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화 마검 포르테(Forte) (20) - 꽃의 연회 참으로 음산한 날이었다. 아직 해가 질 시간이 아닌데도 구름이 짙은 하늘은 어두컴컴했고, 불어오는 바람결에는 피 냄새와 시체 냄새가 섞여 있었다. 불길하면서도 어울리기 짝이 없다고, 현자는 생각했다. 한때 어떤 왕국의 수도였고, 이제는 마왕의 거처가 된 장소까지 불과 하루거리도 되지 않는 장소가 바로 이곳이었다. 그런 곳이 밝고 활기찬 생명력에 가득 차 있다고 한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 아니겠는가. 달리 말하자면 적의 수장의 코앞까지 도달했다는 소리이기도 했지만, 현자는 차마 그 사실에 기뻐할 수 없었다. 그는 얼기설기 누더기처럼 설치된 막사 사이를 바삐 오가는 병사들의 모습을 지켜보았다. 낡고 해진 갑옷, 이가 빠지거나 부러진 검. 통일성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이 제각각인 복식에 제대로 씻지도 못해 하나같이 꾀죄죄한 몰골들. 마왕군과의 싸움에서 누구보다도 많은 활약을 보인 정예병의 모습이라기에, 그 꼬락서니는 너무나도 초라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현자는 무심코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눈앞에 있는 병사들을, 각자의 이유에 따라 마왕군과 맞서기로 한 이들을 향한 욕이 아니었다. 아군에게 괴롭고 힘든 역할은 죄다 떠넘긴 채, 뒤에서 그럴듯한 개소리를 지껄이고 있을 ‘자칭’ 동맹들을 향한 욕이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이신가요.”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현자가 시선을 돌리자, 그곳에는 성녀라 불리는 여인이 쓴웃음을 지은 채 서 있었다. “알 거 없으니 꺼져. 사기꾼 성녀 같으니.” “마음 같아선 저도 그러고 싶지만, 현자님이 그렇게 우중충한 얼굴을 하고 계시면 다른 분들이 힘들어하시니까요.” 겸손한 듯하면서도 할 말은 다 하는 그 모습에, 현자는 묘한 감개를 느꼈다. 처음 만났을 당시의 성녀는 이렇지 않았다. 가족이 저지른 죄와 그로 인한 죄책감과 강박관념에 찌들어 있었고, 자신의 정체를 알고 있는 현자의 눈치를 늘 살폈다. 하지만 지금의 성녀는 현자와 친하다곤 할 수 없을지언정 그럭저럭 대등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숲에 틀어박혀 있던 그를 억지로 끌고 나온 바보가 그 원인이라는 건 따로 말할 필요도 없었다. 현자 본인은 사실 이전의 벌벌 떠는 성녀보다 지금의 성녀가 더 낫다고 생각했지만, 그걸 태도로 드러내는 건 싫었기에 변함없이 퉁명스러운 태도로 말했다. “이건 병신 짓이야. 보급도 시원찮고, 병력도 부족해. 마왕성에 쳐들어갈 게 아니라 당장 후퇴를 해야 한다고.” “하아.” 성녀는 짧은 한숨과 함께 소리를 차단하는 얇은 구체형 결계를 만들어냈다. 이대로 현자가 떠드는 소리를 다른 이들이 듣게 했다간 별로 좋을 게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물론 현자에 대해 알 만큼 아는 아군들은 그래 봐야 별 신경도 안 쓰겠지만, 적어도 성녀 본인의 마음은 편해졌다. “후퇴하면요? 여기까지 오는데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시는 것도 아니잖아요. 동맹군들의 반발은 또 어떻고요.” “시발. 그 새끼들이 한 게 뭐가 있다고 반발은 반발이야? 뒈질라고.” “곳곳에서 마왕군 군세와 대치하며 그들이 못 움직이게 하고 있잖아요.” “그래, 마왕이 있는 쪽으로 밀고 들어갈 생각은 조금도 없이 철저하게 제자리만 지키고 있지. 근데 그게 그놈들의 전력인가?” 현자의 입에서 매서운 독설이 연이어 쏘아졌다. “그놈들이 망할 놈의 전공과 내부 정치 때문에 그나마 좀 사람 같던 지휘관들을 해임하고 웬 머저리들을 대체품으로 보내지 않았더라면, 병사 하나 안 보내는 주제에 보급 물자조차 못 주겠다고 찡찡거리지 않았더라면, 앞에 나서서 피 보기 싫다고 은근슬쩍 진공 계획을 늦추며 우리에게 부담을 떠넘기지 않았더라면!!” 말하면서도 진정되기는커녕 더욱 울화가 치민다는 듯이, 현자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그러면, 적어도 지금보다는 상황이 더 나았을 거야. 결국 이 상황을 만든 건 그놈들이라고. 그러니까 후퇴하겠다는데, 대체 뭐가 문제지?” 성녀는 대답 대신 물끄러미 현자를 바라보았다. 이미 대답을 알고 있지 않느냐는 듯한 그 시선을 받고서도, 현자는 완고하게 입을 다물었다. 