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기 시작 4시간 전. ​ “……….” ​ 종묘 구장 관객석에 걸터앉은 성묵. 그는 먹구름이 낀 종묘 구장의 풍경을 아무 말 없이 바라봤다. ​ 그때, 갑자기 그의 눈이 무언가에 가려졌다. ​ “누구게~요.” ​ “…노아?” ​ “흐흫, 정답이에요!” ​ 기뻐하며 손을 떼는 노아. 그녀는 방실방실 웃으며 성묵에 물었다. ​ “옆에 앉아도 되죠…!?” ​ “어, 편한 대로 해.” ​ “야호~!” ​ 깨발랄한 모습으로 기뻐하는 그녀. 무표정하던 성묵의 얼굴에 웃음이 살짝 감돌았다. ​ “별일이네요, 성묵 오빠가 이렇게 감성에 젖은 모습이라니…! 혹시 오늘 경기 부담되세요…?” ​ “조금은? 안 된다면 거짓말이겠지.” ​ 나 하나 잘하면 그만이던 현역 시절이었다면 이런 감정도 품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주변 사람들이 소중해지는 만큼, 그들의 미소를 잃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고스란히 부담으로 다가왔다. ​ 성묵의 표정에서 그 감정을 어느 정도 읽은 듯한 노아. 그녀는 갑자기 자리에서 쏙 일어났다. ​ “좋은 방법이 있어요, 잠시만 기다리세요…!!” ​ 그리고는 쌩 달려가 버린 노아. 약 5분 정도 뒤, 그녀는 손에 뭔가를 쥔 채 돌아왔다. ​ “성묵 오빠, 오른손 펴볼래요?” ​ “응? 갑자기?” ​ “해줄 게 있어서 그래요! 눈도 감아주세요…!” ​ “으음….” ​ 일단은 해달라는 대로 해주는 성묵. 눈을 감고 손바닥을 내주었는데, 뭔가 이상한 감각이 느껴진다. ​ 지익, 직-! ​ 맨들맨들한 뭔가로 손 위를 직직 긋는 느낌이랄까. 요상한 감각에 성묵은 흠칫 놀랐다. ​ “윽…?!” ​ “떽! 금방 끝나니까 눈 감고 계세요!” ​ 야단치며 눈을 못 뜨게 막는 노아. 성묵의 궁금증이 한창 도질 때쯤에 끝이 났다. ​ “끝났어요, 눈 뜨셔도 돼요!” ​ “쓰읍, 뭐지…?” ​ 이내 눈을 뜬 성묵. 그는 곧 볼 수 있었다. 손바닥 위에 쓰여진 한 문구를 말이다. ​ [전국 No.1 투수!! ( •̀ᄇ• ́)ﻭ✧ ] ​ “이건….” ​ “마운드에서 힘드실 때면 항상 생각하시는 거예요…! 후후, 나는 전국 넘버원이다…!!” ​ “넘버원이라.” ​ 확실히 포텐셜 하나는 넘버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미래의 이야기다. ​ “아직은 갈 길이 좀 먼데?” ​ “결국 되실 거잖아요? 미리 좀 외쳐두면 뭐 어때서요! 그리고….” ​ “그리고?” ​ “우으음, 그게 말이죠오….” ​ 얼굴을 붉히며 우물쭈물하더니, 곧 몸을 일으키며 성묵의 양 어깨를 착 붙잡는 그녀. ​ 성묵의 얼굴에 천천히 자기 얼굴을 가져다 대던 노아는, 곧 그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 “…이미 오빠는 저한테 넘버원이에요, 누가 뭐라고 해도.” ​ “…!” ​ “꺄아, 부끄러…!! 먼저 가볼게요…!” ​ 후다닥 도망쳐버린 노아. 예상치 못한 발언에 눈을 깜빡이던 성묵. ​ 그는 이내 씩 웃음 지었다. ​ ​ ​ ######## ​ ​ “……하하.” ​ 오른손 글러브를 벗자, 거기에는 그대로 쓰여있다. 경기 전 노아가 써준 ‘전국 No.1 투수!!’ 라는 글자가. ​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성묵은 이 단순한 문구를 보며 꽤나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을 느꼈다. ​ 전국 넘버원. 