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적막이 흐르는 노천탕. 나와 도연 사이에는 거의 10분째 적막이 흐르고 있다. 나는 먼 산을 바라보며, 슬쩍 물었다. ​ “도연 누나.” ​ “으응…?” ​ “할 말 있으신 거 아니었어요?” ​ “응, 맞긴 한데….” ​ 말을 흐리면서 여전히 본론으로 들어가지 않는 그녀. 개인적으로는 빨리 이야기를 끝내고 탈출하고 싶었다. ​ 이 야릇한 분위기 속에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나는 하반신에 대한 통제력을 잃어버리고 말테니까. ​ 호로록! ​ 도연은 여전히 입이 떨어지지 않는지, 옆에 놓인 잔에서 무언가를 계속 따라 마셨다. 나는 궁금해서 그녀에게 물었다. ​ “뭐 마셔요?” ​ “아, 과일맥주야. 노천탕에서 마시면 더 맛이 좋아서….” ​ 홀짝! ​ 아까부터 계속 마시는 그녀.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 “…어라라, 왜 이렇게 기분이 좋지?” ​ 헤롱헤롱하는 도연. 뭔가 벌써 취하고 있는 거 같은데…? 저거 과일맥주 맞아? ​ ​ ##### ​ ​ -2시간 전 ​ ‘뭐, 그냥 하던 대로 하라구…?’ ​ ‘응, 누나 같은 타입은 일부러 연기하는 게 더 어색할 거 같거든. 그냥 평소 루틴대로 해, 내가 알아서 상황은 만들어 줄 테니까.’ ​ 도진은 앞서 말한 ‘비책’의 상세 내용을 도연에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편이 훨씬 자연스러울 거라 생각해서다. ​ 촤륵-! ​ 책상 위에 노트를 펼친 도진. 거기에는 이번 계획에 대한 대략적인 내용이 쓰여 있었다. ​ “첫 번째는 상황 조성, 누나는 항상 이때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노천탕에서 목욕을 해. 거기에 성묵 형을 집어넣을 수만 있다면….” ​ 남녀관계의 진도를 훅 뺄 수 있는 최적의 이벤트를 조성할 수 있다. 도진은 그 상황 속에서의 도구 사용도 잊지 않았다. ​ “두 번째, 누나가 노천탕에서 마시는 건 항상 과일맥주. 그걸 도수가 센 술로 바꿀 수 있다면…?” ​ 도진은 집 안을 뒤져 적당한 것을 찾아냈다. 그 술은 바로 ‘매실주’. 도연이 만든 데이터 팀의 여직원이 선물한 것으로, 그녀가 마시기에는 도수가 높아서 마시지 않고 있었다. ​ ‘누나의 주량이라면, 두세 잔만 마셔도 취할 게 분명해. 게다가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면 그 속도는 배가되지.’ ​ 도진이 굳이 누나를 취하게 하는 이유. 거기에는 확고한 이유가 있다. ​ “…세 번째, 취한 누나는 웬만한 남자들은 버티지 못할 만큼, 엄청난 파괴력을 가지고 있어.” ​ 술에 취한 도연은 적극성이 엄청나게 상승하고, 속된 말로 색기를 풀풀 풍기고 다닌다. ​ 도연 본인도 자신의 주사를 알아챈 뒤로는 남들 앞에서 마시지 않는다. 