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헷, 이 정도면 충분해요…!!” ​ “그러냐.” ​ 꽤나 오랫동안 쓰다듬어 줬는데, 한껏 상기된 얼굴로 방방 뛰는 그녀. 이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손뼉을 짝하고 친다. ​ “아, 맞다…! 오늘 도연 언니네 집 가신다면서요?” ​ “뭐야, 어떻게 알았어?” ​ “언니랑 톡하면서 들었어요, 오늘 경기 끝나고 초대할 예정이라고요…!” ​ 그동안 둘이 꽤 친해진 건가 싶은 성묵이다. 노아는 붙임성이 상당히 좋아서 누구랑도 쉽게 친해지는 편이기도 하고. ​ “한 번 놀러 오라고 하시더라고, 맛있는 거 해주신다던데.” ​ “그렇군요, 아…!” ​ 좋은 생각이라도 난 건지 손바닥을 콩 치는 노아. 이내 내 양손을 붙잡고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했다. ​ “나중에 꼭 저희 가문에도 한 번 방문해주세요…! 아버님이 성묵 오빠를 꼭 뵙고 싶어 하시거든요.” ​ “나를…?” ​ “네! 저희 오라버니의 생명의 은인이시잖아요? 저도 신세를 많이 지고 있고요…!!” ​ “흐음.” ​ 노아네 가문이라면 아마 일본 최대 규모의 야쿠자 조직일 텐데. 거기를 방문해달라니, 벌써 무서운 생각이 잔뜩 드는데. ​ ‘설마 나한테 해코지 하겠어?’ ​ 차기 보스 후보의 친구한테 뭔 짓을 하진 않을 거라 생각한 성묵.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꼭 한 번 갈게.” ​ “앗, 약속하신 거예요…!?” ​ “그래, 정말.” ​ ‘그러고 보니, 이번 국제 대회 아시아 예선 개최지가 도쿄라고 그랬던가.’ ​ 국가대표로 뽑히게 되면 일본에 갈 수 있다는 소리다. 그때는 한 번 방문해봐도 좋겠다고 생각하는 성묵이다. ​ “그때는 극진하게 대접해드릴게요…! 기대하셔도 좋아요!!” ​ 양 주먹을 꽉 쥐며 결의를 다지는 노아. 꽤나 재력이 있는 집안이니 뭔가를 하기는 할 생각인 모양이다. ​ “아, 벌써 시간이….” ​ 도도연과 주차장에서 만나기로 한 시간이 다 되었음을 깨달은 성묵. 그가 사정을 설명하자 노아는 선뜻 고개를 끄덕였다. ​ “언니 집에는 잘 다녀오세요! 다음에는 저랑도 같이 갔으면 좋겠네요…!!” ​ “응? 아아.” ​ 노아처럼 텐션 높은 인싸 캐릭터가 하나쯤 있어서 나쁠 건 없다고 생각하는 성묵. 그는 선뜻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녀와 멀어졌다. ​ “……….” ​ 성묵에게 손을 흔들어주며 제자리에 서 있는 노아의 뒤로, 이내 미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노아.” ​ “아, 오라버니.” ​ 노아가 성묵의 품에 기대어서, 쓰다듬을 받고 있던 때부터 상황을 지켜보던 류지. 그는 여동생이 성묵을 향해 품은 감정을 그제야 확신했다. ​ “저렇게 성묵이를 보내도 괜찮겠어? 나는 네가 가지 말고 나랑 놀자던가, 뭐 그럴 줄 알았는데.” ​ 류지는 어릴 적 종종 목격한 노아의 똥고집을 떠올려 보았다. ​ ‘오라버니, 오라버니이…! 훈련 가지 말고 나랑 노라!’ ‘시러, 시러어…!! 가지 마…!’ ‘으아앙, 아빠아. 오라버니가 나 버리고 간대…!’ ​ 물론 꽤 어릴 적 이야기지만, 그 뒤에도 하나에 꽂히면 절대 흔들리지 않는 고집을 보여준 노아다. ​ 그래서 나중에 호감 있는 남자에게도 그러지 않을까~ 라고 류지는 내심 생각했다. ​ 그러나 노아는 여유만만한 표정이다. 좋아하는 남자가 경쟁자의 집에 놀러 갔음에도 말이다. ​ “후훗, 괜찮아요! 계획대로 잘 되어가고 있는걸요.” ​ “계획? 으음, 그러냐….” ​ 잠시 고민하던 류지. 그는 이내 노아에게 물었다. ​ “노아, 혹시 그 계획이 뭔지 물어봐도 되냐?” ​ “네, 안 돼요…!” ​ “쩝….” ​ ‘그 계획’에 관해서는 오빠인 그에게도 말할 생각이 없어 보이는 노아. 굉장히 단호하게 딱 잘라 거절했다. ​ ‘이거 참, 어렵구만.’ ​ 류지는 생각했다. 내 동생이지만, 가끔은 잘 모르겠다고. ​ ​ ​ ####### ​ ​ “잘 먹겠습니다.” ​ “응, 맛있게 먹어…!” ​ 상다리가 부러져라 차려진 음식들. 나는 도연과 도진의 집에서 같이 식사하기 위해 방문해있다. ​ 김치찌개를 한 숟갈 떠서 입에 넣자, 기분 좋은 목 넘김이 바로 느껴진다. ​ “오, 맛있는데요?” ​ “…휴우, 다행이다.” ​ “그쵸, 누나가 어릴 때부터 요리를 쭉 해왔거든요. 아마 일반인 중에서는 상당히 잘하는 편일 거예요.” ​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도연과 설명을 얹어주는 도진. 오랜만에 맛보는 정성 어린 집밥을 나는 허겁지겁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 “이번 경기는 좀 어땠어? 컨디션이 썩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 ​ “역시 누나는 알아볼 거라 생각했어요. 확실히 저번보다는 체력이 많이 달리더라구요.” ​ “앗, 정말이었구나…! 미안한 걸, 이럴 줄 알았으면 약속도 뒤로 미뤘을 텐데.” ​ 진심으로 미안해하는 도연. 나는 손사래를 쳤다. ​ “아뇨, 이런 날이니까 더 좋죠. 이렇게 맛있는 집밥 먹는 게 훨씬 더 빠르게 회복되니까요.” ​ “정말…? 그렇게 말해주니 기쁘네, 고마워!” ​ 싱긋 웃는 도연. 이거는 꽤 심장이 아픈데. 솔직히 조금 설렜다, 인정. ​ “성묵 형은 어떤 여자가 이상형이에요?” ​ “콜록, 콜록…!!” ​ 그때 훅하고 들어온 도진의 질문. 거기에 도연이 갑자기 기침하기 시작한다. 꽤 곤란한 표정인데. ​ “도, 도진아! 갑자기 그런 질문은 좀….” ​ “그냥 제가 궁금해서 그래요. 그래서 형은 어떤 타입이 이상형이에요?” ​ “……….” ​ 꽤나 긴장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둘. 이상형이라, 전부터 생각해둔 건 있었던 것 같은데. ​ “기본적으로는 뭐, 대화가 잘 통하는 사람이지.” ​ “아, 대화 중요하죠.” ​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상대방의 내면을 봐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면 좋을 거 같다.” ​ “아하, 이해했어요.” ​ 맞장구를 치며 끄덕이는 도진과 여전히 긴장한 채로 쳐다보는 도연. 왜 긴장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둘의 질문 공세는 꽤 오랫동안 이어졌다. ​ “그으, 성묵아…! 