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악! ​ 4번 타자 석운강이 홈런을 뽑아냈다. 내 홈런 뒤에 바로 터진 백투백 홈런이다. ​ 어느덧 스코어는 4-0. 문혁고가 넉넉한 점수 차로 리드하기 시작했다. 그 뒤에 콧김을 뿜으며 타석에 들어서는 지수용. ​ “으랴앗! 저도 한 번 뽑아보겠습니다!” ​ 기세 좋게 배트를 붕붕 돌려대며 타석에 들어선 녀석. 앞 타자들이 연이어 홈런을 쳐대는 모습에 자극받은 모양이다. ​ 그러나 녀석은 간결한 스윙을 할 때 가장 강력한 타구를 뽑아내는 스타일. 홈런을 의식해 스윙이 커지면 결과는 뻔하다. ​ 부웅! ​ “스트라이크 아웃!” ​ “끄아악, 아쉽드아앗…!” ​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는 지수용. 그렇게 이닝이 교체됐다 ​ 슬슬 수비 좀 하러 들어가 볼까 싶으면, 핫산이 삼진을 펑펑 뽑아내며 금방 이닝을 교대시켜 버린다. 수비 스텟 올리게 뜬공 좀 만들어 줬으면 좋으련만. ​ 그렇게 다시 돌아온 문혁고의 5회 말 공격 상황. ​ 따악! ​ 6번 타자 서경수가 매서운 타구를 뽑아냈다. 3유간 깊숙한 곳으로 빠르게 흘러가는 타구. ​ 그러나 이번에도 그 녀석이다. 슬라이딩 캐치로 낚아채는 유격수 이태경. 열심히 뛰어봤으나 1루에서 아웃당한 서경수가 탄식을 흘리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 경기 초반부터 엄청난 호수비를 보여주는 이태경의 모습에, 나는 명 감독 옆에 앉아서는 슬쩍 물었다. ​ “감독님, 쟤 어때요?” ​ “아, 유격수? 수비가 엣지 있더라.” ​ “그쵸?” ​ “왜, 영입 제안해 보려고?” ​ “빠따는 식물 수준이라 좀 그렇긴 한데, 우리가 지금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잖아요.” ​ “맞긴 하지, 성묵아. 네가 경기 끝나고 한 번 살살 꼬시고 와라.” ​ “옛써.” ​ 어느덧 남의 학교 선수 빼 오는 것 정도는 예사로 생각하게 된 우리 둘. 사고방식 자체가 범인들과는 다르다고 할 수 있겠다. ​ 이태경처럼 수비 하나는 확실한 내야 매물은 있어서 손해 볼 건 절대 없다. 운 좋게 타격도 되는 내야 매물을 찾게 되면 백업으로 쓰면 되고, 못 구한다면 저 좋은 수비로 3루 자리를 채워주면 된다. ​ 따악! ​ 힘없는 내야 땅볼로 타자를 정리한 핫산. 녀석은 오늘 직구-스플리터 조합으로 6이닝을 깔끔하게 막아냈다. 물론 강팀 상대로 검증된 것은 아니나 녀석의 자신감이 붙은 얼굴을 보면, 오늘의 피칭은 녀석에게 큰 자산이 될 것이 분명하다. ​ “감독님, 저도 몸 풀까요?” ​ “됐다 임마, 너까지 쓸 생각 없어. 에이스를 아무 경기에나 펑펑 써서 되겠냐. 오늘은 타자에만 집중해.” ​ 단호하게 오늘 난 던질 필요 없다고 말하는 명신우 감독. 나는 고개를 주억이고는 불펜 쪽을 바라봤다. ​ “오늘 찬준 형님 등판 시키려고요?” ​ “그래, 찬준이도 실전 등판 경험을 좀 쌓아야 대회 때 쓰지.” ​ 감독님이 가비지 용 투수로 뽑았던 박찬준이 열심히 몸을 풀고 있다. 사실 이럴 때 경험을 쌓게 해야 한다는 건 전적으로 맞는 말이다. 