그나마 남동생 앞에서 마시는 정돈데, 도진 입장에선 이게 엄청난 무기가 될 거라고 확신했다. ​ “네 번째, 성묵 형은 결코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게 아냐.” ​ 지금은 완벽하게 갱생했다지만, 일부 맞다고 인정한 성묵의 소문 속에는 여자 관련된 소문도 있었다. ​ 그 전에 어떤 여자들을 만났을지는 모르겠지만, 도도연 처럼 예쁜 여자는 그중에 없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 아마 도연 정도 되는 여자가 작정하고 덤벼든다면, 아무리 성묵이라도 쉬이 버틸 수는 없으리라. ​ 이 네 가지가 도진이 일을 추진할 수 있게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계획이 잘 안 풀린다 한들 서로를 이성으로 크게 의식하게 될 것이고, 잘 풀리게 되면 둘이 일사천리로 배꼽을 맞추는 걸 보게 되리라. ​ “…형이 우리 집에 가족사진이 안 보인다 했죠.” ​ 끼익- ​ 방문을 열고 나온 도진. 그리고 벽을 짚은 채,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그리고는 사진을 걸기에 딱 적당한 벽을 올려다보며 입꼬리를 올렸다. ​ “같이 찍으면 되겠네요, 가족사진.” ​ 도진은 진심이다. 성묵을 ‘매형’이라고 부르게 되는 것에 말이다. ​ ​ ####### ​ ​ “어라, 으응…….” ​ 이제는 확실하다. 도연은 취했다. 그것도 꽤나 얼큰하게. ​ “누나, 잠깐만.” ​ 그녀가 따라 마시던 술의 입구에 코를 가져다 대고는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는 바로 깨달았다. ​ ‘매실주…?!’ ​ 과일맥주 병에 들어있지만, 이건 매실주의 향이 분명하다. ​ 아무래도 누군가가 손을 쓴 모양. 그리고 그 대상은 너무 투명했다. ​ ‘도도진, 이 놈 자식을 그냥….’ ​ 혼쭐을 내주는 건 나중의 일이다. 일단 도연에게 이 술을 더 이상 마시게 하면 안 될 것 같다. 그러나 도연은 방실방실 웃으며 한 잔 권해온다. ​ “성묵아, 같이 마실래~?” ​ “아뇨, 전 괜찮아요.” ​ “그래애, 그럼 내가 다 마셔야겠다….” ​ “…!” ​ 나는 술병을 향해 손을 뻗는 도연의 손보다 빠르게, 술병을 낚아챘다. 그리고는 남은 술을 통째로 들이켰다. ​ 벌컥! ​ “…캬.” ​ 이 얼마 만에 술인가. 대충 20% 정도 남아있었는데, 꽤 달달하니 맛있다. ​ 운동한다는 놈이 대뜸 술을 마시면 걱정할 수도 있겠지만, 금성묵은 말술 중의 말술이라 이 정도 마신다고 간에 기별도 안 온다. ​ ‘주량이 5병이라고 그랬나?’ ​ 소주를 5병은 먹어야 좀 취한 티가 나는 금성묵이다. 이 매실주도 소주보다 약한 술인 걸 감안하면, 그냥 음료수 마신 거랑 다를 게 없다. ​ “어때, 맛있어~?” ​ “음, 맛있네요.” ​ “후후, 그치~.” ​ 격의 없는 미소로 기뻐하는 그녀. ​ ‘…젠장, 심장이 아프다.’ ​ 이전의 도연과 지금의 도연은 다른 사람 수준으로 다르다. 지금 모습으로 꼬시면 아마 안 넘어올 남자가 없지 않을까 싶은 정도다. ​ “누나, 그래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뭐예요?” ​ 빠르게 본론으로 넘어가, 이 상황을 종결하는 수밖에. 내 물음에 도연은 갸우뚱했다. ​ “우응, 딱히 막 뭔가를 정해서 이야기하고 싶은 건 아닌데….” ​ “그러면 왜…?” ​ “그야, 성묵이랑 친해지고 싶어서~ 궁금한 것도 많고.” ​ 또다시 빵긋 웃는 도연. 생각지도 못하고 있던 이유에 나는 꽤 놀랐다. ​ ‘순전히 도진이 건에 대한 고마움 때문인 줄 알았는데….’ ​ 동생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관계 정도로만 보고 있을 줄 알았는데, 나랑 개인적으로 더 친해지고 싶어 하는 줄은 몰랐다. ​ 기린고 전을 앞두고 따로 찾아온 것에도 그런 목적성이 있었던 것일까.