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운강의 영입을 마친 나는 소림사에서 정식으로 서류를 받았다. 아직 팀이 없다고 이야기했음에도, 주지 스님은 그런 건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는 듯한 반응이었다. ​ ‘운강이를 잘 부탁하네. 자네 같은 투수가 만들 팀이라면 필시 높은 곳까지 올라갈 것이라 믿네.’ ​ 무언가 통찰력이 있어 보이는 주지 스님에게 당부받은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소림사를 내려왔다. 그것도 석운강과 함께 말이다. ​ 내가 한 살 형이기도 하고, 이제 같은 팀이니 말을 편하게 해달라고 하여 나는 편하게 석운강에게 물었다. ​ “운강아, 내려가면 지낼 곳은 있냐.” ​ “소림사는 불교계의 상징이기도 한만큼, 연결된 사찰이 많습니다. 이미 주지 스님께서 문혁고 주변의 절에 연락을 돌렸다고 들었습니다.” ​ “쩝, 종교계도 역시 인맥인가.” ​ “그렇게 세속적인 표현보다는, 연(緣)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서로 인연이 맞아 도움받고 돕는다고 생각하는 쪽이 훨씬 세상을 따뜻하게 볼 수 있지 않겠습니까.” ​ “…그러냐.” ​ 좀 기분 나쁠 법한 발언에도 상당한 통찰력이 담긴 말로 돌려주는 운강. 나 같은 망나니는 감히 다다를 수 없는 고매한 경지다. ​ 앞으로 만들 팀에 석운강 같은 녀석이 있어서 다행이다. 나 같은 놈이 개지랄 떨면 이런 녀석이 좀 팀원들을 다독여줘야 팀이 좀 굴러갈 테니까. ​ 먼 길을 걸어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 둘은 각자 용건을 처리하다 개학 때 다시 만나기로 했다. ​ “야구부 설립 건은 금성묵 시주가 알아서 잘하리라 믿겠습니다. 언제든 준비가 되면 사찰로 연락을 주시지요.” ​ “그래, 조만간 보자고.” ​ “아미타불.” ​ ​ ​ ######## ​ ​ 순조롭게 흘러갈 줄 알았던 야구부 설립은, 이사장의 시큰둥한 표정과 함께 브레이크가 걸렸다. ​ “뭐, 그걸 진짜로 해왔나?” ​ “그게 무슨…” ​ “그냥 해본 말이었는데 말이지. 크흠.” ​ 석운강의 전학 신청서를 받아 들고는 머리를 긁적이는 이사장. ​ 이사장이 만만찮은 인물인 건 알고 있었다만 이렇게까지 말을 쏙 바꿔버릴 줄이야. 나는 화를 겨우 억누르고 물었다. ​ “이사장님이 직접 내세우신 조건 아닙니까. 그 약속만 믿고 고생고생해서 데려왔는데 설마 이제 와서 말을 바꾸시는 겁니까?” ​ “……흠.” ​ 내 말에 턱을 매만지더니, 휴지에 코를 팽 풀고는 나를 쳐다보는 이사장. ​ “야구부가 없던 곳에 새로 만드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알고 있나? 지금 명문 고교들이 오래는 300년, 최소 100년 이상 전부터 야구부를 운영한 학교들일세.” “학부모회는 또 어떻고, 거기서 나오는 후원금 덕분에 그나마 굴러가지. 양심 좀 지키겠다고 회비를 걷지 않은 야구부들은 죄다 사라졌다고 하더군.” “우리 학교가 야구를 포기했기 때문에 그 예산으로 다른 분야에서 전국에 먹히는 학생들을 키울 수 있었지. 미술, 무용, 피아노, 요리…. 작년에 영국에서 유학 온 여학생은 방송까지 나갔다지.” ​ 주절주절 변명을 씨부리는 이사장의 말들이 귀에 영 들어오지 않았다. 사실 저 거추장스러운 멘트들이 가리키는 함의는 아주 간단했으니까. ​ “애초에 야구부를 만들어줄 생각이 없었군. 당신.” ​ 꽉- ​ 나는 주먹을 꽉 쥐고는 이사장을 노려봤다. 그러자 이죽대며 웃는 이사장. ​ “우문이군. 