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신우가 문혁고의 감독을 맡아주기로 한 뒤, 우리는 몇 차례인가 팀을 어떻게 꾸려갈 것인가에 대해 심도 있게 논의했다. ​ “…이거 원, 석운강 정도 되는 포수를 영입했을 줄이야. 미리 말해줬으면 좋았잖아.” ​ “뭐, 깜짝 선물이라고 치시죠.” ​ “킁, 솔직히 좋긴 해. 부임 선물로 특급 FA 받은 감독들 기분이 이런 건가 싶어.” ​ 그는 일차적으로 석운강 같은 대단한 포수가 이 팀에 올 예정이란 것에 놀랐고, 그냥 꼭두각시 노릇만 시킬 줄 알았던 내가 최대한 감독 의견을 존중하겠단 의사를 표하자 꽤 정열적으로 팀의 플랜을 짜기 시작했다. ​ 이제 중요한 것은 코치 인선. 이사장한테 뜯어낸 예산이 무한정 있는 것도 아니다. 코치도 딱 필요한 파트에 1명, 무리해서 2명 정도가 한계였다. ​ 다만 명신우 감독이 타격과 수비 코칭은 본인이 할 수 있다고 하였고, 나 역시 그 부분은 애초에 맡길 예정이었다. 남는 건 자연스레 한 자리였다. ​ “역시 투수코치가 문제네요.” ​ “투수코치는 어떻게 할까. 내가 좀 아는 사람들이 있기는 한데.” ​ “흠…….” ​ 사실 머릿속에 강력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한 명 있긴 하다. 바로 낡은 피칭 센터에서 치매 노인 코스프레를 하고있는 전설의 투수, 마덕수 할배다. 안 그래도 어제 덕수 할배에게 코치 자리를 부탁드리러 찾아갔지만. ​ -당분간 닫읍니다. ​ 허름한 팻말 하나 문에 걸어두고는 사라져버렸다. 연락할 수단 하나 아는 게 없는지라, 손만 빨다가 돌아왔다. ​ 투수 코치의 역할은 상당히 중요하다. 나름대로 구력이 있는 나조차도 혼자서만 폼을 체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 ‘덕수 할배 코칭이 대단하긴 하지만, 마냥 기다릴 수도 없어.’ ​ 아쉽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 “예, 감독님 아는 분으로 데려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 “그래, 능력은 있는 친구니 괜찮을 거다.” ​ 고개를 주억이는 명 감독. 그 뒤로도 자잘한 건에 대하여 논의하는 와중에 중요한 게 떠올랐다. ​ “감독님, 벌써 내일이 개학식이라 발표 해야 하는데 준비 다 하셨어요?” ​ 개학식에 있을 야구부 창단에 관한 발표는 전적으로 명신우 감독이 맡기로 했다. 그동안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내가 했지만, 이건 어른인 그가 나서야 할 자리였다. 발표를 조지면 선수 수급에도 차질이 생길 수 있으니 걱정이 됐지만 명 감독은 태연해 보였다. ​ “성묵아, 내가 괜히 생존왕이라고 불렸겠냐.” ​ “...?” ​ “지켜봐라, 야구보다 더 잘 하는 게 입 놀리는 거니까. 흐흐.” ​ ​ ####### ​ ​ 이것저것 준비하느라 빠르게 흘러가 버린 방학이 모두 지나고 어느덧 개학 날이 다가왔다. 문혁고의 모든 학생이 대강당에 모여있다. ​ “여러분, 새로운 학기가 시작되었습니다. 새로운 도전은 언제나 우리를 성장시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실패를 통해 배우며 한 걸음씩 나아갑시다…!” ​ 개학식에서 열심히 일장 연설하는 이사장. 