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장이 분주하다. 사람들은 하나둘 관중석을 채우고, 거대한 스크린들은 제 역할을 위해 대기 시간을 송출하며 기지개를 켠다. [여기는 LOCK 아레나, 오늘 ST와 다윈 게이밍, DWG와의 개막전이 펼쳐질 예정입니다.] [개막전이라는 볼거리 말고도 오늘 특이한 점이 하나 있죠?] [그렇습니다. 장장 삼천 하고도 팔백오십구 일의 시간을 지나, ST의 미드가 바뀌었습니다.] 3,859일. 단순 계산만으로도 십 년이 넘는 어마무시한 길이이며, 프라우드라는 존재가 ST에게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방증이었다. “자, 이제 나갈 준비해 주세요.” 직원의 말과 더불어 나는 앞뒤로 줄 서 있는 ST의 멤버들을 흘긋 바라봤다. “긴장되지?” “하던 대로만 해. 이겨줄게.” “......”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모를 표정들이다. 아무튼. 시간은 흘러가고, 선수들이 경기장 가운데에 위치한 스테이지에 오르기 시작했다. “은설아, 잘할 수 있어. 너무 걱정하지 마.” 오늘 내가 LOCK 데뷔전이라고 바쁜 시간 쪼개 찾아오신 안재훈 감독님은 나를 토닥여주시고선 자리를 비켜주었다. ‘후우.’ 그럼. 가보자. 이번 생에 지켜보기만 했던 그곳으로. [현재 부상으로 인해 휴식기를 가진 프라우드 선수를 대신해, ST2에서 신인 선수가 등장했죠?] [맞습니다. ST3, 그러니까 마스터 리그에서 무실 세트 전승 우승이라는 엄청난 업적을 달성하며 그랜드 리그로 콜업되었고, 오늘! 결국 그 누구보다도 빠른 LOCK 데뷔전을 치르는 신인!] [누굽니까!] [바로 이 선수! 트루입니다!] 전광판에 약력과 함께 사진이 떠오른다. [ST에서 프라우드에 이어 두 번째로 어린 나이에 데뷔하는 선수이자, LOCK 최초의 여성 선수. 그리고 무엇보다도 ST의 미드 라인이라는 중압감을 이겨내야 하는 트루가 LOCK 아레나에 등장합니다!] 내가 걷는 순간마다 귀가 찢어질 듯한 함성과 환호가 나를 강타한다. 그렇지만 이 정도로 떨릴 다리였으면, 애초에 시작도 안 했다.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거리를 여유롭게 걸으며 ST 유니폼에 붙어있는 로고를 잠시 손가락으로 가리키고선 그대로 주먹을 쥐고 두들긴다. 나를 찍는 카메라가 스크린에 그 모습을 송출하고, ST 팬석 쪽이 더없이 뜨거워졌다. [벌써부터 어떻게 해야 팬 분들이 기뻐하는지 아는 선수군요.] [마스터 리그에서도 신인답지 않고 베테랑답다고 관계자들이 신기해했는데, 참 이렇게 LOCK에 와서도 한결같은 모습입니다.] [네, 힘들 수 있겠지만 중압감을 이겨내고 오늘 경기에서도 같은 모습 보여주면 좋겠습니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상대 미드라이너인 이매진을 흘긋 바라봤다. 씨익 웃어 보이는 걸 보니 저 인간 성격도 어디 안 간 모양이다. [자! 이렇게 선수들 모두 스테이지에 올랐고!] [LOCK 1라운드, ST 대 DWG, DWG 대 ST의 시즌 시작을 알리는 개막전!] [먼저 밴픽부터 보시죠!] 익숙한 부유감과 함께 밴픽창이 허공에 떠오른다. 우리가 블루, 상대가 레드 진영이라 첫 밴, 첫 픽은 전부 우리로부터 시작된다. “자, 일단 브이 밴 하자.” 밴픽에 있어 나는 굳이 배려해 줄 필요가 없다고 했고, 그런 만큼 밴픽은 준비했던 대로 진행되었다. [자, ST 상체 완성되었습니다.] [나름 나쁘지 않게 가져왔죠?] [그렇습니다. 