보문고 정도면 앞으로 만날 학교 중에선 제일 약한 편일 테니까. ​ 그래서 사실 어느 정도는 막아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 따악! ​ 핫산이 내려가고 박찬준이 등판하자, 방망이에 불이 붙기 시작한 보문고 타자들. 150km 중후반대의 공에 속수무책 당하다가 130km 후반대의 공이 날아오니 물 만난 물고기처럼 자신감 있게 배트를 돌려댔다. ​ 그 결과가 지금 이거다. ​ 문혁고 : 보문고 5 : 3 ​ 어느덧 2점 차까지 따라온 보문고. 그런데 아직 보문고 측의 공격은 끝나지 않았다. 7회 초, 1사 만루 상황. 위기를 자초한 박찬준이 땀을 뻘뻘 흘리고 있다. ​ “쓰읍….” ​ 솔직히 좀 불편하다. 나름 네명 뿐인 문혁고 투수진의 일원으로서, 밥값 정도는 해줘야 할 텐데 계속 이런 모습이면 곤란하다. ​ 띠링! ​ 이름: 박찬준 국적: 대한민국 나이: 20 키: 184 cm 스킬 / 마당쇠 (B) : 연투 상황에서 피로도가 감소합니다. 잠재 키워드: 강철 체력(A+) ​ 투수 능력치 (*포텐셜) /우투 스리쿼터 체력: A (*A+) 제구: B 직구: C+ 구위: C+ 변화구: C+ ​ ‘분명히 발전했어, 발전은 했는데….’ ​ 직구 스텟과 변화구 스텟이 이전보다 올랐다. 문제는 그 발달한 스텟도 타자들을 효과적으로 제압하기엔 약하다. ​ “후우, 하아….” ​ 모자를 벗으며 땀을 닦는 박찬준. 뭐라고 하기엔 모자를 벗을 때마다 보이는 찬준햄의 빈약한 모근이 나를 약하게 만든다. ​ 내가 뽑은 선수는 아니긴 하지만, 어떻게든 써먹을 방법이 없을까 머리를 굴려봤다. ​ ‘자체 밸류가 높은 변화구를 익혀야 하나…? 아니면 폼을 괴랄하게 수정해…?’ ​ 그렇게 방안을 이리저리 고심하던 그때. ​ 따악! ​ 타자가 친 공이 내 쪽을 향해 날아왔다. 나는 앞으로 대쉬하며 타구와의 거리를 가늠했다. ​ ‘거리가 좀 애매한데…?’ ​ 뛰어서만 잡기에는 거리가 멀다. 그렇다고 앞으로 슬라이딩하며 잡기엔 가깝다. ​ 이럴 때는 방법이 있지. ​ 촤아악-! ​ 한쪽 무릎을 굽히며 잔디를 훑듯이 미끄러진 나는 공의 낙구 지점에 글러브를 가져다 댔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착 글러브 속으로 빨려 들어오는 공. 원래 내 수비 스텟이면 공이 튕겨 나가야 하는데, 글러브 작을 한 보람이 있다. ​ “빽, 빽……!!” ​ 당연히 안타인 줄 알고 멀찍이 가 있던 주자들에게 귀루 신호가 걸렸다. 혼비백산 돌아가기 시작하는 주자들. 물론 나는 멀쩡히 살려서 보낼 생각이 추호도 없다. ​ “으랴압…!” ​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힘차게 공을 뿌렸다. 1루 주자가 헐레벌떡 슬라이딩하며 돌아가 보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 “아웃…!” ​ 심판의 자비 없는 판정 아래 얼굴이 흙빛이 된 1루 주자. 