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으, 고추 아파.” ​ 어제 경기에서 혹사당한 아랫도리를 덮쳐오는 엄청난 통증. 나는 어기적어기적 서혁준 선생에게 다녀왔다. 그리고는 엉망진창 혼났다. ​ "정말 죽고 싶으신 겁니까! 다시는 이런 무모한 짓 하지 마십시오!" ​ "죄, 죄송합니다." ​ 평소에 화를 안 내던 사람이 화내면 더욱 무섭다는 말은 정말이었다. 그 엄청난 박력에 나는 크게 놀랐다. ​ “후우, 오죽 급하면 그랬을까 싶긴 합니다만….” ​ 그래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간다는 듯 한숨을 내쉰 그. 나름대로 후유증이 없는지 꼼꼼히 몸 상태를 점검해주었다. ​ “그 자리에 소림의 제자가 있던 건 엄청난 기연입니다. 다른 부위에는 피해 없이 깔끔하게 맥만 뚫렸군요.” ​ “그 말은….” ​ “네, 이제 몸 상태는 일절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 진료 결과, 혹시 모를 부작용도 없다는 결론. 내심 불안함이 남아있던 나는 웃음이 절로 나왔다. ​ “정말 감사합니다!” ​ 허리를 꾸벅 숙여 감사를 표한 나. 기왕 찾아온 김에, 궁금한 것들도 물어봤다. ​ “오호, 강한 적을 만나면 아랫도리에서부터 기운이 흘러나온다. 이 말입니까?” ​ “예, 맞습니다. 이걸 강화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 상담할 수 있는 사람은 서혁준뿐이다. 이딴 걸 내가 어디 가서 물어본단 말인가. ​ “간단하지요. 정력을 더 키우면 될 거 아닙니까?” “첫째, 하체운동을 많이 하십시오.” “둘째, 남자에게 좋은 음식을 많이 드십시오. 이상입니다.” ​ “………!!” ​ 서혁준이 내린 결론은 간단했다. 태양신맥(太陽神脈)은 아랫도리에서 나오는 힘인 만큼, 정력을 더 키우면 된다는 것! ​ ‘허허, 이런 미친 게임.’ ​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내 손은 열심히 움직이고 있었다. ​ “하체 운동 스케줄 일단 하루 늘리고….” ​ 나는 서혁준 선생의 금과옥조 같은 말씀들을 하나도 빠지지 않고 메모했다. 내 포텐셜이 다 개화되기 전까지는, 태양신맥 스킬이 내 유일한 밥줄이다! ​ ​ ​ ##### ​ ​ 경기에 지친 선수들을 배려하기 위해, 명신우 감독은 경기 피드백을 다음 날로 미뤘다. ​ 그렇게 모인 문혁고 야구부 멤버들. 하얀색 칠판 앞에 선 명 감독이 피드백을 시작했다. ​ 그는 우선 크게 ‘수비’라는 두 글자를 큼지막하게 썼다. ​ “제군들이 제일 잘 알겠지만, 어제 경기에서 여러분들의 수비는 눈 뜨고 봐주기 힘들었다. 이건 본인들이 제일 잘 알겠지.” ​ “……….” ​ “봄 대회 직전까지는 수비를 최우선으로 훈련할 거고, 굉장히 고될 테니 미리 각오하도록!” ​ 명 감독의 수비 집중훈련 선포. 수비 포텐셜이 있는 친구들도 많으니 많이 개선될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 “그다음은 타격에서의 문제인데….” ​ 경기에서 보인 문제점들을 조목조목 짚어주는 명 감독. 상당한 분석력이 돋보이는 피드백이었다. ​ “…그래도 너희들은 그 청현고를 이겨냈다.” “정말 잘했고, 수고 많았다는 말을 해주고 싶어.” “자, 같이 고생한 팀 동료들에게 박수 한 번 쳐주자.” ​ 짝짝짝-! ​ 그렇게 끝이 난 명감독의 경기 피드백. 