 쟤 요즘 별로 안 좋아. 미드 갈걸.” “그럼 은설이 먼저 고르자.” 감독님의 말에 나는 별 고민 없이 남은 미드 티어픽 중 트리스타의 진입을 견제할 수 있는 메이지 챔피언, 흐뭬이를 골랐다. 그리고 곧이어 서폿이나 탑, 심지어 헌터로도 갈 수 있는 뽀비도 픽했다. 그 뒤부터는 서로 무난한 밴픽이 이어졌다. [자, 블루 5픽까지. KTT의 선택이 모두 끝났습니다.] [탑에 크샨테, 헌터에 다이애난, 미드에 트리스타, 바텀은 새나와 탐캔치를 고른 KTT.] [그리고 이에 맞춰 ST는 탑에 뽀비, 미드에 흐뭬이, 바텀에 칼리스탄과 노틸런스를 고르며 헌터만을 남겨둔 상태.] 애초에 블루 3픽으로 크샨테가 튀어나온 것부터 탑이 굳이 5픽으로 빠질 이유는 없었기에 그냥 뽀비를 탑으로 돌렸다. 그리고 끝까지 숨겼던 상대 헌터의 픽을 보고 옥스에게 마지막 픽을 고를 수 있도록 했다. “이거 나달리 괜찮을 거 같은데.” 잘 쓰면 뒤틀린 숲의 흉폭한 여왕이고, 못 쓰면 창 든 힐러 소리 듣는 극단적인 모 아니면 도 챔피언의 이름이 옥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창현아, 할 수 있어?” 감독님의 걱정이 괜한 게 아니다. 포킹—멀리서 상대 체력을 갉아먹는 것—챔피언임과 동시에 공격적이고 주도적이어야 하는 헌터 포지션의 챔피언이다. 상성 좋다고 꺼내들기엔 약간 애매하단 소리였다. “잘할 수 있어요.” “그럼 고르자.” 막픽 자리에 앉아있는 관계로 대신 픽을 해야 하는 벨은 어째 손을 덜덜 떨면서 나달리를 골랐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렇게 한다고 해서 확정된 픽이 바뀌진 않는다. [오와아아아아악!] [아니 분명 육식형 헌터고, 다이애난에 비해 몬스터 캠프 도는 것도 빠른 건 맞는데, 이게 참 극단적인 챔피언이거든요?] [하지만 ST, 1세트에 불안한 모습을 보인 옥스 선수를 믿기로 했습니다.] [결국 팬들이 지금 할 수 있는 건 기대하고 응원하는 거겠죠!] [그럼 ST 대 KTT와의 2세트! 지금 만나보시죠!] 일단 나달리는 몬스터 잡는 속도가 상대적으로 빠르다. 고로 핵심은 빠른 속도를 이용해 몬스터 캠프를 한 바퀴 쭉 돌고 턴을 조금씩 벌어 그걸 라인 갱킹에 쓰든, 카정에 쓰든 해야 한다. “다이애난 보통 어디서 시작하지?” “강철부리.” 체력과 공격 관련 버프를 주는 붉은 정령 바로 위에 있는 몬스터다. 보통 스킬 중 다수를 맞힐 수 있는 스킬을 가지고 있는 헌터 챔피언들은 으레 그쪽에서 시작하곤 하니, 딱히 특이할 게 없단 소리였다. 고로 우리가 주의해야 할 건 하나다. KTT의 진영 기준으로 저 강철부리 몬스터들이 미드라인에서 아래쪽에 있다. 그러니 미드 라인과 바텀 라인은 다이애난이 나달리와 성장 차이가 날 걸 감안하고 아예 과감하게 라인으로 들이닥치는 걸 조심해야 한다. “다이애난 3렙 찍을 시간 되면 경고 한 번 해줄게.” 그래도 첫 캠프를 도는 시간 정도는 모두 기억하고 있는 옥스는—창의력이 부족한 거지, 기본 지식조차 없진 않다—그렇게 말하며 우리를 안심시켰다. [자, 미니언 생성되었습니다!] [이거 아무래도 인베이드는...어?] 서로 라인에 얼굴을 맞대고, 헌터는 몬스터와 얼굴을 맞댄다. 