덜컥! ​ 나는 공원의 자판기에서 음료수를 뽑아 들고는, 올리비아에게 건네줬다. ​ “고마워요, 잘 마실게요.” ​ “그래.” ​ 나와 그녀는 그네에 나란히 앉았다. 적당히 흔들거리는 그네 위에서 우리 둘은 음료를 홀짝였다. ​ “몸 상태는 괜찮으세요? 훈련 때문에 피곤하실 거 같은데.” ​ “괜찮아, 잠들 시간까지 아직 시간이 꽤 남았거든.” ​ “아하.” ​ 납득한 듯 고개를 주억이는 그녀. 우리 둘은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나눴다. ​ ‘사실 뭐, 대단한 이야길 하려고 부른 건 아니라서.’ ​ 우리 둘은 일단은 ‘친구’다. 친구끼리 꼭 용건이 있어야 대화를 나누는 건 아니지 않나. 오히려 지금 이게 훨씬 더 자연스러운 모습일 거다. ​ “영어 수업 때 깜짝 놀랐어, 네가 갑자기 내 옆에 앉을 거라고 생각이나 했겠냐." ​ 교내 최고의 유명인인 그녀가 뜬금 내 옆에 앉자, 상당한 시선이 몰렸던 건 꽤 잊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치만, 전 성묵씨 말곤 따로 친구라 할 만한 사람이 없는걸요." ​ “…맞다, 그랬지.” ​ 엄청난 미녀에다가 능력까지 갖춘 것과 별개로, 자발적 아웃사이더 생활을 유지 중인 올리비아 아닌가. ​ “성묵씨가 불편하시면, 다른 곳에 앉을게요.” ​ “아냐, 나도 친구 별로 없긴 매한가지거든. 내 옆자리라면 언제든 환영이라고.” ​ “휴, 다행이네요….” ​ "다음엔 도시락만 좀 몰래 줘, 앞에 놈들이 엿들은 탓에 해명하기 곤란했거든." ​ 내 말에 귀를 쫑긋 세우는 그녀. 꽤나 궁금해하는 눈치다. ​ “다들 오해라도 하신 건가요, 저희 관계에 대해서?” ​ “그래, 아무래도 도시락 싸주고 받는 게 일반적인 관계는 아니니까.” ​ “어떤 식으로…?” ​ “뻔하지 뭐, 너랑 내가 사귀는 거 아니냐. 그런….” ​ 그 말에도 흔들림 없이, 또렷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그녀. ​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 “뭐라 하긴, 절대 아니니까 이상한 소리 말라 했지.” ​ “절대….” ​ 뭔가 뾰로통해 보이는 올리비아. 오른쪽 뺨이 부풀어 있다. ​ “크흠, 너는 반쯤은 공인인데 괜히 소문 퍼져서 좋을 건 없잖냐. 그것도 나 같은 양아치 출신이랑.” ​ “말했잖아요, 저는 성묵씨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 ​ 휘릭! ​ 나는 다 마신 음료수를 휙하고 쓰레기통으로 던졌다. 유려한 포물선을 그리며 안으로 쏙 빨려 들어가는 음료 캔. ​ 멍하니 지켜보던 올리비아는 이 거리에서 캔을 집어넣은 게 꽤 놀란 눈치다. ​ “역시 투수는 이런 부분에서도 다른 건가요…!?” ​ “캔 던지는 게 뭐 대단한 거라고, 올리비아도 해볼래?” ​ “아, 잠시만요.” ​ 호로록- ​ 내 제안에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는 남은 음료수를 들이켜는 그녀. 이내 올리비아는 캔을 쥐고는 힘껏 팔을 휘둘렀다. ​ 땡그랑! ​ “앗….” ​ 그저 땅바닥에 꽂혀서는 데구르르 구르는 캔. 나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이거 이거, 요리 외에는 영 꽝인데?” ​ “읏, 저도 배우면 잘 던질 수 있어요…!” ​ “오호라, 그렇게 나오시면 내가 한 수 안 가르쳐줄 수가 없잖냐.” ​ “좋아요, 가르쳐 주세요…!” ​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올리비아. 나는 방금 바닥을 구른 캔을 주워 들고는, 그녀에게 다가가 손에 캔을 쥐여주었다. ​ “올리비아, 너도 왼손잡이지?” ​ “아, 네. 