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고가 경기에 승리한 그 때, 2차전 상대인 금강고 역시 경기에서 승리하며 취재진을 맞이하고 있다. 문혁고 측과 꽤 다른 점이라면 전국구 강팀인 만큼 꽤 많은 인원의 기자가 붙었다는 것. ​ 꼬장꼬장한 성격이 얼굴에 잘 드러나는 금강고 감독, 유종훈이 기자들의 질문을 받아주고 있다. ​ “감독님, 1차전 상대 충룡고 상대로 에이스 장태산 선수를 출장시키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을까요?” ​ “쯧, 이전에도 말한 것 같은데…. 충룡고는 만만한 상대는 아닌 만큼 태산이를 내보낼까 생각도 했지만, 며칠 전 감기 몸살이 난 탓에 무리시키지 않았습니다. 책임감이 강한 녀석이니 본인의 출전 의지는 강했습니다만 굳이 무리시키고 싶지는 않더군요.” ​ “그렇다면 2차전에는 출장시키실 예정이신 겁니까?” ​ “예, 그렇습니다.” ​ 문혁고에게는 재앙과도 같은 소식. 금강고 전의 난이도를 높이는 주범이자, 청소년 국가대표 투수인 장태산이 문혁고 전에 선발로 등판 예정이다. ​ 장태산은 오늘 묵묵히 경기장에 앉아 팀의 경기를 지켜봤다. 출장하지 않았기에 묵묵히 경기장을 빠져나가려 했지만 207cm에 달하는 장신이다 보니 눈에 띄지 않기 어려웠고, 결국은 기자의 눈에 띄어 붙잡히고 말았다. ​ “아, 장태산 선수! 질문 하나만 해도 괜찮을까요…!” ​ “예, 하시죠.” ​ “방금 막 타구장 소식이 들어왔습니다. 금강고의 2차전 상대는 문혁고라는 학교가 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태산 선수는 상대 학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문혁고…?” ​ 갸우뚱하는 장태산. 그는 그저 지금 드는 생각을 솔직담백하게 내뱉었다. ​ “죄송합니다만, 그런 미미한 학교엔 별로 관심 없습니다. 그래서 딱히 말씀드릴 수 있는 게 없군요.” ​ ​ ​ ###### ​ ​ ​ [금강고 에이스 장태산 曰 “문혁고? 그런 미미한 학교 관심 없어.”] “이런 싸가지 없는 새키를 봤나…!” ​ 지역 신문을 반으로 쫙 찢어버리고는 길길이 날뛰는 최아담. 첫 경기 승리의 여운과 함께 단체 훈련 중이던 문혁고 야구부원들은 기사를 읽고 썩 기분이 좋지 않아보였다. 상대방이 자신들을 제대로 된 적으로 조차 인식하지 않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리라. ​ “…흠.” ​ 성묵은 상황을 지켜보다가 선수들을 불러 모았다. ​ “애들아, 기사 봤지. 금강고 투수 발언한 거.” ​ 고개를 끄덕이는 선수들. 성묵은 다소 강경한 어조로 말했다. ​ “마음은 알겠는데 진정 좀 하자. 저런 놈들 심리는 내가 좀 아는데, 다 상대 흔들려고 저러는 거다. 괜히 경기력 지장 가게 감정에 몸을 맡기지 마라.” ​ “……….” ​ 양아치 행동에는 그 누구보다 빠삭할 것처럼 생긴 성묵의 말이기에, 자기도 모르게 설득당해버린 팀원들. 다소 진정이 된 듯한 동료들의 모습에 성묵은 씩 웃으며 한마디를 더했다. ​ “웃기지 않냐? 방심시키려고 전력 좀 숨겼더니 진짜로 방심해선 미미한 팀이 어쩌고 입 털고 있는 꼬라지가 말이야.” ​ “오, 그러고 보니….” ​ “오늘 훈련도 잘 마무리해보자고, 해산!!” ​ “해산…!!” ​ 점점 더 단단해지기 시작한 문혁고. 그 중심에는 주장을 맡은 성묵이 있었다. ​ ​ ##### ​ ​ 금강고 측 선수들은 2차전을 앞두고 썩 긴장한 반응은 아니다. 그들은 당장 붙게 될 문혁고 보다는 다음 대진에서 맞붙게 될 강적인 대관령고, 한청고에 더 관심이 많았다. ​ “전력 분석팀에서 불렀다고?” ​ “아씨, 태산이 말대로 그냥 미미한 학교잖아. 꼭 봐야 돼?” ​ 하품을 찍찍하며 귀찮음을 표시하는 선수들. 그러나 감독의 명령에 갈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시작된 문혁고 분석 PPT. ​ 역시나 타자 1순위 경계 대상은 석운강이다. ​ “오, 나 쟤 알아. 