첫 픽으로는 세주, 다음 픽으로는 토르 선수의 레넥턴과 트루 선수의 아제르까지.] 내가 약점이라도 된다는 듯 미드 챔피언을 집중적으로 밴 한 상대 덕에, 우리는 나름 괜찮은 것들을 가져왔다. [상대가 트루 선수를 대놓고 노리고 트타, 르블람, 니콥까지 밴 했는데, 결국 어떻게 길을 찾았습니다.] [사실 니콥보다는 아제르를 밴하는 게 어떨까 했습니다. 마스터 리그에서도 아제르 숙련도가 천외천이었던 트루 선수거든요?] [어쩌겠습니까, 어쨌든 팀의 선택이니까요.] [미드 라인과 더불어 서폿으로도 사용 가능한 니콥을 밴 하면서 ST의 밴픽 경직도를 높이고, 신인이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숨통은 약간 붙여놓은 상태에서 상황을 지켜보려는 모양입니다.] 한편. 우리 밴픽에 대응해 상대는 잭슨, 마오이카, 제이슨을 가져왔다. [곧이어 바텀도 완성이 되는군요.] [DWG가 먼저 카이스를 픽했고, ST가 자얀과 랠로 응수합니다!] [레드 막픽으로 알리스탄까지 가져오면서, 밴픽 이렇게 끝났습니다!] 우리는 탑부터 레넥턴, 세주, 아제르, 자얀, 랠이고. 상대는 잭슨, 마오이카, 제이슨, 카이스, 알리스탄이다. 인게임 내용은 일단 제쳐 두고 상성으로만 본다면 미드는 초반에 약간 불리하되 헌터 차이에 따라 갈린다. 애초에 그걸 감안해서 제이슨과 어울리는 세주를 첫 픽에 뺏어온 것도 있으니까 넘어가도록 하자. 그리고 탑부터 바텀까지는 다 무난한 픽이고, 후반에 가면 바텀은 우리나 상대나 캐리력 측면에서는 밀리지 않는 챔피언 뿐이다. 결국, 중요한 건 게임을 어떻게 풀어가냐였다. [자, 이제 선수들 준비 신호 들어왔고! 협곡으로 진입합니다!] [LOCK 개막전, ST와 DWG! 지금 시작합니다!] “하나! 둘! 셋!” “ST 파이티이이이잉!” 열띤 환호와 함께, 우리는 어느새 뒤틀린 협곡에 있었다. “자, 무난하게 하고 상대 쌍둥이 타워 앞에서 보자고.” “당연하지.” “우리가 트루 첫 승은 챙겨 줘야지.” 왜 저 말들에서 미묘한 떨림이 느껴지는지 모르겠지만, 리핏도 아니고 쓰리핏한 인간들이다. 스크림에서라면 모를까, 실제 경기에서는 조금 더 잘해주리란 기대가 있었다. “나 여기 딜교 좀 볼게. 탑 좀 와봐.” “어? 나 이거 좀 먹고 갈게.” “박는다.” 아무리 상대 미드라이너가 요즘 좀 부진하다지만, 프라우드를 한 번이라도 뚫고 기어코 록드컵 우승을 했던 인간이다. 라인전에 집중부터 해야 하는게 맞았다. 그런데 어째 위쪽에서 들리는 소리가 심상찮았다. “아니, 거기 들어가지 말고 빼!” “괜찮아. 괜찮아. 다 잡으면 돼.” 안 괜찮다. [으아아! 여기서 역갱!] [레넥턴한테 잭슨이 일부러 거리를 주고 끌어들였어요!] [세주가 돌진에 플래시까지 쓰면서 어떻게든 잭슨을 잡아보려고 하지만 실패!] [오히려 잭슨의 봉 돌리기 스턴 맞고 타워까지 두 대 맞습니다!] 모래 병사를 이용해 상대 미드라이너에게 압박을 주면서, 탑의 상황을 흘긋 확인한다. ‘저건 갔네...’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협곡에 킬로그가 떠올랐다. [ DWG Cross -> ST Thor ] [ DWG Cross -> ST Ere ] [으아아악! 비사아아앙!] [트루 선수 데뷔전부터 빨간불 켜집니다!] [정작 신인인 트루가 있는 미드 라인은 평화로운데 초반부터 탑이랑 헌터 이게 무슨 참사입니까!] 