이 문혁 재단의 주인인 내가 자네 같은 양아치랑 한 시시콜콜한 약속을 왜 지켜야 하나?” ​ “……!” ​ “잘 기억하게. 원래 인생이란 그리 제멋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물론 노력 대비 기대한 보상을 받지 못하는 건 아쉽겠지. 하지만 그것 또한 자네를 성장시킬 걸세. 껄껄.” ​ “당신…!” ​ “가보게, 어른에게 불손한 태도를 보이는 건 이번 한 번은 봐주도록 하지. 그냥 잠깐 나쁜 꿈 꿨다고 생각하고 학생 본연의 업무인 학업에 매진하게.” ​ “……….” ​ “더 할 말 없으면 나가주겠나?” ​ 손을 휘적휘적 젓는 이사장. 내가 집무실에서 나가자, 어딘가로 급하게 전화를 건다. ​ “어, 그래. 고 사장. 혹시 석운강이라는 선수 아나? 이번에 우리 학교로 전학 오기로 했는데 말이야. 자네만 괜찮다면 한 번 보러오게. 만약 맘에 든다면 저번에 했던 계약 이야기를 다시 해봐도…” ​ 내가 개고생해서 데려온 선수를 바로 다른 학교에 팔아먹으려는 뻔뻔스러움에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 “푸하.” ​ 이사장 앞에서 길길이 날뛰지 않고 조용히 나온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 화나면 화난 대로 감정 표출하는 건 삼류 양아치나 하는 짓이다. 거기서 난동이라도 부렸으면 아예 수습이 불가능해진다. ​ ‘이따위로 나온다 이거지.’ ​ 내가 빙의한 몸은 누가 봐도 생양아치. 사회적 시선과 거기서 오는 디메리트는 충분히 인지하고 있다. ​ 그래서 내가 양아치가 아니라는 걸 증명하기 위해 타인들에게는 최대한 친절하게 대하려 했고, 어른들에겐 특히 더 깍듯이 대했다. ​ 그 결과가 이런 거라면, 나는 바뀔 수밖에 없다. 상대방이 ‘넌 이런 새끼잖아’하고 낙인찍었던 그 모습 그대로. ​ ‘어쩌면 그게 가장 나다울지도.’ ​ 현역 때도 누구 눈치를 보거나 한 적 없었다. 지금 가장 나다운 행동은 뭘까. 그 답은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 지잉, 지잉, 지잉! ​ 이사장실 안에 있을 때 하반신의 저릿저릿 센서가 미친 듯이 울려댔다. 뒤가 구린 놈 아니랄까 봐 치명적인 약점이 넘쳐흐른다. ​ ‘경기 중에 못 쓰는 쓰레기 스킬도 이런 쓸모가 있구만.’ 모멸과 핍박의 시간은 지났다. 이제는 ‘금발 태닝 양아치’ 금성묵으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넌 뒤졌다. 이 씹새끼.’ ​ 먼지 한 톨 안 남게 탈탈 털어주마. ​ ​ ######## ​ ​ 그래서 약점이 있는 건 알았는데, 이사장실에 숨겨진 걸 어떻게 꺼내? 라고 하면 답은 간단하다. ​ ‘몰래 들어가면 그만이지.’ ​ 이사장이 백수 대낮에 ‘어이쿠, 제 집무실을 마음껏 쓰시는 겸 비리 자료도 좀 조사해보십시오.’하고 방을 빌려줄 리가 없지 않나. ​ 아무렴 몰래 들어가는 수밖에. 물론 이게 안전한 방법은 아니었다. 침입하다 걸리면 그냥 예외 없이 퇴학에 경찰서행이다.그렇게 되면 대회도 못 나갈 테니 게임 오버나 다름없다. ​ ‘적외선 레이저가 곳곳에 깔려있다 들었지.’ ​ 켕기는 거 있는 놈 아니랄까 봐 학교에 최첨단 보안기기를 설치해놨다. 보통 야간 투시경이라도 있어야 여길 통과할 수 있겠지만… ​ 지잉! 지잉! ​ “…쉬운데?” ​ 하반신의 감각만 믿고 꼴리는 대로 걷고, 기어가고, 점프했더니 전부 통과했다. ​ 이 스킬의 ‘약점 감지’라는 능력이 야구 할 때 빼고는 범용성이 확실히 지리는 것 같다. ​ 이사장실의 문 앞, 나는 낮에 집무실에서 나오며 꿍쳐둔 열쇠를 문에 끼우고 돌렸다. ​ 끼이익- ​ 별 어려움 없이 활짝 열린 문. 