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일단 야구부 설립은 확정이고..." ​ 이사장의 게이 야스 비디오를 손에 쥔 나는, 야구부 설립과 전폭적인 지원을 약속받았다. ​ 학교에서 가까운 시설과 협약 하에 야구장 및 연습 시설을 빠르게 갖춰준다고. 이제 중요한 건 선수다. ​ 단기 토너먼트 형식인 고교리그 특성상, 선수 몇 명이 멱살 캐리가 가능하다지만 나와 석운강이 모든 걸 캐리할 수는 없는 노릇. 나와 같이 이 팀에서 핵심 역할을 해줄 선수를 반드시 데려와야 했다. ​ "유격, 중견, 3루 정도는 괜찮은 녀석이 와줘야 할 텐데." ​ 나머지 자리는 그냥저냥 밥값만 하는 놈들 집어넣어도 되지만, 핵심 포지션은 공수가 고루 가능한 녀석이 필요했다. 봄 대회가 시작되면 타 고교에서 선수를 빼 올 수도 없어진다. 다소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 "일단 우리 학교에 묻혀있는 진주부터 좀 찾아볼까." ​ 그래서 일단 든 생각은, 문혁고 내부에서 찾아보는 것이다. 나름 문혁고가 야구부 돈 많이 든다고 투자 안 해서 그렇지, 짤짤이로 분산 투자는 많이 해뒀다. 다른 운동 종목에 전국구 선수들이 있단 말은 거짓이 아니다. ​ 멀쩡히 다른 종목 잘하는 선수들을 왜 둘러보냐고? 말했다시피 이 세계관에서 야구는 압도적 인기의 원탑 스포츠. ​ 야구 선수 한 번 꿈꾸지 않는 스포츠 유망주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다만 그 압도적 인기에 비해 프로 구단은 20개밖에 없고, 선수 지망 고교야구부 역시 그 문턱이 상당히 높다. 그래서 좋은 재능을 가지고 있더라도 스카우터의 눈에 띄지 못하면 그 아까운 재능이 그대로 묻히게 되는 것이다. ​ 그래서 찾아보려 한다. 마음속 한구석에 아직도 야구를 품고 있는, 뛰어난 유망주를! ​ "일단 농구부 쪽 부터 볼까." ​ 나는 한창 농구 경기가 진행 중인 대강당에 들어섰다. 개학 직전임에도 학교에 나와 구경하는 관객도 꽤 있었다. ​ 5분만 지켜봐도 누가 눈에 띄는지는 대략 가닥이 나왔다. ​다만 이름을 모르면 스캔이 불가능하다는 게 문제. 그럴 때의 해결 방법은 의외로 간단했다. ​ “와, 방금 플레이 개 쩔었다. 혹시 저 친구 이름 아세요?” ​ 농구를 좋아해 보러온 평범한 관객인 척 옆 사람들에 물어보는 것! 주로 특정 인물에게 리액션을 더 잘해주는 사람은 지인일 확률이 높다. ​ “아, 저 친구가 궁금하셨구나? 제 친구 경수에요, 서경수!” ​ “아하.” ​ 프로 스카우터들이 눈독을 들이고 있고~ 어쩌고 하는 소리는 한 귀로 듣고 흘리며 나는 상태창을 켰다. ​ 이름: 서경수 나이: 18세 키: 187 cm 스킬/ 퀵스로우 (B) : 수비 후 송구 동작의 시간이 짧아집니다. 잠재 키워드: 수재(B+) ​ 타자 능력치 (*포텐셜) / 좌투 좌타 파워: D 컨택: C+ (*B+) 스피드: B (*B+) 선구: C 수비: C (*B) 어깨: B (*B+) 추천포지션: 좌익수, 우익수, 1루수 ​ '꽤 쓸만하겠는데?' ​ ‘수재(B)’라는 항목으로 통합되어 나오는 B등급의 포텐셜이 4개. 이 정도면 꽤 나쁘지 않았다. 다른 종목이긴 하나 전문적으로 훈련 받은 선수다 보니 스탯 발달도 꽤 잘 되어있다. ​ 농구부 에이스를 빼가는 건 조금 양심에 찔리긴 하지만, 지금 우리 코가 석 자다. ​ 그렇게 나는 축구부, 육상부, 수영부 등 다양한 곳들을 돌아다니며 인재를 찾아다녔다. 그러고 느낀 감상은 단순했다. ​ ‘벤치가 딱인 놈들이 대다수구만.’ ​ 농구부의 서경수가 선녀일 정도로 내가 바라는 A급 포텐셜의 유망주가 안 보였다. ​ 적어도 한 명 정도는 건질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너무 과한 걸 바란 것일까. ​ "이제 마지막은 여기인가." ​ 굳이 여길 가야하나 싶었지만, 너무 수확이 없어서 의례상 방문했다. 문혁고에서 유일하게 야구 관련 활동을 하는 동아리였다. ​ [Hit & Run] ​ 허름한 나무 목판이 문 위에 붙어있었는데, 안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그러고 서 있자 뒤쪽에 지나가던 한 중년의 선생이 말을 걸었다. ​ "야구 동아리 친구들 찾아?" ​ "아, 넵." ​ "요~ 근처에 시립 야구장에 경기 나갔어." ​ 안 나왔다 그러면 그냥 스킵하려 했는데, 일단 경기를 하고 있긴 한 모양. ​ 약 5분 정도 걸어가자 선생이 말해준 시립 야구장이 보였는데, 그들의 플레이를 본 내 감상은 간단했다. ​ “형편 없구만.” ​ 제구가 안 되는 투수가 대부분이라 볼넷 남발, 인플레이에는 에러가 속출, 도루 저지가 불가능한 포수들의 소녀 어깨 등. ​ 딱 취미 수준의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애초에 야구는 일반인과 선수의 차이가 가장 큰 종목. 동아리 수준이 낮은 것도 어쩔 수 없다. ​ 그래도 진심으로 즐기고 있는 표정을 보면, 뭔가 부럽다는 감정도 문득 들었다. ​ "돌아갈까." ​ 그렇게 돌아가려고 한 순간이었다. ​ 따앙---! ​ 호쾌하게 돌아가는 스윙,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이 대번에 2루까지 질주하는 주력. ​ “오호라.” ​ 키는 중학생인가 싶은 정도로 작았지만, 그 실력은 예사롭지 않았다. ​ “캬, 역시 최아담! 히트앤런의 자랑!” ​ “너밖에 없다 아담아!” ​ [최아담 님의 스테이터스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Yes / No ] ​ “Yes.” ​ 그렇게 뜬 최아담의 스탯에 나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 이름: 최아담 나이: 19세 키: 160 cm 스킬/ 배드볼 히터 (A) : 볼 타격 시 안타 확률이 올라갑니다. ​ 잠재 키워드: 질풍(*S+), 타격 영재(*A+), 수비 영재(*A+) ​ 타자 능력치 (*포텐셜) / 우투 좌타 파워: D 컨택: B+ (*A+) 스피드: S (*S+) 선구: D+ 수비: B+ (*A+) 어깨: B 추천포지션: 유격수, 2루수 ​ ​“찾았다.” 문혁고 야구부의 1번 타자. 상대 팀을 지독하게 괴롭히고 우리 팀 공격의 포문을 열어줄 선봉장을 찾아냈다. ​ ​ ​####### ​ ​ 문혁고의 모든 스포츠 부를 둘러본 나는 꽤 만족스럽게 발걸음을 떴다. ​ "역시 최대 수확은 최아담인가.“ 녀석의 키는 160cm, 나와는 무려 32cm가 차이 난다. ​ 압도적으로 작은 키, 그리고 다소 거친 스윙과 선구안이 큰 약점이라 그 어떤 고교 야구부에도 뽑히지 못한 모양이다. ​ '스카우터 놈들 고맙다, 너희들 눈이 옹이구멍이라 살았다.' ​ 나라면 최아담을 고교 리그 최고의 리드오프로 키울 자신이 있었다. ​ 당장이라도 영입 제안을 하고 싶었으나 굳이 말을 걸지는 않았다. ​ 육상으로 갔어도 먹혔을 S급 스피드의 재능으로 아직도 동아리에서 야구를 하는 걸 보면, 야구에 대한 애정이 남다른 녀석이라는 뜻. ​ 어차피 정식 입부 테스트를 열게 되면 찾아올 게 분명했다. "이제는 감독인가." ​ 감독은 내가 원하는 사람을 고용해 달라고 이사장에게 이미 결제를 받아둔 상태다. 