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우." ​ 본인만 모르는 노히트 노런 상황. 성묵은 여전히 강력한 공을 뿌렸다. ​ 하지만 이전 이닝까지 신묘한 볼 배합으로 상대를 제압해오는 데 성공했다 해도, 수 싸움은 통계인 만큼 항상 이길 수는 없는 노릇. 심지어 상대 타자는 서울권에서도 손에 꼽히는 교타자. ​ 따악! ​ 중견수 방향을 향해 깊숙이 날아가는 타구. 타구를 본 순간 성묵을 포함한 팀원들은 모두 직감했다. ​ '젠장, 장타다…!' ​ 열심히 타구를 쫓아가는 지수용. 하지만 그의 수비 실력은 여전히 평균 이하. 그래서 아무도 기대하지 않았건만… ​ "우오오오옷……!!!" ​ 굉음을 내며 달려가 몸을 던지는 지수용. 그 충격으로 데굴데굴 구른 지수용에게 경기장의 이목이 온통 집중됐다. ​ "헤헷, 형님들!! 저 잡았습니다…!" ​ 빵긋 웃으며 글러브를 올리는 녀석. 수비의 구멍이라 생각했던 지수용이 보여준 엄청난 파인 플레이에 경기장에서 함성이 울려 퍼졌다. ​ "나이스 플레이, 지수용…!!" ​ "무조건 놓칠 거라 생각했어. 미안하다…." "에엑……!?!" ​ 중견수 방향을 향해 따봉을 날린 성묵. 수비수의 도움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다음 타석은 금강고의 4번 타자 조휘결의 타석. ​ 따악!! ​ 유격수 라인 위를 향해 날아가는 빨랫줄 같은 타구. 이대로 가면 좌중간을 꿰뚫을 것이 분명했으나 공의 궤적 사이로 폴짝 뛰어오르는 누군가가 있었다. ​ "으랏챠…!!" ​ 터억! ​ [아, 유격수 최아담 선수! 엄청난 점프 캐치로 안타를 낚아챕니다!!] ​ [조휘결 선수, 많이 아쉽겠는데요?] ​ 그 다음인 5번 타자 이성운. 그는 모두가 예상치도 못한 선택을 했다. ​ '노히트는 안 된다. 노히트는!' ​ 저런 듣보 고등학교의 희생양이 될 수는 없다. 대기록이라면 앞으로도 입방아에 오르내릴 터. ​ 그렇게 생각한 이성운은 불문율 상 하지 않는 일에까지 손을 대고 말았다. 바로, 대기록 중에 번트를 대는 것이다. ​ 투웅! ​ [아아, 이성운 선수! 세이프티 번트! 금성묵 선수는 예상 못했는지 움찔합니다!] ​ [대기록 중에 번트를 대는 것은 불문율 상 잘 하지 않습니다! 분명 그래서인 것 같은데요. 어어, 3루수…?!] ​ 순간 멈칫하고 반응을 못 한 성묵과 달리, 3루에서 쏜살같이 튀어나오는 인영이 있었다. ​ "되겠냐?" ​ 슈웅! ​ 맨손으로 타구를 바로 낚아챈 류지는 그대로 1루를 향해 러닝스로. 모두의 이목이 집중된 순간, 심판의 손이 올라갔다. ​ "아웃…!!" ​ 결국 진루에 실패한 이성운은 아쉬움을 표하며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하마터면 주자를 내보낼 뻔한 상황을 류지 덕에 은 성묵은 조용히 엄지를 세웠다. ​ “여어, 나이스 플레이.” ​ “흐흐, 별말씀을.” ​ 그러자 야구장에서 퍼지기 시작하는 야유. ​ "우우, 추하다 추해." ​ "자기들도 당할 수 있단 거는 생각 안 하나?" ​ 금강고 투수 장태산 역시 노히트가 진행 중인 상황. 문혁고라고 똑같이 기습 번트를 대지 않으리란 법은 없다. ​ “엇…!” ​ 그걸 깨닫자 아차 싶었던 이성운. 면목 없다는 듯 장태산에 사과했다. ​ "미안하다 태산아. 내가 어떻게든 살아나가야 한다고 생각해서 그만..." ​ "됐다. 네 실수는 결국 여기서 우리가 이기면 희석된다. 신경 쓰지 말고 수비에 집중해다오." ​ "어어, 그래…!!" ​ 이성운을 위로한 뒤, 결연한 표정으로 마운드에 올라서는 장태산. 