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부를 만들 때가 왔음을 직감한 나는 이사장을 찾아 나섰다. 사립 학교인데다 돈 관련된 모든 일은 학교의 소유주인 그를 통해야 하기 때문이다. 방학 중이라도 학교에 출근하는 일이 많다는 그를 찾아 문혁고에 방문했지만. ​ "예약이 꽉 찼다고요?" ​ "네, 당분간은 기약이 없습니다" ​ 이사장을 만나는 건 아무래도 쉽지 않았다. 심지어 그냥 비서 선에서 자르려는 뉘앙스가 팍팍 풍겼다. 한 학교의 일인자인 만큼 학생의 신분으로 대뜸 만나기는 어려운 일인 듯 했다. ​ ‘정문이 막히면 개구멍으로 들어가면 그만이지.’ ​ 그래서 나는 다른 방법을 택했다. ​ "안녕하십니까. 이사장님...!" ​ 이사장과의 만남을 문의할 때 슬쩍 훔쳐본 비서의 문서에서 다른 고위급 인사들과 골프 모임을 가는 시간대를 노려 나타난 것이다. ​ 푸짐한 뱃살과 중앙만 벗겨진 그의 머리를 가진 이사장 얼굴은 갑자기 튀어나온 학생에 당황한 낌새였다. ​ “이사장님, 어떻게 이런 우연이!” ​ “오…, 학생이 여긴 어떻게 알고…. 크흠, 아무튼 반갑구먼." ​ “마침 간절하게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었는데, 잠깐 이야기 가능하실까요?" ​ "하하, 내가 지금은 좀 바빠서...." ​ "그럼 제가 편하신 시간에 꼭 찾아뵙고 싶습니다. 괜찮겠습니까!" ​ "크흠….“ ​ “괜!찮!겠습니까…!” ​ “그래, 그렇게 하도록 하게..." ​ 그냥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듯 내 눈을 피하며 둘러대는 이사장. 하지만 나는 저 말만 듣고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다. ​ "아이고, 유지웅 재단장님. 선한 영향력에 항상 감화되고 있습니다." ​ "박규태 회장님 아니십니까? 상장 축하드립니다. 거기에 회장님 역할이 컸다고 많이 들었습니다." ​ 슬쩍 훔쳐봤던 일정표에는 동행하는 유력자들의 이름 또한 쓰여있었는데, 철저한 구글링을 통한 사전 조사로 옆에 있던 사람들을 죄다 구워삶아 버렸다. ​ 각자 자기 분야에서 성공한 사람들은 다들 인정 욕구가 있다. 공부에 손도 안 댈 거 같은 양아치 같은 놈조차 자길 알아보고 똥꼬를 핥아준다는 것은 엄청난 쾌감. 죄다 광대가 승천하는 눈치다. ​ "허허, 자네 학교에 이렇게 훌륭한 학생이 있을 줄이야." ​ “생긴 걸 보고 오해할 뻔했지만, 앞으로 크게 될 친구야.” ​ "무슨 사정인지는 모르겠지만, 이사장 이 친구가 그리 꽉 막힌 친구는 아니니 잘 들어줄걸세." ​ 이사장 빼고 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 그는 더 이상 뺄 수 없는 분위기로 몰렸다. ​ “끙…….” ​ 그 덕분일까. 대략 이틀 뒤, 일사천리로 그와의 개인 면담 일정을 잡을 수 있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그의 개인 사무실로 들어갈 수 있었다. ​ “후, 그래. 금성묵 군. 골프 모임에까지 끼어들어서 내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가?” ​ "그건 어디까지나 우연..." ​ "나를 바보로 아는 건가? 본론이나 이야기하게." ​ "…하하." ​ 아무래도 호락호락한 사람은 아닌 모양이다. 나는 표정을 굳히고는 바로 본론을 말했다. ​ “문혁고에 야구부를 만들어주셨으면 합니다.” ​ 이사장의 넓은 이마가 찌푸려졌다. ​ “이미 야구 동아리가 있지 않은가?” ​ “제가 말한 건 정식 야구부입니다. 