얼마나 뭐같이 싸웠길래 초반 교전의 신이나 다름없는 레넥턴과 세주의 조합이 진 건지는 굳이 더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심지어 이거 바텀도 위험합니다!] [니케 선수 Q 플래시 빗나갔었군요!] [여기서 정말 무조건 스턴을 먹일 수 있는 순간이었는데, 기기에 이상이 있는지 의심되는 플레이였습니다!] 결국 알리스탄 상대로 먼저 들어가서 스킬을 하나도 못 맞춘 우리 바텀도 탑과 헌터가 퍽 부러웠는지 따스한 우물로 빠르게 귀환했다. [ DWG LockOn -> ST Exor ] [ DWG LockOn -> ST Nikke ] 이젠 놀랍지도 않다. “아니 이거 잡는 각이었는데.” “까비까비. 다음 턴에 다시 해보자.” “트루는 걱정 안 해도 돼. 아직 해프닝.” 나는 그 말을 듣자 이성이 끊어졌다. 아무래도 ST의 오랜 전통을 다시금 꺼낼 필요가 있어 보였다. “다 다물어.” 선배고 나발이고. “입 다물고 내 오더나 따라와.” 나는. 오늘 꼭 이겨야겠다. “어...어?” 우리 팀이 내 직설적인 말에 정신 못 차리고 있을 때 몰아쳐야 한다. 프라우드 말도 가끔 넘기는 인간들이 즐비한 와중에 내가 화 좀 냈다고 곧장 내 말을 들어주리라고는 생각도 안 한다. 그러니, 실력으로 보여주는 수밖에 없다. 상대 헌터는 초식형에다가 아까 탑 갱을 간 터라 당분간 미드든 어디든 찌를 생각은 안 할 테니 배제한다. 초식형 챔피언에게 이동기 달린 아제르를 궁극기 찍기 전에 잡으라는 건 말도 안 되는 짓이니까. 그리고 혹시 모를 상대 서포터는 바텀에서 방금 확인했고 탑이야 언제나의 탑이다. 고로 지금 미드 라인은 일대일 대결이나 다름없다. 상대가 마치 본인 헌터가 근처에 있다는 걸 과시하는 과감한 포지션은 허풍이라는 의미다. 고로 이매진에게 일부러 각을 주고 한계까지 끌어들인다. 헌터가 존재하는 것처럼 행동했던 그였기에, 여기서 딜교환을 하지 않고 빠지면 들킨다는 걸 잘 아는 터라 좋든 싫든 내게 다가와야 한다. 그리고 제이슨이 원거리 폼이 아닌 망치폼으로 전환해 이미 모래 병사 돌진기인 Q를 사용한 내게 붙어 이기적인 딜교를 시작한 순간. —황제의 전언이다! 플래시를 반 박자 늦게, 대각선으로 쓰면서 뚜벅이인 제이슨의 플래시를 뺀다. 그러면서도 타이밍 맞게 사용한 궁극기를 이용해 상대를 타워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으아아! 타워 맞고 체력 거의 안 남은 이매진!] [너무 안일했나요! 트루 선수에게 이렇게 여유롭게 거리를 주면 어떡하나요!] 이매진은 아예 1차 포탑과 2차 포탑 사이의 뒤틀린 숲으로 향하는 길로 도망쳤지만, 나는 쿨타임이 돈 Q를 이용해 모래병사와 함께 돌진하며 기어코 그를 잡아냈다. [ ST True -> DWG Imagine ] 록이 왜 미드 연봉이 가장 높은지 증명할 때였다. [으아아아! 힘든 상황 속에서 으라차차!] [이거 신인 맞나요! 이매진 선수를 기어코 솔킬 내버리는 트루!] [방금까지 ST에 들었던 망조가 약간 움직였습니다!] [이매진 선수가 화면으로 고개를 갸우뚱하고선 헛웃음을 짓습니다!] [자신을 뛰어넘을 신인의 등장은 몇몇 선수들에겐 스트레스지만, 또 누군가에겐 새로운 동력이 되는 법이죠!] 한편. 나는 라인을 밀어 넣으며 아까 다 하지 못한 말을 계속했다. “뒤틀린 숲 상층 오브젝트 싸움하게 니케 오고, 엑소르는 버텨. 그리고 토르는 내가 들어가라고 할 때 강가로 진입하고.” “...일단 오케이.” “이거 늑대만 먹고 바로 각 볼게.” 아직 정상화까지는 멀었지만, 최소한 굴러는 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