배럴 타구 이론에 관해서 같이 논의하고 싶은데…!” ​ “형, 혹시 결혼하게 되면 몇 살쯤?” ​ “잠깐, 잠깐, 하나씩 좀….” ​ 그렇게 혼돈의 식사 시간이 끝나고, 뒷정리할 시간. 나는 맛있는 식사를 차려준 도연에게 감사를 표했다. ​ “잘 먹었습니다. 정말 맛있었어요.” ​ “맛있게 먹어줘서 기쁘네. 가서 좀 쉬고 있을래?” ​ “얻어먹었는데 어떻게 염치도 없이. 설거지라도 제가 할게요.” ​ 그러자 내 앞으로 슥 튀어나와서는, 대신 사양하는 도진. ​ “아뇨 형, 괜찮아요. 저희가 할게요.” ​ “사양할 필요 없어. 뭐 어려운 것도 아닌데.” ​ “아뇨 그게 아니라….” ​ “…?” ​ “저희 집 그릇은 전부 식기 세척기로 씻거든요. 정 그러시면, 저기 안으로 옮기는 것만 좀 도와주세요.” ​ “어? 그래.” ​ 척 봐도 엄청나게 최고급인 식기 세척기다. 그 안으로 그릇을 넣고 버튼을 누르자, 알아서 그릇이 씻겨져 나간다. ​ 위이잉…! ​ 쩝, 이래서 사양한 거였구나. ​ “화장실에서 양치질 좀 하고 와야겠다. 어디 쪽에 있어?” ​ “아, 저쪽으로 가시면 돼요.” ​ 도진의 안내에 따라 나는 화장실로 향했다. 집이 워낙 넓다 보니 저번에 와봤어도 헷갈린단 말이지. ​ ​ ​ ####### ​ ​ “누나, 뭐해 진짜…?” ​ “응?” ​ “…왜 그래 정말, 기껏 이성 관계에 대해 질문 던져서 판 좀 깔아두려고 하면, 야구 질문으로 망치기나 하고.” ​ “그게….” ​ 평소의 그 쿨하고 남자 보기를 돌같이 하던 누나는 어디 가고, 이런 수줍은 소녀가 남았단 말인가. ​ 천재적으로 데이터를 분석하고, 눈앞에 닥친 문제들을 냉철한 사고 판단으로 해결하던 도연의 똑똑한 머리조차 좋아하는 남자 앞에서는 무용지물이 되는 모양이다. ​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조금 전 식사 자리에서 그녀의 행동은 어느 정도 이유가 있었다. ​ “너무 노골적으로 물어보면 성묵이가 눈치챌 것 같아서….” ​ “눈치 채라고 물어본 건데?” ​ “어?” ​ “결국 연애는 어느 한쪽이 상대를 좋아하는 걸 들키고, 또 상대는 그걸 알아차림으로써 성립되는 거야. 누나처럼 혼자 끙끙대면서 아무한테도 안 들키면 그냥 독거노인 되는 거라고.” ​ “……앗.” ​ 그런 뜻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 못한 도연. 그녀는 꽤나 신기한 눈치다. ​ “뭐야, 도진이 너. 왜 이렇게 잘 알아?” ​ “고백을 종종 받다 보니 연애는 몇 번 해봤어. 그닥 흥미가 없어서 다 한 달도 못 갔지만.” ​ “뭐…!?” ​ 전혀 모르고 있던 동생의 연애사에 깜짝 놀란 도연. 사실 다섯살이나 어린 남동생은, 모태솔로인 그녀보다도 훨씬 경험이 많았던 것이다! ​ “전혀 몰랐어. 왜 나한테도 이야기를….” ​ “누나 외모를 보고 그동안 접근했던 그 남자들처럼, 그 여자애들도 마찬가지였거든. 괜찮은 애라고 생각했으면 말했을 거야.” ​ “아, 그랬구나.” ​ 그 말에 어느 정도는 납득한 도연. 아무리 가족이어도 시시콜콜 모든 이야기를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 ​ “누나, 일단 내가 생각해둔 게 있거든?” ​ “응…?” ​ 도진은 다 계획이 있다. ‘악질 우결충’으로서, 누나와 성묵이 이어지게 만들 특급 비책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