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이 사람들….”” ​ “누구예요?” “누구야?” ​ “………!!” ​ 성묵은 당황했다. 기분 탓일지도 모르겠지만, 분위기가 썩 좋아 보이지 않는다. 그로서는 전혀 이해가 가지 않는 상황. ​ ‘에라 모르겠다.’ ​ 일단 성묵은 그녀들의 바람을 들어주기로 했다. 누구인지 물었으니, 알려주면 될 것 아닌가? ​ 우선 성묵은 연장자인 도연부터 소개하려 마음먹었다. ​ “자, 이쪽은 도연 씨인데….” ​ “성묵아, 도연 씨라니.” ​ “……?” ​ 그런데 시작부터 태클이 들어왔다. 심지어 걸어온 것은 본인인 도도연. 그녀는 머리 한 쪽을 귀 뒤로 넘기며 싱긋 웃었다. ​ “도연 누나라고 부른다 했잖아.” ​ “……??” ​ 내가 정말 그랬나 싶은 성묵이지만, 딱히 기억은 안 난다. 하지만 전생에선 고졸 따리, 현생에선 중졸 따리인 성묵 엘리트인 그녀보다 기억력에 자신이 없다. ​ ‘뭐, 누나는 맞으니까.’ ​ “아, 그랬죠. 도연 누나.” ​ “후후, 잘하네 성묵이.” ​ “……….” ​ 온화한 미소를 짓는 도연. 그걸 지켜보는 두 여성의 표정은 썩 좋지 않다. 성묵은 전혀 눈치채지 못한 채 소개를 이어갔다. ​ “이쪽은 도연 누나인데, 도진이 친누나셔. 데이터 분석에 있어선 믿고 맡길 수 있는 분이라 상대 팀 분석할 때 도움을 받고 있어.” ​ “앗, 설마 그 레포트가…?!” ​ “응 맞아, 내가 쓴 거야.” ​ 뭔가 짚이는 게 있는 듯한 노아. 그녀는 류지가 경기 전날 한 레포트를 달달 외우는 걸 옆에서 슬쩍 본 적이 있다. 잠깐 봤을 뿐인데도 ‘엄청나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하는 서류라는 게 노아의 감상이다. ​ “직원들한테 부탁해서 다음 경기 상대인 무상고 뿐만 아니라, 기린고, 대관령고, 심지어 한청고 까지 전부 자료를 모으고 있어. 상대 팀은 내가 머리부터 발끝까지 분석해줄 테니까 성묵이 너는 경기에만 집중해. 알겠지?” ​ “네, 믿고 있을게요.” ​ 마지막에 쐐기를 박는 한마디에 성묵의 ‘믿는다’는 말까지 이끌어 내며 도연은 턴을 종료했다. 나름 성과를 거뒀다고 생각하는 것인지 슬며시 웃는 그녀. ​ 그다음 차례는 올리비아다. ​ “이쪽은 올리비아 램지, 영국 유명 쉐프인 고딘 램지의 딸이자 최근 핫한 예능인 청백요리사에 출연한 쉐프입니다. 그리고….” ​ “매일 성묵 씨에게 밥을 해줬어요.” ​ “……!!?” ​ 갑자기 확 치고 나온 올리비아의 엄청난 워딩에 깜짝 놀라는 두 여성. 매일 밥을 해준다니, 그건 마치 부부 같지 않은가. ​ 도연은 그녀가 방송에도 출연한 쉐프라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 ‘고딘 램지는 나도 알아. 동기들이 저 방송 이야기하는 걸 들은 적도 있고. 물론 관심 없어서 보지는 않았지만….’ ​ 요리사에 관한 유명한 소문이 있다. 그들은 집에서는 요리를 잘 하지 않는다고 한다. 밖에서도 종일 요리를 하다 보니, 집에선 할 의욕이 나지 않아 주로 배달 음식을 시켜 먹는다고. ​ ‘그런데 매일 요리를 해준다고…?’ ​ 심지어 그녀는 영국 최고 셰프의 딸. 어지간히 각별한 사이가 아니면 요리 한 번 얻어먹기 힘든 귀인일 텐데, 매일 해준다니. 도연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꽉 깨물었다. ​ 물론 듣고 있는 성묵 입장에선 다소 고개가 갸우뚱해지는 말이다. ​ ‘아니, 뭐. 매일 해주던 때가 있기는 했는데….’ ​ 올리비아의 불법 체류 서류를 쥐고 흔들던 시절에 잠깐 그랬지만, 요즘은 경기 날에만 도시락을 받고 있다. 이걸로는 모자라는지, 성묵을 보고 한마디 더 남기는 올리비아. ​ “…오늘 경기에서 먹은 요리도 맛있다고 해주셨지만, 저는 자신 있어요. 세종기까지 앞으로 남은 모든 경기에서 최고의 활약을 하실 수 있게, 더 맛있고 영양까지 모두 잡은 그런 요리를 차려 드릴게요.” ​ “오, 그거 좋은데. 기대할게.” ​ 성묵에게 ‘기대할게’라는 말을 들으며 턴을 마친 올리비아. 그녀 역시 나름 만족한 눈치다. 