그런데 아직 무언가가 남아있는 듯했다. ​ “자, 제군들에게 좋은 소식이 세 가지 있다.” ​ “……?” ​ 대체 좋은 소식이라 할만한 게 뭐가 있나 싶은 상황. 모두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우선, 드디어 야구부 전담 영양사 선생님이 생겼다. 운동선수에 맞는 최적의 영양 보급을 해주시겠다 하시니, 부담 없이 마음껏 먹도록.” ​ “오오…!!” ​ 야구부가 생긴 지 그리 오래된 것은 아니지만, 복불복에 가까운 학교 급식으론 뭔가 아쉬운 상황. 그런데 이제 그런 걱정이 아예 없어진다니, 명 감독이 가져온 첫 번째 소식부터 부원들은 화색이 되었다. ​ ‘…슬슬 올리비아를 놔줘야겠지.’ ​ 이제 밥값 걱정도 없는 상황이니, 그녀를 더 이상 억까하며 붙들고 있기도 미안하다. 조만간 날 잡고 그녀를 해방해줘야 겠다고 다짐했다. ​ “두 번째 소식이다. 투수조 여러분을 가르칠 코치님이 새로 오셨다. 자, 전원 기립.” ​ ““안녕하십니까………!!”” ​ 목소리 높여 새로운 투수 코치에게 인사하는 팀원들. 새 투수 코치는 안경을 쓴 지적인 느낌의 코치였다. ​ “아, 잘 부탁드립니다. 문혁고의 투수 코치를 맡게 된 이태정입니다.” ​ ‘나쁘진 않은 것 같은데.’ ​ 마덕수같은 괴수는 누구랑 붙여도 비교가 불가능하니까 논외로 치고, 고교 기준에서는 충분히 괜찮은 코치로 보였다. ​ ‘내 투구폼 체크 좀 해주고, 핫산 변화구 좀 달아주고, 리동혁 멘탈 케어 좀 해주고….’ ​ 그 정도만 해도 밥값은 다 하는 거 아닐까 하는 생각이다. ​ “자, 마지막 세 번째 소식. 이건 아마 꽤 놀랄 수 있다.” ​ “…………?” ​ “우리 팀에 새로운 동료가 생겼다. 자, 들어와라.” ​ 나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 곧 멀찍이서 누군가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 “저, 저 녀석…?” ​ “뭐야, 청현고 주전조에 있던 그…!” ​ ​ ​ ​ ####### ​ ​ “뭐, 문혁고에 올 생각이 없냐고?” ​ 어이를 상실한 눈으로 날 바라보는 최석호. 경기중에 살벌한 신경전까지 벌여놓고 그런 말이 나오냐는 눈치다. 아마 명문에서 신생고로 넘어오라는 터무니 없는 제안을 하는 놈이 있을 줄 상상도 못한 부분도 있겠지. ​ 그러나 나는 진심이다. ​ ‘최석호 정도 되는 거포면 도움이 되고도 남지.’ ​ 팀의 1루가 비어있는 상황인데다, 이 녀석이 감독과 임태율을 혐오하는 걸 경기 중에 알아챘다. 코너에 몰린 임태율이 지수용에게 벌인 짓을 보고 정나미가 더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 어느 정도 승산이 있다고 생각하고 던진 제안이다. ​ “크큭, 푸흐하핫……!!” ​ 크게 웃음을 터트린 최석호. 눈물 쏙 빠지게 웃은 그가 곧 대답을 들려주었다. ​ “미안하지만, 거절하도록 하지.” ​ “쩝….” ​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혹하기는 해. 너희 팀도 직접 맞붙어본 입장에선 꽤 매력적이거든.” ​ “그런데?” ​ “내가 1학년이었으면 모르겠지만, 지금은 팀에 나만 보고 버티는 녀석들이 많아서 말이야. 