이 한국 고교야구의 넘버원 투수라는 것은, 전 세계의 유망주 투수들 중 정상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 야구를 하는 수백 국가의, 수백만 명의 투수 중 1위. ​ 그 정도 존재가 되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퍼포먼스를 보여줘야 하는 것인가. ​ ‘…아무도 따라 하지 못하는, 나만의 스페셜 원(Special One).’ ​ 마침 성묵에게는 있지 않은가. 조건부로 제 스텟을 마음껏 올렸다 내렸다 하는 독보적인 스킬인 태양신맥이. ​ 한 시즌, 아니 한 시합 통째로는 불가능하다. 하지만 딱 한 타자를 상대로 한다면, 흉내 정도는 낼 수도 있을 터. ​ “그래, 미리 전국 넘버원 타이틀 좀 땡겨쓰지 뭐.” ​ 눈을 감은 성묵. 그가 곧 결연한 표정으로 눈을 뜨며 낮게 읊조렸다. ​ “…오프(Off)” ​ [태양신맥이 비활성화됩니다!] [태양신맥에 의한 스탯 변화가 초기화됩니다!] ​ 잠시 능력치 강화를 없앤 성묵. 그는 다리를 높게 쳐들고는, 초구를 힘차게 뿌렸다. ​ 퍼엉!! ​ “스트라이크…!!” ​ [바깥쪽에 정확히 꽂히는 스트라이크! 151km의 공을 용감하게 꽂아 넣는 금성묵 선수입니다…!!] [박태제 선수는 하나 지켜봤죠? 원래 초구를 잘 치지 않는 선수입니다만, 제2구 부터는 본격적으로 배트를 낼 것으로 보입니다!] ​ 불룩! ​ [태양신맥이 재활성화됩니다!] [직구 스텟이 A->A+로 강화됩니다!] [직구 스텟이 A+->S로 강화됩니다!] [써클 체인지업 스텟이 A+->S로 강화됩니다!] ​ 오프(Off) 상태가 끝나고 다시 부풀어 오른 성묵의 하반신. 그걸 누군가 눈치채기도 전에, 성묵은 다시 오른발을 키킹하며 2구를 던졌다. ​ 뻐엉--!!! ​ “스트라이잌…!!” ​ “……!!” ​ [아, 직구!! 162km!!] [박태제 선수의 배트가 헛돌아갑니다…!!] ​ ‘분명 150km대의 공이 올 줄 알았는데.’ ​ 150km의 공에 타이밍을 맞췄던 만큼, 단 한구만에 10km나 빨라진 공에 제대로 반응하긴 힘들었다. ​ ‘…그래, 갑자기 느려질 수가 있으면 갑자기 빨라질 수도 있겠지.’ ​ 박태제는 1회에 성묵이 최혁수에게 보여준 ‘그 공’을 떠올렸다. 최상급의 컨택 능력을 갖춘 최혁수가 쌍욕을 하며 당한 그때 그 공. ​ 160km의 공을 던진 뒤, 같은 폼에서 바로 150km의 공을 뿌리며 말도 안 되는 완급조절. 가히 불가사의한 영역이다. ​ ‘같은 폼에서 저 정도의 완급을 조절하다니, 그런 짓이 가능할 리가 없는데….’ ​ 그런데 그걸 해내는 자가 눈 앞에 있다. 그렇다면 그것까지 계산에 넣고 상대하는 수밖에 없다. ​ ‘…그런 선택지가 머릿속에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해.’ ​ 박태제는 천재라는 이름에 걸맞은 타격 능력을 보유한 타자. 어지간한 공은 커트하며, 좋은 공이 왔을 때 담장 밖으로 보낼 힘이 그에겐 있다. ​ ‘자, 와라…!!’ ​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제 3구를 기다리는 박태제. 성묵은 그를 보며 씩 웃었다. ​ “…스위치.” ​ [태양신맥에 의한 스탯 변화가 초기화됩니다!] [직구 스텟이 A->A+로 강화됩니다!] [구위 스텟이 A->A+로 강화됩니다!] [구위 스텟이 A+->S로 강화됩니다!] ​ 공 세 개에 세 종류의 스탯. 