그다음은 노아의 차례다. ​ “이쪽은 타카히나 노아. 류지의 여동생이예요. 야구부에선 매니저 겸 치어리더를 맡고 있는데, 응원전에서 밀리지 않은 건 그녀의 덕분이라 생각합니다.” ​ “헤헷, 경기 직전에 성묵 오빠가 직접 밀착 과외를 해주신 덕분이죠! 춤을 이렇게 추는 거야…! 느낌으로 가르쳐 주셨잖아요.” ​ “오,빠…!?” ​ 그 별 거 아닌 명칭이 두 여성의 가슴에 훅하고 꽂혔다. 남자가 들었을 때 가장 좋아한다는 명칭 1위에 랭크한 ‘오빠.’ ​ 동갑이나 연상은 넘볼 수 없는, 연하녀만의 특권. 남성들이 실제로 연하녀를 선호하는 경우가 많음을 생각해보면, 노아의 존재감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 ‘밀착 과외…?’ ​ 올리비아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이제 일상에 지장이 전혀 없을 정도로 한국어를 잘한다지만, 아직 몇몇 단어는 어려웠다. ​ 밀착 과외라니, 얼마나 딱 달라붙어서 가르치길래 밀착이란 단어를 쓴단 말인가. 그녀는 심기가 상당히 불편해졌다. ​ “앗, 성묵 오빠. 혹시 갑자기 오빠라고 불러서 싫으신 건….” ​ “응? 나는 괜찮은데. 편한 대로 불러.” ​ 괜찮은 걸 넘어 내심 듣기 좋다고 생각 중인 성묵. 거절할 리가 없다. 성묵의 수락에 눈을 반짝반짝 빛내던 노아는 곧 도연과 올리비아 쪽을 보며 한마디를 던졌다. ​ “언니들!!” ​ “……!” ​ 훅하고 찔러 들어오는 노아. 올리비아에게도 데미지가 있었지만, 도연 쪽이 특히나 커 보였다. ​ 뭔 이야길 하려는 건가 싶었는데, 노아가 눈을 초롱초롱 빛내며 두 소녀에게 다가갔다. ​ “꺄앙!! 가까이서 보니까 언니들 두 분 다 너무 이뻐요!! 저랑 친하게 지내주시면 안 될까요…!” ​ “……??” ​ 갑작스러운 노아의 태도에 그녀들은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노아는 꽤나 진심인 듯, 핸드폰까지 꺼내 들었다. ​ “언니들, 인스타 하시나요…! 괜찮으시면 맞팔해요!” ​ “…하긴 하는데.” ​ “으응, 계정은 있어.” ​ “히힛, 잘됐네요. 이게 제 아이디에요!” ​ 그렇게 한껏 열을 올려가던 세 여성의 기싸움은, 노아 덕분에 어찌저찌 수습될 수 있었다. ​ ‘음, 잘됐구만. 잘 지내게 되어서.’ ​ 그녀들 사이에서 얼마나 고도의 기싸움이 오고갔는지 모르는 성묵은 잘 됐다며 허허 웃었다. ​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의 고난은, 지금부터가 시작이다. ​ ​ ###### ​ ​ 삐빅! ​ 도연은 비척비척 포르쉐 카이엔에 올라탔다. 한창 기싸움을 올리다가, 노아 떄문에 맥이 탁 풀렸기 때문이다. ​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은데….’ ​ 그렇다고 견제를 안 할 수 없다. 노아는 조금 검색을 해보니 최근 인기를 끄는 영상 덕에 그 인지도가 높아지고 있고, 팔로워도 만 단위로 있었다. ​ 가장 큰 견제가 되는 것은 역시 올리비아. 그 나이에 방송까지 탄 유명 쉐프인데다가, 성묵과 같은 학년 동급생. ​ 외부인인 도연과 달리 자연 발생하는 이벤트의 숫자 자체가 다를 수밖에 없다. ​ 그리고 도연 스스로도 가장 큰 장점이라 생각하는 풍만한 몸매 역시, 올리비아도 크게 꿇리는 편이 아니다. ​ 도연은 핸들에 머리를 박고 진지하게 고민했다. ​ ‘어필할 수 있는 게 뭐가 더 있지, 돈…?’ ​ 거기까지 생각이 닿으니 문득 드는 한 가지 생각. 성별을 바꿔서 생각해보면, 성숙한 여고생에게 돈으로 접근하는 수상한 아저씨나 마찬가지 아닌가. ​ “응, 이건 진짜 아니야…!!” ​ 고개를 맹렬하게 저으며 생각을 떨쳐낸 도연. 한숨을 푹 내쉰 그녀는 곧 아주 중요한 걸 떠올렸다. ​ “아, 맞다. 성묵이한테 태워준다고 해야 하는데…!!” ​ 성묵을 기다리던 버스를 도진이 일찍 출발시켜 가며 만든 기회를 기싸움 하느라 까맣게 잊고 있던 그녀. 도연은 후다닥 차에서 나와 어디론가 달려 나갔다. ​ ​ ##### ​ ​ 올리비아는 곤란했다. 