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카히나 류지는 정신을 차렸다. ​ “…여긴.” ​ 어둑어둑한 공사장 건물 안. 그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밧줄로 꽁꽁 묶여있다. ​ “형님, 이 새끼 정신 차렸는데요?” ​ 부하의 말에 뚜벅뚜벅 다가오는 한 남자. 류지의 얼굴에 담배 연기를 후 내뿜는 그는 강서구 최대규모의 폭력 서클인 백호파의 보스, 박기태였다. ​ “반갑다. 우리 사업에 번번이 훼방을 놓는 게 누군가 했더니, 드디어 낯짝을 보는군.” ​ “나야말로, 겁쟁이처럼 부하들 뒤에 꼭꼭 숨어계셔서 구경도 못 했는데 말이야.” ​ “…이 새끼가.” ​ 박기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외부 활동은 철저히 피하다가, 류지가 붙잡혔다고 하니 출두한 걸 지적당했기 때문이다. 박기태는 욱하는 기분을 가라앉히고는 물었다. ​ “잡혀 온 상황에까지 그렇게 꼿꼿하다니, 깡 하나는 인정해야겠군. 너 이름은 뭐냐?” ​ “타카히나 류지.” ​ “일본 놈이었나? 아니 잠깐, 타카히나…?” ​ “왜 그러십니까 형님?” ​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기 시작하는 박기태. 그는 허겁지겁 칼을 들었다. ​ “혀, 형님...?!” ​ 촤아악! ​ 박기태는 류지의 오른팔 부분의 겉옷을 칼로 갈라버렸다. 그리고는 이마를 탁 짚었다. 오른팔 부위에 오밀조밀한 모양의 용 문신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는 이 문양을 알고 있었다. ​ “젠장, 머리가 붉은색일 때 알아봤어야 하는데. 무영회 후계자였냐...!?” ​ “무, 무영회!!” ​ 그 문신의 정체는 타카히나 가문의 직계이자, 무영회를 이어받게 될 후계자만 새기는 문신이다. ​ 한국의 깡패와 일본의 야쿠자는 나라가 가까운 만큼, 활동반경이 겹칠 때가 간혹 있었다. 괜히 둘의 충돌이 바깥으로 새어 나가면 국제문제로 번질 수 있기에, 서로에게 터치 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었다. ​ 그런데 무영회는 그런 게 없다. 한 번 빡돌면 불문율이고 나발이고 미친 듯이 칼춤을 추는 게 그들이었다. 백호파는 강서를 접수했다곤 하지만, 무영회에 비하면 아주 귀여운 수준의 세력이다. 조직원들은 슬슬 후환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 “형님, 이거 어떻게 하죠. 당장 풀어줘야 하는 거 아닙니까?” ​ “조용히 해봐.” ​ 부하들을 진정시키고 생각에 잠긴 박기태. 그는 곧 비열한 웃음을 짓더니 한가지 결론을 내렸다. ​ “역시 죽여서 입을 다물게 하는 게 낫겠어.” ​ “혀, 형님!” ​ 깜짝 놀란 부하들. 아무리 폭력을 일상처럼 휘두르는 그들이지만 사람을 죽이는 일까지는 해본 적이 없었다. 류지는 자신을 죽이니 마니 하는 이야기가 나왔음에도 덤덤했다. ​ “…감당할 자신 있어? 아주 지옥 끝까지 쫓아갈 텐데.” ​ “흥, 뒷처리는 충분하다. 아무리 상대가 무영회여도, 우리가 한 짓인 걸 알아내는 건 불가능해.” ​ 저 말은 틀렸다. 무영회는 류지가 죽으면 이 주변에서 활동하는 모든 양아치를 족쳐서라도 정보를 얻어내고, 경찰에게 돈을 먹여서라도 범인을 추적할 거다. 결국엔 이놈들을 모조리 찾아내 대가를 치르게 하겠지. ​ ‘저 멍청한 놈이 그걸 알기나 하겠어. 후우….’ ​ 박기태는 그를 죽여도 절대 들키지 않으리라고 맹신하는 얼굴이다. 류지 입장에선 저 녀석이 안 들킬 거라고 믿고 그를 담가버리면 손쓸 도리가 없다. 