나는 오롯이 이사장의 방에 혼자 있게 되었다. ​ “자, 어디 얼마나 더러운 새낀지 구경이나 해볼까.” ​ 그렇게 집무실을 이곳저곳을 뒤지던 나는 무언가를 발견하곤 경악을 금치 못했다. ​ “와, 진짜 미친 새끼네 이거.” ​ ​ ############# ​ ​ “룰루루, 홋호….” ​ 이사장은 기분이 매우 좋았다. 웬 양아치 놈이 야구부를 만들어 달랍시고 S급 유망주를 제 손으로 갖다 바쳤기 때문. 그 포수를 다른 학교로 보내주기로 한 덕에 꽤 짭짤한 뒷돈을 받게 될 예정이었다. ​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이사장실 문을 열자, ​ “아이고, 이사장님. 많이 늦으셨네.” ​ 책상에 걸터앉은 금성묵이 그를 반겨주었다. 이사장은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랐다. ​ “너, 너…. 여길 어떻게!” ​ “우리 이사장님 방에서 구린내가 하도 진동하길래, 청소 좀 해주러 왔죠.” ​ “어딜 버릇없게…! 썩 나가지 못해…!!” ​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소리를 빽빽 지르는 이사장. 성묵은 그에 화답하듯 조용히 한 종이 뭉텅이를 들어 올렸다. ​ “이게 뭘까요?” ​ “그게 뭔…, 컥! 설마?” ​ “정답! 우리 이사장님이 재단 돈을 열심히 꿍쳐서 빼돌린 증거입니다…!!” ​ “이리 내…! 내놓으란 말이다!” ​ “어허, 안 되죠.” ​ 그 육중한 몸으로 달려들어 봤지만, 압도적인 피지컬을 가진 성묵에게 그 종이들을 뺏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 “……끄윽.” ​ 이사장은 곧 몸에서 힘을 쭈욱 빼고는, 체념하듯 말했다. ​ “후, 이런 날이 오는 건가. 돈만 바라보고 달린 최후가 이거라니.” ​ 그리곤 곧 사뭇 진지한 표정으로 성묵을 보고는 말했다. ​ “내게 하루만 시간을 주게. 자수하도록 하지.” ​ “………….” ​ 이건 마치 악행 끝에 모든 죄를 뉘우치고 그 죗값을 치르겠다는 숭고한 광경처럼 보일 수도 있겠지만, 내게는 다르게 보였다. ​ “이사장님, 머리 굴리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리는데?” ​ “…!” ​ “사립 학교 사학 비리는 어차피 여론 좀 잠잠해지고, 학생들 몇 기수 졸업하면 별문제 없이 복귀 가능하니까 호화 변호인단 붙여서 상고심까지 뻐기고, 집유 받고 집에서 쉬다가 돌아오면 그만이야!” “라고 생각하신 거 아니죠 설마?” ​ “무, 무슨…. 언제 그런 생각을 했다고.” ​ “아니에요? 그럼 잘됐네. 야구부 만들어 주고 서로 윈윈하면 되겠다. 그죠?” ​ “이익……!” ​ 푸들푸들 떨리기 시작하는 이사장의 미간. 그는 결국에 분을 참지 못하고 터트렸다. ​ “그래, 차라리 터트려라 이놈아! 건수 하나 잡혔다고 네 말에 오냐오냐할 것 같으냐!” ​ 아무래도 야구부를 만드는 게 장기적으로 더 손해라는 계산이 나온 모양. ​ 이 나라에서 고교 야구는 국가가 주도하는 숙원 프로젝트. 정식 야구부를 한 번 만든 이상 그렇게 쉽게 없앨 수도 없고, 특기생을 계속해서 받아야 하기에 앞으로도 최소 수억 원은 꼬라박아야 한다. ​ 타 국가는 이렇게까지 큰돈이 들지는 않지만, 야구 세계 1위라는 자부심과 프로 배출을 위한 학교 간의 경쟁 덕에 더 좋은 장비, 좋은 코치 등에 경쟁이 붙어 비용이 계속 올라가 엄한 학교 측의 가랑이가 찢어졌다. ​ ‘근데 뭐, 내 돈 아니잖아.’ ​ 돈은 니들이 다시 벌면 되지만, 나는 게임을 못 깨면 뒈진다. ​ 간절함의 깊이가 다르다. 