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묵은 쐐기를 박는 홈런을 치고 덕아웃에 돌아와선, 모두의 축하를 받았다. 헬멧을 우다다 두들겨 맞으면서.​ "야이씨, 또 홈런이야? 너 혼자 다 해 먹어라 그냥...!" ​ "성묵 형님, 이제 완전 휴식이신데 좀 세게 맞읍시다!!" ​ 투다다닥!! ​ "야, 야. 살살 좀 치자 애들아!! 크악!" ​ 다들 운동부라 그런지 손이 상당히 맵다. 흔들리는 골통을 겨우 진정시키며, 성묵은 명신우 감독 옆에 가서 앉았다. ​ "감독님, 9회말 수비는 좀 빼주시면 안 됩니까?" ​ "얌마, 당연한 소리를 하고 있어! 오늘 니가 다 해줬는데 한 이닝 수비 빼는 게 대수라고." ​ “흠, 충성.” ​ 그렇게 9회 말은 덕아웃에서 보내게 된 성묵. 4번 석운강은 외야플라이로 아웃되고, 5번 타자 류지는 오늘 첫 안타를 터트렸다. ​ "오호라, 이제야 좀 알겠네." ​ 드디어 안타 맛을 본 류지는 씨익 미소 지었다. ​ 다음 타석은 지수용. 그는 입맛을 다시며 타석에 들어섰다. ​ 다시 한번 나비를 반갈죽하는 그 기분을 경험하겠다는 다짐을 하며 들어섰지만, 그의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 “타임, 투수 교체...!” ​ 기린고 감독은 교체 카드를 꺼냈다. 어차피 딱 두타자만 막으면 된다. ​ 세르게이가 지수용과 다시 맞붙었다간 걷잡을 수 없이 점수 차가 벌어질 수 있다는 판단하에 내린 선택이다. ​ "끄아악, 내 나비가…!!” ​ 담담 일진 노릇 좀 하나 싶었더니, 감독이 투수를 슉 빼버린 상황. 지수용은 결국 3루수 쪽 땅볼로 병살타를 만들어냈다. ​ 그렇게 문혁고의 정규이닝 공격은 끝. 단 3점 차. 4-1의 스코어. ​ 마지막에 뒤집으려면 뒤집을 수도 있는 스코어지만, 기린고 측 관중들은 상당히 기가 죽은 듯 보였다. ​ 그와 반대로, 문혁고 측은 한창 뜨거운 응원 분위기를 자랑했다. ​ 응원을 계속 주도하는 노아. 승리가 점점 보이기 시작하는 경기 막바지까지도 선수들에게 힘을 주기 위해 그녀는 혼신의 힘을 다했다. 땀이 비 오듯 흐르는 데다 화장 고칠 틈도 없지만, 노아는 행복했다. ​ ‘진짜 갈 수 있을지도, 전국…!!’ ​ 경기는 9회 말에 접어들었다. 동료들과 문혁고 학생들의 응원을 등에 업은 리동혁의 공은 엄청난 효용을 보여주었다. ​ 딱! ​ [아, 9번 타자 김선웅 선수의 타구가 맥없이 3루로 흘러갑니다! 타카히나 류지 선수가 가볍게 잡고는 1루에 송구합니다. 아웃!] ​ 다음 타자인 1번 김청호. 그는 얼추 느끼고 있다. 경기 분위기가 완전히 넘어갔다는 것을 말이다. ​ ‘…기린고의 한 해가 이렇게 끝나는 건가.’ ​ 뒤 타자들이 저 괴물 같은 투수 상대로 쳐줄 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는다. 그리고 그 또한, 칠 자신이 없었다. ​ 휘리릭! ​ 투웅-! ​ [김청호의 타구가 2루수 정면! 1루로 가볍게 송구하며 아웃됩니다…!] [이로써 경기 종료까지 남은 카운트는 단 하나!!] ​ 이 상황에 타석에 들어서는 것은 2번 타자 천즈펑. 그가 다소 긴장된 표정으로 타석에 들어섰다. ​ ““천즈펑 짜요……!!”” ​ ““문혁고 화이팅………!!!”” ​ 엄청난 화력을 자랑하던 중국인 관객의 응원 화력도 문혁고 측에 밀리기 시작했다. 믿기지 않는 현실에 그는 이를 꽉 물었다. ​ “젠장, 반드시 이 천즈펑 님이 역전의 발판을…!” ​ 퍼엉-!! ​ “스트-라잌!!” ​ “헙…!!” ​ 금성묵과는 다른 의미로 엄청난 직구가 스트라이크 존 하단에 꽂혔다. 배트를 낼 엄두조차 내지 못한 채 굳어버린 천즈펑. ​ 마치 전투 기계 같이 차가운 리동혁과 눈이 마주친 천즈펑은, 순간 흠칫했다. ​ ‘자, 잠깐. 