어찌 보면 무영회의 복수조차, 류지에게 무슨 일이 벌어진 뒤 벌이는 뒷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 ‘…나 진짜 죽는 건가?' ​ 목숨이 경각에 다른 지금 이 순간, 가장 먼저 생각나는 건 가족의 얼굴이다. ​ '노아, 미안하다. 무거운 짐을 너한테 남기게 됐네.' ​ 아마 자신이 죽으면 노아가 무영회의 뒤를 잇게 될 것이다. 그리고는 지금처럼 해맑게 웃을 수 있는 사람에서 점점 멀어지겠지. 류지는 그게 다른 무엇보다 죄책감이 들었다. ​ 그리고 왜일까, 최근에 처음 만난 한 녀석도 문득 떠올랐다. ​ ‘야구부에 들어와라, 타카히나 류지.’ ‘목표는 여름대회 우승이다.’ ​ “하아....” ​ 죽기 직전에야 깨달았다. 그는 야구가 너무나도 하고 싶다. 그렇기에 역설적으로, 그는 순순히 죽음을 받아들였다. ​ ‘어차피 야구를 하지 못한다면, 충동에 못 이겨 주먹질이나 하고 다니는 쓰레기 같은 인생을 살겠지. 그럴 바에 죽는 게 나을지도.’ ​ 백호파의 조직원이 칼을 들고 그에게 다가온다. 류지는 곧 자신의 인생이 끝남을 직감했다. ​ “…다음 생에는 좀 평범하게 살고 싶네.” ​ 그렇게 조용히 읊조리며 눈을 감은 순간. ​ "굳이 다음 생까지 갈 거 뭐 있냐?" ​ “너…!?” ​ 퍼어억-!! ​ “꾸에엑!!” ​ 엄청난 타격음과 함께 백호파 조직원이 하늘을 날았다. 그림 같은 옆차기였다. ​ 그 누구도 예상치 못한 불청객의 등장. 신원을 가리기 위해 모자와 마스크를 쓰고 있지만, 류지는 그가 금성묵임을 대번에 알아차렸다. ​ "여어, 구하러 왔다." ​ “너, 어떻게 여길….” ​ “그게 지금 중요하냐? 일단 이것부터 좀 풀자.” ​ 투두둑! ​ 모두가 정신이 없는 틈을 타 성묵은 작은 나이프를 주워 류지를 묶은 밧줄을 끊어냈다. 백호파 조직원들은 몹시 혼란스러운 상태다. ​ “뭐야, 저놈은 어디서 튀어나온 거야!” ​ 부하들에게 닦달하는 보스 박기태. 높은 서열의 부하가 면목 없다는 듯 답했다. ​ “크윽, 납치 과정에서 실수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 “쳇, 쓸모없는 자식들.” ​ 박기태가 혀를 찼다. 하지만 동시에 재밌다는 듯 씩 웃었다. ​ “고작 두 명이서 뭘 하겠다는 거지. 여기에 있는 백호파 조직원만 50명인데!” ​ 우르르 박기태의 주변으로 몰려드는 부하들. 하나하나만 떼놓고 보면 금성묵과 류지의 상대가 되지는 않겠지만, 주먹깨나 쓴다는 양아치가 무려 50명씩이나 모인 상황이다. 쉽지 않다를 떠나 승산이 희박한 상황. ​ 상황이 좋지 못함을 느낀 류지는 성묵에게 우려를 표했다. ​ "구해준 건 고마운데 괜찮겠어? 둘이서 50명은 쉽지 않을 거 같은데." ​ “두명 아닌데?” ​ “뭐?” ​ "혹시 몰라서 한 명 더 데려왔지." ​ “………??” ​ 두 명이나 세 명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 싶은 표정의 류지. 하지만 금성묵은 이 자리에 데려올 수 있는 사람중 가장 강한 사람을 데려왔다. 그것도 아주 든든한 탱커로 말이다. ​ "…아미타불." ​ 복면을 뒤집어쓴 엄청난 거구의 사내, 석운강이 등장했다. 그는 왜인지 몹시 분노해있었다. ​ “다수가 소수를 핍박하며 목숨까지 빼앗으려 하다니. 참으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행이 아닐 수가 없소.” ​ 그는 곧 금성묵과 류지의 앞에 서더니, 이 자리에 있는 모두에게 선포했다. ​ “지금부터 이 둘에 대한 접근을 금하오. 함부로 다가왔다가는 물리적인 제재를 가할 수밖에 없소." ​ 참으로 광오한 선언. 백호파 2인자 김성철은 비웃음을 터트리며 달려들었다. ​ "넌 뭔데, 이 꼰대 빡빡이 새끼야...! 뒈져!" ​ 혀로 칼날을 쓱 핥고는 석운강에게 달려가기 시작하는 김성철. 