물론 그걸 귀담아듣는 학생은 아무도 없다. ​ “언제 끝나냐 이거?” ​ “아, 개노잼. 빡빡이 오늘도 말 많네.” ​ 한참 지나서야 겨우 끝난 이사장의 연설. 이사장은 헛기침을 몇 번 하더니 핵폭탄을 투여했다. ​ “커험, 여러분께 공지드릴 사항이 있습니다.” ​ “이번 학기부터, 문혁고에 정식 야구부가 개설될 예정입니다.” ​ ““…………………!!”” ​ 난데없는 소식에 대강당이 미친 듯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 이 세계관에서 야구부는 존재 자체만으로도 학교에 콘텐츠를 만들어 주는 존재다. ​ 무용과나 댄스부 여학생들은 팀을 꾸려 직접 치어리딩하기도 하고, 관현악부는 응원가를 연주해주기도 하며, 야구를 좋아하는 많은 학생은 전국 대회에서 자기 학교를 응원하며 청춘을 보낸다. ​ 야구부 없는 거 빼곤 다 좋다는 평가를 받던 문혁고. 학생들 입장에선 흥분하지 않을 수가 없다. ​ “그래서, 앞으로 문혁고 야구부가 가진 비전과 선수 모집에 대해서….” ​ 웅성웅성-! ​ 미친 듯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한 강당. ​ “여러분, 정숙해주시길 바랍니다...” ​ 그래도 진정되지 않고 과열된 분위기에 이사장은 더 이상 뭔가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래쪽에 있던 선생들이 조용히 하라며 제지를 해보아도 도무지 통제되지 않는 상황. ​ 이 상황을 정리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한 학생이었다. ​ 삐이이이이----!! ​ 미친듯한 마이크의 하울링 소리가 대강당에 울려 퍼졌다. ​ “꺄악……!” ​ “뭐야, 이거!” ​ 갑작스런 청각 테러에 많은 학생이 귀를 막았다. 대강당에 있는 수백명의 인원이 그 소리의 근원지에 시선을 보냈는데, ​ “아이고, 실수.” ​ ““………………….”” ​ 그곳에 서 있는 것은 비릿한 미소를 짓고 있는 금성묵이었다. 지나치게 강당이 시끄러워지자 그는 스피커에 마이크를 가져다 대 엄청난 하울링을 만든 것이었다. ​ ‘개고생해서 만든 자리인데, 시장 바닥 되는 꼬라지는 못 보지.’ ​ 과정이 어떻든 강당은 조용해졌다. 그는 이사장에게 다시 마이크를 돌려주었다. ​ “이사장님, 마저 이야기하시죠.” ​ “아아, 크흠. 고맙군.” ​ 순전히 본인을 위해서 한 행동이긴 했으나, 그 악마 같던 금성묵이 자기편을 들어주자 이사장은 묘하게 든든했다. 그는 곧 자신을 이어 발표할 인물을 불러들였다. ​ “예, 으음. 다음 순서로는 문혁고 야구부의 초대 감독을 맡아주실 명신우 감독님을 만나보겠습니다.” ​ 이사장의 소개와 함께 걸어 들어오기 시작하는 훤칠한 중년 남성. 야구를 좋아하는 학생들 위주로 수군거림이 터져 나왔다. ​ “파드리스의 바퀴벌레 명신우?” “저 사람 정치질하다가 쫓겨난 거 아니었어?” ​ “안녕하세요. 문혁고 야구부의 감독을 맡게 된 명신우입니다.” ​ 그가 허리 숙여 학생들 쪽으로 인사했다. 단발적인 박수가 있을 뿐 딱히 반기는 분위기는 아니었다. ​ “여러분의 우려는 잘 알고 있습니다. 저는 많은 야구팬이 알고 있다시피, 정치질만 특기인 적폐 코치로 낙인찍혀 세종 파드리스에서 쫓겨났습니다.” ​ “억울한 부분은 많지만, 과거에 대해 가타부타 변명하지 않겠습니다. 