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비 원툴 내야수, 이태경은 문혁고의 일원이 되었다. 지금 팀으로서 높이 가기 힘들다는 것을 실감한 것인지 살짝 찔러보자마자 일사천리로 전학을 결정했다. ​ “안녕하십니까! 보문고에서 전학 온 1학년 이태경이라고 합니다. 내야는 제가 철통같이 지키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허리를 넙죽 숙이며 선수단에 인사하는 녀석. 환영의 의미로 선수들이 박수를 쳐준다. 특히 땅볼형 투수인 리동혁은 특히 기뻤는지 더 열심히 박수를 치는 모습. 반대로 이태경의 탄탄한 수비를 봤던 후보 멤버들이 다소 긴장한 표정을 짓는 게 보인다. 아마 수비 하나는 확실한 선수가 들어온 만큼 기회가 적어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크겠지. ​ ‘뭐, 꼬우면 잘했어야지.’ ​ 팀이 창단되고 얼마 안 된 이 시점이 가장 어수선하면서도 기회가 많은 시기. 이럴 때 두각을 못 드러내는 녀석은 앞으로도 벤치만 뜨뜻하게 달굴 가능성이 높으리라. ​ "그래, 환영한다. 같은 나이인 핫산이 잘 챙겨주고." ​ "옙, 감독님!" ​ 씩씩하게 답하는 핫산. 사실 첫 적응부터 굳이 외국인인 핫산을 붙여놓는 건 좀 그렇긴 하지만, 주전급 1학년은 워낙에 그 수가 적다. 위계 서열이 큰 운동부 특성상 차라리 선배보다는 외국인 동갑내기가 편할 거라는 게 명감독의 계산이다. ​ 그리고 뉴페이스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놀랍게도 여자 매니저가 들어왔다. ​ "신혜지라고 해요. 잘 부탁합니다!" ​ 박수를 치며 열렬한 환영을 받는 여자 매니저. 장신에 단발, 수수한 외모의 그녀는 최아담의 소꿉친구라고 한다. 어릴 때부터 같이 교회를 다녔다고 하던가. 배구부에 쭉 있다가 부상을 당해서 관두고, 야구부 서포트에 집중하고 싶다고 해서 붙었다고 한다. 아무래도 몸 쓰는 일에 익숙한 매니저가 더 빠릿빠릿 할 테니 기대가 크다. ​ 하지만 정작 소꿉친구인 최아담은 이 상황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지 입술을 삐죽 내밀고 있다. ​ “쳇, 여기서도 저 박살 난 상판떼기를 봐야 하는 거냐.” ​ “뭐래, 이 잼민이가.” ​ “이 년이 미쳤나…!!” ​ 괜히 툴툴대다 티격태격 하기 시작한 둘. 신혜지 쪽은 키가 170 중반대인 데 반해 최아담은 160 극 초반. 그 묘한 대비에 우리들은 숙연한 반응을 보냈다. ​ “도진아, 저게 설레는 키 차이라는 거다.” ​ “음, 뭔가 슬프네요….” ​ 그렇게 뉴페이스 소개가 끝났다. 나름 여자 한 명 왔다고 확실히 화사해진 분위기에 팀원들은 만족하는 모양이다. ​ 사실 여자 매니저고 뭐고 쌈뽕한 타자 하나 더 영입했으면 좋았을 테지만, 이제 외부 영입은 종료됐다고 보는 게 맞다. 이 멤버 그대로 출정식에 나가 엔트리를 확정하고 그대로 봄 대회를 뛴다고 봐야 한다. ​ ‘…갑자기 학교에서 특급 유망주 안 튀어나오나?’ ​ 전혀 현실성이 없어서 한숨이 푹 나왔다. 타선에 무게감을 더할 장타자가 필요한 상황이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팀을 꾸리는 수밖에. ​ 훈련에 돌입하기 전, 화장실에 가려다가 어딘가에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여자 목소리가 섞여 있는 걸 보니, 신혜지와 최아담인 것 같다. ​ “야, 최아담. 그래도 내가 와줘서 좋지? 응? 좋지?” ​ “아씨, 개빻은 얼굴 들이밀지 마라. 짜증 나니까.” ​ “쳇, 좋다고 한마디 해주면 덧나냐. 