류지가 금성묵과 착각할 만큼 나름 한 주먹 하는 금태양인 그였으나. ​ "…여래신장(如來神掌)." ​ 데엥! ​ "쿠흐어업...!!" ​ 맑은 범종 소리가 공사장에 울려 퍼졌다. 복부에 일장을 얻어맞은 김성철은 뒤로 사정없이 몇 바퀴를 구르더니, 기둥에 쾅 부딪히며 정신을 잃었다. ​ “굳이 벌주를 택하다니, 참으로 안타까운 중생이오.” ​ 분노하며 스킬 ‘마승’의 효과가 발동된 석운강의 파워는 무려 S등급. 아무리 무협 소설에 나오는 정도는 아니라지만, 범종을 한 손으로 받아낼 정도로 엄청난 근력을 지닌 석운강의 파워는 일개 양아치가 감당할 수준이 아니다. ​ 다가오는 적은 모조리 분쇄하는, 파괴승 석운강이 이 자리에 강림했다. 손바닥으로 퉁 밀치는 동작 하나로 간부를 쓰러트리자, 백호파의 혼란은 더욱 가속됐다. ​ “어떻게 저런 위력을…!” ​ "뭐야 저 새끼…! 당장 어떻게든 해봐…!!“ ​ 이런 기회를 가만히 두고 볼 금성묵이 아니다. ​ “으랏차!!” ​ 빠악! ​ “쿠허억!!" ​ 플라잉 니킥에 쳐맞은 조직원이 하늘을 날았다. 무려 상대가 50명이다. 태양신맥 3단계, 강발의 경지로 후려팰 샌드백이 50명이다? 이건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 ​ "야, 류지.“ ​ “왜?” ​ “내기할까, 누가 더 많이 쓰러트리는지…!" ​ 빠악, 빡! 빡!! ​ 미친 망아지처럼 날뛰며 양아치들의 강냉이를 수집하기 시작한 금성묵. 류지는 피식 웃고는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 ​ “아아, 그 내기 접수했다…!!” ​ 퍼억, 빡! 빠악!! ​ 류지 역시 질세라 백호파 조직원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용혈에 몸을 맡기며 백호파 인원들을 말 그대로 쓸어 담기 시작했다. 백호파는 이 갑작스러운 상황에 도무지 대처가 되지 않았다. ​ "뭐야, 지금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 "고작 3명이라고, 3명...!" ​ 믹서기 수준으로 조직원이 갈리고 있다. 서로 질 수 없다는 듯 미친 듯한 속도로 공격해오는 금성묵과 류지. 그런 둘을 저지하기 위해 들어오는 견제를 막아내는 석운강. 처음으로 손발을 맞춰보는 상황이나, 셋의 조화는 마치 하나의 정밀한 톱니바퀴처럼 돌아갔다. ​ 훗날 고교 야구 역사상 최강의 클린업으로 꼽히게 될, ‘문혁고 3인방’의 첫 조합이 실현되는 순간이다. ​ “성묵아, 너 왼쪽에 세명!” ​ 퍼억! 빠악!! ​ “너야말로 오른쪽 두 명 온다!!” ​ 퍼억!! 퍽! ​ 서로 등지고 다가오는 적을 분쇄하는 둘. 물론 그 둘이 전부 커버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 “빈틈이다, 자식들아…!!” ​ 각목을 들고 내려치는 백호파 조직원. 그러나 그 위치는 석운강이 지키고 있다. ​ “천근추(千斤錘).” ​ 퍼엉! ​ “엣.” ​ 석운강의 돌덩이처럼 단단한 피부에 막혀, 그대로 부러진 각목. 조직원은 각목과 사람이 맞부딪혀서 각목이 깨지는 걸 처음 봤다. ​ “여래신장(如來神掌).” ​ 데엥-!! ​ “꾸헤엑…!” ​ 맑은 종소리와 함께 데구르르 구르게 된 조직원.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 “아이씨, 이제 좀 손맛 좀 보나 싶었는데 벌써 끝났잖아.” ​ 50명의 일반 조직원 및 간부. 문혁고 3인방에게 전멸. ​ “으윽…!!” ​ 이제 남은 것은 단 한명. 그 대상은 백호파의 보스 박기태다. 