능력으로 보여드리겠습니다. 저를 택한 문혁고의 선택이 절대 틀리지 않았음을 입증하겠습니다.” ​ 힘 있는 목소리로 포부를 말하는 명신우. 아직도 야구팬인 학생들은 시큰둥했다. ​ “어김없이 나왔네. 야구로 보답하겠습니다~” ​ “어휴, 멀쩡한 감독 많은데 왜 하필이면….” ​ 그러나 명신우의 진가는 지금부터. 깔끔한 PPT를 준비해온 그는 특기인 화려한 언변을 뽐내기 시작했다. ​ “야구부를 만들며 고민했습니다. 타 고교보다 100년 이상 뒤쳐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대체 어떻게 하면! 타 학교를 따라잡을 수 있을까.” ​ “답은 하나였습니다. 전방위에 압도적인 투자를 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첫 번째 투자는, 바로 가능성 있는 원석! 사람에 대한 투자다.” ​ “문혁고 야구부는 결코 낮은 곳을 목표로 하지 않습니다. 이런 포부에 동감해 준 고마운 학생들을 소개합니다.” ​ “첫번째 특기생입니다. 부산 굴지의 야구 명문, 부전고 출신의 금성묵 군 나와주시죠.” ​ 터벅터벅 단상 앞으로 나오는 금성묵. ​ “최고 구속 151km, 다양한 변화구를 뿌리는 좌완 파이어 볼러입니다. 부상으로 방황하던 시기에 이사장님의 포부에 감명받고 일찍이 문혁고에 전학을 온 학생입니다.” ​ “쟤 작년 말에 왔던 걔지? 조용히 있고 싶으니까 건들지 말라고 했던...” “야구 했었다는 건 들었는데, 특기생으로 온 거였구나?” ​ ‘애들아, 그거 다 구라다….’ ​ 성묵은 그냥 어깨 부상으로 야구 때려치울 겸 이 학교에 온 것뿐이지만, 명 감독의 아갈질에 의해 야구부 창립을 위해 이사장이 일찍이 영입한 비밀병기로 둔갑당했다. ​ 여기까지는 아직 뜨뜻미지근한 학생들. 예상한 대로의 반응이었다. 하지만 다음에 소개할 학생의 차례에는 결코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 “두 번째 영입생은 고교 야구 유망주 랭킹 12위, 홍콩 국가대표 포수인 석운강 군입니다.” ​ “내가 지금 잘못 들었나…?” ​ “서, 석운강? 소림사의 그?” ​ “말도 안 돼!!” ​ 제일 큰 사이즈임에도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교복을 입고 등장한 석운강의 모습에 장내는 급격히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다. ​ 그만큼 고교 랭킹 탑티어 유망주의 영입이란 것은 꽤 무거운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 “석운강 군은 본래 소림사에서 수련을 계속하다 본국에 돌아갈 예정이었으나, 금성묵 군의 엄청난! 기량에 감명받아 생각을 바꿨다고 합니다. 남은 1년간 문혁고의 포수로서 뛸 예정입니다.” ​ 그러한 명감독의 소개에 모두의 시선이 금성묵에게 쏠렸다. 그냥 공 좀 빠른 흔한 투수인 줄 알았는데, 저 눈 높기로 유명한 석운강을 실력으로 매료시켰다니. ​ ‘대체 얼마나 잘하길래…!?’ ​ 석운강의 존재감에 힘입어 금성묵의 존재감 역시 커지는 순간이었다. 