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완전히 익숙해진 루틴을 소화한다. 아침에 일어나 학교에 갔다 와서, 바로 헬스장으로 직행해 기초 체력을 기르기 위한 운동을 한 시간 반. 그리고 집에 돌아오면 눈치 볼 것 없이 바로 컴퓨터 전원 버튼을 눌렀다. 현재 내 티어는 마스터 초입. 평균적인 팀운이라면 아마 이번 주 내로 마스터를 탈출해 그랜드마스터에 발을 들일 수 있을 거다. 올라갈 사람은 올라간다는 게 랭크 게임의 본질이지만,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리냐는 팀운이 어느 정도 작용할 수밖에 없는 만큼 나름 운적인 요소가 있긴 하니까. 애초에 그게 록이라는 게임에 유저들을 과몰입시키는 원동력이기도 하고. 오로지 내 탓이 아니라, 같은 팀원의 실수나 실력 때문에 졌다고 말할 수 있게 되는 순간부터 본인에게는 관대해지고 실수에 대한 면죄부가 생기는 법이다. 그렇게 팀원만 정상이면 이긴다는 생각에 설령 패배하더라도 분노하면서 자연스레 다음 판을 외치게 만든다. 팀원만 정상이면 이길 거 같으니 말이다. 전형적인 본인 실력 생각은 못 하고 나대는 부류다. 이것만 했으면 마스터, 저것만 했으면 챌린저 등. 어이없는 말을 외치는 이들이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백날 입으로 말해봐야 티어는 안 바뀌지만. “흠. 흠. 자, 다들 들어오셨어요?” —트하 —드가쟈잇! —ㅎㅇ —이 친구는 학원 안 다니나요? —록이 곧 인생인데 학원따위... “학원 다녀서 나쁠 건 없지만, 저한테는 낭비죠.” 일단 내 수학(修學) 능력을 떠나서, 어차피 고등학생 전에 아카데미 들어가 프로에 데뷔할 건데 책상에서 문제나 푸는 건 시간 낭비, 돈 낭비나 마찬가지였다. 물론 언젠가 공부를 계속할 때가 오겠지만, 그건 전생처럼 그때 가서 생각해도 충분했다. —이미 방송만 해도 먹고사는데 대학이 중?요한가? —문제는 저걸 다른 중딩들이 따라하면 ㅈ된다는 거지 —ㄹㅇㅋㅋ —벌써 평청 1000이니까 가능한 발언 —평균 시청자 수 돌았누 —어떻게 중학생 방송이 1000명ㄷㄷㄷ —정보) 록 방송 시작한 지 아직 1달도 안 됐다 —트끼야아아악 —무서워오 —이 중딩...어디까지 자랄까? —지금이 딱 좋은 거 같기도 하고 —뭐뭣 오늘도 어지러운 채팅창을 가볍게 무시하고 록에 접속했다. —이거 챔피언 돈 주고 사야됨? 나는 저 혼란 속에서 뉴비의 질문을 캐치했다. 가끔 이렇게 필요한 채팅을 고르는 일을 하면, 왠지 모르게 집중력 훈련이 되는 기분이다. “일단 전 챔피언은 무료로 쓸 수 있고요, 스킨은 돈 내고 사는 거예요.” 당장 지금만 해도 챔피언 숫자가 160을 거의 넘어가는데, 대체 그걸 돈 주고 팔면 어느 뉴비가 좋다고 전체 과금으로 구매하고 게임을 시작할까. 듣기로는 베타 테스트 기간에 챔피언 제한을 두고 그 챔피언들만 가지고 강제로 튜토리얼을 진행했다가 격렬한 부정적 평가에 게임사에서 바로 그 시스템을 철회했다고 했었는데, 잘한 선택이 맞는 것 같다. 