금성묵은 피가 묻은 주먹을 탈탈 털며 박기태에게 다가갔다. ​ "오, 너가 두목인가 보네?" ​ “크윽, 네 놈들은 대체…!!” ​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있는 박기태. 그는 자신을 향해 다가오는 금성묵을 보며 식겁했다. ​ 묵직-! ​ "허억.......!!" ​ 금성묵이 입술을 혀로 쓱 핥았다. 그것도 불룩한 아랫도리와 함께. ​ 박기태는 전신에서 삐질삐질 식은땀을 흐르기 시작했다. 칼을 들고 다가오는 깡패보다 지금의 금성묵이 더 공포스러웠다. ​ “아, 안돼...! 다가오지 맛...!!” ​ 소년원 시절에도 겨우겨우 지켜낸 뒷구멍의 정조. 그러나 저 무지막지한 녀석을 상대로는 지켜낼 자신이 없다. ​ 그의 눈과 코에서 물이 주륵주륵 나오기 시작했다. 힘이 풀린 다리를 겨우 끌어 뒤로 물러나는데, 금성묵이 손가락을 들어 무언가를 가리켰다. ​ “야야, 옆에 봐라 옆에.” ​ “뭐, 뭣?” ​ 빠악! ​ “끄허억…!” ​ 타카히나 류지의 강력한 발차기가 그의 머리에 작렬했다. 그 일격에 의식이 꺼진 박기태. ​ 금성묵의 묵직함을 보고 오히려 재밌겠다며 달려드는 자와, 공포에 질려서 혼비백산 물러나는 자. 류지와 박기태의 격차는 거기서부터 벌어졌을지도 모른다. ​ 이로써 백호파의 모든 인원이 정리됐다. ​ “후아, 진짜 죽는 줄 알았네…!” ​ 저승의 문턱까지 다녀온 류지. 그는 이 위험한 상황에 달려와 준 둘이 너무나도 고마웠다. ​ “거기 덩치 큰 친구, 이름이 뭐야?” ​ “…석운강이라고 합니다.” ​ “스님인가 보네? 구해줘서 고맙다. 덕분에 살았어.” ​ “당연한 일을 한 것뿐입니다. 아미타불.” ​ 우선 초면부터 이런 자리에 나타나 도와준 운강에게 류지는 감사를 표했다. 물론 가장 감사한 대상은 따로 있다. ​ “친구, 고맙다. 이 은혜는 갚을게.” ​ “오냐.” ​ 타악! ​ 쿨하게 악수하고는 별다른 첨언을 하지 않는 성묵. 류지는 궁금해서 물었다. ​ “뭐야, 야구부 권유 안 해?” ​ “왜, 안 물어봐 줘서 섭섭하냐?” ​ 성묵의 말에 피식 웃은 류지. 그는 곧 성묵에게 손을 내밀었다. ​ “전화기 좀 빌려주라. 쟤네가 내 거 박살 냈거든.” ​ “자, 옜다.” ​ 성묵의 핸드폰을 받아서 곧바로 어딘가에 전화를 거는 류지. 다름 아닌 아버지, 타카히나 류켄에게 거는 전화다. ​ “여, 아버지. 오랜만입니다.” ​ [너 이 자식, 대체 어쩌자고 연락도 끊고…!!] 스피커폰 너머로 엄청난 분노가 느껴지는 류켄의 목소리. 류지는 귀를 후비적 파고는 주제를 돌렸다. ​ “그건 나중에 따로 뵙고 사과드릴게요. 그나저나 제 이야기 좀 들어주세요. 이번에 목숨이 좀 위험했거든요.” ​ [뭣, 목숨이……?] ​ 갑자기 아들이 목숨이 위험했다니 진지해진 류켄. 그는 정황을 듣고는 아까와는 달리 차분해졌다. ​ […알겠다. 한국 지부 부하들에게 처리하라 할테니 신경 끄거라.] ​ “흠, 알겠어요.” ​ 분명 한층 차분해진 목소리일 텐데, 그 안에서 깊은 농도의 분노가 느껴진다. 감히 무영회의 후계자임을 알면서도 처리하려고 했던 그 만용을 가만히 둘 수 없겠다는 감정이리라. ​ “설마 쟤네 다 드럼통 들어가는 거냐?” ​ “남의 나라에서 그런 깽판을 어떻게 쳐. 다시는 못 설치게 경고 좀 하고, 손가락 하나 정도 받고 끝내시겠지.” ​ ‘그게 고작…?’ ​ 역시 무서운 세계다. 라고 성묵은 문득 생각했다. 그렇게 자기가 닥친 상황을 말한 류지. 그는 곧바로 아버지에게 폭탄선언을 날렸다. ​ “아버지, 저 야쿠자 안 하렵니다.” ​ [너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 “저, 진심으로 야구가 하고 싶어요.” ​ [뭣…!!] ​ 충격받았는지 한동안 말이 없는 류켄. 곧 그는 그동안 류지를 설득하는 데 큰 힘을 발휘한 논리를 들고 왔다. ​ [그럼 무영회의 후계자 자리를 노아가 맡게 되어도 좋다는 소리냐?] 