그 소림사 포수 아니야?” ​ “뭣 하러 저런 무명 학교에 갔대? 이해가 안 가네.” ​ 그다음은 지수용, 최아담, 도도진 정도가 꼽혔다. 그러나 셋 다 무명에 가까운 만큼, ‘그나마 꼽자면’ 느낌의 분석이었고 선수단 역시 심드렁한 반응이다. ​ “인재가 없구만, 인재가 없어.” ​ “신생이라잖아. 뭘 바라냐?” ​ 그다음은 투수 분석으로 넘어갔다. 영상 자료에는 핫산이 공을 던지는 영상이 담겨있다. ​ “오! 파키스탄 투수라, 내전 중이라 한국으로 튀었나?” ​ “야구 유학 온 걸 수도 있지. 못 사는 나라에서도 야구 유학 보내는 부자들 꽤 많잖아?” ​ 외국인 투수에도 별 놀라는 반응은 없는 금강고. 이미 각 지역의 강호고들에 상당히 많은 외국인 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 그다음으로 PPT에 등장한 것은 성묵이다. ​ “자료가 많지는 않지만, 부산 명문인 부전고 출신의 투수입니다. 고1 때는 간간이 등판하다 2학년 기록은 없습니다. 아마 하산 선수는 1차전에 등판했으니 선발투수는 이 선수가 할 가능성이 꽤 높습니다.” ​ “투구 패턴이 어떻게 되는데요?” ​ “1학년 당시에는 150km 초반의 직구에 간간이 커브, 슬라이더 등을 섞어 구사한 걸로 확인은 되지만 방어율이 4점대 후반에 육박하는 걸로 봐선 그 위력이 딱히 대단하진 않을 것으로 추측 됩니다.” ​ “뭐야, 허접이네.” ​ 의자를 쭉 늘어트리며 그리 평가하는 금강고 선수. 그들은 이번 경기도 낙승 예정이라고 판단했다. ​ “그래도 방심은 금물입니다. 그래서 이번에도 ‘최악의 시나리오’를 준비했습니다. 그걸 좀 말씀드리자면….” ​ “아, 또 시작이야?” ​ “지긋지긋하다고, 저거 듣는 것도.” ​ 선수들은 이내 질린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찌푸렸다. 금강고가 세종기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에 대회를 떨어지는 일이 종종 있다 보니, 그것도 대비 안 하고 뭐 했냐는 높은 분들의 민원이 들어왔다. ​ 그래서 전력 분석팀에서 만든 방법이 ‘최악의 시나리오’를 선수들에게 주지시키는 것인데, 선수들 입장에선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비약해서 겁주는 걸로밖에 비치지 않았다. ​ 그래도 꿋꿋한 전력분석원. 문혁고의 경기에서 나름의 경계 요소를 찾았기에 선수들에게 경고하기 위하여 다음 자료를 틀었는데…. ​ ♪ ♫ ♬♪ ♫ ♬~ ​ “엇, 이게 왜…?!” ​ 실수로 혼자 보려고 저장해둔 치어리더 영상이 틀어졌다. 스크린에 띄워진 노아의 춤추는 모습. ​ 당황해서 리모컨을 연달아 눌러봤지만 영상은 멈추지 않았고, 선수들은 휘파람을 불어대며 영상을 관람했다. ​ “휘유, 분석관님 고지식한 줄 알았는데 상남자셨네.” ​ “앞으로도 이런 좋은 거 있으면 같이 봅시다. 이러니까 훨씬 재미있네.” ​ “쟤네 실력은 모르겠는데, 치어리더는 우리 팀보다 나은데?” ​ “오, 그거 인정.” ​ 문혁고의 총체적인 전력 분석과 더불어, 노아의 춤 영상을 보고 선수들이 든 생각은 하나였다. ​ ‘저놈들, 대회에 놀러 왔나본데?’ ​ 종종 있는 학교 부류다. 치어리딩이나 응원에 진심을 쏟고서는, 1~2차전 쯤에 웃으며 탈락하는 팀들. 야구에 진심인 입장에선 한심하기 그지없는 부류지만, 한 경기 한 경기가 피 말리는 토너먼트에서는 개꿀 대진 상대나 다름없었다. ​ “쯧, 이쯤 봤으면 됐군. 이만 해산하지.” ​ 기껏 빼놓은 분석 시간에 상대 팀 여자 치어리더 영상이나 트는 꼴이 영 맘에 들지 않는 감독. 그는 결국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지 않고 분석 시간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 “앗, 감독님. 