세상 어느 게임이 뉴비한테 하고싶은 챔피언도 못 시키게 하고 튜토리얼만 시키냐고. “그러니까 한번 구경만 하실 뉴비 분들은 굳이 돈 쓰실 필요 없어요.” —깔끔한 설명은 트평 —아ㅋㅋ돈 쓰지 말고 나한테 도네하라고ㅋㅋ —스킨 팔아줘봤자 트루한테 돌아오는게 없긴 해 —ㄹㅇㅋㅋ —본인 이름 박힌 LOC 월드컵 스킨 나오면 돈 들어오긴 함 —ㅋㅋㅋㅋㅋㅋㅋㅋ —자기 스킨이 없는데 어떻게 팔아요 —우승을 안했는데 어떻게 스킨이 있누 —중딩인데 언젠간 가능할수도 있지 —킹림도 읎지 —솔랭이랑 팀게임은 다른거다 —얘 우승하면 스킨 무조건 산다 내 이름이 새겨진 스킨이 분명 세 개나 있었는데 어디 가서 말할 수도 없다는 게 한이라면 한이다. ‘...그러고 보니.’ 심지어 내 프레스티지 스킨은 고사하고, 그걸 씌워 줄 챔피언조차 아직 게임에 나오지도 않은 상태다. 끽해야 스토리에서 한두 줄 언급되고 넘어간 게 끝이랄까. 아마 다음 시즌에 나왔었나. “아, 진짜.” —??? —왜 급발진해 —뭔진 모르겠지만 죄송합니다 고소만 봐주세요. “아니 그게 아니고, 하고 싶은 챔피언이 있는데 못해서요.” —스킨 없다는 거지? —대충 도네 해달라는 뜻 —ㅋㅋㅋㅋㅋ —알겠어 아조씨들 지갑에서 용돈 줄게 —록평 “아뇨 돈으로 못 사요. 아직 안 나왔거든요.” —?ㅋㅋ —상상 속의 챔피언ㄷㄷㄷ —미드 라인의 양쪽 뒤틀린 숲 어느 쪽에서든 헌터가 갱을 올 수 있다는 공포를 뛰어넘누 —씹ㅋㅋㅋ —아무리 생각해도 얘도 정상이 아님 —사실 이미 욕할 때부터 싹수가... —ㅋㅋㅋㅋㅋㅋ —록하는 새끼중에 정상이 어디있음? —팩트)다 —개초딩챔 구상해본 트루면 개추 —무지개반사챔임? —시1발 그딴거 나오면 그 개씹것 업뎃일이 섭종일이야 —ㄹㅇㅋㅋ 그 유치찬란한 반사 스킬을 가진 챔피언이 언젠가 나온다는 점에 유감을 표함과 동시에, 어쨌든 그거 나오고 나서도 한동안 록이 안 망한다는 것에 적당한 위로를 미리 보내본다. “자, 그럼 이제 룰렛 돌릴게요.” 내가 아무리 랭크 등반이 우선이라지만, 방송을 켜버린 순간부터 시청자들에게도 어느 정도 즐길 수 있는 거리를 던져줘야 한다. 그래서 만든 게 바로 룰렛이었다. 방송을 시작하고 첫 번째 판은, 무조건 저 룰렛에 이름이 적혀있는 챔피언 중 하나로만 정해진다. 이미 최신형 VR 기기를 산 만큼 도네이션으로 원하는 챔피언을 뽑기 위해 룰렛의 면적비를 조정하거나 하는 등의 행위는 금지고, 그냥 누구든 천 원을 내면 이미 목록이 정해져있는 룰렛이 돌아간다. ‘아무리 그래도 미드에서 쓸 수 있는 챔피언을 가야지.’ 근본 자체가 글러 먹었거나, 서포터 혹은 어느 하나에 특화된 챔피언을 고르는 건 랭크 게임을 하는 다른 팀원들에게 피해라 어쩔 수 없다. 특히 나는 다른 포지션도 아니고, 미드 라이너니까. 황족은 그 의무를 다할 필요가 있다. —텅. 통. 팅. 이런 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룰렛은 이미 돌아갔다. 얼마 안 가 멈춰버린 룰렛은, 장단점 명확한 미드 메이지 챔피언 중 하나를 가리켰다. [ 제노스 ] —ㅋㅋㅋㅋ —뚜벅이챔이다 —억까...당해야겠지? 나름 공격 스킬 범위도 길고, 준 글로벌 궁극기도 있어 킬 캐치도 나쁘지 않긴 하다. 다만 지금 메타 자체가 온갖 암살자들이 날뛰느라 기를 못 펴고 있는 게 문제였다. “뭐, 그래도 저번처럼 이상한 거 안 떠서 다행이네요.” 처음 이 룰렛을 시작했을 때 실수로 유틸 원툴 챔피언 골랐다가 진 뒤로는 이상한 챔피언을 넣어놓진 않지만, 항상 생각나는 방송 일화랄까. “저 정도면 감지덕지죠.” 