학교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고, 전국 대회 출전을 노리는 정식 야구부.” ​ “………….” ​ 소파를 짚고 일어나 사무실을 천천히 걷기 시작하는 이사장. ​ “야구, 야구…. 좋지, 부정할 수 없는 세계 최고의 인기 스포츠 아닌가?” “근데 말이지,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는 아니야. 자네도 전학 오기 전 야구부 소속이었으니 대충 이쪽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잘 알지 않나?” ​ “…예.” ​ 이사장이 하는 말의 뜻은 잘 알고 있었다. 아무리 이 세계관에서 원탑 스포츠인 야구지만, 동아리 수준이 아닌 프로 지망 야구부는 엄청난 돈이 들어간다. ​ 내가 그를 찾아온 건 전폭적인 지원을 바라기 때문. 좋은 성적을 낸다면야 투자금액 이상을 뽑아먹지만, 그렇지 않다면 상당한 손해를 감수해야 하는 그런 투자를 난 바라고 온 것이다. ​ “반드시 좋은 성적을 내겠습니다.” ​ “어떻게? 기록을 보니 자네는 꽤 심한 부상을 당해서 야구부도 없는 우리 학교로 왔다고 들었는데?” ​ “완치했습니다. 전혀 문제없습니다.” ​ “그래 뭐, 그렇다 치고. 야구는 혼자 하는 게 아니지 않나?” ​ “전국을 노릴만한 동료를 데려오겠습니다.” ​ 이 학교에서도 어느 정도 모아보고- 라는 말 역시 살짝 덧붙였다. ​ “뭐, 전국을 노려? 크하핫...!” ​ 그에 크게 웃기 시작하는 이사장. 아마 세상 물정 모르는 고등학생의 철없는 망상으로 들리는 모양이다. ​ “자네 인맥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모르겠지만, 야구를 잘 모르는 내가 인정할 정도의 대단한 유망주를 데려오는 것이 정말 가능한 건가?” ​ “인정할 정도의 기준이 뭡니까?” ​ “음, 어디 보자…. 저게 있었군!” ​ 책상 위에 놓여있던 한 잡지를 집어 들더니 침을 발라가며 페이지를 넘기는 이사장. 곧 한 페이지를 펼쳐 내게 넘겨주었다. ​ “얼마 전 발간된 고교야구 잡지이네. 그리고 이 페이지에 담긴 건 고교 유망주 랭킹 20위까지." ​ "20위…." ​ "딱 이 정도가 내가 인정할 수 있는 선수의 마지노선이네. 어떤가? 데려올 수 있겠나?" ​ “………그건.” ​ 말도 안 되는 조건이다. 20위면 사실상 1라운더급 선수라는 소리. 하지만 저 랭킹에는 1학년부터 3학년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 일반적인 한 해의 1라운드보다 컷이 훨씬 높다는 소리. 하지만 그의 태도를 보아하니 여기까지가 타협 가능한 마지막 선으로 보였다. ​ “그래, 당연히 안 되겠지. 그러니 얼른 돌아가서….” ​ “좋습니다. 데려와 보죠.” ​ "뭣...?" ​ 내가 받아들일지 몰랐는지 미간을 찌푸리는 이사장. 그는 이내 너털웃음을 지으며 책상 의자에 도로 앉았다. ​ “허허, 좋네. 젊은 시절에 달콤한 꿈을 꾸어보는 것도 하나의 경험이지. 이야기는 끝난 것 같으니 가보게." ​ 철컥! ​ 그렇게 이사장과의 협상은 끝났다. 그리고 난 밖으로 나와서는 상황이 영 골치 아파졌음을 새삼 깨달았다. ​ ​​“…니미, 말이야 쉽지. 얘네들을 어떻게 빼 와?” ​ 20위권 선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하나같이 눈이 휘둥그레지는 툴을 가진 실력자들이 분포해있었다. ​ 스탯에 S등급 없는 놈을 찾아볼 수가 없다. 