그에 맞선 선두타자는 오늘 출루가 없는 2번 타자 도도진이다. ​ '솔직히, 아직도 자신 없어.' ​ 자기 객관화를 마친 도진. 장태산을 상대로 정타를 만드는 건 쉽지 않아 보인다. ​ '지금 투구 수는 68개.' ​ 도연의 레포트는 도진 역시 꿰고 있다. 80개쯤부터 등장하기 시작한다는 장태산의 쿠세. 아직 거기까지 가려면 공이 족히 12개는 남아있다. ​ '…나는 디딤돌이다.' ​ 정타 욕심을 버린 도진. 뒷 타자들을 위해 최대한 투구 수를 늘리기로 결심한 그와 장태산의 끈질긴 승부가 시작됐다. ​ 따악! "파울!" ​ 퍼엉! "볼!" ​ 존 근처에 공이 오면 커트하고, 크게 빠지는 공은 치지 않는다. 도진은 이 간단한 행위를 반복했다. 자기 뒤의 괴물같은 클린업이 저 투수를 상대로 점수를 뽑아내는 걸 돕기 위해서. ​ '클린업 모두 이번 세 번째 타석이 마지막 타석일 가능성이 높아. 그러니까, 더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주마.' ​ 딱! 딱! 따악!! ​ 파울, 그리고 또 파울. ​ 포커페이스인 장태산을 찡그리게 할 정도의 진득한 승부가 이어졌다. 그러나 결국 이긴 쪽은 장태산이었다. ​ 따악! ​ [아, 3루수 잡았습니다. 그리고 1루로 송구! 도도진 선수 1루에서 아웃됩니다.] ​ [끈질긴 승부 펼쳐줬는데요. 아쉽게 됐습니다.] ​ 결국 도진은 아쉽게도 유격수 땅볼로 아웃됐다. 그는 타석으로 걸어오는 성묵에게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 “형, 미안해요. 기왕이면 출루하려고 했는데.” ​ “아니, 훌륭해. 너는 네 몫을 100% 다 했어.” ​ “…형.” ​ “이젠 나한테 맡겨, 짜식아.” ​ 도진의 어깨를 툭툭 치며 위로한 성묵. ​ 이제는 더 망설일 것도 없다. 아마도 마지막이 될 이번 타석. 성묵은 나지막이 읊조렸다. ​ "스위치." [태양신맥에 의한 스텟 변화가 초기화됩니다!] [파워 스텟이 B+ -> A로 강화됩니다!] [파워 스텟이 A->A+로 강화됩니다!] [컨택 스텟이 B->B+로 강화됩니다!] ​ 성묵은 생각했다. 지금이야말로 장태산을 무찌를 때라고. ​ ‘도진이가 투구 수를 늘려준 덕분에, 녀석의 쿠세가 드러날 때가 앞당겨졌어.’ ​ 현재 장태산의 투구 수는 76구. 조금만 더 던지게 하면 난공불락 같던 녀석의 유일한 약점이 드러난다. 승리를 위해선 무조건 집중적으로 물고 뜯어야 한다. 우선 장태산의 초구가 던져졌다. ​ 뻐엉!! ​ “스트라이크…!!” ​ 155km의 직구가 존 한가운데에 꽂혔다. 참으로 대담한 선택. 성묵은 휘파람을 불고는 배트로 발을 탁탁 털었다. 그리고 다시 들어선 타석. ​ 퍼엉! ​ “볼…!!” ​ 그 뒤에는 존을 빗나가는 직구와 스플리터 하나씩. 볼카운트는 2-1. 그 뒤에도 배터리의 선택은 빠른 공이었다. ​ 따악! ​ “쓰읍….” ​ 빗맞은 타구가 뒷그물을 때렸다. 배트를 타고 오는 얼얼한 진동에 혀를 내미는 성묵. ​ 카운트는 2-2. 과연 여기서 배터리는 무슨 선택을 할 것인가. 성묵이 내놓은 답은 간단했다. ​ ‘보고 결정하면 그만이지.’ ​ 다리를 높게 드는 장태산. 그의 오른팔이 채찍처럼 휘어진다. ​ 그리고는 성묵은 보았다. 정말로 그의 어깨가 먼저 열리는 것을. ​ ‘…커브 어서오고.’ ​ 엄청난 높이에서 큰 폭으로 떨어지기 시작하는 커브. 눈높이에서 가슴, 가슴에서 허리로 점점 하강한다. ​ 그러나 성묵의 배트 역시 물 흐르듯 움직인다. 눈높이에서 가슴, 가슴에서 허리, 그리고- ​ 따악--!! ​ 땅바닥에서 하늘까지. 