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게이머에게 합숙은 거의 반 필수나 다름없다. 기본적으로 시즌이 끝날 때까지 스크림과 솔로 랭크, 그리고 때론 경기 일정까지 소화해야 하는 터라 매일 각자 집에서 출근하는 건 못 할 짓이다. 게다가 집에 인터넷 연결 이슈라도 생기면 그날은 통으로 날리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런 고로, 아카데미를 지나 엄연히 ‘프로’ 타이틀을 달 수 있게 되는 마스터 리그부터는 합숙은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그리고 부모님이 내 프로 생활에서 가장 걱정한 것도 비슷한 부분에서였다. ‘개인 방 맞죠?’ ‘각자 도어록에, 빨래 같은 건 고용한 분들이 해주십니다. 당연히 여성분들이고요. 개인 시간은 당연히 보장됩니다.’ 듣기로는 2부 리그나 3부 리그, 혹은 해외 리그에서는 여성 프로게이머가 간간이 있었기에 팀마다 나름의 규정이 있다고 했다. 하지만 부모님이 보시기엔 ST는 지금껏 단 한 번도 성별이 여자인 프로게이머를 영입한 적이 없으니 더 극성이셨다. “여자애 짐이 이렇게 단출해서 어떡하니.” “내 방에 있는 굿즈들이라도 챙겨가?” “얘는 무슨. 보니까 구단에 널려 있던데 뭘 그런 걸 담아.” 사실 구단에서 마음껏 쓰고 선물도 좀 하라고 십수 만원은 호가하는 자켓이나 유니폼을 세트로 한 무더기 주긴 했다. 마음만 먹으면 한 시즌 내내 같은 옷으로 돌려막기도 가능하겠지. 물론 그 짓을 했다간 채 일주일이 지나기 전에 상황 파악하러 온 우리 장 여사님이 나를 다시 집에 끌어다 놓을 테지만. 아무튼, 우리는 단출하디 단출한 짐을 가지고 ST의 사옥 쪽으로 향했다. * * * 사옥 바로 옆에 마련되어있는 숙소는 달라진 LOC의 위상과 더불어 한층 더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솔직히 말 안 했으면 그냥 고급형 오피스텔인 줄 알았을 거다. “네가 은설이구나? 듣던 대로 참하게 생겼네!” 마흔 중반으로 보이는 ST3 담당 매니저님은 푸근한 미소로 나를 맞이해주셨다. “여기 일단 은설이 방 카드키. 잃어버리지 않는 게 제일 좋은데, 잃어버려도 로비로 오면 재발급해 주니까 너무 걱정하진 말고. 알겠지?” “감사합니다.” “뭘, 일단 짐부터 놓으러 가자. 오늘부터 바로 바쁘잖니.” 짐을 방에 풀 시간도 없이 첫 스크림을 하러 가야 하긴 했다. 그나마 방에 내 물건을 가져다 둘 수 있는 것이 불행 중 다행이랄까. '팀 동료들끼리 인사할 시간도 없겠네...' 참고로 마스터 리그 개막일까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최약체라 평가받는 우리팀이 스크림 시간을 임의로 정할 수 없어 발생한 문제다. 나중에라도 성적이 좋아지면 우리 맘대로 편한 시간에 스크림을 잡아 사소한 복수를 해주고 싶었다. 아무튼. 그렇게 우리는 카드키에 적혀져 있는 번호를 확인하고선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옆에 벽에 붙어있는 각 층별 용도를 확인하니, ST3는 5층, ST2는 6층, ST1은 7층에 머무는 모양이다. 그 아래는 카페부터 아카데미 교실, 연습실까지 다양하게 있었고. “내가 사실 여기 여자애가 온다고 해서 걱정이 많았어. 알다시피 다들 남자애들에다 사춘기고...” “그 나이대가 다 그렇죠 뭐.” “근데 보니까 은설이는 딱 느낌이 와. 어른스러워서 문제없을 거 같아.” 사실 내 기준에서 보면 프라우드를 제외하고 대하기 어려운 사람이란 없다. 심지어 프라우드도 공식적인 자리에서나 대하기 힘든 거고, 사석에서야 언제나 격 없이 지냈으니까. “남자애들이 괴롭히면 말해야 해?” “걔들이, 저를요?” 