클리어에 방해가 되는 놈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박살 낼 자신이 있었다. 내가 지금 꺼내려는 최후의 수단 역시 그 일환이다. ​ “이사장님, 꼭 끝을 봐야겠어요?” ​ “흥, 내가 너 같은 양아치 놈에게 더 이상 휘둘릴 것 같으냐!” ​ “더러워서 이것까진 안 쓰려고 했는데, 본인 선택입니다?” ​ “더러워서라고? 그게 뭔….” ​ 내가 가방에서 한 비디오를 꺼내자, 삽시간에 표정이 딱딱하게 굳으며 자리에 주저앉는 이사장. 그는 그것의 정체가 뭔지 알아챈 듯하다. ​ 털썩! ​ “그, 그럴 리가 없다! 그걸 네가 어떻게…!” ​ 이사장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보는 것도 이해는 간다. 책장 맨 위에 한 낡은 박스 사이에 덩그러니 꺼져 있었으니. 센서가 아니었으면 절대 찾을 생각도 못 했을 거다. ​ “마침 여기 TV랑 비디오 플레이어도 있었네요. 이사장님의 소중한 추억, 같이 한 번 볼까요.” ​ 위잉-! ​ 재생되기 시작한 비디오. 이 비디오의 정체는 흔히들 스캔들의 주재료로 많이 쓰이고는 하는, 야스 장면이 담긴 비디오였다. ​ 사실 그 행위 자체가 이상한 건 아니다. 사랑하는 남녀끼리 하는 건 지극히 당연한 행위니까. ​ 다만 문제가 있다면, 거기에 남자밖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 화질을 보아하니 거의 20년 전의 영상으로 추정되는데, 이사장은 팔과 다리가 모두 묶인 채 상대에게 당하는 쪽이었다. ​ ["오고오오옥……………!!”] [“네가 누구라고?”] [“저는 촛불 플레이로 절정하는 수컷실격 암퇘지에요오옷…!!] 비디오 안에 담긴 것은 이사장과 익명의 주인님 사이의 적나라한 행위 그 자체. 비디오가 꽤 닳아있는 걸 보니 이사장실에서 주인님과의 추억을 꽤 자주 되돌아본 모양이다. ​ “이야, 몰랐네요.” ​ 탁! ​ 나는 이사장의 책상 위에 놓여있던 가족 사진을 툭툭 건드렸다. 어여쁜 아내와 딸 둘의 모습이 담긴 화목한 가족 사진을 말이다. ​ “가정까지 있으신 이사장님이 사실은 젊었을 땐 남자한테 박히며 앙앙대는 취미가 있으셨을 줄이야.” ​ “…제발, 내가 잘못했네. 제발 가족에게만큼은!” ​ “………..” ​ 내 발밑에 무릎 꿇고 싹싹 비는 이사장. 난 어이가 없어서 머리를 탁 짚었다. ​ “아, 씨 재미없네. 그냥 다 때려치죠?” ​ “뭣…!?” ​ “저도 참, 어쩔 수 없는 양아치인가 봅니다. 이젠 야구부고 뭐고, ‘암퇘지 선언’을 듣고 변할 당신 아내와 딸들의 표정이 궁금해서 미치겠는데요.” ​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잔인할 수가…!” ​ “본인은 뭐 얼마나 자비로운 인간이셨다고.” ​ 마치 악마를 보는 듯이 벌벌 떨기 시작하는 이사장. 나는 그의 귀에 달콤한 최종 선택지를 내려줬다. ​ “마지막 기횝니다. 죽 닥치고 야구부 만들래요, 아니면 가족들한테 은밀한 취향 공개하실래요?” ​ “나, 나는…” ​ “빨리 골라, 이 돼지 새끼야.” ​ “히익…!!” ​ 그렇게 나는 아주 평화로운 협상을 통해 야구부를 만드는 것을 허락받았다. 이사장실을 나오는 내 표정은 환하게 밝아져 있었다. ​ 나는 손에 들린 비디오를 들고는 씩 웃었다. 왜 팬들이 못하는 선수가 꾸역꾸역 살아남으면 ‘저 새끼 단장 게이 야스 비디오 있는 거 아님?’이라고 하는지도 알게 됐다. ​ ‘효과 확실하구먼.’ ​ 써본 사람만 아는 엄청난 효과! 나를 기만하려 든 대가는 앞으로도 톡톡히 지르게 할 예정이다. 꿍쳐둔 돈이 바닥날 때까지 쪽 빼먹어주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