공은 쭉쭉 뻗어나간다. ​ [아, 금성묵 선수! 큽니다! 큽니다아앗…!!] ​ 성묵은 이미 배트를 던졌다. 하늘 높이, 높이 뻗어져 나가는 공. 중견수가 열심히 쫓아가 보지만, 이내 고개를 떨군다. ​ 투웅!! ​ 전광판을 맞고 다시 경기장으로 떨어지는 공. 반박의 여지 없는 홈런이다. ​ [담장 넘어갑니다!! 양 팀 동시에 노히트 노런이라는 팽팽한 균형을 무너뜨리는 금성묵 선수의 선제 솔로포!! 문혁고 1-0으로 앞서갑니다!] ​ [아, 지금은 커브를 완전히 노리고 쳤거든요…! 정말 대단합니다. 금성묵 선수! 오늘 경기를 혼자서 지배하고 있어요!!] ​ 장태산의 노히트 노런을 박살 내는 선제 솔로 홈런에 문혁고 측 덕아웃, 그리고 관객석은 난리가 났다. ​ “우와아아앗…………!!!” ​ “젠장 금성묵, 미쳤냐고…!!” ​ 금성묵의 손에 완벽히 깨져버린 대기록. 양팀간 팽팽한 균형을 먼저 깨는 것이 문혁고 측일 거라 예상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노아의 유도 아래, 문혁고 측 관객들은 열렬하게 성묵의 이름을 연호했다. ​ ““금성묵, 금성묵, 금성묵!!”” ​ 열렬한 함성 속에 묵묵히 베이스를 도는 금성묵. 그는 방금 타격을 복기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존 안으로 들어와서 다행이군.’ ​ 아무리 좋은 변화구라도 존 안에 넣다 보면 언젠가 맞게 되어 있다. 방금 공이 존 아래쪽으로 떨어지는 공이었다면 성묵 역시 공략하기 쉽지 않았을 터다. ​ 하지만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 이 타석의 승자는 성묵이다. ​ 유유히 홈을 밟은 그는 홈에서 기다리는 석운강, 류지에게 다가가 중요한 정보를 건넸다. ​ “확실해, 80구 넘어가기 무섭게 어깨가 일찍 열려.” ​ “그게 정말입니까…!” ​ “오호라, 접수 완료.” ​ 합장하는 석운강과 턱을 매만지는 류지. 성묵은 덕아웃에 돌아가서 환호받으면서도, 두 타자에 대해 걱정은 하지 않았다. ​ ‘무려 천타지체 보유자들인데.’ ​ 따악!! ​ 청량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4번타자 석운강은 커브를 노려 우측 담장으로 넘어가는 홈런을 쳐냈다. 노히트 노런이 깨진 뒤에 터진 백투백 홈런. ​ “……큭.” ​ 금성묵에게 맞을 때만 해도 덤덤하던 장태산의 표정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투수 교체를 알아봐 줄 수 있냐고 덕아웃을 바라봤지만, 고개를 젓는 감독. 그의 선택은 장태산을 그대로 끌고 가는 것이다. ​ ‘어차피 태산이 만한 투수는 우리 팀에 없다.’ ​ 백투백 홈런으로 내준 2점은 뼈아프지만, 이미 맞은 홈런이다. ​ 타카히나 류지의 장타력을 경계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경기 초반 보여준 그 큰 타구는 어디까지나 가장 떨어지는 구종인 스플리터를 상대로 만든 타구. ​ 그냥 깔끔하게 잊고 가는 게 낫다고 생각한 금강고 감독이다. 이번 이닝만 마치면 상대 타순은 하위기도 하고. ​ 그러나 그 생각은 완전한 패착이다. 지금 타석 앞에는 눈깔이 돌기 직전인 한 남자가 대기 중이다. ​ 띠링! ​ 이름: 타카히나 류지 국적: 일본 나이: 19세 키: 189cm 소속: 문혁 고등학교 ​ 스킬/ 용혈(龍血) (S+) : 파괴 본능이 번질 때, 파워 스텟이 크게 상승합니다. ​ 타자 능력치 (*포텐셜) / 우투 좌타 파워: A+ -> S (*S+) 컨택: B (*A+) 스피드: B 선구: A (*S) 수비: A (*A+) 어깨: A+ (*S) ​ 기본 A+인 스텟이 S로 변경되어있다. 