말한 적 없을 텐데 어떻게?” ​ “너 요리하는 거 본 적 있잖아, 왼손으로 칼 쥐더만.” ​ 그걸 유심히 봤다는 것에 꽤 놀라는 그녀. 잔잔한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머물렀다. ​ “자자, 초심자 눈높이에 맞춰서 알려줄게, 읏챠.” ​ 나름 탑급 연예인들의 시구 지도 역시 많이 해본 나다. 몸 쓰는 느낌을 직접 알려주기 위해 그녀의 뒤로 다가가 어깨를 붙잡았다. ​ “…읏!” ​ 몸을 부르르 떠는 올리비아. 아무래도 남이 몸에 손을 대는 게 좀 민감한 모양이다. ​ “초보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실수가, 힘만 잔뜩 준 채로 팔만 냅다 휘두르는 거야.” ​ “그러면 어떻게 할까요?” ​ “팔꿈치가 먼저 나간다는 이미지가 제일 좋아, 이런 느낌으로.” ​ 나는 그녀의 팔을 잡고는, 포물선을 그리며 자세를 알려주었다. 여전히 특정 포인트에서 부르르 떠는 건 마찬가지지만, 그래도 이해력이 꽤 괜찮다. ​ “좋아, 마지막에 손목으로 살짝 밀어주는 느낌으로. 이해했지?” ​ 사실 이 정도 느낌만 가져가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녀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 “아뇨, 잘 모르겠어요.” ​ “……엥??” ​ “조금만 더 알려주세요.” ​ 뭐지, 충분히 잘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슬쩍 뒤를 돌아 자기 어깨를 보여주는 그녀. 아까처럼 직접 붙어서 알려달라는 것 같다. ​ “자, 반복해서 해줄게. 이렇게 하면….” ​ “아하….” ​ 밀착 코칭도 효과가 있던 것일까. 이젠 올리비아의 눈에서 나름 자신감에 엿보였다. ​ “한 번 해볼게요.” ​ 자세를 잡는 그녀. 다리를 들고, 어깨를 뽑아내는 자세가 꽤 볼만하다. 그렇게 던져진 캔은 꽤 유려한 포물선을 그렸다. ​ 타앙! ​ “성공이에요…!!” ​ “오오!” ​ 내 양손을 맞잡고 크게 기뻐하는 올리비아. 나도 내 제자의 성공에 내심 기뻐 폴짝 뛰었다. ​ 그러다가 문득 정신이 들고는, 헛기침하며 깍지를 풀고 떨어지는 우리 둘. ​ “크흠, 마저 앉을까.” ​ “네, 좋아요….” ​ 그네에 다시 앉은 우리 둘. 아까와 차이점이 있다면, 이제는 음료수가 없어서 손이 자유롭다는 것. ​ 올리비아는 발을 몇 번 구르더니, 능숙한 자세로 그네를 탔다. ​ “오, 생각보다 잘 타네?” ​ “생각보다라니, 제가 그네를 잘 타면 이상한가요…?” ​ “부잣집 아가씨니까, 이런 데서 놀아본 적 없을 줄 알았지.” ​ “가문의 앞마당에 그네가 있었어요. 아버지가 일 끝나고 오시면 밀어주셨는데, 어릴 때 그걸 꽤 좋아했던 것 같아요.” ​ 추억에 잠긴 얼굴의 올리비아. 이내 꽤 우울한 얼굴로 입을 뗀다. ​ “…최근에 아버지에게 연락받았어요. 자기가 잘못했으니 최대한 빨리 영국으로 돌아와 달라고요.” ​ “………!” ​ 이건 또 무슨 일이래. ​ “놀라운데, 네 말대로 그냥 관심 끄고 계실 줄 알았는데.” ​ “그러게요, 저도 아버지를 아직 잘 모르고 있었나 봐요.” ​ “결정은 내렸어?” ​ “………….” ​ 침묵하는 올리비아. 생각이 꽤 많아 보인다. ​ “아직 잘 모르겠어요. 아버지는 한국 같은 요리 변방국에서 시간 낭비하지 말고, 돌아와서 램지 가문 산하 레스토랑의 수셰프 자리를 맡으라고 하세요. 요리사로서의 커리어만 생각한다면, 그쪽이 더 나은 선택지인 건 틀림 없어요.” ​ “넌 어떻게 하고 싶은데?” ​ “저는…….” ​ 눈을 질끈 감은 올리비아. 