내가 얼굴을 들고 담당 매니저님을 웃으며 바라보자, 그녀는 이내 말을 정정했다. “어유. 괴롭힌다는 말 취소. 은설이 두고 안 싸우면 다행이겠네.” “그쵸?” 확실히 쓸모 있는 구석이 많은 얼굴이다. “근데 규정상 팀 내에서 연애는 금지인 건 알지, 은설아...?” 매니저님은 왠지 불안한 눈빛으로 바라봤지만, 나는 전혀 걱정할 필요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에이. 저 그런 성격 못 돼요.” 게다가 이런 이유가 아니더라도 매니저님이 걱정이 성립조차 하지 않는 이유야 차고 넘쳤고. “싸우면 제가 찍어 누르죠 뭐.” 원래 팀에서는 게임 잘 하는 놈—년—이 왕이다. 그리고 나는 1군이면 모를까, 마스터 리그 녀석들에게 대화의 주도권을 내줄 생각은 없었다. “여긴 원래 그런 곳이잖아요.” 뭐가 됐든, 모든 스포츠 구단의 기본은 경쟁이니까. 같은 팀 멤버끼리 경쟁해봐야 뭐하나 싶겠지만, 오더 하나에 모든 게 달라질 수 있는 상황에서 나는 반드시 팀을 휘어잡아야 했다. ‘...특히 팀 상태도 심각해.’ 안재훈 코치님이 미리 건네준 스크림 영상을 보면, 플루크를 제외하면 사람이 안 보였고, 심지어 그 녀석조차도 독박 이니시를 맡으면서 과부하가 많이 걸린 상태였다. “우승 약속 지키려면, 열심히 해야 할 거 같거든요.” 나는 1군에 있을 때 리빌딩한답시고 나 빼고 2군 선수들만 즐비했던 스쿼드에서조차 LOCK 우승을 해본 사람이다. 그에 비해 지금 ST3에서 풍기는 구린내 정도면 재활용이 불가능한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내가 볼 땐 은설이는 진짜 잘될 거 같아. 분명히 다른 애들이랑 비슷한 나이인데, 생각하는 게 다르네. 천방지축인 녀석들이랑 어떻게 붙여 놓나 모르겠다...” 그건 정말 걱정할 필요 없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아무튼, 어느새 우리가 탄 엘리베이터는 내 방이 있는 층에 멈춰 섰다. * * * 내 방은 원룸 오피스텔 형식의 방 하나, 화장실 하나의 단출한 구조였다. "짐만 놓고 바로 연습실로 가자. 지금 가면 인사는 하고 스크림할 수 있겠다." "그럴게요." "엄마가 해주고 갈까?" "괜찮아. 저녁에 천천히 할게." "우리 딸 성격이면 대충 해놓고 지낼까 봐 그렇지." 우리 장 여사께서는 태평한 내 모습에도 뭐가 그렇게 걱정이 되시는지, 몇 번이고 내게 당부의 말을 건네며 작별 인사를 했다. “주말에만 집 갈 것도 아니고, 시간 나면 항상 집 갔다 올 수 있잖아. 걱정하지 마.” “우리 딸이 언제 이렇게 독립심이 강해졌대.” “돈 받는 프로니까. 돈값은 해야지.” 안재훈 코치님이 항상 입에 달고 살던 말이라, 나도 입에 붙었다. ‘그 연봉 받고 팬서비스도 안 할거면 팀에서 꺼져 개새끼들아.’ ‘우리가 계속 처 던지니까 지는 거 아니야.’ ‘가서 죽어봐.’ 생각해 보니 ST에서 배운 게 록 하나가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짐을 내려놓은 뒤, 마음 같아서는 거대해진 숙소를 좀 구경하고 싶었지만 이미 정해진 일정이 있었다. “왔니? 그럼 바로 스크림 준비하자.” 짐을 풀지도 않고 바로 연습실에 도착하니 나를 반기는 건 인터넷으로 미리 확인했던 ST3의 감독이 아니었다. "안재훈 코치님?" "어, 은설이 왔구나. 다행히 스크림 미룰 필요는 없겠다." 이미 다들 게임에 접속했는지 조용한 연습실에는 코치님만이 서 계셨다. "아니 그보다 왜 여기 계세요?" 3부 리그팀 스크림까지 관여하실 정도로 한가하시진 않은 걸로 기억하는데. "그야, 내가 이번 시즌 ST3 공식 감독이니까." "네?" "왜, 별로니?" "아뇨. 