그동안의 류지라면 여기서 포기했겠지만, 그의 결심은 이미 강철같이 단단해져 있었다. ​ “그 아이의 미소, 아버지도 잃고 싶으신 건 아니시잖아요.” ​ [……!] ​ 허를 찔렸다는 류켄의 반응. 사실 류지에게 야쿠자를 시키기 위해 한 말일 뿐. 그 역시 소중한 딸에게 조직의 뒤를 맡길 생각 따윈 추호도 없었다. ​ “이번에 죽을 뻔하고 깨달았어요. 저는 역시 야구가 하고 싶다는 걸요. 그리고 그 생각을 처음 들게 한 건, 제게는 그 어떤 선수보다도 멋졌던 아버지의 등이었죠.” ​ [……….] ​ “그건 지금도 변함없어요. 아버지가 불의의 사고로 은퇴했어도, 제가 닮고 싶은 선수는 늘 아버지예요.” ​ 수화기 너머로 말을 잃은 류켄. 금성묵은 아무 말 없이 지켜보며 생각했다. ​ ‘이 자식, 똥꼬 빠는 솜씨가 탁월한데?’ ​ 실제로 아들의 절절한 숭배는 효과가 있었다. 류켄은 부끄러운 듯 헛기침하더니, 모두가 기다리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 [딱 1년이다. 그 안에 성과를 내지 못하면 국물도 없다.] ​ “감사합니다, 아버지…!!” ​ [추한 모습으로 무영회의 이름에 먹칠했다간, 일본까지 수영해서 돌아와야 할 거다.] ​ “제가 그럴 리가 없잖아요. 누구 아들인데, 그쵸?” ​ [흥,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 그러면서도 내심 기쁜 모양인 류켄. 그는 곧 무언가 할 말이 떠오른 듯 성묵을 불렀다. ​ [거기 옆에 자네, 금성묵이라고 했던가. 야구부의 주장이라지?] ​ “예, 그렇습니다만.” ​ [우리 아들과 딸을 잘 부탁하겠네. 아직 여러모로 부족한 점이 많은 애들이라서 말이야.] ​ “걱정 붙들어 매시죠. 둘 다 제가 잘 챙기겠습니다.” ​ 성묵의 말에 흡족한 반응을 보이는 류켄. 그는 성묵이 꽤 마음에 든 모양이다. ​ [맨입으로 부탁을 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아들을 통해 좋은 선물을 보낼 테니 부담 갖지 말게나. 그럼 나는 이만….] ​ ‘오…?’ ​ 좋은 선물이라니, 성묵은 기왕이면 돈으로 줬으면 좋겠다고 내심 생각했다. 류지는 통화를 끊기 무섭게 바닥에 벌러덩 드러누우며 숨을 크게 내쉬었다. ​ “푸하…!! 쫄려서 죽는 줄 알았네!” ​ “왜, 생각보단 친절하신데?” ​ “친절…? 만나보면 그런 소리 못할걸.” ​ 질렸다는 표정을 짓고는 손을 팔랑팔랑 휘젓는 류지. 그는 곧 땅바닥을 홱 짚고 일어나더니, 몸을 탁탁 털고는 성묵을 향해 다가갔다. ​ “……으음, 막상 말하려니 좀 낯 뜨거운데.” ​ “뭔데?” ​ 머리를 긁적이며 먼 산을 바라보던 류지. 그는 곧 성묵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 “앞으로 잘 부탁해. 캡틴.” ​ 씩 웃으며 손을 내민 류지. 성묵은 그 손을 강하게 맞잡았다. ​ “오냐, 잘 해보자 인마.” ​ 꽈악! ​ 그렇게 타카히나 류지의 영입에 성공한 성묵. 한 팀에 무려 세 명의 천타지체 보유자가 탄생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 ‘…고교는 물론, 리그에도 전례가 없는 일이지.’ ​ 더 이상 문혁고는 평범한 신생 고교라 하기 힘들었다. 성묵은 자신이 처음 구상했던 것 보다 훨씬 포텐셜이 높은 팀을 완성하는 데 성공했다. ​ ‘이제 진심으로 노릴 만 해, 전국 우승.’ ​ 성묵은 우두커니 서서 불어오는 봄바람을 느꼈다. 곧 벚꽃이 피어오를 때쯤이면, 모두가 문혁고의 돌풍에 열광하리라. ​ 성묵은 그 사실을 의심하지 않았다. 아주 조금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