포텐셜만 S등급이 많고 능력치 대부분이 C와 B를 왔다 갔다 하는 나보다 훨씬 더 잘하는 선수들이라 봐야 했다. ​ '쓰읍, 1위부터 10위까지는 다 글러 먹었고...' ​ 다 초명문 고등학교의 핵심 선수들이다. 11위부터 20위까지는 그나마 비벼볼 구석은 있는 선수들이 보였지만, 다 그럴듯한 전력은 갖춰놓고 어필해야 영입이 가능한 선수들이었다. ​ 내 눈에 개쩌는 유망주는 다른 학교에서도 이미 다 알고 채간 지 오래. 스카우터들 눈이 그렇게 옹이구멍이 아니다. ​ "후…." ​ 일말의 가능성이라도 보이는 인물은 딱 하나. ​ ‘유망주 랭킹 12위, 석운강.’ ​ 심지어 야수 중 제일 중요한 포지션인 포수. 그는 아무런 고등학교에도 속하지 않고 있다. ​ 그의 신분은 승려. 소림사 한국 지부 소속이다. ​ 나이는 아직 18세이기에 고등학교에 갈 나이지만 여전히 절에서 수행을 하고 있기에 정식 경기 기록은 따로 없다. ​ 국가 대항전에 홍콩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게 유일한 공식전 출장임에도 12위에 오를 만큼 엄청난 능력치를 지닌 선수다. ​ 정식 경기에 뛰었다면 유망주 랭킹이 5위권 이상 갔을 거란 이야기는 거의 정설 취급 받고 있다. 아무리 약체고일지라도 얘 하나만 영입하면 전국을 노려볼 만하다는 이야기가 돌 정도로 대단한 포수다. ​ 그래서 스님이 왜 야구를 하고 있냐고? ​ ‘소림사 설정이 진짜 골때리니까.’ ​ 잊지 말아야 할 것이, 여기는 기본적으로 야구에 미친 세계관이다. 그 마수는 무술을 수련하는 것으로 유명한 소림사의 승려들 역시 피해 가지 못했다. ​ [소림사는 야구를 통하여 참된 불업의 수행을 목표로 한다.] [타격이란 공(空)과 연기(緣起)의 실천. 공을 맞히려면 집착을 비우고(空) 방망이와 자신이 하나임을(緣起) 느껴야 하니라.] [투구란 무주상보시(無住相布施)의 실천. 투수가 이미 손에서 던진 공의 결과는 오롯이 타자에게 달려있는즉, 자신을 내어주는 마음으로 공을 던지고 그 결과를 온전히 받아들여야 할지어다.] ​ 그러한 연유로, 소림사를 찾아가면 무술 훈련 대신 야구를 하는 승려를 볼 수 있다고 한다. ​ ‘타국에 지부를 낸 건 한국이 유일하다 그랬나.’ ​ 소림사는 중화권의 자부심. 같은 중화권에만 지부를 내지만 야구 선진국인 한국과의 교류를 위해 예외적으로 허용했다고. ​ 스님이라고 무시할 수는 없는 것이, 그 훈련이 상당히 고되어 상당한 실력자들을 많이 배출한다고 한다. 다만 본업이 승려인데다 돈 욕심 없는 사람이 많아 프로가 되는 사람은 거의 없는 편이라고. ​ 석운강은 그러한 소림사 속에서도 특출날 정도로 빛나는 인재. 그의 영입 조건은 사실 간단했다. ​ "제가 가히 받아내지 못할 정도로 대단한 공, 그걸 보고 싶습니다." ​ 투수 대 포수로서 30개의 공을 던져서, 그가 하나라도 받아내지 못하면 그걸로 조건 달성. 그를 자기 팀에 데려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 얼핏 듣기엔 너무도 쉬워 보이는 조건에 전국 각지의 고교 에이스들이 ‘나는 다르다’라며 소림사를 찾아왔지만 전부 개같이 실패하고 돌아갔다. ​ '…문제는 나도 뽀록으로 한 번인가 성공한 게 끝인데.' ​ 그냥 던지는 족족 턱턱 잡아낸다. 심지어 애매한 바운드볼이나 하이볼도 싸그리 잡아낸다. ​ 그냥 위력으로 뚫으려면 직구 스탯이나 변화구 스탯이 엄청나야 할 텐데, 고교 파트에서 그 정도로 성장하긴 어려웠다. ​ '조금이라도 영입 가능성 있는 건 얘뿐이란 게 문제다 문제….' ​ 석운강 영입이 ‘매우 매우 어려움’ 이라면 다른 선수들은 ‘불가능’이다. 다른 선택지 자체가 없었다. ​ “후우…….” ​ 복잡한 마음을 조금 정리할 필요가 있었다. 