나 혼자 빠져나갈 순 없지 않겠냐.” ​ “그런 이유라면야.” ​ 나름의 이유가 있는 듯한 최석호. 납득이 가는 이유긴 해서 난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 “데려갈 거면 지수용한테나 제안해보던가?” ​ 거절하고는 다른 이름을 입에 담는 최석호. 물론 처음부터 지수용이 타깃에, 경기 중에 이 녀석이 눈에 들어온 거였지만 나는 시치미 뚝 떼고 물었다. ​ “아, 그 친구 기억나. 근데 팀 동료를 내가 선뜻 꼬셔서 데려가도 괜찮겠어?” ​ “어차피 그 녀석, 임태율에게 찍혀서 경기도 제대로 못 나올걸. 그 아까운 재능을 그런 쓰레기 때문에 썩힐 바에야 너네 팀에 가는 게 낫지.” ​ “흠.” ​ 이 녀석, 생각보다 더 좋은 녀석 같다. 뒤끝도 없는 쿨한 성격도 마음에 들고. 이러니 동료로 영입 못한 게 좀 더 아쉬워지는데. ​ “지금쯤이면 아마 하천 쪽 잔디에 누워있을 거다. 그 녀석이 좋아하는 장소거든.” ​ “아아, 땡큐.” ​ 나는 바로 지수용을 만나러 갈 채비를 했다. 그러자 붙잡고는 무언가 말하려는 최석호. ​ “어이, 금성묵.” ​ “?” ​ “올해 국가대항전 있는 거 잊은 건 아니겠지? 대표팀에서 다시 만나자고.” ​ “대표팀…?” ​ “그래, 거기선 같은 팀으로 뛰어보자.” ​ 국가대표. 하루하루 허덕이며 살다 보니 잊고 있던 특별한 컨텐츠다. 목표 중에 프로 1라운드 지명도 있는 내 입장에서는, 절대로 손해 볼 건 없는 게 청소년 대표팀이다. 분명 그 시즌엔 스카우터들의 이목도 절로 집중되기 때문이다. ​ ‘4년 주기로 하는 U-18 야구 월드컵이 올해 있다고 그랬지.’ ​ 봄 대회랑 여름대회 사이에 일정이 잡혀있다 들었다. 그러면 봄 대회만으로 국가대표급 임팩트를 남겨야 한다는 소리인데…. ​ “오냐, 거기서 보자.” ​ 뭐, 까짓거 못할 것도 없지. 봄 대회 씹어먹고, 국대도 가주마. ​ ​ ##### ​ ​ 최석호가 알려준 강가에 가니, 익숙한 뒷모습이 잔디에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 ​ “후우, 어렵다. 어려워어…!!” ​ 무언가 안 풀리는 문제가 있는지 머리를 잡고 데굴데굴 구르고 있는 지수용이 보인다. 나는 조용히 다가가 말을 걸었다. ​ "이봐." ​ "우와앗, 다, 당신은…!!" ​ 깜짝 놀라선 후다닥 일어난 녀석. 곧 나에게 삿대질하며 떠오른 이름을 말한다. ​ "어, 음, 금성무 씨?" ​ "그건 홍콩 배우잖아, 임마." ​ “아하!” ​ "자, 앉아봐. 이야기 좀 하자." ​ "…?" ​ 물음표를 띄운 채 날 따라 자리에 앉는 녀석. ​ "내가 널 왜 찾아왔을 것 같아?" ​ "으음, 잘 모르겠습니다….“ ​ "너, 문혁고에 와라." ​ “...........!!” ​ 훅 들어오는 스카웃 제안에 입이 떡 벌어진 지수용. 나는 말을 계속 이어 나갔다. ​ “우린 너 같은 외야수가 필요해, 지수용.” ​ “저, 저요?” ​ “그래, 타격 능력은 발군. 발도 빠르고 선구안도 있는 데다 어깨도 좋지.” “수비가 꽝이긴 하다만, 그건 우리에게 어떻게든 방법이 있어. 믿어도 좋아." ​ "엇, 어어……." ​ 갑작스러운 칭찬 세례에 입을 다물지 못한 녀석. 그러나 일단 첫 답변은 거절이었다. ​ "높은 평가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다른 팀에도 폐를 끼칠 순 없으니까요!" ​ "너, 이대로 계속 청현고에서 교체 멤버로 뛸 거야?" ​ "어쩔 수 없는 거 아니겠습니까. 