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부 테스트 다음 날. 명신우 감독의 소집 아래 우리들은 학교로 모였다. 다만 그 목적이 야구를 하기 위함은 아니었다. ​ “시간이 촉박한 건 촉박한 거고, 이걸 그냥 넘어갈 수는 없지.” ​ 오늘 모인 목적은 다름 아닌 친목회. 이제부터 야구부라는 같은 그룹 안에 묶인 인원들이니만큼, 팀워크를 다지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나. ​ “음식은 한껏 준비해뒀으니, 마음껏 먹도록!” ​ 이 나이대의 운동부라는 존재는 음식을 흡입하는 진공청소기나 다름 없는 존재들이다. 이런 놈들이 마구 먹어대도 부족하지 않을 정도로 충분한 배달 음식들이 대기 중이었다. 결제는 당근 이사장 카드로 했다. ​ “자자, 1학년부터 자기소개랑 하고 싶은 말 해보자. 하산!” ​ “네엡!” ​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핫산. 긴장한 역력히 가득한 표정이다. ​ “안녕하세요. 파키스탄에서 온 하산 이크발입니다! 포지션은 투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짝짝- ​ 자기소개의 포문을 연 하산에게 다른 부원들이 박수를 쳤다. 도로 앉으려다 떠오른 게 있는지 손뼉을 탁 친 핫산. ​ “아, 제 이름은 핫산이 아니라 하산입니다. 하, 산! 기억해주세요. 감사합니다!” ​ 다들 핫산이라 부르는 게 신경 쓰였구나. 그래, 알겠어 핫산! ​ “자 다음은 2학년!” ​ 1학년은 숫자가 얼마 되지 않아 금방 2학년 차례로 넘어갔다. ​ “홍콩에서 온 석운강입니다. 포수를 맡고 있습니다. 이 야구부를, 여러분을 지탱하는 기둥이 되겠습니다. 아미타불.” ​ 간결하고도 울림 있는 소개에 모두가 박수를 보낸다. 팀에서 가장 유명한 선수이기도 하고, 테스트 때에도 엄청난 모습을 보여줬으니 다들 기대가 크겠지. ​ “진성고 출신, 도도진입니다. 주 포지션은 2루수입니다. 이 팀의 주장인 성묵 형의 권유로 문혁고로 전학 왔습니다.” ​ 그렇게 말하고는 잠시 말을 멈춘 도도진. 그리고는 모두에게 선언했다. ​ “주장에게 무례한 행동을 하는 사람은 제 적으로 간주하고 절대 용서하지 않습니다. 주의해주십시오.” ​ “오바하지 마, 임마.” ​ 따악! ​ “아앗….” ​ 분노의 딱콩을 얻어맞은 도도진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도로 자리에 앉았다. 도진이 이놈은 갑자기 왜 급발진이래. ​ “농구부 출신 서경수입니다! 주 포지션은 외야수입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 삐죽삐죽한 성게 머리가 돋보이는 농구부 에이스 출신, 서경수가 자기소개를 마쳤다. 그는 곧 머리를 긁적이더니 모두에게 물었다. ​ “저기, 궁금한 게 있는데….” ​ “뭔데?” ​ “혹시 야구부에 여자 매니저도 필요하지 않나요?” ​ “매니저……!” ​ 야구에 미친 모든 고교생의 심금을 울리는 단어. 여자 매니저! ​ 모두가 한 치의 의심의 여지도 없다는 듯 맹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 “여자 매니저 없는 야구부? 그건 앙꼬 없는 찐빵이지.” ​ “아! 작열하는 태양 아래 여자 매니저가 건네준 쌉싸름한 드링크의 추억이여!” ​ 어느덧 망상의 경지까지 나아간 부원들의 모습. 거기에 서경수가 기름을 콸콸 부었다. ​ “제 주변에 야구부 매니저를 하고 싶다는 여자애가 있는데, 혹시 괜찮을까요?” ​ “우오오…!” ​ 터져 나오는 열광적인 반응. 명 감독 역시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은 많으면 좋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 그런데 나뿐일까. 여기서 구린내를 맡은 사람은? ​ “어이, 경수 스탑.” ​ “예, 예…?” ​ “그 여자애 이름이 뭐지?” ​ “어….” ​ 갑자기 머뭇거리는 서경수. 내가 빤히 쳐다보자 기어코 입을 연다. ​ “진아요, 이진아….” ​ “너 걔랑 무슨 관계야?” ​ “……………….” ​ 갑자기 꿀먹은 벙어리가 된 서경수. 녀석은 곧 고개를 떨구고 이실직고했다. ​ “…사귀는 사이요.” ​ 한창 달아올라 있던 분위기가 싸늘하게 식었다. 