학생들의 마음속에 신생 야구부에 대한 관심이 스멀스멀 커지기 시작했다. ​ 물론 쓸데없이 주목을 받은 금성묵은 째려보는 눈빛으로 명 감독을 쳐다봤으나, 이미 입에 모터가 달린 그는 기세를 몰아 발표를 이어 나갔다. ​ “이 외에도 각 포지션에 유망한 선수들이 대거 문혁고와 뜻을 함께하겠다는 뜻을 밝혔습니다. 그 선수들의 실력은 결코 이 둘에 뒤지지 않을 것입니다!” ​ 구라였다. 저 둘 말고는 아직 아무도 영입하지 못했다. ​ “다만! 문혁고의 학생들에게도 제한 없이 공평한 기회를 줄 예정입니다. 그 누구에게도 테스트를 볼 기회를 드릴 것입니다.” ​ 이 역시 구라였다. 금성묵이 대충 스탯창 쓱 훑어보고 가망 없다 싶은 놈들은 광탈시킬 예정이었다. ​ “야구부에 합격한 학생은, 활동 기간 내내 학비의 반액이 장학금 형태로 지급될 예정입니다.” ​ 이건 진짜였다. 금성묵의 영입 대상 리스트에 형편이 어려운 학생들도 꽤 있는 터라, 이사장에게 장학금 좀 내놓으라고 거하게 삥 좀 뜯었다. 그러고도 남은 금액은 뎁스용 선수들에게 뿌릴 예정이었다. ​ “반액 장학금…!” ​ “와, 혜택 미쳤는데?” ​ 부모 등골을 쪽쪽 빨아먹는 사립고교의 학비를 야구부 합격만으로 절반을 돌려준다니. 오랜만에 집안에서 효자 노릇 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 “신생이니까 지원이 부족하다? 그런 거 없습니다. 훈련장, 영양 보충, 장비 등에서 최고의 지원을 약속합니다.” “일주일 뒤, 3시에 시립 야구장에서 공개 입부 테스트 진행 예정입니다. 많은 성원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그렇게 폭풍처럼 이어진 명신우의 발표가 끝이 났다. 짧다면 짧다고 할 수 있는 이 발표는 문혁고에 엄청난 파장을 일으켰다. ​ 우선 가장 난리가 난 쪽은 야구 동아리 쪽이었다. “야, 최아담! 테스트 볼 거지?!” ​ “우리 히트앤런에서 저기 붙을 건 너밖에 없다. 진짜로!” ​ 다른 부원들이 호들갑을 떠는 것과는 별개로, 단신의 소년은 오히려 차분했다. ​ “안 가, 새끼들아. 내가 너네 두고 어딜 가냐.” ​ 소년의 말에 당황한 듯한 동아리 부원들은 이내 환하게 웃으며 최아담의 어깨를 두들겼다. ​ “…우리 농담하는 거 아니야, 아담아.” “너 누구보다 노력했잖아. 선수도 되고 싶어 했고.” “부탁이니까 테스트 한 번만 보고 와라. 괜히 후회하지 말고.” ​ “…………….” ​ “알겠어, 한 번 보러 가면 되잖아.” ​ 툴툴대며 승낙한 소년에 동아리원들이 씩 웃음 지었다. 그리고 또 열광적인 반응을 보낸 것은 의외로 무용과 쪽의 한 소녀였다. ​ “꺄아아아아앙……!!” ​ “…타카히나 양!?” ​ “대박…!! 진짜로 대박!” ​ 분홍색의 양갈래 머리를 한 유학생 소녀가 기쁨을 주체 못하고 방방 뛰었다. 그 모습에 누군가가 의아해하자 다른 학생이 이유를 말해주었다. ​ “노아는 원래 야구 광팬이야. 집안에서 반대만 안 했으면 야구 명문교에 가서 응원단을 하고 싶었다고 그랬거든.” ​ “앗, 타카히나 양 집안이면 분명히….” ​ “…으응, 맞아.” ​ 입에 담기도 무섭다는 듯 벌벌 떠는 두 여학생. 무서운 집안을 가진 소녀가 설렘에 방방 뛰고 있는 한편. ​ “.............” ​ 강당의 제일 뒤편에서 이 상황을 지켜보는 베이지색 포니테일의 소녀 또한 있었다. 올리비아 램지는 서늘한 눈빛으로 조용히 읊조렸다. ​ “찾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