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악! ​ 하늘 높이 쭉쭉 뻗어져 나가는 공. 더 이상 볼 것도 없다. 담장을 훌쩍 넘어가는 역전 홈런이다. ​ 베이스를 돌고 덕아웃에 돌아가 환호받는 최석호를 보며 성묵은 한숨지었다. ​ 명신우 감독은 서둘러 마운드에 올라왔다. 그리고 야수들 또한 마운드 쪽으로 모여들었다. ​ “성묵아, 괜찮냐? 더 던질 수 있겠어?” ​ “뭐 홈런 하나 가지고. 저 괜찮습니다.” ​ 그렇게 대화를 나누는데, 어디서 울먹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 이 모든 일의 발단. 큰 실수로 이번 이닝에 팀을 역전당하게 만든 1학년 3루수가 눈물까지 보였다. ​ “크흡, 성묵 선배. 죄송합니다. 다 저 때문에….” ​ “……….” ​ 도움을 주지 못한 다른 야수들 역시도 미안함에 고개를 떨군 상황. 뭐라 한마디 할 수도 있었지만, 성묵은 별 상관없다는 듯 픽 웃었다. ​ “사내자식이 울고 난리야. 괜찮아 인마.” ​ 후배의 머리를 헝클어놓은 성묵은 곧 선수들에게 손짓했다. 자신에게 모여보라는 듯이. ​ 그렇게 둥글게 모여 어깨동무한 문혁고 멤버들. 성묵은 그들에게 가볍게 물었다. ​ “애들아, 재밌지 않냐.” ​ “………!” ​ “이게 야구야. 엎치락뒤치락. 한 대 맞으면 한 대 때려주고. 마지막에 더 때린 놈이 이기는 스포츠.” ​ “…….” ​ “아직 한 점 차이다. 여전히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나뿐이냐?” ​ 거기에 서로 눈빛을 교환하더니, 이내 목소리 내기 시작하는 멤버들. ​ “맞아요, 아직 안 끝났습니다.” ​ “야, 우리 이미 3점 뽑았는데 한두점 더 못 뽑겠어? 가보자고 한 번!” ​ 사기충천한 팀원들을 보며 씩 웃음 지은 성묵. ​ “오케이, 가보자!” ​ 그의 외침과 함께 다시 흩어진 문혁고 멤버들.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다음 타자는 외야수 뜬공으로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었다. ​ “후우….” ​ 이닝을 마친 성묵은 깊게 숨을 뱉었다. 그리곤 마운드에서 내려와선 덕아웃 문 앞에 섰다. ​ “감독님, 잠시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 “그, 그래.” ​ 명신우 감독은 당황했다. 방금까지 웃으며 팀원들을 달래주던 성묵의 얼굴이 그 어느 때보다 어두웠기 때문에. ​ “끙…….” ​ 이 뒤에 그가 뭘 할지 예상은 가지만, 차마 보내주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 ​ ​ ##### ​ ​ ​ “씨이팔……!!” ​ 퍼엉! ​ 글러브를 강하게 벽에다 내던진 성묵. ​ 주장의 책무를 맡고 있어서 팀원들 앞에선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가장 분한 건 그였다. 그는 앞머리를 쓸어내리며 벽에 기대 주저앉았다. 실수를 반복하는 팀의 수비도, 아까부터 이상한 몸의 상태도. 그가 정말로 ‘에이스답게’ 던졌다면 무마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러지 못했다. ​ “이 병신같은 새끼. 일은 일대로 벌여놓고 뭐 하는 거냐.” ​ 분명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나름 있었다. 그런데 이 결과는 뭐란 말인가. ​ ‘자만하고 있었던 건가. 내가…?’ ​ 현역 시절엔 사이영 상 수상 투수, 은퇴 후엔 이 게임의 최고 고인물. 거기다 게임에 대해 잘 몰랐다면 넘지 못했을 투음절맥이라는 벽까지 넘어섰다. 더 이상 내 앞을 가로막을 것은 더 이상 없다고 내심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 “하아…….” ​ 뼈에 사무치는 무력감을 느끼던 그 순간, 한 가지 의문이 들었다. ​ ‘아니지, 자만한 적은 없어.’ ​ 오히려 뒈지기 싫어서 매일같이 최선을 다해 열심히 살았다. 그런데도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상황. 무언가가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다. ​ ‘…내가 정말 이 몸을 제대로 활용하고 있는 게 맞나?’ ​ 분명히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고, 이 주어진 신체의 한계까지 박박 긁어서 잘 활용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면? ​ “스텟창.” ​ 금성묵 # 투수 능력치 (*포텐셜) /좌투 스리쿼터 체력: A+ (*S) 제구: C+ 직구: B (*S+) 구위: B (*S+) 변화구: B (*S) ㄴ커브: B ㄴ슬라이더: B ㄴ써클체인지업: A ​ # 타자 능력치 (*포텐셜) /좌투 좌타 파워: B+ (*S+) 컨택: C+ (*S) 스피드: B(*S) 선구:C 수비:D 어깨: B (*S+) ​ 전에도 생각했지만, 스텟의 전체적인 성장도가 너무 느렸다. 무려 천타지체와 천투지체의 소유자다. S등급으로 도배를 한 금성묵의 포텐을 생각하면 A등급까지는 스텟이 급속도로 오르는 게 맞았다. 그런데 치료 전 특수하게 훈련한 써클 체인지업을 제외하면, 무엇하나 A등급 스텟을 찍은 게 없다. ​ “투음절맥은 분명 치료했잖아. 대체 왜…?” ​ 언젠가 오르겠지- 라고 생각은 했지만, 이건 이상했다. 그것도 아주 많이. ​ 저릿! ​ “………!” ​ 그 순간, 하반신을 자극하는 익숙한 감각. 방금 계속 투구할 때 느껴진 뜨거운 감각과는 달랐다. ​ ‘약점을 발견했을 때의 감각…?’ ​ 저릿저릿 센서, 내가 가진 F등급의 스킬. 야구를 할 때는 하등 쓸모없지만 이사장을 엿먹일 때 유용하게 썼던 그 스킬이다. ​ 화장실에 나 혼자뿐인 지금, 뜬금없이 스킬은 발동됐다. 마치 내 의문에 정답을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이. ​ “스텟창 위쪽…?” ​ 저릿저릿 센서가 힌트를 주는 방식은, 무언가에 대한 강렬한 충동의 발생. 나는 홀린 듯 내 스텟 창을 위로 올렸다. ​ 띠링! ​ 이름: 금성묵 국적: 대한민국 나이: 만 18세 (고3) 키: 192cm 몸무게: 89kg 소속: 문혁 고등학교 스킬/ 저릿저릿 센서 (F) : 선천적으로 타고난 물건을 가진 당신, 아랫도리의 감각을 통해 상대방의 약점을 파악합니다. 경기 중에는 사용이 불가능합니다. 잠재 키워드: 천투지체(EX+), 천타지체(EX) ​ “그래서, 이걸 왜 보라는….” ​ 저릿! 저릿! 저릿! ​ “뭣……?” ​ 놀랍게도 센서가 가리키는 대상은, 바로 스킬 자기 자신이다. 나는 도무지 이 상황을 종잡을 수 없었다. ​ “아니, 이게 대체 어디가 약점….” ​ 저릿! ​ “아씨, 알았다고!” ​ 마치 자아라도 있는 듯 계속 자극을 건내는 하반신의 지시에 따라 다시금 스킬 설명을 읽어보았다. ​ “선천적으로 타고난 물건을 가진 당신, 아랫도리의 감각을 통해….” ​ 더 이상 센서는 울리지 않았다. 애초에 울릴 필요가 없었다. 그 묘한 위화감의 정체를 이젠 알아차렸다. ​ “내 물건, 커진 적이 있던가?” ​ 뭔 개소리냐 싶을 수 있지만, 난 진지했다. ​ 내가 빙의한 캐릭터인 금성묵은 한창때의 피 끓는 청년이다. 게다가 엄청난 피지컬을 가진 만큼 끓어오르는 욕구마저 엄청나야 정상. ​ 하지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아랫도리는 아주 잠잠했다. 상태창이 공언할 정도로 ‘선천적으로 타고난 대단한 물건’임에도 말이다. ​ 마치 기나긴 잠에라도 든 것처럼 잠잠한 아랫도리는, 마치 무성욕자라도 된 것처럼 도도연이나 올리비아 같은 예쁜 여자를 봐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말이 안 되잖아.” ​ 금성묵은 과거 게임에 적으로 등장했을 때, 투구 외적인 문제로 나와 시청자들을 빵 터트린 적이 있다. 