내가 감독에게 요구하는 제1조건은 간단했다. ​ '내 말을 잘 들을 것.' ​ 난 이 게임의 최대 효율을 뽑는 법을 알고 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지 간에 날 믿어줄 수 있는 감독이어야 한다. ​ 게임 속에서 명감독으로 꼽히는 인물들이야 몇몇 있다. 그 영입 조건 역시 꿰고 있고. ​ 다만 큰 문제점이 있었다. ​ "에고가 너무 세단 말이지. 능력 있는 감독들은." ​ 바로 자기 주관이 너무 뚜렷하다는 것. 내가 뭔 짓을 벌일 때마다 사사건건 태클을 걸며 충돌하게 되면 보나 마나 팀케미는 개작살이 날 게 뻔했다. ​ "내 말을 잘 들을 수밖에 없을 만큼 감독직이 간절한 사람. 근데 능력이 없지도 않은 사람." ​ 게임 속에 존재하는 수많은 지도자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 "딱 한 명 있겠네." ​ ​ ####### ​ ​ 한 초등 리틀야구 구장. 40대 초에 멀끔하게 생긴 젊은 코치와 머리가 하얗게 센 남성이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 "미안하네, 다음 달부터는 출근하지 않아도 좋네." ​ "사장님...!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갑자기 말씀하시면" ​ "자네가 코칭 능력이 괜찮은 건 알아. 하지만 어머님들이 우려가 깊네. 자네가 워낙 파드리스 코치 시절 소문이 흉흉하지 않았나." ​ "그건...." ​ "또 자네를 써줄 팀이 분명히 있을 걸세. 그럼 행운을 빌겠네." ​ 또 잘렸다. 명신우 코치는 또다시 지도하던 팀에서 쫓겨났다. ​ "하아…." ​ 나름 세계 최고라는 한국 리그에서 전문 수비 요원으로 15년 넘게 생존하며 '생존왕'이라는 호칭까지 얻었던 그. ​ 은퇴 뒤에도 코치 연수를 다녀와 세종 파드리스의 코치로서 승승장구하는 듯했다. 다만 운명이 바뀌는 건 한순간의 일이었다. ​ -[속보] 세종 파드리스 코칭 스태프의 파벌 싸움 심각, 편 가르기에 애꿏은 선수들만 피해. ​ -세종 팬들 깊은 배신감 표출. 曰“우리가 이런 꼴 보려고 파드리스 응원하는 것 아냐.“ ​ 코치들 간의 알력 다툼이 극에 달했고, 삽시간에 언론에도 그 이야기가 퍼져나갔다. ​ 감독과 코치진이 갈라져서 싸우고, 편애하는 선수만 잘 가르쳐주니 팀 케미가 멀쩡할 리가 만무. ​ 자연히 성적은 떨어졌고 팬들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그래서 범인 찾기에 들어섰다. ​ 그 상황 속에서 명신우는 안심하고 있었다. 양대 파벌 모두에게 제안 받았지만 어디에도 속하지 않았고, 모두와 편견 없이 친해지기 위해 노력했다. ​ 다만 그런 모습이 양대 파벌에선 거슬렸다. 원래 회색분자는 어디에서든 환영받지 못하는 법. ​ 내부자의 탈을 뒤집어쓴 누군가가 직장인 커뮤니티에 폭로 글을 올렸다. ​ [파벌이 있는 건 인정, 근데 명신우 이 새끼가 진짜 악랄한 새끼임. 양대 파벌 이간질 한 사람이 얘임. A파벌에서 같은 편인 척 딸랑대서 들은 정보 B파벌에 불어버리는 식으로 싸움 붙임.] ​ 이 글의 파장은 어마어마했다. 양측 파벌은 자기 파벌에서 희생양이 나오지 않고 피해자 입장에서 일을 마무리 할 수 있었고, 선수들은 명신우에게 깊은 배신감을 느꼈다. ​ 그가 양쪽 파벌 선수들 모두에게 차별 없이 대했던 것이, 어느새 이간질을 위한 행동으로 둔갑하여 있었다. [적폐 코치 명신우는 팀에서 꺼져라!] ​ 세종 돔구장에는 어느덧 이런 플랜카드까지 붙었다. ​ 그는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옷을 벗었다. 그 자신이 지치기도 했고, 구단 측이 그를 지켜줄 의사가 없었으니. ​ 그 뒤로 여러 학교를 떠돌며 코치 자리를 맡긴 했지만, 학부모들의 우려로 6개월 이상 일해본 적이 없었다. ​ 어린 선수들조차 제대로 된 뭔가를 알려줘도 '이거 정말 맞을까?' 