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악!! ​ 딱!! ​ “우와아….” ​ “미친….” ​ 묵직한 타격음이 연신 구장에 울려 퍼진다. 문혁고의 대진 상대인 한청고의 훈련이 한창 진행 중이다. ​ “오케이, 태제 라스트.” ​ “옙.” ​ 한청고의 4번 타자, 괴물 박태제. 그가 배트를 휘두르자, 전쟁터의 포성을 연상케 하는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 따아악-!! 따악!! ​ 엄청난 비거리를 뽐내며 담장을 넘어가는 배팅볼들. 이걸 보고 간담이 서늘해지지 않는 투수는 거의 없으리라. ​ “역시 박태제인가….” ​ “…국대 클린업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니까.” ​ “좋아, 다음은 카를로스.” ​ “넵!” ​ 검은 피부의 타자가 타석에 들어서고, 또다시 엄청난 파열음을 일으키며 타구를 쭉쭉 날린다. 지켜보던 기자들은 연신 감탄을 내질렀다. ​ “한청고의 순혈 정책을 깨트리게 만든 장본인…!” ​ “대단한데, 미국 청소년대표팀의 붙박이 클린업이라지?” ​ 카를로스 위스덤. 미국 태생인 그는 한국 야구의 강함을 동경해 어린 나이에 유학을 택한 케이스다. 처음에는 흑인이라는 점 때문에 겉돌던 시기도 있었지만, 압도적인 실력으로 팀에 융화되며 여기까지 왔다. ​ “나이스 배팅, 카를로스.” ​ “오오, 혁수. 잘 마무리하라고.” ​ 그 뒤에 케이지에 들어온 타자인 최혁수와 하이파이브를 하며 교대하는 카를로스. 최혁수 역시도 엄청난 타자인 건 매한가지다. ​ “오오, 정밀 기계 최혁수…!” ​ “스트라이크 존 전체가 핫 존이라는 천재 타자!!” ​ 따악! 딱! ​ 최혁수가 친 타구가 구장 방방곡곡 떨어진다. 좌, 중, 우 가리지 않고 그가 원하는 곳으로 날아가는 타구. ​ 그는 극한의 배트 컨트롤 능력을 갖춘 타자로서, 어떤 공이든 안타로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전국구 타자다. ​ 이 압도적 광경을 보며 감탄한 스포츠 기자. 그는 차마 입에 담아서는 안 될 단어를 입에 담고 말았다. ​ “역시 박카스 트리오…! 읍읍!?” ​ “어이! 그 단어는 말하면 안 돼! 한청고에 출입 금지 당하는 수가 있다고!” ​ “예엣…!?” ​ 박태제의 박, 카를로스의 카, 최혁수의 수자를 따와서 박카스 트리오라고 한청고의 클린업을 부르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기자들도 이걸 인용하곤 했지만 어째서인지 그 기자들 모두가 한청고 취재 금지 처분을 당했다고 한다. ​ “세 선수 모두가 그 명칭을 혐오하거든. 아무래도 입에 착착 붙는 것에 비해 어감이 썩 좋지 않아서 그런가 봐.” ​ “아앗….” ​ 박카스가 뭐 어때서, 라고 생각은 하지만 싫다는데 어쩌겠는가. 한청고 쯤 되는 강팀의 취재가 금지되는 건 막심한 손해였기에, 기자는 입에 지퍼를 채우기로 했다. ​ 뻐엉---!! ​ 그때였다. 천둥이 내려치는 듯한 포구음. 기자들은 우르르 그쪽으로 몰려갔다. ​ 뻐엉!! ​ 한청고의 에이스, 류한울이 불펜에서 공을 던지고 있다. 가볍게 던져도 150km 후반대가 나오는 그의 공은 가히 어마무시한 구위를 자랑했다. ​ 뻐엉-!! ​ “우와앗, 저기 맞으면 사람 죽겠는데…?” ​ “구위 살벌하다, 살벌해.” ​ 그런데 불펜에 이질적인 존재가 한 명 있었다. 얼굴에는 선글라스를 낀 채, 철제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연신 빨대로 제로 콜라를 들이켜는 남자가. ​ 쪼로록- ​ 그의 정체는 자타공인 최강의 마무리 투수, 류택진이다. ​ “오옷, 한청고의 류 씨 형제!” ​ “그림 좋은데!!” ​ 형제가 모두 전국구 투수라는 점은 상당한 주목 요소였기에 많은 기자가 둘이 나란히 불펜에서 공을 던지는 그림을 원했으나, 류택진은 절대 그 무거운 엉덩이를 의자에서 떼지 않았다. ​ “볼 좋다! 