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서 바라만 봤던 복도를 내달린다. 점점 더 크기를 키우는 거대한 함성과 함께, 나는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갔다. [쌍둥이 타워 날리고!] [스트롱 부활까지 앞으로 12초!] [아! 바닥에 와드 박으면서 다섯 명이 같이 노출된 넥서스 칩니다!] 캐스터의 긴박하면서도 기쁜 목소리까지 추진력 삼아 있는 힘껏 달려간 나는, 마침내 복도의 끝에 도착했다. “여기 아무나 들어오시면...트루 선수?” 진행 요원들은 잠시 경기장 스테이지로 향하는 문을 막으려다, 이내 나를 알아보더니 빠르게 닫힌 출입구를 열었다. 그렇게 도착한 경기장은. 뜨거운 용광로보다 더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BBG의 넥서스 깨지면서—!] [지지!] [MSC 파이널, 올해 첫 국제전 그 대망의 승자는 ST입니다!] 가장 먼저 귀에 꽂히는 해설의 승리 선언. “ST! ST! ST!” “이겼다아아아아!” “이게 ST야!” 곧이어 터져나오는 ST 팬들의 환호성. 그리고 마지막으로 시선을 옮긴 곳에는, 스테이지 위에서 얼싸안고 방방 뛰는 ST1의 선수들이 있었다. “뭘 보고만 있어?” 내가 한참 먼저 출발했는데도 근본적인 체격 차이 때문인지 감독님이 퍽 빨리 도착하셨다. “은설이 너도 올라가야지.” 록드컵 우승을 몇 번 하든 우승은 우승이라 감독님도 어지간히 선수들 사이에 끼고 싶으셨을 터다. 하지만 감독님은 내 옆에 잠시 멈추시더니 그렇게 말씀하셨다. “뭐, 보기 좋은데 좀 놔두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내가 보기엔 네가 있어야 할 것 같거든.” 그 말과 더불어 방금까지만 해도 에레와 껴안고 있던 프라우드가 스테이지 아래, 그러니까 내가 있는 방향을 정확히 응시했다. —올라와. 관중들과 해설의 환희 섞인 목소리에 프라우드의 말이 잘 들리진 않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같이 가실래요?” “너 따라오느라 힘들다. 코치 애들이랑 같이 올라갈 테니까 먼저 가.” 원래 선수는 감독 말을 잘 들을 필요가 있다. 나는 이 이상의 권유는 의미 없다는 걸 잘 알았기에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스테이지로 올라섰다. [아! 여기서 트루 선수가 합류합니다!] [이 선수 충분히 이 자리에 올라올 자격이 있습니다!] [1라운드, 2라운드, 4강, 그리고 오늘 결승 중 자그마지 반절을 뛴 ST의 식스맨, 트루 선수까지 이 행복한 순간에 합류합니다!] 관중들이 내 닉네임을 연호한다. 아예 처음부터 스테이지 위에 올라와 있으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환대를 받는 건 또 처음이라 그런지 신선한 경험이다. “뭘 그렇게 쭈뼛거려.” “평소에는 막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애는 애야.” “...그런 거 아니거든요.” 이 인간들이 아주 경기 때보다 나 놀리는 거에 더 혼신을 기울이는 것 같다. 나를 이렇게 괴롭힐 각을 보는 노력으로 한타 각을 봤으면 5세트고 뭐고 그대로 3대 0 셧다운은 했겠다. “뭐, 그래도 이겼으니까 오늘은 봐 드릴게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여기저기서 내 머리를 헝클였다. 나를 껴안지 못하는 것도 있고, 일반적인 여성에 비해선 꽤 크지만 남자 기준으로는 평균에서 살짝 못 미치는 키라 그런지 아주 내 머리가 공공재였다. [트루 선수, 기념 사진 찍기 전에 머리라도 묶어야겠습니다.] [하하. 그렇습니다. 완전 산발 다 됐네요!] [그리고 여기서 복도 리플레이 보시죠!] 여기저기 있는 전광판을 흘긋 보니, 마지막 한타가 끝나기 무섭게 자리를 박차고 복도로 내달리는 내 모습이 아주 잘 찍혀있었다. “커리어 집착이 심하긴 하네.” “우리 우승 못 했으면 저 속도로 달려와서 그대로 맞았다는 거지?” “어우. 이거 무서워서 게임 하겠냐.” “......” 바텀 듀오가 아주 쌍으로 놀리는 모습이 참 훈훈한 와중에, 등짝을 조금 더 뜨듯하게 만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그래도 나쁘진 않지?” 한편, 바텀 듀오 사이로 슥 나타난 프라우드는 내게 그렇게 말했다. “당연하죠.” 언제나 그렇듯. “그럼 가자.”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자, 이제 ST 선수들이 천천히 MSC 트로피를 향해 다가갑니다!] [아니 이 트로피 언제 스테이지 위로 올라왔나요?] [결승 끝난 직후부터 아주 천천히, 조심스레 무대 정중앙에 올라온 황금빛의 MSC 트로피가 지금 그 주인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더 이상의 대화는 필요치 않았다. 우리는 누가 먼저 말하지도 않았으나 적절한 순간에 뒤를 돌아,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는 듯 고고한 자태를 뽐내는 트로피에 시선을 고정했다. [평소보다 한 명 많지만, 선수들 어렵지 않게 자리를 잡습니다.] [LOCK부터 MSC까지 합을 맞춘 효과가 이렇게 또 빛을 발하나요?] 