바로 한창 경기 중에 묵직해진 ‘그곳’의 존재감 때문에. ​ -형님, 이 새끼 섰는데요? -성묵 게이야…. -금성묵 이름 어원이 ‘금태양 성기 묵직’이었네 ㄷㄷ ㄴ ㅁㅊ ㅋㅋㅋㅋㅋㅋ ​ 그걸 보고 진지하게 걱정하는 유저 또한 있었다. ​ -경기 중에 저렇게 서면 공 던질 때 안 불편한가? -ㄹㅇ 존나 아플 텐데 ​ 그 뒤 금성묵이 던지는 것을 본 유저들은 모두 당황했다. 금성묵은 오히려 그렇게 묵직한 상태가 된 뒤에, 훨씬 더 나은 퍼포먼스를 보여줬기 때문이다. 그것도 강타자들을 상대로 말이다. ​ -아니, 저거 달고 강속구를 대체 어떻게 던짐? -사실은 거근이 밸런스 잡는 무게추였던 것임 ㄷㄷ -역시 두근두근 베이스볼 예능캐 GOAT ​ 여기서 유추할 수 있는 사실은 두 가지였다. 1. 금성묵은 경기 중에도 묵직해질 만큼 만큼 왕성하다. 2. ‘그곳’의 상태와 경기력에 유의미한 상관관계가 있다. ​ 둘 다 확실한 것은 아니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지금 몸 상태가 내가 알던 금성묵의 그것과는 크나큰 괴리가 존재한다는 것. ​ 그렇게 발생한 의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다음으로 의심스러운 것은, 금성묵의 스킬. ​ “세계관 탑급 포텐셜에 F급 스킬, 이것도 따지고 보면 말이 안 돼.” ​ 이 게임은 캐릭터마다 빈익빈 부익부가 극심하다. 포텐 짱짱한 놈이 스킬마저 사기급을 달고 있는 경우가 너무나도 흔했다. ​ S급 포텐을 8개나 달고 있는 사기적인 포텐셜의 금성묵이 가진 스킬이 고작 F급? F급은 야구에 재능이 아예 없다시피 한 선수에게나 붙는 스킬이다. ​ 저릿저릿 센서가 일반적인 F급 스킬은 아니긴 하나, 나는 여기서 또 한 가지 가능성에 다다랐다. ​ “심각한 신체 결함으로 인한 스킬의 열화.” ​ 예전에 스쳐 지나가듯 한가지 글을 본 적이 있다. ​ [제목: 님들, 제 선수 스킬 등급 떨어졌는데요?] 제 선수가 강철어깨라는 A급 스킬 가지고 있다가 경기 중에 엄청나게 큰 충돌을 당했거든요? 근데 그 뒤에 C급 스킬로 바뀜 ㄷㄷ ​ 사람들은 이 글에 흥미를 표하며 인증을 요구했으나, 작성자는 글만 남겨둔 채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이걸 검증하려고 시간을 많이 쓴 유저들도 있었지만, 결과는 모두 실패. ​ ‘만에 하나, 저 작성자의 말이 사실이었다면…?’ ​ 금성묵은 모종의 신체적 결함으로 스킬 등급이 크게 떨어졌고, 제 위력을 내지 못하고 있다. 그 결함은 투음절맥을 치료한 지금도 여전하다-, 라는 가설이 도출된다. ​ 나는 지체 없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 [“………여보세요?”] ​ “서혁준 선생님,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지금 좀 많이 급해서요.” ​ “흠, 무슨 일인진 모르겠지만 한 번 이야기해 보시죠.” ​ 나는 지금 내 사정을 하나부터 열까지 설명했다. 훈련 진척도가 굉장히 더디고, 경기 중에 몸속에서 느껴지는 뜨거운 기운에 식은땀이 나는 데다, 아랫도리가 죽은 듯 잠잠하다는 것까지 설명했다. ​ 물론 스킬에 대한 것은 설명할 수 없으니 제외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무언가 짚이는 것이 있는지 서혁준은 침음성을 흘렸다. ​ [“짚이는 게 있습니다만, 성묵씨의 몸은 참으로 고약한 상태로군요.”] ​ “…말해주시죠.” ​ [“성묵씨는 남성 호르몬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 “남성 호르몬, 말입니까…?” ​ 뜬금없는 의학용어의 등장에 나는 당황했다. 그래도 일단은 선생에게 아는대로 답했다. ​ “힘이랑 연관된 거 아닙니까? 