내일 한울이 혼자서 다 던져도 되겠는데?” ​ “당연하지 형, 내일 형 샤워 안 해도 되게 해줄 테니까 기대하라고.” ​ 세상만사 귀찮다는 듯한 류택진과, 그게 또 당연하다는 듯 맞장구쳐주는 류한울. 그는 어지간해서는 등판하고 싶어 하지 않는 눈치다. ​ “류택진, 생각보다 훨씬 게으른데요…!?” ​ “저래 보여도 고교 통산 방어율이 0점대야. 홈런은 고교 3년을 통틀어 단 한 번도 맞은 적이 없어.” ​ “예엣…!?” ​ “저 녀석은 살아 숨 쉬는 억제력 그 자체야. 불펜에서 몸을 푸는 것만으로도 상대 팀을 급하게 만들지. 9회가 되기 전에 점수를 내야 한다- 라는 압박감은 가히 상상하기도 힘든 정도라고 하더군.” ​ 고교야구가 너무 쉬워서 나태해진 남자, 류택진. 그의 게으름은 문혁고를 상대로도 변함없이 발동될 예정으로 보인다. ​ “그런데 하나 궁금한 게 있는데요. 왜 한청고는 훈련 세션을 이렇게 대놓고 공개하는 겁니까? 전력이 유출될 수도 있을 텐데요.” ​ “볼 거면 봐라 이거지, 니들이 뭔 대책 세워도 다 깨부술 수 있다는 압도적인 자신감의 표현인 거다.” ​ “………!!” ​ 한청고는 정석적으로 강하다. 골고루 발달한 꽉 찬 육각형과 같은 팀이라고 할 수 있겠다. ​ 게임의 특성상 대관령고 처럼 한두가지 능력치가 기형적으로 발달한 ‘기믹형 학교’가 꽤 많은 편인데, 한청고는 그런 게 없이 그냥 강했다. ​ “자, 훈련 종료!” ​ 우렁찬 수석 코치의 외침과 함께 종료되는 훈련. 선수들은 꾸벅 허리 숙여 인사하고는 해산했다. ​ “꺄악, 최혁수 선수! 여기 좀 봐주세요!” ​ “택진 오빠!! 사랑해요…!!” ​ 미래의 스타 군단이란 호칭에 걸맞게 벌써 개인 팬이 붙은 한청고. 그들은 훈련의 피로를 핑계로 거절할 수도 있지만, 한 명씩 꼼꼼히 팬서비스를 해줬다. ​ ‘팬서비스를 게을리하는 녀석은 경기에 나오지 못할 줄 알아라!’ ​ 한청고의 창단 이래 쭉 지켜진 이 원칙은, 한청이 뼛속까지 명문이라는 걸 입증하는 면모 중 하나기도 하다. ​ 한청고의 감독인 차강훈이 구장을 나서자, 대기 중이던 기자들이 우수수 달라붙었다. ​ 그는 고교야구판에서 꽤 유능한 감독으로 이름이 난 명감독으로서, 압도적 카리스마로 한청고를 지휘하고 있다. ​ “차강훈 감독님, 인터뷰 괜찮으십니까!” ​ “예, 하시지요.” ​ 그가 선선히 허락하자 기자들은 화색이 되어 우수수 질문을 던져대기 시작했다. ​ “세종기의 진출을 결정지을 준결승전 상대가 문혁고로 결정되었습니다. 한청고의 상대로 금강고, 기린고, 대관령고 등을 예상했던 팬들이 많은데 전혀 다른 결과가 나온 상황입니다. 혹시 지금의 대진을 예상하셨나요?” ​ “아뇨, 예상 못했습니다. 애초에 누굴 상대하느냐는 그닥 중요하지 않습니다. 한청고는 누가 올라오든 이긴 뒤 전국으로 갈 뿐입니다.” ​ “선발로 등판할 금성묵 선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좋은 선수더군요, 제 공을 던질 줄 안다는 건 훌륭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청고의 타순은 그 어떤 투수를 상대로도 점수를 뽑아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건 그라도 예외가 아니지요.” ​ 거기에 한 기자가 손을 들어 질문했다. ​ “혹시, 방심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다른 세종기 진출 경험팀도 모두 문혁고에게 무너졌습니다만….” ​ “…….” ​ 꿈틀! 