황금빛으로 반짝이는 원형의 트로피를 둘러쌌다. 그 직후, 프라우드의 신호에 맞춰 트로피를 살짝 공중에 띄우고 손의 위치를 조정한다. “셋 하면 드는 거다?” “에이, 형. 트로피만 몇 번 드는데 그 정도야.” “난 아닌데 너흰 이 트로피 처음 드는 거잖아.” “......” 한 문장으로 네 명—당연히 나는 있‘었’으니까 제외다—의 입을 다물게 한 프라우드는, 실실 웃으면서 카운트다운을 시작했다. 셋. [선수들 트로피 살짝 들었어요!] [부진은 있지만 몰락은 없다!] [지난 시즌 록드컵에서 쓴맛을 봐야만 했던 ST가!] 둘. [해가 지지 않는 나라 영국에서!] [제국의 부활을 알리며!] 하나. [마침내 한 달간의 여정을 끝내고 우승컵을 차지합니다!] 어두운 하늘을 더없이 밝게 수놓은 폭죽과 함께. 우리는 그 무엇보다 반짝이는 것을 더없이 높게 들어 올렸다. * * * 결승 직후의 무질서한 기쁨이 잦아들고 찾아오는 건. 역시 정산의 시간이다. “MSC Final MVP is—” “ST Fraud!” 결승전 MVP, 소위 말하는 파엠—파이널 MVP—는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프라우드가 챙겨갔다. 나야 결승전에 한 세트도 안 나왔고, 5세트의 경기를 끝내는 프라우드의 슈퍼 플레이가 모든 것을 결정했으니 그의 수상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닌가?’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탑이 받아야 했다느니 원딜이나 헌터가 받아야 한다느니 하겠지만, 그걸 지금 이 앞에서 말할 수 있는 인간이 존재할 리 없는 관계로 넘어가도록 하자. 인터넷에 싸지르는 열등감에 찬 글만큼 헛된 게 또 없으니까. 어쨌든 간에. 이런 저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어느새 프라우드의 MVP 인터뷰도 막바지였다. “정말 다들 잘 해줘서 고맙고, 저를 제외하면 다들 첫 번째 MSC 트로피인데 받을 자격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언제나 그렇듯 사석과 달리 겸손 넘치는 인터뷰가 끝나고, 마이크는 다른 선수들에게 돌아갔다. “스트롱이 이름처럼 잘하긴 하더라고요. 물론 제가 이번에는 좀 더 잘하긴 했고요.” 그저 탑신봉—병—자 그 자체인 토르의 발언. “형이 하라는 대로 하니까...네. 무난하게 이겼던 거 같습니다. 팬들께도 감사 인사 전하고 싶네요.” 에레의 정석적인 인터뷰. “음. 원딜로서 캐리하지 못해 약간 아쉽지만, 이건 팀게임이니까요. 백점은 아니더라도 오늘 저 트로피를 들 자격은 있는 것 같습니다.” 원딜인 엑소르의 겸손과 자신감이 혼재된 대답. “약간 아쉬운 부분은 돌아가서 좀 더 보강할 예정이고, 이번 시즌 이게 끝이 아니다. 아니, 아닙니다. 그러니까 더 준비해서 발전된 모습으로 돌, 돌고, 아닌가? 아. 돌아오겠, 습니다.” 막판에 말이 꼬여 고장난 도구까지. 그저 즐거운 시간이었다. “자, 그럼 이 선수를 빼놓을 수 없죠?” 아. 맞다. “프라우드 선수를 대신해 ST를 이번 MSC 4강으로 직행시킨 ST의 여섯 번째 선수!” 나도 해야지. “트루 선수의 인터뷰 해보겠습니다!” 얼떨결에 니케로부터 마이크를 받아든 나는 우승 소감을 묻는 아나운서의 말에 생각해 뒀던 것을 꺼냈다. “우선 팬 분들께 감사드리고, 이렇게 1군 무대에서 국제전 우승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큰 경험이자 자산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나눠서 드니까 생각보다 트로피가 가볍더라고요.” 실제로 다섯이 들 때보다 가볍더라. “그럼 마지막으로, 아마 귀국하시면 다시 그랜드 리그로 돌아가실 텐데 ST2 선수들에게 미리 전해 주실 말씀 있으실까요?” “유관력 챙겨서 갈 테니까 이번 시즌 남은 대회들 우승 못 하면 알지?” “......네! 국제전 우승자답게 자신감 넘치는 모습 아주 보기 좋습니다!” 너무 해맑게 말해서 그런가, 진행자는 무의식적으로 호응하려다가 어떻게든 이 직설적이기 짝이 없는 말을 잘 비틀어 예쁘게 포장해 주셨다.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네. 말씀하세요.” “그랜드 리그, 제가 돌아갑니다.” 미리 말했으니. 무슨 일이 일어나든 책임은 각자가 지는 거다. * * * 같은 시각. ST2 전용 다목적실. [그랜드 리그, 제가 돌아갑니다.] 트루의 말에 ST2의 선수들은 헛웃음을 지었다. “아니 애초에 떠난 적도 없잖아.” “쟨 우리 휴식기 때 갔으면서 뭐래.” 그 말에 플루크는 한숨을 내쉬며 옥스와 스트라이크에게 덧붙였다. “이상한 소리 그만하고 이제 솔랭이나 돌려요.” “조금만 더 쉬자.” “은설이 쟤가 방금 뭐라고 했는지 들었으면서도 그래요?” “......” 저 경고가 과연 다른 팀에게만 한 것일까. “솔랭 좋지.” “연습하자 연습.” 갑자기 분주해진 선수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