성묵이 던진 모험수였다. ​ ‘영광으로 알라고, 네가 처음이니까…!!’ ​ “후읍…!!” ​ 주자 따위 알바 아니라는 듯, 크게 와인드업하며 제 3구를 뿌린 성묵. 박태제의 배트가 확신에 가득 찬 상태로 뿜어져 나왔다. ​ ‘몸쪽 직구다. 충분히 장타로 연결할 수 있-.’ ​ 그 순간. 박태제의 머리에 사이렌이 울렸다. 지금 이 직구는 뭔가 다르다는 감각. ​ ‘타이밍이 안 맞는다고…!?’ ​ 150km도, 160km도 아니다. 오히려 그 중간의 어딘가다. ​ 구속만 문제가 아니다. 공이 솟구친다. ​ 완벽히 궤도를 그리며 뽑힌 그의 배트를 완전히 비켜서, 용이 승천하듯 솟구치는 직구. ​ 이전의 성묵의 공에도 라이징 무브먼트가 분명 있었지만, 이렇게 공 한 개만큼 훅 솟아오르진 않았다. 구위 S의 위력은 그만큼 대단했다. ​ ‘대체 어떻게…!!’ ​ 박태제가 눈을 부릅떴다. 한 타석에 세 명의 투수를 상대하는 느낌이다. ​ 공 하나 던지고 교체하고, 또 공 하나 던지고 교체하여 총 세 명. ​ 처음 상대하는 투수에게 빠르게 익숙해지는 것이 좋은 타자를 가른다고 한다. 그런 의미에서 박태제는 좋은 타자라 할 수 있지만, 이건 상정 외다. ​ 공 하나 던지고 전혀 다른 공을 던져대는 투수? 그딴 걸 감당할 수 있을 리가 없다. ​ 퍼엉-!!! ​ “스트라잌 아우웃…!!” ​ 허망하게 헛돈 배트. 직구 세 개에 삼구삼진. 압도적인 패배. ​ 한청고의 4번 타자 박태제. 그는 0의 균형을 깰 찬스 상황에서 성묵에게 무릎 꿇을 수밖에 없었다. ​ “우효오오오옷………!!!” ​ 어퍼컷을 내지르며 포효하는 성묵. 승자의 권리를 마음껏 만끽하는 그다. ​ [삼구삼진…!! 155km의 몸쪽 직구에 박태제의 배트가 허무하게 돌아갑니다앗…!!] [이 직구는 대체 뭡니까!! 엄청난 라이징 무브먼트를 보여줍니다!! 삼진을 잡은 뒤 포효하는 금성묵! 지금의 우효는 그 어느 때보다도 우렁찹니다!!] ​ “우와아아아악-!!” ​ “미친, 실화냐……!!” ​ 전혀 예상치 못한 성묵의 승리. 천하의 박태제가 저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 한청고 측 학생들은 본 적이 없었다. 자기 팀의 4번 타자가 저리 허무하게 헛스윙 삼구삼진을 당하는 건 말이다. ​ -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갤주 업! 갤주 업! 갤주 업! -씨발 쌌다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성묵이 형 나를 가져요 제발!!!!!!!!!!!!!!!!!!!!! -미치겠네, 나 진짜 희망 가져도 되냐? 진짜로??? -아니 완급조절 실화냐? 151->162->155 ㄷㄷㄷㄷㄷㄷ ㄴ마지막 공이 개 지리는 게, 구속은 떨구고 회전수는 높여서 이전 공보다 훨씬 더 솟구침. 그냥 갤주 <- 개미친새끼임 ㅋㅋㅋㅋㅋㅋㅋ ㄴ아니 씨발 그게 왜 되는데 ㅋㅋㅋㅋㅋㅋ ​ -고개를 들어라! 박태제! 갤주에게 진 것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1, 3루 주자 그냥 얼음 ㅋㅋㅋㅋㅋ 망부석인줄 ㅋㅋㅋ -[속보] 금성묵, 물리법칙 파괴 혐의로 체포 예정 ㄴ??: 같은 폼에서 회전수 조절 불가능하다고? 되던데? ㄴ 아 ㅋㅋㅋㅋ 물리고 지랄이고 나는 되는데 어쩌라고 -갤주 세레모니 좆간지 ㄷㄷㄷ 진짜 기쁜가 봄 ㄴ그거 봄? 마운드 내려오면서 갤주 피식 웃는거 ㅋㅋㅋㅋ 캬 존나 멋있어 -아 오늘 잠 다 잤닼ㅋㅋㅋㅋㅋ 뽕 찬다 ㅋㅋㅋㅋ ​ 찬물이 끼얹어진 듯한 한청고 측 관객석. 