차강훈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심, 그가 가장 싫어하는 단어다. ​ 작년 세종기에서도 ‘방심해서 떨어진 거 아니냐?’하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실눈을 가늘게 뜨며 기자에게 답했다. ​ “방심이야말로 저희와는 가장 거리가 먼 단업니다. 그저 우린 수백 년간 쌓아온 한청고라는 이름에 쌓인 역사와 힘을 믿을 뿐입니다. 봄 대회의 매 경기를 전국 대회라고 생각하고 임하고 있으니, 방심하는 거 아닌가 하는 걱정은 하지 않으셔도 좋습니다.” ​ 그의 말에 납득한 듯한 기자. 곧 다른 질문이 날아왔다. ​ “이번 경기 키플레이는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 “선수 전원입니다. 한청고는 결코 선수 한명에게 의존하는 팀이 아니니까요.” ​ 그런 말이 있다. 한청고의 백업 타자는 타 팀에 가면 클린업을 칠 수 있고, 패전조 투수는 타팀에 가면 에이스 놀이를 할 수 있다는 그런 말. ​ 약간의 과장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투타 모두에서 서울권 톱클래스의 전력을 자랑하는 팀이란 건 의심의 여지가 없다. ​ “마지막으로 상대 팀인 문혁고에게 할 말이 있으시다면…?” ​ “문혁고는 좋은 팀입니다. 창단 팀이 여기까지 올라온 것도 처음이라고 하더군요. 이번 봄 대회에 활력을 불어넣었다는 점은 인정하지 않을 수가 없기에, 박수받아 마땅합니다. 그러나….” ​ “그러나…?” ​ 다시 실눈을 치켜뜨는 차강훈. 그는 꽤 단호한 어조로 말했다. ​ “박수칠 때 떠나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전국을 가지 못하는 건 아쉽겠지만, 이번 경기를 통해 많은 것들을 배워갔으면 합니다. 그걸 토대로 내년엔 더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겁니다.” ​ “……!” ​ “인터뷰는 여기까지 하지요, 감사합니다.” ​ ‘진다’라는 건 전혀 생각지도 않는 듯한 차강훈 감독의 인터뷰. 그러나 그들이 오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다. ​ 이유는 단순하다. 그저, 한청고가 그런 말을 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기 때문이다. ​ ​ ​ ####### ​ ​ 난 수업을 땡땡이쳤다. 옥상에 드러누워, 하늘을 보며 누워서 통화를 하고 있다. ​ 절대 평면벡터의 내적과 외적이니, 로그함수의 밑변환이니 하는 소리가 듣기 싫어서 도망친 것은 아니다. ​ 도연 누나와 한청고의 전력에 관해 긴밀한 통화를 나눌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쉬는 시간에 하면 되는 거 아니냐고? 젠장, 네가 뭘 알아...!! ​ [“…이상이야.”] ​ “쓰읍, 역시나.” ​ 전력 비교 결과는 간략하다. 우선 1번부터 9번까지, 전체적인 타선은 절대적인 열세다. ​ [“한청고 타선은 빈틈이 없어. 아마 투수가 가장 상대하기 싫은 팀 중 하나일 거야.”] ​ “확실히, 제일 싫어하는 유형이긴 하지.” ​ [“그래도 한가지 긍정적인 점은, 클린업만 비교했을 때는 그렇게 꿇리지 않는다는 거야.”] ​ 저쪽에 박카스 트리오가 있다면 이쪽에는 금석류 트리오가 있다. 홈런 개수만 비교해봐도, 파괴력 하나는 절대 밀리지 않는다. ​ ‘음, 근데 이번 경기에선 내 타석에 영 맥을 못 출 확률이 높긴 한데.’ ​ 이번에 파워 스탯이 A로 오르긴 했지만, 태양신맥을 투수 상태에 쓰기도 벅찬 상태라 추가적인 스탯 펌핑을 기대하기 힘들다. ​ 최선은 다해보겠지만, 선발투수인 류한울을 상대로 정타를 만들어내긴 힘들지도. ​ [“투수진도 압도적인 열세인 건 마찬가지야. 