저 녀석 어디선가 본 것 같은 기분이…?’ ​ 퍼엉!! ​ “스트라잌!!” ​ 다시 한번 직구가 꽂히며 투 스트라이크. 경기장에는 ‘삼구삼진!’ 콜이 쩌렁쩌렁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 이제 자포자기한 듯 ‘짜요!’도 외치지 않는 중국인 측 관객들. 천즈펑은 아직도 리동혁의 얼굴을 떠올리기 위해 열중이다. ​ ‘서, 설마 평양에서…?!’ ​ 휘리릭! ​ 퍼엉!! ​ “스트라이크 아우웃!! 게임 셋!” ​ [아, 천즈펑 선수 루킹삼진!! 4-1로 승리하며 봄 대회 5차전으로 진출하는 문혁고! 그야말로 파죽지세입니다…!] [벌써 작년 세종기 진출팀을 두 개나 박살 내는 문혁고입니다! 대체 이 무서운 팀은 어디까지 올라가게 될까요!] ​ 또다시 강호 팀을 이긴 문혁고. 이제 누가 그들을 무시하랴. ​ 당당히 강호들과 맞설 자격을 얻게 된 문혁고 야구부는, 엊그제 창단했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존재감을 키워나가고 있었다. ​ ​ ​ ######### ​ ​ “키야, 수고했다 애들아!!” ​ “나이스 플레이! 오늘도 쩔었다…!” ​ 경기장 라커룸으로 승리를 자축하는 동료들. 기자 회견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기뻐하는 선수들에게 간단히 한마디를 남겼다. ​ “자자, 다들 기쁘고 들뜨는 마음은 아는데. 너무 늦게까지 싸돌아다니지 말고 일찍 일찍 들어가서 컨디션 관리하자.오늘 수고 많았다.” ​ “네엡…!!” ​ 기합 찬 목소리로 대답하는 후배들. 그런데 뒤에서 궁시렁대는 3학년 녀석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우, 금성묵 저 꼰대시키. 지는 부산에서 즐길 거 다 즐겨놓고 밑에 애들만 쌔리 잡는구만 .” ​ “흠, 나는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보는데. 물론 성묵이는 꼰대가 맞긴 하지만!” ​ 최아담이랑 류지가 쑥덕대는 게 보인다. 바로 철권제재를 하려고 했더니 쌩하고 도망가는 두 녀석. ​ 최아담은 어차피 너무 빨라서 못 잡고, 류지랑은 육탄전으로 맞붙어봤자 엄대엄이라 한숨만 내쉬고 포기했다. ​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조언이거늘, 내가 꼰대라니. 역시 나이가 들어봐야 이 금과옥조 같은 조언들이 얼마나 소중했는지 깨닫게 된다니까. ​ “나 먼저 나간다. 저녁 약속이 좀 있어서.” ​ “앗, 성묵 형님!! 수고하셨습니다앗!” ​ 넙죽 허리 숙여 인사하는 지수용. 나는 동료들과 적당히 인사를 나누고는 라커룸을 빠져나왔다. ​ 그렇게 좀 걷는데, 멀찍이서 보이는 눈에 띄는 분홍색의 트윈테일 머리. 어딜 봐도 타카히나 노아다. ​ “아앗, 성묵 오빠!!” ​ 나를 보자마자 폴짝 뛰더니 전력으로 달려오는 노아. 초롱초롱 눈빛을 빛내는 그녀는 쌓아둔 말을 우다다 쏟아냈다. ​ “꺄아앙…! 오늘도 수고 많았어요!! 오늘 컨디션이 안 좋다고 건너건너 들었는데 어떻게 이렇게 잘 던지세요? 특히 위기 상황에서 노빅 선수에게 병살타를 유도하실 때랑, 홈런을 치셨을 때는 소름이 확…!!” ​ “…노아, 마음은 알겠다만 좀 천천히 말해줘..” ​ “핫, 제가 너무 흥분했죠…? 너무 신이 나서 그만.” ​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노아. 뭔가 피식 웃음이 나왔다. ​ “오늘 수고 많았다. 덕분에 힘이 많이 됐어.” ​ “그쵸? 저 오늘 열심히 했어요!! 헤헤….” ​ “그래그래, 고맙다 노아.” ​ “흐흣, 정말 고마우세요?” ​ “어, 고맙지?” ​ 노아는 갑자기 소악마 같은 웃음을 지었다. 