지금 이 착잡함을 진정시켜줄 수 있는 건 3주간 매일같이 찾았던 덕수 투구장 뿐이었다. ​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 “홀홀~~” ​ 이제 커브나 슬라이더 스텟은 훈련으로 연습에서 올릴 수 있는 스텟인 B등급까지 다 올려뒀으니 안 와도 그만이지만, 투구라는 게 매일 해줘야 감각을 잃어버리지 않는다. ​ 아직 이 몸에 내 투구폼을 조정시키는 과정이 더 필요하기도 했고. ​ 철썩- ​ ‘직구 승부는 무리. 구속이 올라오려면 꽤 시간이 걸려.’ ​ 아직 최대 구속이 140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만큼 금성묵이 투음절맥에 걸려 버린 시간이 뼈아프다. ​ 손에서 채어진 커브가 연이어 그물망을 타고 빨려 들어갔다. 얼마 전의 처참한 변화구 각을 봤던 사람이라면 정말 장족의 발전이라고 박수를 쳐 주겠지만, 도무지 성에 차지가 않았다. ​ "이 정도 각으로는 안 될 거 같은데, 슬라이더도 마찬가지고. 이 정도로는 그 녀석에게-." ​ "암, 그럼. 안 되고말고." ​ "........!!" ​ 깜짝이야! 갑자기 덕수 할배가 튀어나와서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아니, 아니지. 그것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 "뭐야, 할아버지가 말한 거에요?“ ​ "이놈의 썩을 자식이, 사람을 무슨 병신 취급하고 있어!" ​ 길길이 날뛰려던 할배는- ​ “헛…? 끄어응….” ​ 곧 허리 통증이 도졌는지 다시 쭈그러들었다. 그리고는 헛기침을 하며 말했다. ​ "뭔 사정인진 몰겄지만, 한참~ 멀었구먼. 그런 허접한 변화구로 뭘 하겠다고." ​ "커흠..." ​ 나의 부족함은 나 자신부터가 제일 잘 알고 있으니 뭐라 할 말이 없었다. B등급 변화구 정도론 기라성 같은 리그의 S급 타자들까지 잡아낼 순 없다. ​ 내가 현생에서 대단한 투수였고 뭐고, 지금은 다 의미가 없는 게 현실이었다. ​ "자, 잡아봐." ​ "예?" ​ 손을 내밀자 야구공을 내 손에 쥐이는 덕수 할배. 내 손가락을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어느덧 하나의 그립을 완성했다. ​ “음, 딱이고먼.” ​ "이 그립은..." ​ "나한테 변화구 하나만 배워보지?" ​ "..............!" ​ 처음 겪는 상황에 내 눈이 휘둥그레졌다. 원래 덕수 할배는 그냥 무기력한 치매 환자로서 게임에 등장한 게 전부였을 텐데 이렇게 코칭을 자처한다고? ​ '...나쁜 조건은 아니야.' ​ 애초에 히든 피스 그 자체인 인물이다. 연습하는 피쳐에게 훈련 효과를 높일만한 최적의 볼들을 꼬박꼬박 골라내서 전해줄 정도면, 야구 내력이 상당할게 분명했다. ​ 이 게임은 혼자 훈련할 때보다 코칭을 받을 때 그 숙련도가 더 많이 오르는 경우가 많으니 한 번 코칭을 받아봐서 나쁠 건 없다. ​ '실력 없는 코치에게 받으면 오히려 떨어지니까 잘 골라야 하기는 하지만.' ​ 그걸 골라낼 정도의 능력이 내게 없지는 않으니까. 결심을 내린 나는 꾸벅 허리를 숙였다. ​ "잘 부탁드립니다. 할아버지." ​ "홀홀, 오냐." ​ 그 와중에 갑자기 까먹고 있던 한 기능이 떠올랐다. ​ ‘나, 상태창 볼 수 있잖아?’ ​ 야구에 관련하여 도움을 받을 수 있는 대부분의 인물은 상태창 조회가 가능하다. 그렇다면 덕수 할배의 스텟을 본다면 그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 얼추 가늠되지 않을까? ​ 나는 생각을 마치기 무섭게 할배에게 물었다. 