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다면 짧은 일주일간의 휴식기가 끝났다. [오늘도! ST의 이름은 건재합니다!] [아니 이 조합으로도 이기면 대체 앞으로 다른 팀들은 뭐 어떻게 막나요!] [마스터 리그의 감코진들의 머리가 아프겠습니다만, 안재훈 감독은 그저 즐겁습니다!] 2라운드가 시작된 지도 좀 지났지만, 마스터 리그 순위표의 맨 위에 군림하는 ST라는 이름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만큼 리그의 분위기는 다른 건 몰라도 ST를 한 번만 잡으면 된다는 생각으로 팽배했다. 저 무적함대를 딱 한 번만 어떻게든 잡아내면 스포트라이트가 쏠릴 테니까. “그래서, 분석 좀 해 봤어?” 곧 있으면 ST3와 맞상대를 하게 될 전통의 후원사 더비 상대인 KTT 3군의 감독과 코치진들은 늦게까지 남아 머리를 맞대고 있었다. “일단 상체는 답이 없어요.” “왜?” “탑은 신인이긴 한데 전부터 미드로도 유명했던 애라 챔프폭이 넓고, 또 라인전이 기가 막혀요. 한타도 혼자 판단도 나름 잘하고.” 그러니 탑을 후벼파는 짓은 불가능하다. 괜히 들쑤셨다가 바텀이 무한 갱을 받고 터져버릴 가능성도 적잖았다. “그리고 옥스, 얘는 진짜 뭔 생각을 하는 건지 알 수가 없던데요.” 무지성으로 뒤틀린 숲속의 몬스터를 먹고, 먹다가도 어느 순간 튀어 나가서 라인에 개입한다. “그냥 그때그때 판단이 다 달라요. 근데, 그게 또 최적의 판단이에요.” “전 시즌에는 안 이랬지?” “우리 쪽에서 동선 한 번 꼬아주면 좋아 죽었죠.” 라이너 주도권이 없어도 몰래 옥스 쪽의 뒤틀린 숲 몬스터를 한 번이라도 빼 먹으면 동선이 꼬이고 꼬여 자멸하던 게 바로 그였다. “...쯧, 진짜 모든 판단을 트루한테 맡긴다는 게 맞나보네.” “그러게요. 선수가 저러기도 쉽지 않은데.” 솔로 랭크만 해도 자아가 넘치는 인간들이 한트럭인데, 프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근데 뭐, 솔직히 내가 현역이었어도 트루 말 듣긴 했을걸.” “중딩이 하는 말을 듣겠다고?” “스크림에서 트루가 하는 걸 생각해 봐. 개길 생각은 들겠냐?” “......” 이미 스크림 때 온갖 기상천외한 방법으로 다 당했던 KTT였기에—물론 다른 팀들도 다 당했다—차마 저 말에 반박할 수가 없었다. “그럼 탑이랑 헌터는 놔두고, 미드...하.” 분석 영상을 보면 볼수록 막막해지는 게 바로 트루라는 선수였다. “칼챔을 못 하는 것도 아니야, 지원형 챔피언도 잘해, 심지어 이니시랑 한타도 기가 막혀.” 마스터 리그의 황소개구리. 아니, 애초에 이 우물에 있으면 안 되는 선수다. “난 아무리 생각해도 쟤라면 랜덤픽 던져줘도 그걸로 캐리할 것 같다.” 반박이 없다는 사실부터 지금 트루의 평가가 마스터 리그 내에서 어떤지 여실히 보여줬다. “암튼, 미드도 그럼 넘어가고.” “바텀 보시죠?” 상체 쪽은 몰라도, 그나마 바텀은 KTT도 할 말이 있었다. “사실 전 시즌에 얘들이 상대적으로 나쁘지 않았다지만, 객관적으로 ST 바텀 쪽을 보면 마스터 리그 중위권 정도 되거든요?” 