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채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 ST 유니폼 한 벌을 주고선 먼저 경기장 안으로 들여보냈다. “먼저 들어가 있어. 나중에 따라 들어갈게.” 당장 내 주변에 뱅뱅 맴도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만 봐도, 일반인인 은채가 얼굴이 팔려서 좋을 건 없었다. 그렇게 은채의 모습이 저 멀리 사라지자, 나는 들고 온 작은 가방에서 액션캠을 꺼냈다. 내 건 아니고, ST 촬영팀한테 부탁하니까 하나 빌려줬다. 그분들 말로는 오늘 경기만 아니었으면 날 찍는 걸 도와줬을 거라는데, 그건 내가 더 부담스러우니 차라리 이렇게 직접 찍는 편이 낫다. 현장감도 살고. 곧 카메라를 좀 만지며 조정해 방송을 켜자, 핸드폰에 켜둔 채팅창이 우르르 올라가기 시작했다. —이걸 켜네 —굳 —이거지 —지금 어디 있음? —동문 앞이네 —그냥 대놓고 잘 보임 —혼자 그림체가 다른데? —실물이 나으면 개추 —ㄹㅇㅋㅋ 방송을 켜자마자 주변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휴대폰 알림 소리가 울리거나 진동이 들려오는 걸 보면, 어지간히도 많이 왔다 싶다. 그래도, 걱정은 별로 안 됐다. “은설아, 이쪽으로...!” 우리 ST3 팀을 담당하는 매니저님이 어느새 내 뒤에서 말을 걸었다. “준비 다 됐어!” “벌써요?” “사람이 몰릴 것 같아서 미리 준비 좀 했지.” 숙소에서 뭐 하나 안 되는 일 있으면 언제나 부르던 우리의 만능 매니저님께서는 내 방송도 보고 계셨고, 그날부터 곧장 임시 부스 준비까지 해주셨다. “그, 혹시 저거예요?” 그냥 단출하게 의자 하나에 적당한 책상 하나면 될 줄 알았는데, 어째 다른 부스들처럼 의자에 현수막까지 퍽 본격적이었다. 옆에 줄지어 늘어서 있는 내 이름 박힌 유니폼은 덤이었고. “이렇게까지 안 해주셔도 되는데...” “에이, 그래도 따지고 보면 은설이가 처음으로 직접 팬들이랑 대면하는 건데, 내가 이 정도는 힘 써야지!” 매니저님은 그렇게 말씀하시고선 카메라에 대고 어느 위치로 올지에 대해 공지까지 해주셨다. “아, 그리고 여기 있는 유니폼은 우리 은설이가 팬분들을 위해 가격 절반을 부담하기로 했어요.” —매니저눈나 공지 GOAT —캬 —대 트 루 —내 도네가 드디어 유의미하게 쓰이는구나 —감사합니다 —바로간다 —줄 서요 줄 —근데 ㄹㅇ왜 벌써 줄 서고 있냐 —누가 보면 입장 줄인 줄 알겠네ㅋㅋㅋ 그렇게 시간이 흐를 때마다 사람이 점점 모이기 시작했다. 내가 마련된 부스의 의자에 앉을 무렵에는 어느새 줄이 부스를 가로막을 지경이었다. “아니 왜 오겠다고 한 말이 진짜인 건데요, 다들.” 난 끽해야 십수 명 정도가 와서 팬이에요 호호—하면서 사인 받고 갈 줄 알았는데, 이렇게 줄이 길어지면 더 이상 게릴라 팬미팅이 아니게 되어버린다. —트루 유니폼 사려고 기다리는 사람도 있을 듯 —ㄹㅇ —싸게 유니폼을 사는데 트루가 이야기도 해주고 사인까지 해준다고? —이건 가야지ㅋㅋ —지방이라 못가는게 한이다 —지금이라도 KTX 타고 달려와라 —이 줄이면 경기 끝날 때까지 안 줄어들걸 —ㄹㅇㅋㅋ “매니저님, 제 생각보다 너무 많이 왔는데요?” “걱정하지 마. 