아직 남은 자료가…!” ​ 헐레벌떡 만류하려던 분석원은 감독의 째려보는 눈빛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결국 축 처진 분석원. ​ “이번에는 진짜로 불안한데….” ​ 그렇게 중얼거리는 그의 앞에, 거대한 그림자가 멈추어 섰다. ​ “분석관님.” ​ “어엇, 장태산 선수…?!” ​ 유일하게 이 자리에 남아있는 선수는 다름 아닌 금강고의 에이스, 장태산이다. ​ “아까 못 보여준 자료, 제게 보여주실 수 있습니까.” ​ “………!” ​ 준비해둔 ‘최악의 시나리오’를 보여달라는 장태산. 문혁고에게 한 가지 악재가 있다면, 유일하게 방심하지 않은 선수가 하필이면 상대 팀의 에이스라는 것이다. ​ ​ ​ ##### ​ ​ [성묵씨, 1차전에 도시락 필요하죠?] ​ 1차전을 앞두고 성묵에게 문자를 보낸 올리비아. 그녀는 당연히 필요할 거라 생각하고 열심히 연습 중이었건만…. ​ [ㄴㄴ 괜찮음] ​ 쿠궁! ​ 돌아온 반응은 필요 없다는 말이었다. 올리비아는 그만 손에 든 국자를 떨구고 말았다. ​ 물론 약캐 코스프레를 해야 하는 상황에 그녀의 도시락까지 먹을 필요는 없어서 거절한 것이었지만, 올리비아는 꽤나 큰 충격을 받았다. ​ “어째서.” ​ 분명 그때 친구를 맺기로 하지 않았나. 서로 필요할 때 돕기로 해놓고 이렇게 일방적으로 거절할 줄이야. ​ "…더 이상 내 요리는 필요 없다 이거죠." ​ 성묵에 대한 묘한 분노까지 치밀어 오른 올리비아. 처음엔 수업을 빼고 야구장에 가려 했지만, 열받은 나머지 가지 않았다. 경기 결과에도 관심을 끄려고 했다. ​ “……….” ​ 그래도 차마 거기까진 하지 못한 그녀. 수업 중 몰래몰래 중계 어플을 통해 경기를 지켜봤다. 그리곤 이상한 점을 깨달았다. ​ ‘성묵 씨가 선발 투수가 아니네? 그리고 9번 타자…?’ ​ 평소 경기에선 에이스 투수에 클린업을 맡던 성묵이다. 갑자기 이렇게 역할이 바뀌다니. 그녀가 모르는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건가 싶었다. ​ 그런데 그 고민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굉장히 눈에 거슬리는 존재가 있었기 때문. ​ ‘2학년의 타카히나?’ ​ 대략 10명 내외의 유학생이 있는 문혁고다. 따로 말을 섞어본 적은 없지만 유학 관련 업무를 처리할 때 몇 번인가 마주친 적이 있다. ​ 그런데 그녀가 갑자기 야구부 치어리더가 되어서 활동 중이라니, 심지어 꽤 귀엽다면서 영상 조회수가 나날이 올라가는 중이다. ​ "………흥." ​ 묘하게 심기가 불편한 그녀. 이제 도시락이고 뭐고 다시 프랑스 요리에나 매진하자고 생각하는 올리비아. 그때 그녀의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 문자를 보낸 장본인은 다름 아닌 성묵이였다. ​ [올리비아, 나 2차전 진짜 중요한데 도시락 좀 부탁해도 되냐?] ​ "………!" ​ 눈을 크게 뜨더니, 딱딱했던 표정이 금세 풀리는 올리비아.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발걸음은 다시 주방으로 향하고 있었다. ​ “중요한 경기….” ​ 이전에 해줬던 것들보다 더 발전해야 했다. 그러나 딱히 떠오르는 게 없는 상황. 그러던 와중 잊고 있던 걸 떠올린 그녀가 화들짝 놀라며 선반으로 다가갔다. ​ “아…!!” ​ 1차전 때 해주려고 준비한 음식 재료와 소스를 숙성시켜둔 걸 까먹고 있었다. 상태가 안 좋아졌을 수도 있으니 허겁지겁 뒤처리하려고 봤는데…. ​ “…왜 맛있지?” ​ 잘못되긴 커녕 더 맛있어진 것 아닌가. 의도치 않게 까먹고 방치해둔 덕분에 훨씬 맛있게 숙성이 되어버렸다. ​ "이거라면 만들 수 있어…!" ​ 올리비아는 전의를 불태웠다. 이번에는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 성묵에게 해줬던 그 어떤 요리보다도, 더 훌륭한 요리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