내 플레이 하나로 아웃 카운트 두 개가 올라가며 이닝이 끝났다. ​ 나는 덕아웃으로 돌아가며, 다소 의기소침한 모습인 박찬준에게 다가가 어깨를 툭툭 쳤다. ​ “찬준 형님, 좀 맞아도 괜찮으니까 팍팍 던지세요.” ​ “성묵아…!” ​ 내 격려에 감동한 표정을 짓는 찬준햄. 근데 이 형님 정말 괜찮으려나. 이러다간 중요한 경기는 아예 못 나오겠는데…. ​ 아무튼 박찬준의 실점으로 경기 스코어가 좁혀지자, 보문고 측은 본격적인 움직임을 보이기 시작했다. 바로 에이스를 투입한 것이다. ​ 띠링! ​ 이름: 유성현 국적: 대한민국 나이: 19 키: 187 cm 스킬 / 날카로운 볼끝 (B+) : 선발 등판 시 구위가 상승합니다. 잠재 키워드: 파이어볼러 (A) ​ 투수 능력치 (*포텐셜) /우투 스리쿼터 체력: B+ 제구: B 직구: A (*A) 구위: C+ 변화구: B ​ ‘오, 나쁘지 않은데?’ ​ 이전 투수인 이동재에 비하면 훨씬 나은 스텟이다. 실제로 올라오자마자 하위 타순을 어렵지 않게 정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상대측 에이스. ​ “오케이, 할 수 있다…!” ​ “할만하다 애들아!” ​ 2점 차까지 좁혀진 점수 차에, 강속구를 뿌려대던 아랍 놈은 이미 마운드에서 내려온 지 오래. 보문고 측은 충분히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 실제로도 가능성은 충분하다고 생각한다. 만약 투수가 박찬준 그대로였다면 말이다. ​ 휘릭! ​ “스트라이크 아웃!!” ​ 리동혁의 싱커가 춤을 춘다. 그 현란한 무브먼트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보문고 타자들. 세 타자 전부 범타로 끝낸 리동혁의 피칭 탓에 그들은 점수는 커녕, 1루조차 밟지 못했다. ​ 그렇게 다시 돌아오게 된 문혁고의 공격. 1사 주자 1,2루 상황에 내가 타석에 들어서게 되었다. ​ ‘150km짜리 직구, 체인지업, 커브 이렇게 세 개가 주무기라고 했지.’ ​ 도도연의 보문고 레포트에서 가장 큰 분량을 차지하던 투수가 눈앞의 유성현이다. 물론 청현고의 임태율에 비하면 반의반도 안 되는 분량이긴 하다만. ​ ‘이번엔 슬슬 써볼까.’ ​ 나는 그동안 내 EX등급의 스킬, 태양신맥(太陽神脈)에 대해 연구했다. ​ 동료들을 상대하며 연구한 결과, 태양신맥에는 총 3가지 단계가 있는 걸 알아냈다. ​ 그 3단계는 기(氣)를 발산(發散)하는 능력, 전문용어로 발기력(發起力)에 따라 약발(弱勃), 중발(中勃),강발(強勃)로 나뉜다. ​ 약발(弱勃)은 약간 기를 쓰니까 나쁘진 않은 상대. 중발(中勃)은 적당히 기를 발산하므로 꽤 강한 상대. 강발(強勃)은 강하게 기운을 내뿜기 때문에 확실한 강적을 마주할 때 발동된다. ​ 지금 상대하는 녀석은 견적이 어느 정도냐? ​ ‘약발(弱勃)이면 떡을 치겠군.’ ​ 불룩! ​ [태양신맥에 의해 스텟이 강화됩니다!] [파워 스텟이 B+ -> A로 강화됩니다] ​ 적당히 강한 녀석인지라 딱 한 단계 강화된 스탯. 하지만 그거면 충분했다. 저 녀석의 의기양양한 표정을 죽상으로 만드는 데는 말이다. ​ 크게 와인드업하는 상대측 에이스 유성연, 몸에 한층 기합이 들어간 걸 보니 이번 이닝을 반드시 무실점으로 마치겠다는 각오가 엿보인다. ​ 그런데 어쩌나. 