이거 뭔가 불안한데. ​ “그러면 포상 주세요!” ​ “포상…?” ​ “네, 포상이요!” ​ 갑자기 포상이라니. 뭐 밥이라도 사줘야 하는 걸까. 근데 나 돈 없는데…? ​ “무슨 포상?” ​ “흐흐흣…….” ​ 소악마처럼 웃고는, 내 가슴팍에 툭 하고 이마를 붙여오는 노아. ​ “쓰다듬어 주세요!” ​ “……!” ​ 놀랐다. 이런 식의 포상을 요구할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 ​ ‘뭐, 어려운 것도 아니고.’ ​ 노아가 우리 팀에 하는 공헌을 생각하면, 이 정도는 몇 번이고 해줄 수 있다. ​ “정말 이걸로 되겠어?” ​ “네, 당연하죠! 대신 정성껏 해주셔야 해요…!” ​ “그래그래, 알겠다.” ​ “꺄하~♬” ​ 그녀의 머리를 잔뜩 쓰다듬어줄 생각으로 왼손을 들었던 그때.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쥠 성무쿠.” ​ “………!?” ​ 갑자기 등장한 불청객에 눈이 희번득해지는 노아. 순간 살기가 지나간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 “잠깐 이야기가 하고 싶다. 쥠 성무쿠.” ​ 나를 저렇게 부르는 사람은, 역시 단 한명 뿐이다. ​ “세르게이냐.” ​ “…그래.” ​ 오늘 기린고의 선발 투수로서, 패전 투수의 멍에를 안게 된 세르게이 라스푸틴. 그가 웬일인지 나를 직접 찾아왔다. ​ “오늘 멋진 승부였다. 쥠 성무쿠, 너는 확실히 진정한 남자더군.” ​ “그래, 멋진 승부였다. 세르게이.” ​ 꽈악! ​ 서로의 손을 꽉 쥐며 악수를 나눈 우리 둘. ​ ‘설마 이거 말하려고 따로 찾아온 건가…?’ ​ 다소 좀 의아했는데, 그건 아닌지 바로 본론으로 넘어가는 세르게이. ​ “쥠 성무쿠, 혹시 네 녀석. 결혼할 여자가 있나?” ​ “갑자기…?” ​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뜬금없는 질문. 옆에서 노아가 화들짝 놀란다. 나는 일단 고개를 가로저었다. ​ “아니, 없다만.” ​ “그렇다면 내 고향에 있는 내 가족을 소개받지 않겠나. 벌써부터 미녀라고 러시아에 소문이 자자하다.” ​ “오…?” ​ 나도 남자인지라 좀 솔깃했다. 러시아에 그렇게 미녀가 많다는데 솔직히 좀 궁금하긴 하다. ​ 그런데 잠깐, 뭔가 이상한데. ​ ‘벌써부터 라니?’ ​ 소문이 자자하면 한 거지, 벌써부터는 또 뭐란 말인가. 뭔가 위험한 냄새가 풀풀 나는데. ​ “어이 잠깐, 몇 살이냐 그 사람?” ​ “13살이다만?” ​ “이거 미친놈 아니야…!!” ​ 자칫 잘못했으면 인터폴에 적색 수배령이 내려질 뻔했다. 사실 뭐, 나이대가 맞았다 한들 여유롭게 국제 연애나 하고 다닐 여유도 없지만서도. ​ “흠, 생각이 없나 보군. 알겠다, 그럼 이만….” ​ 그대로 떠난 세르게이. 다시 노아와 이야기를 하려고 고개를 돌렸는데- ​ “노아?” ​ “흥…!” ​ 왜인지 삐져있다. 뭐지…?? ​ ​ ​ ########## ​ ​ “흠, 좋은 제안이라 생각했는데 부담스러웠던 것인가.” ​ “저기, 세르게이 씨…!” ​ 수염을 매만지며 터벅터벅 걷는 세르게이. 그런 그를 누군가가 멈춰 세웠고, 세르게이는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 “누구냐, 너는.” ​ “안녕, 나는 문혁고 투수 박찬준이라고 하는데….” ​ “처음 듣는다. 무슨 볼일이냐?” ​ “조금 뜬금없을 수 있지만, 내게 너클볼을 가르쳐줄 수 있을까?” ​ “……또인가, 주기적으로 이런 똥파리가 날아드는군.” ​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 세르게이. 