이 쫌생이.” ​ 그 뒤에도 이래저래 이야기를 나누던 둘. 갑자기 무언가 떠오른 듯한 신혜지가 질문을 던졌다. ​ "아, 맞다. 그러고 보니 그 사람은 없네?" ​ "뭐, 누구?" ​ "너희 야구 동아리에 있었잖아. 빨간색 장발 머리에, 반반하게 생긴 3루수." ​ "…아." ​ 잊고 있었던 것을 떠올렸다는 표정을 짓는 최아담. 그는 곧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 "걔, 한두경기만 뛰고 동아리 나갔어. 문혁고는 계속 다니는 것 같고." ​ "진짜…? 그 실력이면 무조건 야구부 들어올 줄 알았는데, 아니면 다른 곳 전학 가거나." ​ “흥, 관심 없어. 그런 녀석.” ​ ‘오호라….’ ​ 나는 귀가 솔깃해져서는 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야구 동아리에 상당한 실력을 갖춘 누군가가 속해있었던 모양이다. 심지어 포지션도 3루수? 이건 못 참지. ​ 둘의 이야기가 끝나고 갈 길을 가는 와중에, 나는 최아담의 뒤에 붙어서 물었다. ​ "야, 최아담." ​ "어우씨 깜짝이야!" ​ 화들짝 놀라는 최아담. 나인 걸 확인하자 고개를 까딱이며 묻는다. ​ "뭔 일이냐, 갑자기 불러세우고." ​ "아까 네가 얘기한 그 선수, 누구야?" ​ "…아아, 들은 거냐." ​ 머리를 박박 긁으면서 귀찮게 됐다는 표정을 짓는 최아담. 아무래도 썩 내키지는 않는 모양이다. 녀석은 잠시 고민하더니 입을 열었다. ​ "타카히나 류지, 내가 지금껏 본 타자 중에 가장 뛰어난 실력을 갖춘 놈이야. 벽을 느낄 정도로 말이야.“ ​ "………!" ​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을 정도로 놀랐다. 여기서 그 이름이 나온다고…? ​ “그 류지라는 사람, 동아리는 왜 나간 건데?” ​ “일단 첫인상은 최고였거든? 붙임성도 좋고, 항상 잘 웃고, 왜 여기 있는 걸까 싶을 정도로 실력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 야구 동아리 소속으로 두 번째 경기를 치른 날. 타카히나 류지는 경기가 끝난 뒤 팀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미안, 친구들. 소꿉장난은 여기까지 하자.' ​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매몰찬 한마디를 남긴 그는 그 뒤로 다시는 동아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고 한다. 학교 역시 나오는 날 보다 나오지 않는 날이 훨씬 많아졌다고. ​ “뭔가 사정이 있는 게 아닐까 지레짐작은 하지만, 정확한 사유는 나도 몰라.” ​ “………….” ​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보물이 발밑에 묻혀있는 걸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고교 리그 우승이라는 대계의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선 그 녀석이 꼭 필요하다. 나는 최아담의 어깨를 붙잡고 다급히 물었다. ​ "그 녀석, 몇 반인지 알아…?!" ​ "얌마, 너 아무리 운동부라지만 너무 주변에 관심이 없는 거 아니냐?" ​ "뭐?" ​ "너희 반이잖아. 멍청아." ​ ​ ​ #### ​ ​ ​ “으응, 류지 말이지? 학교 안 나온 지 오래됐어.” ​ "......!" ​ “이대로면 제적당할지도 모르는데, 도통 연락이 안 닿나 봐." ​ 교무실에 찾아가 담임인 성지영 선생에게 물어보니, 학교에 안 나온 지 오래됐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 "연락이 닿을만한 사람은 없을까요?" ​ "글쎄…, 아! 2학년에 류지의 동생이 있어. 