제 실력이 모자라는데!" ​ "흠." ​ 사실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다음 방법을 쓰는 수밖에. ​ "너, 귀 잘 안 들리지?" ​ "…………!!" ​ 녀석은 선천적으로 한쪽 귀가 아예 안 들리고, 반대쪽 귀의 청력도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다. ​ 지수용이 목소리를 크게 내는 이유는 타고나길 성격이 좋아서가 아니다. 그가 작게 말하면 스스로에겐 거의 들리지 않기에, ‘내가 작게 말하면 남들에겐 안 들릴 수도 있다’는 본능에 가까웠다. ​ 굳이 안 해도 되는 선도부에 들어가서 열심히 활동한 것도, 큰 목소리를 내도 이상하지 않은 캐릭터를 구축하기 위함이라고 카더라. ​ "저번에 중견수와 부딪힌 것도 콜플레이를 못 들어서잖아." ​ "앗, 하하. 들켰습니까…." ​ ".........." ​ "제가 어딜 가든 이러면 팀원들이 싫어하지 않겠습니까. 여기는 다들 제 실수에 익숙해져서 괜찮습니다!" “애초에 반쯤 후보라서 중요한 경기는 못 나오기도 하고요….” ​ 마지막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끝내는 녀석. 본심이 아니라는 게 티가 팍팍 난다. ​ “우리 팀엔 너 싫어할 사람 없어. 어제 실책쇼 봤지? 너 정도면 양호한 편이야.” ​ “엣…, 제가 양호한 편!?” ​ “외야에 빵꾸도 겁나 심해. 너 오면 닥주전이야. 나중엔 힘들어서 쉬게 해달라고 빌게 될 걸.” ​ “그게 정말인가요…?" ​ “실수 좀 하면 어때. 니가 그만큼 타석에서 만회해줄 거라고 난 믿는다.” ​ "크흡…." ​ 갑자기 눈물이 핑 도는 녀석. 입질이 오기 시작했다. 나는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 ​ "청력 좀 안 좋은 거? 외야수끼리 수신호 좀 만들면 되지 뭐. 나도 외야수로 종종 뛸 텐데, 그때 같이 맞춰보자고." ​ 이제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녀석. 이내 자리에 털썩 주저앉는다. ​ "정말 괜찮습니까…! 이렇게 모자란 저라도!!" ​ "그래, 인마." ​ "크흐흑, 문혁고에 충성을 바치겠씁니다앗....!!" ​ 콧물 범벅이 된 얼굴로 훌쩍대며 넙죽 절하는 녀석. 나는 한쪽 무릎을 굽히고는 녀석의 어깨를 두들겨주었다. ​ ‘캬, 쉽다 쉬워!’ ​ 이렇게 나는 문혁고의 휑한 외야를 채워줄 키를 영입하는 데 성공했다. 나는 기분 좋게 스탯창을 띄워 녀석의 현재 상태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띠링! 이름: 지수용 국적: 대한민국 나이: 18세 키: 183 cm 스킬/ 핀치 히터(A) : 2스트라이크 이후 컨택이 1랭크 상승합니다. 잠재 키워드: 타격 천재 (S), 스피드 러너(A+), 강견(A+) ​ 타자 능력치 (*포텐셜) / 좌투 좌타 파워: B+ (*A) 컨택: B (*A) 스피드: A (*A+) 선구: B (*A) 수비: D 어깨: B+ (*A+) 추천 포지션: 외야수 '배 부르다, 배 불러!' 선수 빼먹기 프로젝트의 시작이 아주 순조롭다. 좋아, 이대로만 가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