그녀는 곧 고개를 들어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본다. ​ “성묵씨는 제가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요?” ​ 상당히 곤란한 질문을 던져오는 그녀. 나는 여자의 마음에 대해 쥐뿔도 모르는 편이지만, 저 질문에 생각보다 많은 게 함축되어 있다는 것 정도는 느꼈다. ​ 이게 그녀의 미래를 결정할 수도 있겠다는, 그런 자의식 넘치는 생각까지도 말이다. ​ ‘그래서 더 함부로 말할 수가 없어.’ ​ “내 의견은 그닥 도움이 안 될 거 같네, 보다시피 배워먹질 못한 녀석이라 말이야.” ​ “그런가요….” ​ 시선을 떨구는 그녀. 아무래도 마음에 드는 답변은 아닐 거다. ​ 물론 내 입장에선 올리비아가 남아준다면 땡큐다. 세계관 최강급의 요리 버프를 걸어줄 수 있는 그녀가 있다면, 나는 한 단계 더 나은 선수가 되어 경기장에 설 수 있다. ​ ‘…내 성적 때문에 남의 미래를 망칠 수는 없잖아.’ ​ 점점 나는 이곳을 게임이 아닌, 하나의 현실 세계로 받아들이고 있다. ​ 그녀는 내 눈앞에서 숨 쉬고 있고, 만질 수 있으며, 생생하게 대화를 나눌 수도 있다. ​ 이미 내가 죽을 확률은 희박하다. 더 이상 나 좋을 대로 누군가를 이용하고 싶지 않다. ​ 세계 최고의 요리사가 될 자질을 가진 올리비아다. 요리에 감정을 싣는 방법의 실마리도 어느 정도는 깨달은 것 같으니, 이젠 본국에 돌아가 쟁쟁한 요리사들의 세계로 돌아가는 게 훨씬 더 발전할 수 있는 길일지 모른다. ​ 게다가 램지 가문 산하 식당의 수셰프라니, 아직 그녀가 채 성인이 되지도 않은 걸 감안하면 엄청난 자리 아닌가. ​ 나는 그녀에게 의견을 표하지 않으며 내 의사를 밝힌 셈이나 마찬가지다. 돌아가는 쪽이 너의 미래엔 더 좋을 거라고 말이다. ​ “바래다줄게, 밤도 늦었으니까.” ​ “네, 고마워요.” ​ 그렇게 밤길을 나란히 걷는 우리 둘. 꽤 깊은 침묵이 둘 사이에 흘렀다. ​ 얼마나 걸었을까. 금새 올리비아가 사는 집 앞에 도착했다. ​ “바래다줘서 고마워요. 이만 들어가 볼게요, 성묵 씨.” ​ “……그래.” ​ 그렇게 돌아서려는데, 발이 떠나질 않았다. 하고 싶었지만 내뱉지 못한 말들이 목에 탁 걸린 느낌이다. ​ “성묵씨?” ​ 의아하게 바라보는 올리비아. 머쓱한 나머지 머리를 긁적인 나는, 그녀의 눈을 바라보며 하지 못했던 한마디를 툭 내뱉었다. ​ “나는 네 요리 좋아해.” ​ “……!” ​ “앞으로도 쭉 먹고 싶은 마음 하나는 굴뚝 같아. 물론 나 혼자 먹기엔 과분할 정도로 대단한 요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 “성묵 씨….” ​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응원하마! 그럼 난 이만…!!” ​ 타다닥!! ​ 나는 그 자리를 빠르게 떴다. 젠장, 분위기에 취해 꽤나 낯뜨거운 말을 해버렸다. ​ ​ ###### ​ 털썩! ​ “하아….” ​ 집안의 문을 열고 들어온 올리비아는, 문을 닫기 무섭게 자리에 주저앉았다. ​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그녀의 머리엔 속에선 방금 전 성묵이 했던 말이 무한 재생되고 있다. ​ ‘나는 네 요리 좋아해.’ ‘네가 무슨 선택을 하든 응원하마.’ ​ 두근, 두근! ​ 안 그래도 성묵에게 감정을 품고 있던 올리비아다. 안 그래도 이성에 대한 면역이 거의 없는 그녀가 좋아하던 남자에게 대뜸 저런 돌직구성 발언을 들어버린다면, 심장이 도무지 버틸 도리가 없다. ​ “그런 말은, 반칙이에요….” ​ 한번 불붙은 소녀의 마음이란, 그 누구도 끌 수 없는 들불과도 같다. ​ 퍼지기 시작한 들불이 소년과 소녀의 세계에 어떤 영향을 줄 것인가. 그 결과는 아마도 하늘만 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