스트라이크의 공격성과 피지컬은 분명 동 나이대에 비해 고평가받을 구석이 없잖아 있지만, 지나치게 감정적이고 아직 경험이 너무 부족하다. 그리고 벨의 경우는 한타는 나름 잘하지만, 서포터로서 필수적인 시야 부분이나 라인전에서의 딜 교환이나 킬각 보는 부분이 부족했다. 물론 시야 같은 경우는 상체의 미친 듯한 주도권 덕에 그다지 부각되지 않긴 했지만. “그래도 다 장단점이 명확한 녀석들이라 좀 숨통이 트이네.” “상체만 어떻게 개입 없으면 우리 바텀이 어떻게든 말려 죽일 수 있을 거 같은데.” 그 말에 다른 코치가 툴툴거렸다. “그게 힘드니까 다 망했지.” “그럼 우리 그냥 극단적으로 갈까요?” 문득 코치 하나가 아이디어를 냈다. “헌터 챔피언중에 공격적인 애들 그냥 다 자르시죠?” “밴픽 망할 일 있냐? 헌터 챔피언 중에 공격적인 픽이 몇 갠데.” “어차피 오피픽 지금 세 개라 뭐 밴할지도 애매하잖아요.” 상대가 밴을 안 하면 첫 경기 후픽인 KTT는 사기적인 챔피언 2개를 꽁으로 먹으니 좋고, 한 개를 밴 해도 하나씩 나눠 먹기를 하면 된다. “...쓰읍. 우리가 밴 카드 다섯 개 다 헌터에 쓸 수 있나?” 당연하지만 상대도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1군 코치 경험까지 있는 안재훈 감독인 만큼 언제든 밴픽의 방향성을 틀 수 있다. “쟤들이 헌터 처음이나 두 번째 턴에 픽하면 우리 망하는 거야.” “바텀을 버리고요?” “음...” ST의 상대적 약점인 바텀. 그리고 이번 패치 버전에서 OP픽은 거의 바텀과 미드에서 나온다. 만약 바텀에 여유가 많다면 모를까, 헌터가 첫 픽에 낄 자리는 없다는 소리였다. 고로 상대는 어쩔 수 없이 첫 밴 후 진행되는 픽 시간에 바텀과 미드 조합을 완성해야만 했다. “이러면 진짜 되겠는데.” 육식—공격적인—헌터만 하던 선수들의 단점 중 하나는, 다른 챔피언을 플레이할 때도 제 버릇 남 못 준다는 거다. 아무리 한타나 합류 오더를 트루가 한다지만, 근본적으로 지시하는 순간에 발생하는 시간 차이는 어쩔 수 없이 발생할 거고, 그 갭은 평소보다 클 터였다. KTT가 노려야 하는 건 그 부분이었다. “미드만 바텀 로밍 못 오게 어떻게든 막고, 우리 헌터는 바텀에서 살면 되겠네.” “미드 라인 클리어 좋은 챔피언이 뭐 있었더라?” 약간의 희망을 발견한 KTT의 코치진들은 졸린 몸을 이끌고 열심히 밴픽을 짜기 시작했다. * * * ST의 연습실. 은설의 명령 아닌 명령에 휴식기부터 부계정으로 몰래 시작했던 옥스의 초식 챔피언 연습은 슬슬 성과가 나오고 있었다. “이거 편하네.” 옥스는 궁만 딸깍 누르고 적진 한복판에 들어가서 폭사해도 1인분이 되는 몇몇 초식챔을 해 보고 나서야 이게 대놓고 편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물론 이 수준에 도달하기까지 대신 동선을 깎아 준 은설과 코치진들 입장에서는 속 터지는 발언이었다. “그걸 이제라도 알았으니 됐다...” 지금 VR을 끼고 가상 공간에서 대화하고 있는 게 아니었다면 꿀밤 한 대는 먹였을 거다. “아니, 그래. 