나는 순순히 돌려보내 줄 생각이 없는데! ​ 따악! ​ “…………!!” ​ 깨끗한 타격음이 울려 퍼진다. 맞는 순간 직감한 듯 얼굴이 흙빛이 되는 유성연. 나는 느긋하게 타구를 감상하며 천천히 걸었다. 높이, 높이 날아가는 공. 그대로 담장 밖에 떨어진다. ​ 경기에 쐐기를 박는 쓰리런 홈런이 터졌다. 내가 금성묵으로서 처음 경험하는 멀티 홈런 경기다. ​ 산보하듯 베이스를 전부 돌아 홈에 도착한 나는 선행 주자였던 도도진, 최아담과 마주했다. ​ “성묵이 형, 나이스 배팅이에요.” ​ “이야, 금성묵 이 새끼. 오늘 폼 좋네. 약이라도 처먹었냐…?” ​ 축하를 건네는 둘과 주먹을 꽝 맞부딪혔다. 이로써 스코어는 8대 3. 내 두 번째 홈런을 기점으로, 경기는 완전히 문혁고 측으로 기울었다. ​ ​ ##### ​ ​ ““수고하셨습니다……!!”” ​ 경기가 끝나고 서로에게 인사를 건네는 양 팀. 스코어는 14대 3. 성묵의 홈런 이후 불붙은 문혁고의 방망이는 그칠 줄을 몰랐고, 6점을 더 뽑고 나서야 경기가 끝이 났다. 봄 대회를 코앞에 둔 상황에 거둔 기분 좋은 승리다. ​ [보문고를 상대로 승리하였습니다!] [MVP는 문혁고 3학년, 금성묵입니다] [MVP에게 추가적인 스텟 보너스가 제공됩니다] ​ [스피드 스텟이 B -> B+로 강화됩니다!] [수비 스텟이 D-> D+로 강화됩니다!] [수비 스텟이 D+-> C로 강화됩니다!] ​ “오호라.” ​ 그동안 웨이트를 해도 잘 오르지 않던 스피드 스텟이 드디어 한단계 올랐고, 수비 스텟은 워낙 기본 치가 낮아서 그런지 두단계나 껑충 뛰어올랐다. 나름 평범한 팀 상대로 이긴 것 치고는 나쁘지 않은 보상이다. ​ 하지만 여기서 만족할 그가 아니다. 금태양이란 자고로, 내가 노력해서 얻은 것뿐만 아니라 남의 것까지 탐해야 하지 않겠는가. 성묵은 찜해둔 선수에게 은밀하게 접근했다. ​ “조심히 들어가요. 나중에 연락 한 번 할게요.” ​ “앗, 넵!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이태경에게 손을 흔드는 성묵. 그는 보문고 측 몰래 이태경과 번호 교환을 하는 데 성공했다. 오늘 수비에선 파인 플레이, 타석에선 홈런을 두 개나 뽑아내며 맹활약한 덕분에 성묵을 보는 이태경의 시선에선 경외감마저 묻어나왔다. ​ ‘이거, 영입도 쉽게 풀릴 각이구만.’ ​ 10점 가까운 점수 차로 패하며 팀과 팀 사이의 격차를 크게 실감했을 터. 더 강한 팀으로 장학금까지 받아 가며 옮길 찬스를 그리 쉽게 뿌리칠 수 있으리라곤 생각 않는 성묵이다. ​ 이 경기에서도 많은 걸 얻어내어 비릿한 미소를 짓는 성묵. 그러나 그가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사실이 하나 있었다. 이 경기를 남몰래 지켜보던 사람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 “후훗….” ​ 그 정체는 한 여고생이다. 백옥같이 하얀 피부에 귀여운 외모. 분홍색 긴 머리를 양갈래로 묶은 소녀는 얕게 웃음 지었다. 마치 재미있는 무언가라도 발견한 듯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