그리고 분노에 이글거리는 몇몇 부원들. ​ “저 기만자 자식, 누구는 여자친구도 없어서 서러운데….” “신성한 야구부 안에서까지 연애 놀음을 하려고 해?” ​ 야구부의 모든 여론이 서경수의 사형을 원하고 있다. 이 분노를 잠재우기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건 하나. ​ “경수, 유 아웃!” ​ 뻐엉! ​ “끄허억!” ​ 내 친히 이 배신자를 단죄하는 것이다. 절대 부러워서 그런 게 아니다. 뒷발차기에 얻어맞은 서경수가 데구르르 땅을 굴렀다. ​ “휴~” ​ “이제야 좀 속이 편안하다.” ​ 그제야 소화제라도 먹은 마냥 진정된 부원들. 맥이 끊겼던 자기소개가 다시 시작됐다. 이제부턴 3학년이 소개할 차례. ​ “리동…, 아니 이동혁이라고 합니다. 포지션은 투수, 잘 부탁드립니다.” ​ 그 누구도 출신지를 의심하지 못할 완벽한 표준어로 소개를 마친 리동혁. 출생의 비밀은 한 꺼풀씩 차차 드러내자는 내 제안에 녀석은 수긍했다. ​ ‘밝히는 건 저 녀석이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된 뒤에도 늦지 않아.’ ​ 조금 비겁한 방법일 수 있지만, 사람은 원래 쉽게 대체가 가능한 존재에게 더욱 엄격하고 가혹하다. 반대로 이 녀석이 문혁고의 수호신으로서 군림하는 순간 출신지가 어디가 됐든 이해하고 넘어갈 수밖에 없겠지. 나는 그 점을 노렸다. ​ “저 선배 공 진짜 지리더라.” ​ “싱커 진짜 개 돌았던데.” ​ 이미 호평받고는 있지만 이거로는 모자랐다. 한 번이라도 지면 끝인 살얼음판의 순간에, 혼자만의 역량으로 팀을 구해내는 순간 진정한 의미로 대체 불가한 존재가 되는 거다. ​ ‘뭐, 그러고도 남을 놈이니까.’ ​ 뒷문은 따로 걱정도 안 한다. 나는 다음 소개를 위해 일어난 최아담 쪽에 시선을 돌렸다. ​ 그런데 여러 번 봐도 느끼는 거지만 참 작다. 타자 헬멧을 썼을 때는 몰랐는데, 앞머리를 닭벼슬처럼 세운 헤어 스타일을 하고 있다. ​ “예, 이름은 최아담. 포지션은 유격숩니다.” ​ 스윽- ​ 빗으로 앞머리를 슥 빗어 올린 녀석. 그리고는 시니컬한 표정으로 모두에게 경고한다. ​ “키 얘기는 하지 마십쇼. 큰일 날 수도 있습니다. 이상.” ​ 다시 자리에 앉는 최아담. 생각보다 까칠한 녀석인 것 같다. ​ ‘자꾸 주변에서 놀려대서 그런가?’ ​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힘들었겠다고 생각하며 다음 소개자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안녕하십니까. 박찬준이라고 합니다.” ​ 허리를 꾸벅 숙인 푸근한 인상의 박찬준. 풍성하게 자란 턱수염, 검은색 뿔테 안경, 통통한 체형에 엄청난 노안을 가진 사람이었다. ​ 여러모로 운동부 소속이라기 보다는 정육점 쪽이 어울릴 인상이랄까. ​ ‘왜 20살로 뜨는 거지?’ ​ 같은 고3이니 19살이라고 뜨는 게 정상. 사실 외모만 보면 20살이 아니라 30살이라고 해도 믿겠지만, 각설하고 머지않아 그 이유가 밝혀졌다. ​ “하하, 소문을 들으신 분도 있겠지만, 작년에 저희 집안이 갑자기 사정이 안 좋아져서 문혁고를 휴학하고 1년 정도 공사판에서 일하다 왔습니다.” ​ 고등학교를 1년 꿇었던 것. 그 안타까운 사정에 모두가 숙연해졌다. ​ “아무리 힘들어도 야구에 대한 꿈은 버릴 수가 없더라고요. 이런 기적 같은 기회 덕에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 “실력은 부족하지만, 큰형님인 만큼 다양한 분야에서 여러분의 도움이 되고 싶습니다! 제 한 몸 바쳐 열심히 하겠습니다!” ​ 자신의 포부를 밝히며 머리에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허리 숙여 인사한 박찬준. 그 순간 모두가 입을 떡 벌렸다. ​ “저, 저거….” ​ “…설마?” ​ 머리 일부분에 있어야 할 것이 없다. 나름 자라있는 앞머리 옆에 공허하게 비어있는 빈자리. ​ 그렇다. 박찬준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M자 탈모가 실시간으로 진행 중이었던 것이다. ​ “크흡…….” ​ 명신우 감독이 물기 젖은 목소리로 입을 틀어막았다. 중년으로서 절절하게 그 심정이 이해가 갔기 때문이리라. 그는 박찬준에게 다가가 따뜻한 포옹을 건넸다. ​ “찬준아, 누가 너 괴롭히면 말해라. 내가 다 죽여줄게.” ​ “예에……?” ​ 어찌저찌 따뜻한 큰 형님으로서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박찬준. 