시합 시작 십 분 전에는 줄 보고 끊어줄게.” 역시 매니저님. 아무튼. 그렇게 나는 팬미팅을 시작했다. “경기 너무 잘 보고 있어요!” ST의 유니폼 뒷면에 ‘True’라고 적혀진 내 유니폼을 들고 온 여성 팬. “잘 펴서 액자에 넣어두겠습니다.” 방금 산 유니폼을 바로 내 앞에 내밀며 고개 숙여 인사하는 팬. “저, 저는 키보드에 사인해 주세요!” 그리고 국제키보드협회 회원까지. —아직도 족쇄견들이 살아있어? —독하다 독해 —트루는...돌아온다! —아니 할배들 좀 가세요 —이미 프로씬에서 3인칭 컨트롤 잘 쓰는걸로 유명한데 만족을 몰라요 —ㅋㅋㅋㅋㅋ —트루가 키보드로 펜타킬 내고 LOC 월드컵 우승해야 멈출 듯 —ㄴㄴ그러면 더 나댐 —ㄹㅇㅋㅋ 몇 번이고 사인을 계속하고 있자니, 어느새 매니저님이 줄을 끊었다. 벌써 경기 시작까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의미였다. 게다가 우리가 준비해 뒀던 유니폼이 동나기도 했고. —처음 방송할 때 백 벌은 넘어 보였는데 저게 다 팔려?? —ㄷㄷㄷㄷㄷ —트루햄 체급 미쳤네 —중딩이라 밸류도 좋음 —ㅋㅋㅋㅋ이런 록붕이새1끼들 —저 정도면 LOCK에서 뛰는 어지간한 선수들보다 팬들 구매력 높은거 아니냐 —ST 버프랑 유니폼 가격 할인한 거 감안해도 ㄹㅈㄷ네 —더 이상 작은 트루가 아니야... —팩트) 한 번도 작은 적 없다. —실버 구간에서 랭겜할 때도 100명은 찍었다는거임ㅋㅋㅋ 아무튼, 채팅창과 팬의 얼굴을 번갈아 보며 몇 번의 사인과 대화를 더 했을까. “휴우우우...” 드디어 줄이 끝에 다다랐다. 팬들과 만나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지만, 혹여나 이 짧은 만남에 티라도 남을까 봐 말이랑 행동을 조심하다보니 경기할 때랑은 다른 의미로 피곤했다. 그래도, 할 건 한다는 마인드로 몸을 일으켰다. 정리는 해야지. “뒷정리 도와드릴게요.” “아니야! 은설이는 빨리 들어가서 경기 봐!” “...그래도 괜찮아요?” “완전 괜찮지. 이런 거 하라고 내가 돈 받고 일하는 거야. 그러니까 빨리 가. 여기는 언니가 처리할게.” 나는 그렇게 반쯤 떠밀려 경기장으로 향했다. * * * [ST 대 밀키웨이 S! 1세트 밴픽이 모두 끝났습니다!] 경기장에 들어갔을 때는, 밴픽은 모두 끝난 상태였다. 물론 내 관심사는 밴픽보다는 익숙한 얼굴들이었으니 아무래도 좋았다. ‘...변한 게 없네.’ 프라우드는 최근에 봤고, 필리독 또한 방송에서 짧게나마 만난 적이 있다. 하지만 역시 이렇게 경기장에서, 선수로서 벼려진 상태로 보는 건 역시 경우가 다르다. LOC 월드컵 6회, 그 중 한 번은 쓰리핏을 포함하는 시대의 지배자이자 그 외 우승컵도 넘쳐나는 LOC 그 자체인 프라우드. 그리고 그런 프라우드를 한 번이라도 넘고 LOC 월드컵 우승의 상징인 챔피언의 컵을 기어코 들어 올렸던 필리독. 양 팀의 미드 라인을 책임지는 두 선수는, 내 기억 그대로였다. 그들의 모습은 여전히 고고했다. [두 오랜 라이벌이 이번 시즌에도 LOCK에서 격돌합니다!] [지금 바로 만나보시죠!] [하나! 둘! 셋!] “ST 파이팅!” 나는 하늘이 떠나가라 그렇게 외쳤다. [경기 시작합니다! 선수들 빠르게 인베이드 방어하러 제 위치로!] 