그들은 응원단장을 위시로 다시금 응원 열기를 북돋기 위해 노력했다. ​ “자자, 다들 우리 팀 타선의 숨겨진 힘을 알잖냐. 끝까지 응원해보자고…!!” ​ “오오!! 한청고 화이팅…!!” ​ 그렇게 다시 모교의 분발을 외치며 텐션을 올리려는 한청고 관중들. 그러나 금성묵이란 남자는 자비가 없었다. ​ 뻐엉-!! ​ “스트라잌 아우웃…!!” ​ “우효오…!!” ​ “…Fuck(씨발)!!” ​ 성묵의 강속구에 삼진을 당한 뒤 배트를 내동댕이치며 들어가는 카를로스. ​ 딱! ​ “아웃…!!” ​ 열심히 스윙 해봤지만, 빈약한 투수 플라이로 물러난 고은찬. ​ 따악! ​ [앗, 2루수 쪽으로 흐르는 큰 바운드! 잡아서 던져보지만 1루에서 세잎…!!] ​ 7번 타자 한이안이 내야 안타로 출루했지만, 그건 그닥 문제가 되지 않았다. ​ 뻐엉-!! ​ “스트라이잌 아우웃……!!!” ​ “우효오…!!” ​ 8번 타자 심건우를 완벽히 찍어누른 성묵. 그는 7회에도 상대 팀 타순을 완벽히 제압하는 데 성공했다. ​ 자기가 마운드 위에 있는 동안은 점수 낼 생각은 하지 말라고 외치는 듯한 퍼포먼스다. [7이닝 무실점 12K…!! 근 1년 내로 한청고에게 이 정도로 많은 삼진을 잡아낸 선수는 없었습니다! 대단합니다 금성묵 선수!] [금성묵 선수가 잘 던지는 투수인 건 이제 고교야구를 좀 보는 사람이라면 많이들 알 겁니다. 그런데 한청고를 상대로도 이렇게 잘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오늘 고교야구 팬들에게 자기 이름 석 자를 더욱 강렬하게 각인시키는 금성묵 선수입니다!] ​ 중립을 지켜야 하는 해설위원들이 호들갑을 떨 정도로 엄청난 피칭을 이어 나가는 성묵. 문혁고 측 학생들은 슬슬 기대감을 가지기 시작했다. ​ “아니, 금성묵 너무 잘 던지는데…?” ​ “오늘 진짜 뭔 일 나는 거 아니야?” ​ 들뜬 관중들이 그런 생각을 품기 시작하던 그때, 눈앞에 무언가가 떨어졌다. ​ 똑, 똑- ​ “어….” ​ “비 온다.” ​ 쏴아아아- ​ 예보대로 내리기 시작한 비. 하나 둘 우비를 꺼내 드는 관중들, 그냥 맞고 있기에는 빗줄기가 굵었다. ​ “이거, 구름 보니까 당분간 안 그칠 거 같은데.” ​ “일기예보엔 새벽까지 내린다더라, 오늘 경기 중엔 안 그칠 걸.” ​ [아, 종묘 구장에 비가 내립니다!] [예보에 따르면, 오늘 새벽까지 내릴 예정이라고 하는데요. 이게 경기에 어떤 변수가 될 것인지, 지켜봐야 할 것 같습니다!] ​ 관중들이 하나둘 우비나 우산을 꺼내 드는 와중에, 미동도 않고 앉아서 경기에 집중하는 남자가 있었다. ​ 바로 성묵의 스승, 마덕수다. ​ “끌끌, 이 중요한 경기에 비가 내린다라…. 오늘 경기 결과는 하늘이 정하겠구먼.” ​ 구름이 잔뜩 낀 하늘을 올려다본 마덕수. 그는 지금 내리는 이 비가 경기의 결과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거라고 확신했다. ​ ‘보통이라면 강호에 비해 이런 수중전 경험이 부족한 문혁고가 약세인 게 일반적이지만, 흠….’ ​ 뭔가가 걸리는 마덕수. 그는 문혁고에게는 아직 드러나지 않은 힘이 있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중심엔 물론 성묵이 있었고 말이다. ​ 쏴아아아- ​ 멈출 줄 모르고 쏟아지는 비. 과연 이 비가 어느 쪽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지, 아직 아무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