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자. 일단은 눈앞에 닥친 일부터 빠르게 처리하자고.’ ​ “…궁금한 게 뭐예요? 뭐든 금방 다 대답해드릴게요.” ​ 대답 없이 눈을 뻐끔거리는 도연. 그녀는 나른한 표정으로 역으로 물어왔다. ​ “금방 다 대답할 필요는 없는데.” ​ “예?” ​ “성묵이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 ​ “…….” ​ 솔직히 말하면 좀 있긴 하다. 이런 분위기라 더 생각나는 것도 있고. 나는 솔직하게 답했다. ​ “당연히 있죠.” ​ “그래~? 다행이다…. 그러면 서로한테 하나씩 질문하자, 어때~?” ​ “좋죠, 그럼 누나부터.” ​ “알겠어, 후훗….” ​ 발그레 달아오른 뺨에 손을 얹고는 싱긋 웃는 도연. 그녀가 내게 첫 번째 질문을 던졌다. ​ “성묵이는 얼굴이랑 몸매, 둘 중에 뭐가 더 중요해?” ​ “……!” ​ 첫 질문부터 맵다. 나는 쉬이 답을 하지 못했다. 도연 앞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진짜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 “저는 둘 다.” ​ “쓰읍, 그러면 못 써!” ​ 강아지를 타이르듯 씩씩대는 도연. 나는 다시 한번 장고에 들어갔다. ​ “………음.” ​ 내가 결코 타협할 수 없는 게 무엇일까. 고민 끝에 나는 답을 내렸다. ​ “…저는 얼굴이요.” ​ “후음, 그렇구나~?” ​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도연. 이제는 내가 질문할 차례다. ​ “제 첫인상 어땠어요, 솔직하게.” ​ “완전 양아치…!!” ​ “…쿨럭!” ​ 아니, 저기요. 너무 솔직한 거 아닙니까. ​ “…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 “알고 보니까?” ​ “후후, 궁금하면 다음 차례에 또 질문해. 알겠지…?” ​ 쳇, 첫인상에 대한 질문이니까 지금 인식이 어떻게 변했는지는 안 알려주겠다 이건가. ​ “성묵이는 연상, 동갑, 연하 중에 뭐가 제일 좋아?” ​ “……!” ​ 또 이런 어려운 질문을. 사실 상대방이 누군지가 중요한 거지, 나이를 보는 편은 아니다. ​ 하지만 첫 번째 질문에서 두루뭉술 답했다가 ‘쓰읍!’을 당했던 것을 생각하면, 이번에도 납득하지 않겠지. ​ 그렇다면 듣고 싶은 대답을 해주는 편이 낫겠다. ​ “굳이 꼽자면, 저는 연상이요.” ​ “…진짜?” ​ “네, 진짜로.” ​ “후후훗….” ​ 미소 짓는 도연. 이제는 내가 질문할 차례다. ​ ‘…도연 누나 쪽에서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했으니, 나도 한발 다가서야겠지.’ ​ 서로 간의 벽을 줄일 수 있는 효과적인 방법이 하나 있었다. 나는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 “도연 누나, 저 말 편하게 해도 돼요?” ​ 그 방법은 바로 말을 놓는 것. 지금까지 격식을 지켜서 이야기하던 내가 말을 놓게 되면, 나도 그녀도 한층 편하게 말할 수 있게 되어 좀 더 친해질 수 있을 거다. ​ “그래, 바로 한번 해볼래…?” ​ “크흠.” ​ 선뜻 수락한 도연.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바로 말을 깠다. ​ “누나, 한 번 허락하면 못 무른다. 진짜 후회 안 하지?” ​ “……!!” ​ 갑자기 몸을 찌르르 떠는 그녀. 