오늘 그녀답지 않은 행동의 연속이었기 때문. ​ ‘왜지, 나는 분명….’ ​ 원체 다른 사람에게 무관심한 그녀지만, 오늘 성묵의 곁에 다른 여자들이 붙는 걸 보면서는 포커 페이스를 유지할 수 없었다. ​ 그녀는 문득 깨달았다. 그동안 우연이 겹쳐 성묵의 옆에서 계속 요리를 해주고 있지만, 그의 옆자리는 당연한 것이 아니다. ​ 언제든 다른 사람에 의해 대체될 수 있다는 사실. 그게 그녀를 가만히 있을 수 없게 만들었다. ​ ‘나 대신 다른 사람이 성묵 씨의 요리를…?’ ​ 다른 여자가 해준 요리를 먹고 미소 짓는 성묵의 얼굴을 떠올려봤다. 왜일까, 가슴이 시릴 정도로 아프다. ​ “…안 돼.” ​ 그녀는 생각했다. 앞으로도 성묵의 옆을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고. 그리고 졸업한 후에도, 쭉 그의 옆에서 요리를 해주고 싶다고 말이다. ​ 물론 그런 관계를 항간에서 뭐라고 하는지, 요리뇌인 올리비아는 아직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 ​ ​ ##### ​ ​ ​ “흥흥…♬” ​ 노아는 신이 났다. 경기에서도 이기고, 예쁜 언니들의 연락처도 받았기 때문이다. ​ 원체 예쁜 사람을 좋아하는 노아답게 그녀들과 친해지고 싶은 것은 진심이었지만, 그녀들은 당장 노아를 썩 맘에 들어 하지 않는 것 같았다. ​ ‘에이, 차차 친해지면 되겠지…!!’ ​ 성묵이라는 연결고리 때문에 앞으로도 마주칠 일이 많을 거라 생각한 노아. 그녀는 성묵을 생각하면서도 배시시 웃었다. ​ ‘오늘 성묵 오빠, 멋있었지…!’ ​ 상대 팀을 힘대힘으로 압도하는 박력과 남성성. 동 나이대의 남성에겐 느낄 수 없는 수컷 냄새가 성묵에게선 풀풀 풍겼다. ​ 노아는 살면서 같은 나이대의 남자를 이성으로 보지 못한 게 그런 이유다. 나름 주먹깨나 쓴다는 양아치들은 굴지의 야쿠자들을 보며 자란 노아에겐 동네 건달 그 이하의 존재였고, 공부만 하는 샌님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 무영파 보스이자 그녀의 아버지인 류켄. 거기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성묵이 성인이 되어 조금 더 피지컬이 커진다면, 충분히 비슷한 야성미를 뽐낼 거라 생각하는 노아다. ​ ‘오빠라면 아빠의 시험을 통과할지도…!’ ​ 나중에 교제하는 사람을 꼭 자신의 앞에 데려오라고 단언했던 류켄이다. 뭘 할지는 모르겠지만, 딸바보인 야쿠자 보스가 감히 딸을 데려가려는 놈을 결코 가만히 둘리는 만무. ​ 하지만 류지를 구한 날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성묵은 전투력도 꽤 보유하고 있는 게 분명하다. 아마 동나이대에 이런 최상급 매물은 흔치 않으리라. ​ ‘…성묵 오빠, 분명히 왕성하겠지?’ ​ 무려 탑급 의사가 공인한 남성 호르몬 상위 0.01%의 괴수. 심지어 그 사이즈는 경기장에서 하도 티를 내서 더 말할 것도 없다. ​ 노아는 그 묵직한 풍경의 이미지를 잠시 떠올려 보더니,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 ‘응, 나 혼자서는 감당 못해!’ ​ 빠르게 견적을 내린 노아. 그녀의 머릿속에 마침 예쁜 두 언니들의 얼굴을 떠올렸다. ​ “핫, 성묵 오빠를 언니들이랑 같이 사귀면 되잖아…!?” ​ 그녀들이랑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았다. 돌아가면서 성묵의 상대를 해주고, 나중엔 서로 육아도 도와주면 얼마나 좋겠는가. ​ ‘우음, 언니들이 괜찮을지는 모르겠네….’ ​ 노아는 요즘 여자아이답지 않게, ‘영웅호색’이 당연한 거라 생각했다. 그녀의 아버지인 류켄 역시 그러했으니까. ​ “후후, 내가 중간에서 잘하면 어떻게든 될 거야…!!” ​ 눈을 반짝이며 원대한 계획을 세우는 노아. 아무래도 성묵의 이성 관계는 결코 평범한 방향으론 흘러가지 않을 것이 확실해 보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