체력과 공격 관련 버프를 주는 붉은 정령에서 사냥을 시작한 옥스는, 순조롭게 최적화된 몬스터 헌팅을 시작했다. [아니! 이거 뭡니까!] [다이애난이 본인 쪽 강철부리가 아니라 ST의 강철부리 캠프에서 몰래 시작합니다!] 그렇게 하층을 깔끔하게 돌고 올라온 옥스가 시야 없는 강철부리 둥지에 창을 날린 순간. “뭐야. 왜 없어?” “창 잘못 날린 거 아니야?” “내가 랭겜에서 같은 자리에 창을 몇 번 날렸는데.” 최소한 반복 숙달에 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는 옥스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카정당했다. 그것도 초식 챔피언 소리 듣는 다이애난한테. 옥스는 먹어야 할 몬스터들이 없다는 것에 잠시 당황하더니, 이내 바로 상대 뒤틀린 숲 하층으로 뛰었다. “상대 미드 집 보내고 나 좀 붙어줘.” 트리스타가 스킬 패시브 덕에 라인 클리어가 빠른 건 맞지만, 그건 메이지 챔피언인 흐뭬이도 별로 안 뒤진다. 그리고 옥스가 말한 시점에, 나는 이미 딜교를 이긴 상태였다. [어, 이거 이래도 되는 건가요?] [옥스 선수, 한치의 망설임 없이 미드 라인을 그대로 가로질러 상대 뒤틀린 숲 하층으로 진입합니다!] [그리고 거기에는—!] 아니나 다를까. 옥스의 귀중한 몬스터를 빼먹은 다이애난이 본인 진영의 큰 강철부리를 야무지게도 사냥하는 중이었다. “이기지?” “지면 헌터 그만 둬야지.” 서로 3레벨을 찍은 상황에서 둥지에 남은 몬스터를 두고 싸운다. 챔피언 간 깡 스펙 차이에 피지컬 차이, 그리고 나까지 가세하면 다이애난의 패배는 확정된 것과 다름없었다. [다이애난 웁니다!] [아니! 내가 강철부리 좀 빼먹은 건 맞는데! 이러면 하층 캠프 다 털려야 되잖아!] [트리스타 언제 와! 트리스타!] 별로 안 유감스럽게도 상대 트리스타는 집 갔다가 삼분의 일 정도는 걸어왔을 애매한 타이밍이라 텔레포트는 안 탈 거다. 고로 다이애난이 할 수 있는 거라곤 본인 진영의 강철부리를 뺏기고, 실피인 채로 엉엉 울며 집으로 귀환하는 것밖에 없었다. “마지막에 다이애난 어느 방향으로 갔다고?” “아래쪽 부쉬.” “플래시 빠졌지?” “그거 안 뺐으면 내가 진즉에 잡았지.” “그럼 잡았어.” 마음속으로 셋을 센다. 하나. 둘. 그리고 셋. 동시에 흐뭬이의 다중 스킬 시스템 중 원거리 저격이 가능한 QW 조합 스킬을 다이애난이 귀환 중일 부쉬에 내려 꽂는다. [ ST True -> KTT Double ] 깔끔하게 떠오르는 킬 로그. [으아아아악!] [심판의 번개! 원거리 저격 스킬이 하늘에서 말 그대로 번개처럼 떨어졌습니다!] 이 순간. [이러면! 이 게임이이이!] [흐뭬이가 킬을 먹었고, 나달리의 성장은 이제 가속하다 못해 비행기 탔습니다.] [이렇게 되면 이 나달리, 못하는 게 뭔가요!] [없어요 그냥. 딜도 되고, 포킹도 되고, 심지어 힐도 지금 상태의 새나보다 낫습니다.] [그리고 다이애난은 굶어요! 그냥 생으로, 미래 없이 굶어야 해요!] 게임은 터졌다. 전 판과는 달리 아주 빠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