그는 단호했다. ​ “절대 불가, 내가 배운 너클볼은 라스푸틴 가에 대대로 전해지는 비급이다. 아무에게 알려줄 수 없다. 네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져와도 그것은….” ​ 한창 세르게이가 말을 이어가는데, 박찬준은 그저 조용히 모자를 벗었다. ​ “사실 성묵이가 너한테 한번 가보라고 했거든. 네가 탈모약에 대해 궁금한 게 많다고 그래서….” ​ 그리고 세르게이의 동공이 미친 듯이 떨리기 시작했다. ​ “Боже мой(이럴 수가)….” ​ 처음 만나는 동지다. 그동안 숭숭 빠지는 머리털 때문에 정말 고등학생이 맞냐는 소리를 얼마나 들었던가. ​ 그런데 같은 고등학생 탈모 동지를 만나다니. 세르게이는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마저 느꼈다. ​ “Мой брат(형제여).” ​ “어, 어어? 뭐라고…?” ​ “형제여, 너클볼을 배우고 싶다 말했지.” ​ “응, 그치…?” ​ “기꺼이 가르쳐주지. 내가 아는 모든 것을.” ​ “…………!!” ​ 그저 그런 땜빵 투수인 박찬준에게 찾아든 기연. 그가 너클볼을 온전히 자기의 무기로 만들 수 있을 것인지는, 조금은 지켜봐야 할 것 같다. ​ ​ ​ ###### ​ ​ “……….” ​ 아까부터 흐르는 침묵. 노아는 여전히 삐져서는 나를 못마땅한 표정으로 보고 있다. ​ 힐끔- ​ “노아.” ​ 지긋- ​ “뭐냐, 할 말 있으면 말로 해.” ​ 그러자 뾰루퉁한 표정을 짓는 노아. 이내 불만을 터트리기 시작한다. ​ “정말, 성묵 오빠…! 너무해요!!” ​ “어, 뭐가?” ​ “쓰다듬어주시기로 해놓고, 러시아 미녀 소개해준다니까 헤벌레~ 한 표정이나 지으시고…!!” ​ 입을 헤~ 벌리며 그 표정을 재현한 그녀. 내가 그랬다고…? ​ “에이, 내가 언제 그랬어.” ​ “지었거든요! 흥, 어이없어…!” ​ 팩하고 토라지는 노아. 음, 곤란하구만. ​ ‘이건 내가 잘못한 거 같긴 한데.’ ​ 어떻게 풀어줘야 할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 ‘역시 남자라면 정면 돌파지.’ ​ 토라진 노아에게 가까이 다가간 나는, 그녀의 머리 위에 손을 살포시 얹었다. ​ “미안하다,노아.” ​ 사과하며 그녀의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그러자 몸을 부르르 떠는 노아. ​ “……!!” ​ 이내 화들짝 놀라더니 쓱 빠져나갔다. 마치 한 마리의 다람쥐를 보는 듯한 날쌘 동작이었다. ​ “후아, 후… 곤란해요, 갑자기 이러시면…!!” ​ “그러면 하지 말까?” ​ “아뇨, 저 아직 화 안 풀렸어요…!!” ​ “…?” ​ 내가 영문을 모르겠단 표정을 짓다, 후끈 달아오른 얼굴로 시선을 피하는 노아. ​ 그녀는 이내 내 팔을 붙잡더니, 새빨간 홍시 같은 얼굴로 말했다. ​ “…마저 쓰다듬어 주세요. 그러면 좀 풀릴 것 같아요.” ​ “그러냐.” ​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냥 다른 이유는 없고, 하는 짓이 귀여워서. ​ “그래, 얼마든지.” ​ 슥슥- ​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무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정성껏. ​ “풀리면 말해. 아직은 시간이 좀 있으니까.” ​ “네에, 알겠어요….” ​ 내 가슴팍에 이마를 맞대고는 눈을 감은 노아. ​ “흥흥…♬” ​ 아무래도 화는 풀린 것 같지만, 나는 그녀의 부드러운 머릿결을 계속 쓰다듬었다. 그것도 꽤나 오랫동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