분명 이름이 노아였던가 그랬는데?" ​ "........!" ​ 나는 감사 인사를 쌩 남기고 자리를 떴다. 까맣게 잊고 있었다. 타카히나 류지에게는 여동생이 있었다는걸! ​ ​ ​ #### ​ ​ 한창 시끄러운 2학년의 한 교실. 무용과 학생이 대부분인 교실에는 여느 때와 같이 미모의 여학생들이 하하 호호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 "애리야, 너가 추천한 리들샷, 크림 바르기 전에 바르니까 너무 좋던데…?" ​ "그치! 내가 안 쓰면 손해라고 맨날 말했잖아~." ​ 꺄르르 웃음 터트리는 풋풋한 여고생들의 대화 속에, 한 거구의 불청객이 찾아들었다. ​ "저기요." ​ “………!!” ​ 갑자기 급속하게 식어버린 공기. 흠칫 놀란 여고생들은 서로의 눈치만 보며 침묵을 지킨다. 그중에 한 소녀가 용기를 내어 묻는다. ​ "누, 누구 찾으시는 분이라도 있으세요…?" ​ "타카히나 노아, 여기 반 맞죠?" ​ "........!" ​ 혹시나 했지만 역시나. 노아의 매력에 넘어가 버린 남자가 하나 더 생기고 말았다. ​ ‘위, 위험해…!’ ‘…지켜야 해!’ ​ 서로 눈을 마주치며 고개를 주억인 그녀들. 지키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다졌다. 물론 지키는 대상은 타카히나 노아가 아니었다. ​ ‘저 금발 양아치 분이 위험해…!’ ​ 그녀들이 걱정하는 대상은 다름 아닌, 금성묵이었다. 이 모든 일은 대략 일 년 전으로 돌아간다. ​ "노아 양, 저랑 같이 매점에 가서 빵 먹지 않을래요…?!" ​ 한 동급생 남학생은 그녀의 톡톡 튀는 매력에 반해 용기를 냈다. 그리고 그 남학생은 얼마 지나지 않아, 방과 후에 정체 모를 덩치 형님들에게 끌려갔다. 그것도 아주 무서운 인상을 가친 형님들 말이다. ​ “쓰읍…….” ​ 담배를 꼬나물고는 벽에 주저앉은 남학생을 쳐다보는 형님들. 학생은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 ​ "사, 살려주세요." ​ “하하, 이거 웃기는 친구네. 형이 너를 죽이긴 왜 죽여.” ​ 톡톡! 겁에 질린 학생의 뺨을 툭툭 건드린 사내. 겁먹지 말라는 제스쳐였지만, 학생은 더욱더 공포에 사로잡혔다. ​ “그, 그럼 저는 왜…!” ​ "어이 친구, 니가 그렇게 빵을 좋아한다며?" ​ 우수수! ​ 박스 하나가 엎어지더니, 그 안에서 수북한 빵이 땅바닥으로 쏟아졌다. 그들은 담뱃재를 구두로 질끈 밟으며 한 마디를 남기고 갔다 한다. ​ "너 혼자 다 먹어, 알겠지? 형은 다 아는 수가 있다?" ​ “예, 옙……!!” ​ 의문의 사내들은 소년에게 다시는 개수작 부릴 생각 하지 말라는 경고를 남기고 떠나갔다. 하지만 의외로 노아의 동성 친구들에게는 그 누구보다도 친절하고, 가끔 먹을 것도 사 먹으라고 용돈도 준다. 다만 이성적으로 접근하는 녀석들은 예외 없이 단죄했다. ​ 금성묵을 지키기 위해 한 여학생은 급히 어딘가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 [노아에게 접근한 남자 출현! 수업 전까지 최대한 시간 끌어!!] ​ ​ ##### ​ ​ “노아, 슬슬 돌아갈까.” ​ “네에! 좋아요!” ​ 방실방실 웃으며 친구의 뒤를 따르는 노아. 곧 친구의 핸드폰에 진동이 울렸다. ​ 지이잉! ​ 그 문자를 확인하고는 딱딱하게 굳은 친구의 표정. 그녀는 곧 얼굴에 환한 미소를 짓고는 말했다. ​ "노아, 나 이번에 친해진 친구 있는데 소개해줘도 될까?" ​ "꺄, 너무 좋아요~!" ​ ​ ​ ###### ​ ​ 나는 그 뒤에도 몇 번 정도 타카히나 노아를 찾아갔다. 