상태창을 보려면 이름을 알아야 했으니까. ​ "계속 할아버지라고 부르기도 뭐한데. 혹시 할아버지 성함이 어떻게 되시는지 물어봐도 될까요?" ​ “덕수, 알잖여.” ​ “에이, 성도 좀 알려줘요. 할아버지.” ​ “…………………" ​ 고민이 깊어 보이는 할아버지. ​ "마씨여, 마덕수." ​ 띠링! ​ [마덕수 님의 스테이터스를 열람할 수 있습니다. 열람하시겠습니까?] ​ '마덕수...?' ​ 묘하게 미국의 전설적인 선수와 닮은 듯한 이름이다. 그리고 그건, 단순한 기분 탓이 아니었다. ​ [레전드 선수를 발견했습니다.] [은퇴 선수입니다. 전성기 5년을 기준으로 스테이터스를 제공합니다.] ​ 이름: 마덕수 국적: 대한민국 나이: 73 소속팀: 前 부산 컵스 개화 키워드: 제구의 마법사(EX), 프로페서(S+), 마스터(S+) 체력: S+ 구속: A 컨트롤: EX 구위: S+ 변화구: EX ​ "…우효." ​ 그가 B등급 변화구를 ‘따위’라고 할 수 있는 이유. 그 높은 자존감의 이유가 여기에 있다. ​ 심 봤다. 이건 진짜 대박이다. ​ ​ ##### ​ ​ 힘을 숨긴 전설급 투수였던 덕수 할배에게 1:1 밀착 특훈을 받은 나는 자신만만하게 소림사 한국지부를 찾았다. ​ "시펄, 절 아니랄까 봐 무슨 첩첩산중에 있네." ​ 그렇게 한참을 올라간 나의 위에, 한 거대한 현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 [ 소림사(少林寺) ] ​ 그곳에 빗자루질하던 한 승려가 눈에 띄었는데, 내 외관을 쓱 보더니 바로 내 목적을 알아차렸다. ​ “운강스님을 만나러 오신 모양이군요. 이 계단 위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 "아니, 잠깐." ​ 지금까지 올라온 건 애교라고 말하는 듯한, 엄청난 숫자의 계단들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심지어 최상단부는 구름에 휩싸여 그 끝이 가히 보이지도 않았다. ​ “여기가 소림사 아니었어요? 저 위까지 가라고요?” ​ “애초에 이곳은 입구에 불과합니다. 소림사 본관 건물은 전부 이 위에 있습니다. 아미타불.” ​ 아득하리만치 먼, 구름에 뒤덮인 풍경 속에서 청명한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 댕- 대앵- ​ "이건, 종소리…?"​ ​​ “이 청량하고 군더더기 없는 소리를 미루어 보아, 운강 스님이 타격 연습을 하는 소리 같습니다.” ​ "타격 연습…? 종소리가 나는데요?” ​ "천을 휘감은 방망이로 종을 쳐 울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운강 스님은 타고난 장사이기에 이 먼 거리까지 종소리를 울리실 수 있지요." ​ “………….” ​ 진짜 수련 방법까지 정신이 나갔구나. 게임 속에는 등장하지 않았던 새로운 디테일의 나사 빠짐이 내가 더욱더 다른 세계에 와있음을 실감케 했다. ​ ‘뭐 그런 건 아무래도 좋아.’ ​ 이번이 처음이다. 게임을 통해 미리 알고 있던 인물을 만나는 것 말이다. ​ 지금 만나러 간다, 석운강! 그렇게 다짐한 나는 다시 한번 까마득한 계단을 쳐다보았다. ​ “………….” ​ 아니, 이건 진짜 선 넘는데. ​ “에스컬레이터는 없죠?” ​ “…저희도 바라고는 있습니다만, 안 된답니다.” ​ “거 고생이 많으시네.” ​ “아미타불.” ​ 스님과 깊은 공감대를 쌓은 나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올라가서 공 던지기도 전에 하체 다 털리는 거 아니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