이게 맞지. 더 어려운 애들은 잘하면서 딸깍을 못 하는 게 이상하잖아.” “...제가 전 시즌에 이쪽 계열은 좀 파멸적으로 못하긴 했죠.” “난 그때 자이란 들고 상대 원딜이랑 몸 비비려는 놈은 처음 봤다.” “......” 안재훈 감독님은 허허 웃기만 하셨지만, 그것만으로도 누군가에겐 공포였다. “그나저나, 은설이가 보기엔 어때?” “잘 하냐고요?” “아니. 마스터 리그에서 통할 것 같냐는 거지.” “아뇨. 다음 경기에 이거 내면 그대로 그 세트 망할걸요.” 뒤틀린 숲의 몬스터를 전부 털어먹는 거야 연습을 거듭해 시간 단축을 했다지만, 돌발 상황 대처 능력이 아직 좀 많이 떨어졌다. “상대가 몰래 카정 오면 대응 안 돼요.” 벨의 시야 문제까지 겹치면 더 그랬다. 아무리 미드에서 주도권을 잡아도, 어둡기 짝이 없는 뒤틀린 숲을 제 집처럼 드나드는 건 무리니까. 게다가 옥스의 모든 동선을 내가 실시간으로 짜주는 건 지나친 부담이다. 애초에 이런 챔피언을 헌터에게 고르게 하는 것부터 내 과부하를 막기 위함이니 본말전도랄까. “그럼 저 헌터 챔피언 다 막히면 다른 거 하나 해도 돼요?” “뭐야, 우리 창현이 그 와중에 준비한 게 있어?” “그게, 시야도 잘 잡을 수 있고, 이번에 붙을 KTT가 쌍포를 쓰면 밸류도 높고, 후반 밸류는 더 높은 챔피언이 하나 있는데요.” “...그런 게 있는데 왜 내가 모르지?” 감독님은 자신이 뭘 놓치고 있었나 챔피언 목록을 열어 훑어봤지만, 본인 기준에서 저 말에 부합하는 챔피언은 찾지 못하신 모양이었다. “그래서, 뭔데 그게.” “띠모요.” “나가.” 내 그럴 줄 알았다. “아니, 감독님 이거 진짜 좋다니까요?” “뭐라는 거야 진짜.” “정글링도 은근 빠르고, 벨한테 부족한 시야도 버섯으로 채워주고, 상대 쌍포 나왔을 때 제 실명 하나면 아무것도 못 하고, 나중 가면 버섯 하나만 밟아도 상대 반피가 나간다니까요?” 심지어 원거리 챔피언이라 본인 피지컬로 카이팅도 된다느니 어쩌느니 하는 소리를 듣고 있자니— ‘흠.’ 은근 설득이 된다. 감독님도 처음에는 무슨 유냥이가 펜타킬 하는 소리 하고 있냐는 표정이셨다가, 점점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일리가 있다는 얼굴이 되었다. “심지어 탑으로도 되니까 스왑 심리전도 걸 수 있어요!” 저 정도면 하라는 챔피언 연습은 안 하고 띠모만 연습한 수준이다. 생긴 건 띠모를 찢어도 몇 번은 찢을 인간이 예찬론을 늘어놓으니 퍽 신선했다. 한편, 그 와중에 플루크 녀석은 정색에 정색을 했다. “제가 그걸 탑에서 왜 써요 형.” “누가 아냐. 그럴 수도 있지.” “제 프로 인생에 그거 쓸 일은 없어요.” 솔랭하면서 누구보다도 띠모를 많이 만났을 테니 저 띠모를 혐오하는 모습은 정당하다고 할 수 있겠다. “일단 난 그럼 다른 코치들이랑 밴픽 토론 좀 하고 올 테니까 솔랭 계속 돌리고 있어. 알겠지?” “혹시 진짜 진지하게 생각하시는 거 아니죠?” “갈게!” “감독님?” 언제나 그랬듯이. 탑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