누군가는 주장인 너보다 연상인 팀원이 생기면 안 좋지 않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박찬준의 등장을 아주 긍정적으로 봤다. ​ ‘저런 완충재 역할은 얼마든 있으면 좋아.’ ​ 내가 팀원들한테 개지랄을 떨어주면 아래 학년은 석운강한테, 3학년은 박찬준한테 가서 하소연하고 풀면 되는 것이다. 좋은 경찰 / 나쁜 경찰 전략과 비슷하다. 물론 내가 압도적으로 나쁜 경찰 쪽일 테고. ​ “자, 마지막은 우리 팀 캡틴. 성묵이가 마무리하자.” ​ “옙.” ​ 슬그머니 자리에서 일어난 나. 사실 오프 더 레코드지만, 처음엔 주장을 안 하려고 했다. ​ 주장 같은 귀찮은 일은 석운강한테 떠넘기고, 난 뒤에서 필요한 것만 쏙쏙 빼먹는 어둠의 실세 역할이나 하려 했다. ​ ‘그럼 나 감독 때려치우련다.’ ​ ‘……?’ ​ 하지만 명신우 감독이 드러누운 탓에 실패. 나중에 문득 궁금해져서 다시 물었다. ​ ‘감독님, 저 주장 안 하면 진짜 때려치려 하셨어요?’ ​ ‘내가 미쳤냐? 이 꿀 자리를 왜 버려?’ ​ ‘……….’ ​ 다소 속은 느낌이 있지만, 기왕 맡게 된 주장. 일단 모자람은 없도록 최선을 다할 예정이다. ​ “문혁고 야구부 초대 주장, 금성묵입니다. 일단 제가 여러분한테 존댓말 하는 건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알아두십쇼.” ​ "……?!" 보통 저런 걸 굳이 말하나 싶었는지 놀라는 부원들. 나는 개의치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 “저 야구에 진심입니다. 그래서 여러분한테 지랄도 많이 할 겁니다. 근데 다~ 여러분 잘되라고 하는 말이다, 이겁니다. 고깝게 듣지 마시고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생각하고 새겨 들으십쇼.” ​ 이건 절대 꼰대가 아니다. 요즘 같은 개인주의 시대에 나처럼 좋은 말해 주는 사람이 또 어딨나? ​ “힘든 거 있을 때는 웬만하면 저한테 오지 마십쇼. 아마 제가 그 원인일 확률이 아주 높을 겁니다.” ​ ‘이 새끼 미쳤나…?’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는 부원들. ​ “그런데 해결이 너무 힘든 문제가 있다. 그러면 뭐가 됐든 상관없으니 저한테 오십쇼. 뭔 지랄을 해서라도 해결 해줄 테니까.” ​ “…!” ​ 그걸 다시 느낌표로 바꾸는 데는 성공한 모양. 그래, 나 같은 양아치도 같은 편이면 든든할 거라고. 자식들아. ​ “같이 전국 제패해 봅시다. 저 진심입니다. 못 하면 콱 뒈져버릴 거니까 알아서 하십쇼. 이상.” ​ “푸하핫…!” ​ 웃음보가 터지며 끝난 자기소개 시간. 마무리 멘트는 진심이었는데 다들 농담으로 들린 모양이다. ​ ‘애들아, 나 진짜로 뒤지니까 열심히 좀 하자.’ ​ 내 간절한 바람이 닿았을지는, 차차 지켜볼 일이다. ​ ​ ​ ##### ​ ​ “성묵 형, 가져왔어요!” ​ “오호, 이게 그 리포트인가.” ​ 나는 도도진이 건낸 의문의 문서를 건네받았다. 이 서류 더미의 정체는 다름 아닌, 도도연의 ‘특제 분석 레포트’다. ​ ‘이게 게임에서 그렇게 사기라며?’ ​ 상대 팀과 우리 팀의 전력을 현미경 단위로 분석하여, 어느 팀이 이길지 그 승률을 예측하는 레포트다. ​ 어떤 시간 만수르 유저가 세이브 로드 신공으로 수백번을 돌려서 실험해봤는데, 이게 신묘할 정도로 높은 정확도를 보여준다고. ​ ‘이번 청현고와의 친선전은 무조건 이겨야 해.’ ​ 빼내 오려는 선수에게 깊은 울림을 주기 위해선 우선 경기에서 이길 필요가 있다. 물론 우리는 신생 고등학교인데다, 절대적 전력은 청현고에 비해 부족하다. ​ 하지만 우리 문혁고도 만만치 않다. 그리고 공은 둥글다는 말도 있지 않은가. 내가 가려 뽑은 인재들은 장차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활약할 녀석들. 내 예측 승률은 얼추 40% 정도다. ​ “자, 어디 한 번 까볼까?” ​ 이 레포트는 듣기로 첫 장부터 그 승률을 바로 알려주고 시작한다고 한다. 나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 - 문혁고 승리확률: 1% ​ “…어, 시발?” 이러면 나가린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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