최고에요." 안재훈 코치님 밴픽은 이미 정평이 나 있었다. 가능하면 최선, 불가능하다면 차선, 최악의 상황에서는 차악. 1군에서도 밴픽과 관련해 문제가 나온 적이 없었으니 3군이야 말할 것도 없을 거다. '우승 확률 좀 상향할까?' 아무리 밴픽을 잘해도 인게임 내 선수들의 퍼포먼스보다 영향이 크진 않다. 하지만 선수들이 자신의 실력을 뽐낼 기반과 더불어 실수했을 때 두 번째, 세 번째 기회를 쥐어주는 건 밴픽에서 고른 챔피언의 성능이다. 그러니 1부 리그에 비해 실수가 많을 수밖에 없는 그랜드 리그에서는 역설적으로 감독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그것도 어디까지나 상대의 실수를 잡아낼 수 있다는 전제 하에서지만, 그거야 걱정하지 않는다. 내가 있으니까. "일단 시간 없으니까 먼저 스크림 한 판 하고 나서 팀 동료들하고 소개 시간 가지자." "네. 우선 이기고 올게요." 아무렴. 승리가 먼저다. 지고 나서 우중충하고 어색한 인사를 나누기는 싫었다. * * * "우리 팀 미드 진짜 여자야?" "공식 유튜브에 영상도 올라왔는데 구라겠냐." "지환아, 네가 좀 말이나 해봐. 같은 반이라면서?" 전에 있던 미드라이너가 사라졌지만, 채 반 시즌도 같이 안했던 데다 라인이 다른 만큼 그들의 관심은 이미 새로운 미드라이너에게 쏠려 있었다. 아직 은설이 오지 않은 상황에서, 그나마 접점이 있는 지환을 닦달하는 건 예정된 수순이었다. 그리고 그런 관심은 당사자가 나타나자 그대로 그녀에게 옮겨갔다. "스크림 첫 판인데 잘해봐요." 그 한마디에, 시끌벅적하던 분위기가 바로 조용해졌다, "저거 커스텀 스킨 아니지?" "바보냐. 우리 연습실에 그런 기능이 어디 있어." 가상 공간의 모습이 송출되는 게임 중계 특성상, 연습실 기기에는 그런 기능이 모두 제거되어 있다. 그러니 지금 튀어나온 트루의 모습은 현실과 똑같단 소리였다. 그렇게 새로 온 팀원을 멍하니 바라보던 사이. "자, 여기서 본인이 LOC 월드컵 우승해봤다 손." "......?" "또 저러네..." 은설의 급발진에 익숙한 지환을 제외한 모두가 당황했다. "없으면 앞으로 다물고 제 말에 따라 오세요. 아시겠죠?" "그게 뭔 소리야. 너도 없잖아." "백정이...말대꾸?" 폭거. 폭거라고밖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과격한 언사였지만, 스크림 시간이 곧인 관계로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반박을 삼켰다. 절대 은설의 외모에 정신 팔려 말할 타이밍을 놓쳐서는 아니었다. 아무튼 그렇게 준비된 밴픽으로 바로 시작한 스크림. [퍼스트 킬!] [ ST True -> WD Merlok ] 트루는 라인전 솔킬을 시작으로. "헌터 여기 갱 와서 킬 주워먹어." 다른 포지션 킬 챙겨주기. "저기서 빼. 삼 초 내로 빼야 안 죽어." [ WD Londo -> ST Strike ] 데스 예언. "끝낼 수 있으니까 따라와." 게임 끝낼 각까지. [ 상대팀이 항복하였습니다. ] 결국 트루를 막을 수 없다는 걸 인지한 WD는 다음 스크림을 위해 빠르게 행복해지는 버튼을 눌렀다. [ 승리 ] 분명히 화면에는 이겼다는 사실을 알리는 단어가 띄워져 있었다. 하지만 요 몇 달 간 상대의 항복은 커녕 승리조차 거둔 적이 드물었던 ST3의 선수들은 그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트루 하나를 제외하고서 말이다. "말 했죠? 제 말 들으라고." "......" 채 삼십 분이 지나기도 전에 했던 말과 같은 맥락이었지만, 저 말에 반박할 사람은 더 이상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