중계진의 텐션 높은 목소리가 경기장에 울리는 와중, 제대로 ST의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온 은채가 내게 말을 걸었다. “밴픽은 ST가 괜찮아 보이긴 하는데, 우리 프로님이 보시기엔 어떠신지요?" “음...이건 잘 풀린 쪽이 유리해 보이는데.” 어느 한 라인이라도 먼저 균형이 무너지면 진다. 그런 밴픽이다. 슈퍼 플레이라도 나오지 않는 한, 한 번 주도권 쥔 라인은 게임 끝날 때까지 주도권 따윈 없을 확률이 높았다. 그런데 그걸 모르는 인간들이 아닐 텐데도, 부쉬에서 서로 눈이 마주치자 피하지 않고 맞부딪혔다. [어? 어? 여기서 갑자기 1레벨 싸움 시작!] [서로 안 물러나요?!] [사실 두 팀 다 초반부터 할 말은 있는 조합이거든요? 이거 끝까지 갑니다!] 관객들의 웅성거림이 커지고, 경기장 화면으로 나오는 챔피언들의 전투는 1레벨임에도 불구하고 퍽 치열했다. [트리플 킬!] [트리플 킬!] 결과는 ST 탑인 토르의 트리플 킬, 그리고 밀키웨이의 미드인 필리독의 트리플 킬이다. [이러면 이게 어떻게 되나요!] [미드 주도권은 끝났습니다. 프라우드 선수는 버티는 방법밖에 없어요.] [그래도 탑은 토르 선수의 주도권 확실하니, 그 방향으로 굴려봐야 되겠습니다!] 그렇게 전 라인의 미니언이 한 웨이브씩 탈 정도로 오래 싸웠던 전투 이후, 라인전은 바텀을 제외하면 여러모로 극단적이었다. 탑은 경험치 디나이를 시켰고, 미드는 프라우드의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아니었다면 몇 번이고 끝났어도 이상할 게 없었다. [미드 주도권은 없어진 ST지만, 운영은 깔끔합니다!] [역시 최상위 두 팁답게 서로 턴을 잘 나누면서 대형 몬스터를 처치합니다.] [아마 다음 전투가 열린다면, 거기서 서로 모든 걸 쏟아 부을 예정일 겁니다. 상체 쪽은 각자 할 말이 있어도, 바텀이 아직 못 컸으니까요.] 아니나 다를까, 다음 싸움에서 이번 세트 승패가 사실상 결정됐다. [으아아! 여기서 프라우드가 플래시까지 쓰면서 이니시!] [존야 누르고! 상대 스킬 많이 빠졌습니다!] [ST 선수들 전부 진입! 존야 풀린 프라우드도 안 죽고 계속해서 스킬로 딜 합니다! 지금 이러면 밀키웨이는 빼야 돼요!] 그리고 그 상황에서, 잘 큰 토르가 기어코 상대의 후방을 잡았다. [이러면 순식간에 후방이 붕괴!] [밀키웨이 비사아아아앙!] [필리독! 필리독이 최대한 저항해 보지만 이미 혼자 남았어요!] 필리독은 어떻게든 프라우드라도 잡아보려 발악했지만, 유감스럽게도 록에서 인원 수 차이는 어지간하면 절대적이었다. [마무리!] [이렇게! ST가 이번 세트의 승기를 가져옵니다!]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함께, ST는 전리품을 챙기러 뒤틀린 숲으로 향했다. 상황이 계속되면 미드의 영향력 차이로 지는 상황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을 해낸 프라우드, 그리고 홀로 남겨진 상황에서도 기어코 원딜을 낚아챈 필리독까지. 저것이 바로. 내가 지향해야 할 곳이자. 천재들의 시체가 들어찬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