이건 무슨 반응이래…? ​ “응, 후회 안 해…!” ​ 더 시뻘게진 얼굴로 엄지손가락을 세우는 그녀. 이내 진정이 됐는지, 다음 질문을 던져왔다. ​ “성묵아, 혹시나 해서 그런데….” ​ “음…?” ​ “혹시 빠른 년생은 아니지~?” ​ “……?” ​ 이건 무슨 질문이지. 다소 뜬금없다는 느낌이지만, 나는 일단 답해주었다. ​ “아니, 나 10월생이라서 빠른은 아닌데.” ​ “그러면 내년에 성인인 거지?” ​ “응, 맞아.” ​ “……후후, 그렇구나아.” ​ 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짓는 도연. 나는 여전히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 채, 다음 질문을 던졌다. 아까부터 벼르고 있었던 질문을 말이다. ​ “지금 내 현재 인상이 어떤지 말해줘.” ​ “……딸꾹!” ​ 첫인상을 물었을 때 바로 답해주지 않았던 그 질문. 그녀는 순간 놀라더니, 발그레해진 얼굴로 시선을 돌렸다. ​ ‘뭐지, 분위기가 살짝 바뀐 것 같은데.’ ​ 아무래도 부끄러운지, 눈을 맞추지 못하는 그녀. 이게 그 정도로 중요한 질문이었나? ​ “야구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데, 고등학생답지 않게 엄청 해박해서 대화할 때 즐거워. 열심히 공부한 거 같아서 기특해….” ​ “소문만 들었을 때는 재능만 믿고 방탕하게 지내는 선수인 줄 알았는데, 실력도 좋고 노력하는 모습이 멋져. 그리고 땀 냄새도…. 아아, 이건 아니구….” ​ “그리고, 다른 선수랑 맞서 싸워서 이기고 포효할 때가 제일, 그러니까….” ​ “………제일?” ​ “…얘기 안 할래.” ​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도연. 궁금하게 만들어놓고 도망친다니,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 “누나, 이렇게 나오면 곤란하지.” ​ “으응…?” ​ “나도 앞으로 대답 안 한다? 빨리 말 해봐.‘ ​ “그치만, 부끄러워….” ​ “뭐라고 안 해, 뭔데?” ​ 침묵을 지키던 도연. 그녀의 굳게 닫힌 입이 결국엔 열렸다. ​ “…섹.” ​ “섹……?” ​ “섹시하다고 생각했어.” ​ “……….” ​ 추궁하지 말 걸 그랬나. 나까지 얼굴이 화끈해졌다. ​ “크흠….” ​ 둘 사이에 다시 흐르는 정적. 그러나 처음의 어색한 정적과는 느낌이 뭔가 다르다. ​ 지금은 뭐랄까.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은, 그런 폭풍전야 같은 느낌이랄까. 실제로 그건 기분 탓이 아니었다. ​ “성묵아, 이제 내 차례지?” ​ “응, 뭔데?” ​ “……….” ​ 고개를 푹 숙이더니, 슬며시 고개를 들며 나와 눈을 맞춘 도연. 술 취한 그녀가 던진 질문은, 그야말로 폭탄이 터지는 듯 강렬했다. ​ “…가까이 가도 돼?” ​ “…………!!” ​ 지금 둘 사이의 거리는 대략 1m. 내가 이성을 유지할 수 있는 마지노선의 거리감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걸 훅 좁히고 들어오겠다니. ​ 이것까지 수락했다간 더 이상 돌이킬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남자란, 역시 슬픈 동물이다. ​ “안 돼…?” ​ “후우, 좋을 대로 해.” ​ 차마 거절하지 못했다. 