그런데 2학년 복도로 내가 계속 찾아가다 보니, 누군가 위협을 느꼈던 모양. 나중에는 선도부까지 출두했다. 그런데 이 녀석, 낯이 좀 익다…? ​ “크험, 문혁고의 풍기를 어지럽히는 자. 대체 누구냐…!” ​ “나다, 임마.” ​ “끄오옷, 성묵 형님……!?!” ​ 귀신이라도 본 표정을 지으며 식겁하는 지수용. 하필이면 출두한 선도부가 녀석일 줄이야. 몰랐는데 이 학교에서도 계속 짬이 날 때는 선도부 활동을 하는 모양이다. ​ “크흠, 그럼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 쌩 사라져버리는 녀석. 5툴 플레이어 아니랄까 봐 튀는 속도도 예술이다. ​ “쩝, 결국 못 만났네.” ​ 결국 수업 시간이 전부 끝날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 어느 시간에 방문하든 친구들과 놀러 나갔다며 찾아볼 수가 없다. 이쯤 되면 나도 깨닫는다. 지금 의도적으로 날 피하고 있다는 것을! ​ ‘후우, 내일이라고 다를 것 같진 않은데.’ ​ 이쯤 되면 만나주지 않는 이유가 있다는 생각까지 든다. 그런데 딱히 짐작 가는 점이 없는 게 가장 큰 문제다. ​ ‘흑란(黑蘭), 타카히나 노아.’ ​ 서브 퀘스트에서 아주 잠깐 모습을 드러낼 뿐이지만, 현재 시점으로부터 약 10년 뒤 모습을 드러낸 그녀는 상당히 임팩트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 야쿠자 그룹인 무영회(無影會)의 2인자로서, 일본의 암흑계를 휘어잡는 데 큰 공을 세운 그녀는 부하를 끔찍하게 챙기면서도, 잘못했을 때는 한없이 잔인해질 수 있는 여러 가지 면모를 보여준다. 사실 이 남매에게 접근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도박 수일 수도 있다. 그런데 지금 당장 내 발등에 붙은 불부터 꺼야 할 것 아닌가. ​ 그러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타카히나 류지를 영입해야 한다. ​ “일단 타카히나 노아부터 찾아야 하는데….” ​ “…저를 찾으세요?” ​ “응, 그래. 찾고있었-.” ​ 어, 실화냐? 나는 순간 어안이 벙벙해서 눈앞의 소녀를 뚫어져라 쳐다봤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소녀. ​ 하얀 눈처럼 뽀얀 피부. 양 갈래로 묶은 분홍색의 머리. 왼쪽 볼에 자그마하게 난 점. 사파이어가 박힌 것 같은 푸른 눈. 그리고 귀여운 외모까지, 타카히나 노아가 확실했다. ​ “………….” ​ 죽어라 찾을 때는 안 나오다가 갑자기 튀어나오다니. 역시 얕볼 수 없는 상대다. 그녀는 미래에 일본의 암흑계를 쥐락펴락하는 거물. 속에 구렁이가 들었어도 수십마리가 들었을 것이 분명ㅡ. ​ “꺄아, 어떡해…!!” ​ “……??” ​ 갑자기 부끄러워하더니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 나는 드럼통에다가 부하를 풍덩 담가버리는 미래의 그녀와 현재의 그녀 사이에서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 그녀는 곧 내게 다가오더니, 반짝반짝 눈을 빛내며 내 두손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진심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 “꼭 한 번 뵙고 싶었어요! 성묵 선배님…!!” ​ 얘가 진짜로 일본의 암흑계를 쥐락펴락한다고? 아무리 봐도 천상 여고생인데…? ​ “…허참.” ​ 그녀와 나의 첫 만남은, 여러 의미로 강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