이 스텟 변화가 말하는 바는 간단하다. ​ ‘류지 녀석, 용혈 발동됐구만.’ ​ 앞선 타석에서 겪은 아웃들로 인해 파괴 충동이 도지기 시작한 모양. 류지는 다소 희번득한 눈으로 입을 열었다. ​ “거기, 포수 친구.” “…왜 부르지?” ​ “ ‘잘 먹겠습니다’가 일본어로 뭔지 알아?” “모른다만.” ​ 사실 모르는 게 정상이다. 이 세계관 속 한국어는 세계 사용량 2위인 최상급 언어. 가만히 있어도 외국인들이 한국어를 배우는 데 뭣 하러 일본어 따위를 배우겠는가. ​ 그러나, 그런 고정관념에 대해 류지는 일갈했다. ​ “쓰읍! 일본어가 한국어보다 못하다는 사대주의적 마인드는 좋지 않아 친구. 모르면 배울 생각을 해야지.” “……??” ​ “자, 들어봐. 정답이 뭐냐면-.” “…?” ​ 그러나 류지는 입을 꾹 닫고는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묘하게 심기가 불편한 포수. ​ ‘아니, 그래서 정답이 뭔데?’ ​ 심리전에서 말려버린 포수 조휘결. 내심 기다리던 정답은 장태산이 제 4구를 던진 뒤에 들을 수 있었다. ​ 어깨가 일찍 열리고 던져지는 커브. 류지는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배트를 휘둘렀다. ​ “정답은 바로-.” “이타다키마스.” ​ 딱!! ​ “………!!” ​ [아, 타카히나 선수! 쳤습니다! 쭉쭉 뻗습니다!!] ​ 이번에도 높이 치솟는 타구. 빨랫줄 같은 속도로 쭉 뻗어나가는 공은 그 낮은 각도 탓에 펜스에 맞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 터엉-! ​ 그 각도 그대로 담장을 넘어가 버렸다. 라인드라이브 홈런. 타카히나 류지의 장기가 처음 야구계에 선보여지는 순간이다. ​ [담장 넘어갑니다! 문혁고의 백투백투백 홈런! 국적이 전부 다른 문혁고의 클린업이 금강고를 두들깁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방어율 1점대의 절대적 에이스 장태산이 무너집니다!] ​ 광란의 상태에까지 접어든 문혁고 측 덕아웃. 그들은 쏟아지는 도파민에 흥을 주체하지 못하는 듯 보인다. 자기 이름의 연호를 들으며 홈을 밟은 류지. 그는 포수 조휘결을 향해 싱긋 웃었다. ​ “류지의 일본어 교실, 끝!” ​ “……….” ​ ‘이 놈도 어지간히 미친놈이군….’라고 내심 생각한 조휘결이다. ​ 홈런을 친 덕분에 갈증이 다소 해소됐는지, 류지는 싱글벙글 웃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가장 먼저 다가간 것은 역시 금성묵의 근처다. ​ “이야, 성묵아. 덕분에 하나 치고 왔다.” “고맙냐? 그럼 나 다음 선발 때도 치던가.” ​ “오, 벌써 4차전은 따놓은 당상이시다?” “당연하지 인마, 우리 세종기 우승한다니까?” “푸핫…! 맞네!” ​ 오늘 문혁고는 모두의 예상을 박살 내는 중이다. 전국구 에이스인 장태산을 3연타석 홈런으로 혼쭐을 내고, 그 반대 편의 무명 투수 금성묵은 노히트 노런에까지 도전 중. ​ 경기가 막바지, 더 이상 문혁고는 도전자가 아니었다. 이제는 전통의 강호인 금강고, 그들이 도전자다. ​ 뒤바뀐 입장에서 최후의 승자가 누가 될 것인가. 경기는 최종 장으로 접어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