이 상황을 매몰차게 박차고 나올 수 있는 놈이 있다면 그놈은 알도 없는 놈인 게 확실하다. ​ 촤아악! ​ 물살을 가르고 와서 내 옆에 슬며시 앉는 그녀. 그리고는 대뜸, 내 가슴팍에 섬섬옥수 같은 손가락을 얹었다. ​ “……!?” ​ “와아, 돌덩이 같아. 엄청 단단해….” ​ 도연의 부드러운 손가락이 맨살에 닿는 것도 엄청난 자극인데, 저런 대사를 귀로 듣고 있자니 더욱더 효과가 크다. ​ ‘…이제 곧 한계야.’ ​ 이번이 마지막 찬스다. 인내심을 발휘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 여기서 어떻게든 이 상황을 매듭짓지 못한다면, 나는 곧 한 마리의 짐승이 되리라. ​ 파악! ​ “………!” ​ 나는 손가락으로 나를 쿡쿡 찌르는 도연의 양팔을 붙잡고, 다소 강하게 떼어냈다. ​ “적당히 해, 누나.” ​ “………!?” ​ 정색하며 도연을 떼어낸 나는, 그녀가 한 번도 본 적 없을 위협적인 표정을 지었다. ​ “서, 성묵아…?” ​ “누나, 왜 이렇게 겁이 없어?” “이 공간에 우리 둘밖에 없어, 지금 그게 얼마나 위험한 건지 몰라?” ​ “으응…?” ​ “나 양아치 출신인 거 알잖아. 자꾸 이런 식으로 분별없이 굴면, 짐승 새끼로 변해서 누나 덮치는 건 시간 문제라고. 내가 못 할 것 같아?” ​ “성, 묵아….” ​ 처음 보이는 내 모습에 다소 위축된 듯한 도연. 이 정도 말했으면 좋게 알아들었겠지. ​ “후, 이제 슬슬 돌아가자. 이쯤 하면 충분하잖….” ​ “…성묵아, 많이 힘들었지?” ​ “………??” ​ 갑자기 그렁그렁 눈물이 맺힌 도연. 갑자기 나를 꽉 끌어안아 온다. ​ “그동안 오해받고, 상처받고, 힘들었지…? 나한테까지 날 세우지 않아도 돼. 나는 네 편이야 성묵아.” ​ 심금을 울리는 위로를 건네는 도연. 그러나 지금의 나에겐, 너무나도 곤란한 위로이기도 했다. ​ 물컹! ​ ‘…아, 시발.’ ​ 겨우겨우 막고 있던 둑이 터졌다. 그리고 내 귀에 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띠링! ​ [태양신맥에 의해 스텟이 강화됩니다!] ​ 불끈 솟아오르는 무언가. 허리춤에 두르고 있던 수건에 볼록한 형태가 생긴다. ​ 꽉 묶어둔 탓에 풀리지는 않았지만, 결국 우려하던 일이 생겼다. ​ “응…?” ​ 내가 말없이 몸을 부들부들 떨고 있자, 의아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본 그녀. 그리고는 얼음처럼 굳었다. ​ “………….” ​ ‘끝이다….’ ​ 그토록 숨기려 했거늘. 야구장에서 발딱 서는 것은 어디까지나 경기의 일환이라고 정신 승리 할 수 있다. ​ 하지만 이건 불가능하다. 친한 동생의 누나를 보고 커지다니. 변명의 여지가 없다. ​ 그렇게 체념하고 서 있는데, 여전히 나를 껴안고 있는 도연이 슬쩍 나와 눈을 마주치며 물었다. ​ “성묵아, 많이 힘들어…?” ​ “……!?” ​ 나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서 있었다. 도연은 한껏 상기된 얼굴로, 한쪽 머리를 귀 뒤로 넘겼다. ​ 그리고는 까치발을 들어, 내 귀에다 대고 속삭였다. ​ “…힘들면 누나한테 말해, 알겠지?” ​ “……!!” ​ 그리고는 내 어깨에 고개를 푹 담그며, 내 품에 계속 안겨있는 도연. 드디어 내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다. ​ ‘이 정도면 많이 참았어.’ ​ 이제 뒷 일 따윈 알 바 아니다. 