심지어 1인용에 타겟팅도 아니긴 하지만, 나름 CC 스킬—상대 기절시키는 스킬—도 있다. “그럼, 이제 시작할게요?” 나는 그대로 매칭을 잡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수락 버튼이 떠올랐다. —그마ㄱㄱㄱㄱㄱ —오늘 15분 칼서렌으로 다 이겨도 물리적으로 점수 딸려서 못감ㅋㅋ —그럼 마스터 탈출 발사대 정돈 세워보자 룰렛으로 나온 챔피언이 밴 당하는 일은 거의 없었고, 오늘도 별반 다르지 않았기에 나는 별 무리 없이 녀석을 뽑았다. [뒤틀린 협곡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익숙한 안내음성과 함께, 게임이 시작됐다. 내가 상대할 챔피언은 요즘 미쳐 날뛰는 암살자 챔피언 중 하나. 내 쪽이 스킬 사거리, 소위 말하는 팔이 긴 만큼 라인전 자체는 견제가 가능하지만, 상대가 일반 스킬 3개를 다 배운 이후부터는 우리 진영 밖으로 나가 상대를 압박하려고 하는 순간 죽는다고 봐야 한다. 특히 서로 아이템이 어느 정도 뜬 뒤라면 몸 약한 메이지는 표창에 한 번이라도 맞는 순간 라인 주도권은 없다. 정리하자면, 이론적으로만 유리하고 실제로 한번 삐끗하면 끝장나는 매치업이다. 물론 상대방은 나에 비해 기회가 훨씬 많고. 요즘 괜히 저런 류의 챔피언들이 설치는 게 아니었다. 뭐, 이건 어디까지나 솔로 랭크에서의 얘기고. 이론을 극한으로, 그리고 높은 확률로 구현할 수 있는 프로씬에서는 이야기가 또 다른 법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곳에서 사실상 게임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었다. * * * “혹시 상대가 암살자 안 해본 거 아닐까요?” 이미 솔킬 두 번을 낸 상태에서, 상대가 6레벨을 찍고 궁극기를 쓸 수 있게 되자마자 그대로 내게 마지막 승부수를 걸었지만, 어림도 없었다. 일단 첫 표창은 스탑 무빙으로 회피 후, 궁극기로 사라진 상대가 어디 나타날지 예측해 그대로 cc기를 사용한다. 1차 포탑 범위 그 언저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쳤기에, 상대는 기절한 사이 순식간에 체력이 닳았다. 그 직후 다시금 대각선으로 쭉 빼면서 상대의 궁극기 보조 효과로 여러 번 날아오는 표창을 피한다. 그 직후 체력 부족으로 뒤로 쭉 빠진 상대를 내 글로벌 궁극기를 활용해 마무리. “라인전 끝.” —개좋버그네 —이걸 다 피해? —진짜 다 피하고 다 맞추면 이기네ㅋㅋㅋ —사실 진짜 버그는 우리 손이 아니었을까? —ㄹㅇㅋㅋ —뭔 무빙이... —손캠 없었으면 헬퍼 소리 들었을 듯 —ㅅㅂ저 움직임은 난 VR써도 못하겠다. —저건 무빙으로 피하는 게 아니라 거의 예측으로 피하는 거 아니냐? —거의 미래예지임 —부처님 손바닥 안이 뭔지 알겠다. 그렇게 초반부터 박살 낸 게임은 무난하게 승리했다. 다만. 유일하게 문제라고 한다면— “저분 무슨 움직임이...와...말이 안 되는데요?” 내 방송에서는 아무 문제도 없이 넘어갔던 흔한 랭크 게임 영상이, 다른 곳에서 화제가 되어버렸다는 거였다. “저분 헬퍼 맞는 거 같아요. 신고하시면 될 거 같습니다.” 그렇게 나는 박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