하고 의심의 눈길을 보냈다. ​ 야구를 떠날까 싶기도 했지만, 평생 해 온 것이 이것뿐인데다 집에선 사랑하는 아내와 딸이 기다리고 있어 포기할 수도 없었다. ​ "하아, 프로 코치, 고교 코치, 중등 코치, 리틀 코치 점점 내려가네. 다음은 어디냐. 해외라도 가야 되냐? 하..." ​ 그렇게 생각하던 그때, 누군가가 그를 찾아왔다. "명신우씨 맞습니까?" ​ “예, 맞습니다만.” ​ “잠깐 이야기 좀 하시죠.” ​ 그 상대는 거대한 체구, 구릿빛 피부에 금발 머리가 눈에 띄는 금성묵이었다. ​ ​ ​ ###### ​ ​ "그러니까, 문혁고가 새롭게 야구부를 만들 건데, 감독 자리에 관심이 있냐 이건가?" ​ "예, 맞습니다." ​ ‘감독...!’ ​ 한 팀을 지휘하는 수장. 모든 지도자가 꿈꾸며 노리는 자리다. 그는 이 상황이 마치 꿈만 같았다. ​ 세계 최고의 지위에 오른 한국 야구답게 고교 야구 감독 자리 역시 원하는 사람은 많은데, 될 수 있는 사람은 극히 적어 능력과 인맥을 모두 갖추지 않으면 꿈도 꾸지 못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 하지만, 이 자리는 그리 호락호락한 자리는 아니었다. ​ "다만, 조건이 있습니다." ​ "조건...?" ​ "사실 이 야구부의 창립에 제가 전적으로 깊이 관여해있습니다. 감독 후보로서 명신우 씨를 찾아온 것 역시 제 독단이구요." ​ "........?" ​ "조건은 간단합니다. 감독 업무 자체는 원하는 대로 능력을 마음껏 뽐내주시면 됩니다. 훈련 프로그램이나, 선수 기용 등에 관해서는 전적으로 일임하겠습니다. 다만." ​ “다만?” ​ "제가 팀을 위해 필요하다 싶은 무언가를 감독님한테 요구할 때가 있을 겁니다. 그럴 때마다 무조건 절 믿고 지지해주시면 됩니다." ​ “뭣...?” ​ "이해하셨습니까?" ​ "............" ​ 금성묵이 하는 말의 요점은 간단하다. 말 잘 듣는 꼭두각시가 필요하다는 소리다. ​ 눈앞의 청년이 대체 누구길래 이런 권한을 손에 얻었단 말인가. 이사장의 손자? ​ 몇 년 전의 열정 넘치는 명신우였다면 콧방귀도 뀌지 않고 거절했을 거다. ​ ‘네 이놈, 야구를 우습게 보지 마라!’ ‘도련님 소꿉놀이는 다른 데 가서 해라!’ 라는 말 역시 덧붙이며 말이다. ​ 하지만 그러기엔 그는 세상의 풍파를 너무 많이 맛보았다. ​ 지금 그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단 하나였다. ​ ‘졸라 쉽네. 개꿀이잖아!’ ​ “잘 부탁하네, 금성묵 군.” ​ 일말의 고민도 없이 멋진 건치 미소로 악수를 건네오는 명신우. ​ 가끔 학생 오더 좀 들어주고 고교 야구 감독 자리? 이건 거절하는 게 병신이었다. 오랜만에 딸에게 치킨을 사줄 생각에 그는 들떴다. ​ “예,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명신우 감독님.” ​ “감독님, 감독님이라. 하하, 좋구만.” ​ 그렇게 훗날 야구팬들에게 잘 풀릴 때는 명갈량. 안 풀릴 때는 병신우, 명갈통 등으로 불리게 되는 주사위형 감독. ​ 명신우의 문혁고 1대 감독 취임이 결정됐다. ​ ‘이제 곧 그날인가.’ ​ 방학 동안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다 했다. 개학식 당일에 이사장이 판을 깔아주기로 했다. ​ 그날, 전교생의 앞에서 야구부 창립을 공표한다. 문혁고라는 잔잔한 연못에 거대한 돌을 던질 준비가 끝났다. ​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