수차례 경고했음에도 이렇게 선을 넘는다면, 나 역시 그 선을 넘어주는 수밖에. ​ 그렇게 필사의 각오를 마친 내 귀에, 곧 어이없는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 “후으, 흠냐…, 푸후….” ​ “뭣…?” ​ 꿈나라로 가버린 그녀. 취기를 이기지 못하고 수마에 빠진 모양이다. ​ “누나, 도연 누나…?” ​ 아무리 불러봐도 깨어날 기미가 안 보인다. 그녀는 의심의 여지 없이, 내 품에 안긴 채 곤히 잠들었다. ​ “…후우, 이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는 거냐, 아쉬워 해야 하는 거냐.” ​ 나는 그 어느 때보다 복잡한 마음으로, 도연을 들쳐업고는 노천탕을 빠져나왔다. ​ ​ ​ ##### ​ ​ 다음 날 아침. ​ 짹, 짹짹…!! ​ 창밖으로 울려 퍼지는 새소리. 도연은 침대 위에서 눈을 떴다. ​ “윽, 머리가….” ​ 숙취 때문에 아픈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난 도연, 곧 그녀의 방에 동생인 도진이 슥 들어왔다. ​ “어, 누나 일어났네?” ​ “성묵이는…?” ​ “어젯밤에 집에 갔어. 더 신세 지기 뭐하다고 돌아갔거든.” ​ “아, 그랬구나….” ​ 도연의 질문에 답하고는, 곧 씨익 웃는 도진. 그의 용건은 하나뿐이다. ​ “그래서 누나, 어제 일 기억나?” ​ “어제…?” ​ 천천히 어제의 일을 되짚어 보기 시작하는 도연. 그리고는 되짚을수록 그녀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 “도, 도진이 너…! 어떻게 나랑 상의도 없이 그런 짓을…!!” ​ “그래서 효과 없었어?” ​ “……….” ​ 꿀 먹은 벙어리가 된 도연. 머릿속에 남은 잔상들만 되짚어 봐도, 성묵과 훅 거리가 가까워 진 게 기억났다. ​ 말도 놓고, 가까이 다가가 맨가슴도 쿡쿡 찔러봤으며, 끌어안기도 하고, 마지막에는…. ​ “……………!?!” ​ 확실하진 않지만, 뭔가가 닿은 것 같다. 아마 성묵에게 그런 것을 느꼈다면 역시…. ​ “거 봐, 효과 봤지?” ​ “…도진아.” ​ “왜?” ​ “용돈 올려줄까…?” ​ “…다음에도 맡겨줘, 누나.” ​ 도연은 동생인 도진에 대한 신뢰도가 한 꺼풀 상승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당분간 연애 관련된 것은 믿고 맡기자고. ​ ​ ###### ​ 같은 날 아침. 나는 내 자취방 침대에서 눈을 떴다. ​ “오, 뭐야. 컨디션 좋은데…?” ​ 저번 올리비아 사태처럼 컨디션을 조지는 건가 싶었는데, 의외로 해결책은 간단했다. ​ ‘그냥 강화될 스탯 고른 뒤에 자면 될 줄은….’ ​ 스탯 고르니까 알림 소리도 안 울렸고, 거기가 서 있던 말던 피곤하니 잠은 잘 왔다. ​ 온천의 효과 덕분인지, 피로는 말끔히 회복된 상황. 기분 좋게 일어나려는데 뭔가 위화감을 느꼈다. ​ ‘설마…!?’ ​ 이불을 걷어 올린 나는 그 위화감의 정체를 눈치챘다. 욕이 절로 튀어나왔다. ​ “아, 씨발.” ​ 바지와 이불이 모두 축축했다. 그렇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몽정했다. ​ 얼핏 꿈속에서 노천탕을 본 것 같다. 누가 나왔는지는 딱히 얘기하지 않겠다. ​ “…하, 돌아버리겠네.” ​ 그날 나는 학교에 늦었다. 지각 사유는 어처구니 없게도, ‘빨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