선발진의 퀄리티, 그 뒤를 받쳐주는 서브 투수들까지, 비교하는 게 미안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 ​ “크흠….” ​ [“…지만! 팬심 조금 보태서 말하자면, 이번 경기의 핵심이 될 성묵이 너와 이동혁 선수는 한청고에 비교해서도 그리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해.”] ​ 불편한 기색을 보이자 당황하며 첨언하는 도연 누나. 나는 여기에다 추가 질문을 던졌다. ​ “오호, 그건 다행이다. 그래서 승률이 몇 프로인데?” ​ [“으응, 그게….”] ​ “그게?” ​ [“13%….”] ​ “…….” ​ 차마 거짓말은 하지 못 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하는 도연 누나. 아무리 그래도 30%는 나올 줄 알았는데 13%라니. ​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예선에서 한청고는 선 넘잖아, 시발!!’ ​ 그전까지는 한 경기 한 경기 살아남느라 바빠서 체감하지 못했지만, 막상 ‘한청고를 이겨라!’하는 상황까지 다다르니 쌍욕이 마렵다. ​ 원래는 2년 정도 충분한 경험을 쌓으며 성장한 뒤, 세종기에 진출해 4강쯤에 만나서 자웅을 겨뤄보는 게 국룰인 녀석들이다. ​ ‘두근두근 베이스볼’의 최고 단계였던 ‘프로’에서도 이건 너무하다 싶은지 경험치가 쌓이기 전에는 대진에 등장하지 않는 녀석들인데, 역시 ‘익스트림’은 다른 것일까. ​ 세종기로 가는 수문장 자리에 떡하니 한청고를 세울 줄이야. 정말이지, 뭐 하나 쉽게 가는 게 없다. ​ “후우, 누나 입에서 직접 들으니까 뭔가 사형선고 같은데.” ​ [“너무 신경 쓰지 마, 나도 많이 틀리거든.”] ​ “누나가…?” ​ 금시초문인데. 작두 탄 듯이 전력을 낱낱이 분석해서 1티어 히로인으로 꼽힌 게 그녀 아닌가. ​ 심지어 이제는 손발로 부릴 수족들까지 대거 들인 상황, 더 잘 맞추면 맞췄지 틀릴 일은 거의 없는 거 아닌가? ​ [“정확히 말하자면, 성묵이 너에 관한 것만 그래.”] ​ “나에 관한 거라니?” ​ [“압도적인 열세 상황에서도, 성묵이 네가 등장하면 판도가 바뀌어. 그리곤 거짓말같이 팀이 상승세를 타. 이런 선수는 너 말고는 본 적이 없어.”] ​ “누나, 너무 비행기 태우는 거 아녜요?” ​ [“난 진심이야.”] ​ “크흠….” ​ 대뜸 저런 말을 들으니 낯 뜨겁구먼. 확실히 내가 찬스 상황을 즐기고, 더 강한 편이기는 하지만 그게 도연 누나가 예상해둔 정밀한 확률을 뒤집어엎을 정도인진 몰랐다. ​ [“그래서 성묵이 너는 어떻게 생각하는데? 질 거라 생각해?”] ​ “이겨.” ​ 13퍼센트. 낮다면 확실히 낮은 수치지만 0프로는 아니다. 그녀의 말대로 내가 그 확률을 뒤집을 힘이 있다면, 기꺼이 뒤집어 주리라. ​ [“후훗, 그 대답이 듣고 싶었어.”] ​ 기쁜 듯이 웃는 도연. 그렇게 통화를 마치려는데, 나는 문득 잊고 있던 게 생각이 나 물었다. ​ “누나, 혹시 기억나?” ​ [“응, 뭐가?”] ​ “내가 집에 놀러 갔을 때, 노천탕….” ​ 쿠당탕!! ​ [“꺄악!! 갑자기 사무실에 쥐가…!”] ​ 뚜,뚜,뚜- ​ “………??” ​ 갑자기 뚝 끊어진 전화. 그날의 일은 아주 잘 기억하고 있다는 그녀의 격렬한 표현에 나는 씩 웃었다. 꽤나 그때의 일이 부끄러운 모양. ​ “후우, 날씨 좋네.” ​ 휘이잉-! ​ 어느덧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선선한 바람을 타고 날아드는 꽃잎들. ​ 나는 다짐했다. 반드시 이기리라고. 흩날리는 저 꽃잎들처럼, 우리들의 승리도 화려하게 피어나게 만들 것이라고.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