스테로이드 같은 약 맞았을 때 강해지는 이유가 비정상적으로 향상된 남성 호르몬 때문이잖아요.” ​ [“예, 맞습니다. 그 남성 호르몬을 생성하는 부위가 어딘지 아십니까?] ​ “설마…?” ​ [“남성의 고환입니다. 지금 성묵 씨는 남성 호르몬이 제대로 분비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추측됩니다.”] ​ “…………!!” ​ 이게 무슨 소리야. 내가 고자다, 지금 이 말인가…? ​ 서혁준은 혼란에 빠진 내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 [“고환에서 분비되는 남성 호르몬을 신체와 연결 지어주는 맥이 있습니다. 저희 용어로는 음경양맥(陰莖兩脈)이라고 부릅니다.”] ​ “음경양맥….” ​ [“예, 지금 성묵씨는 그곳이 막힌 겁니다”] ​ 언제는 어깨의 맥도 막히더니, 이제는 거시기의 맥도 막혔다니. ​ ‘썅, 가지가지 한다 진짜.’ ​ 서혁준의 말대로라면 절맥 자체도 희귀한 질병이나, 그중에서도 극히 드문 케이스로 아랫도리의 맥까지 막히는 경우가 있다고 한다. 투음절맥도 게임 속에서 전설 취급당할 정도로 희귀했데, 그것보다 더 발병 확률이 낮다면 내가 모를 만도 하다. ​ [“아마 그 탓에 훈련 효율이 반의 반토막이 났을 겁니다. 변화구 훈련만 제대로 된 효율을 보인 것은, 손끝의 감각이 익숙해지는 건 근력의 상승과 별 관련이 없어서겠지요.”] [“경기 중에 의문스러운 감각에 식은땀이 날 정도라고 하셨죠? 아마 얼마 없는 남성 호르몬을 쥐어짜 내며 생긴 통증으로 보입니다.”] ​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 [“치료 과정 자체는 투음절맥 치료와 비슷합니다. 몸속의 기운을 강하게 부딪쳐서 음경양맥을 타동(打通)하는 과정을 거치면 되기는 합니다만….”] ​ “……?” ​ [“그 과정이 투음절맥 치료보다 곱절은 위험합니다.”] ​ “곱절이라 하면, 얼마나…?” ​ [“투음절맥 치료에 실패하면 어깨 근육이 크게 파열되는 걸로 끝나지만, 음경양맥의 타동에 실패 시 폐인이 됩니다.”] ​ “………!!” ​ [“절대로 추천해 드리지 않습니다. 한가지 다행인 것은, 절맥이 치료된 이상 3년이면 자연치유 될 겁니다. 야구를 잠시 쉬면서 조금만 기다려 보시는 것이 어떨지요.”] ​ “……….” ​ 나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답했다. ​ “선생님,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휴, 잘 생각했습니다.”] ​ “죄송하지만, 제가 시간이 너무 없네요.” ​ [“자, 잠깐 성묵 씨. 그게 무슨…!”] ​ -뚜,뚜, 뚜 ​ 서혁준 선생의 다급한 목소리를 뒤로한 채. 나는 전화를 끊고 스마트폰의 전원을 아예 꺼버렸다. ​ “이제 기댈 건 이거밖에 없다.” ​ 나는 가부좌를 틀고는 화장실 바닥에 앉았다. ​ 3년이나 느긋하게 기다릴 시간 따윈 없다. 난 지금 당장 이 경기에서 이길 힘이 필요했다. ​ ‘성공하면 대박, 실패하면 폐인인가.’ ​ 손 놓고 있으면 뒈지는 건 매한가지다. 금성묵이 봉인 당한 ‘진짜 스킬’의 성능이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그 성능이 이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정도로 대단할 것임은 가히 짐작됐다. ​ 잃어버린 스텟도 덤이다. 이후에 제대로 된 영양 섭취만 해준다면 그동안 몸에 쌓였던 훈련치가 그대로 스텟으로 변환되겠지. 서혁준이 치료할 때 몸속의 기운을 인도했던 방식은 강렬했던 만큼, 그 감각 그대로 다 기억하고 있다. 나 혼자라고 못할 건 없다. ​ “씨팔, 이젠 이판사판이다…!!” ​ 우웅--! ​ 몸속에서 떠돌던 기운이 강렬하게 응집되기 시작했다. 어디 한 번 끝까지 가보자, 빌어먹을 몸뚱이! ​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