결국, 성녀는 현자도 자신도, 이곳에 있는 다른 사람들도 알고 있는 사실을 재차 말로 내뱉었다. “물러나면 다음이 없잖아요.” “…….” “동맹군이 소극적인 건 사실이지만, 어쨌든 우리를 도와주고 있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이번 기회를 그냥 날려버린다면, 다음에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죠.” “…….” “이번에는 어찌어찌 마왕군 코앞까지 진격했지만, 다음에도 그럴 수 있다는 보장이 있나요? 다음에는 더 철저하고 집요하게 본진을 지키려고 할 텐데?” 성녀의 말은 정론이었다. 허나, 현자의 지성은 그 정론을 무찌를 말을 알고 있었다. “다른 놈들도 망하게 해버리면 되겠지.” “현자님.” “그냥 우리가 빠지면 돼. 그러면 마왕군은 더 기세를 올려서 주변으로 침략을 이어갈 테고, 더 많은 국가들이 이 전쟁에 휘말리겠지. 그리고 개중에는 마왕에게 맞설 저력을 갖춘 인재와 세력을 갖춘 이들도 있을 거야.” “현자님.” “내 말이 틀렸나? 애초에 왜 우리가 이걸 전부 책임져야 하는 거지? 당장 너만 해도 억울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나? 정작 너는 마왕 소환에 반대하고 그 결과 유폐까지 당했는데도, 그저 혈육이라는 이유만으로 정체까지 숨겨가며 싸워야 하는 게? 이걸 해결할 능력도, 세력도 갖춘 놈들이 죄다 딴청을 피우고 있는데 대체 왜 우리가 독박을 써야 하냐고.” 성녀는 차분히, 흥분한 현자를 달래는 것처럼 그를 향해 말했다. “─아시잖아요. 현자님의 방법대로 한다면,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많은 사람들이 죽을 거라는 걸.” 현자의 말대로 전쟁을 키운다면. 더는 누구도 방관자로 있을 수 없도록 전화를 크게 만든다면, 그때는 각국의 위정자들도 진심을 다해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수를 쓸 것이다. 개중에는 마왕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초월자 또한 포함되어 있을 테고, 현자와 다른 일행들이 이렇게 필사적으로 노력할 필요도 없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 대신 사람들이 죽을 것이다. 위정자들이 전쟁을 결의할 때까지. 그 결의가 실제로 힘으로 변할 때까지. 나라를 움직일 힘도, 자격도 없는 평범한 사람들이 끝도 없이 죽어 나갈 것이다. “여기서, 우리가 마왕을 쓰러트려야 해요.” 그걸 막기 위해서 용사는 검을 들었고, 성녀도, 다른 사람들도 그 의지에 호응했다. 그리고 그건 현자 본인도 마찬가지였기에, 현자는 욕지거리를 내뱉으면서도 다 때려치우고 도망가겠다고 외칠 수 없었다. “뭐야? 왜 그리 얼굴이 우중충해?” 그때, 성녀가 만들어둔 방음 결계 안쪽으로 웬 청년 한 명이 불쑥 머리를 들이밀었다. 새까만 머리카락 곳곳에 파란 물이 들어 있는 독특한 외형의 청년은, 묘하게 짓궂은 얼굴로 두 명을 바라보더니 이내 툭 하고 내뱉었다. “아, 혹시 사랑싸움인가?” “뒤지고 싶나?” “아닙니다.” 벌레 씹은 얼굴과 사무적인 무표정. 어느 쪽이든 썩 유쾌한 기색은 없는 강렬한 거부 반응을 드러내는 두 명의 모습에, 용사 페르난도 발레스티아가 껄껄대며 웃었다. 그 모습이 무척이나 얄미워, 현자는 부루퉁하게 쏘아붙였다. “용사야, 넌 당장 내일 뒈질지도 모르는 이 개판 같은 상황에 웃음이 나오느냐?” “내일 뒈질지도 모른다면 오히려 더 웃어야 하는 거 아닌가? 우중충한 얼굴로 죽으면 서글프잖아.” “시발 그걸 말이라고 해?” “부디 우아하고 고풍스러운 말투를 사용해 주시지요, 현자님. 그래야 자라나는 어린이들의 꿈과 희망을 지켜낼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요즘 우리 이야기가 돌아다니는 게 딱 그런 느낌이던데? ‘현자님. 부디 힘을 빌려주십시오. 마왕에게 고통받는 이들을 돕기 위해서 당신의 지혜가 필요합니다.’ ‘허어, 그대의 뜻이 참으로 고결하구려! 용사여. 그대의 여정에 함께하지요.’라고.” 현자는 잠시 제 귀가 오류를 일으킨 건 아닌가 싶은 표정으로 눈을 몇 차례 껌뻑인 후, 이내 되물었다. “그건 또 무슨 개소리야?” “했던 말 반복하고 있는 거 알아?” “그러니까 그게 무슨 개소리냐고!” “뭐긴 뭐야. 다른 곳에서는 우리의 첫 만남이 저런 식으로 알려져 있다는 거지.” “내용이고 말투고 뭐 일치하는 게 없잖나! 네놈이 언제 그렇게 날 초대했다고!!” “나도 솔직히 좀 웃기긴 한데, 뭐 어쩌겠어. 전쟁터에 있기 바쁜 우리가 일일이 돌아다니면서 사실 저렇게 안 멋졌다고 정정할 수도 없는 일이고.” 용사의 말은 매우 논리적이었고, 그렇기에 현자의 속을 뒤집어지게 했다. 아무리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지만, 그들은 패배한 적도 없건만 저 끔찍한 왜곡은 대체 뭐란 말인가. “저는 어땠나요?” “음, 성녀님은 대체로 실물이랑 비슷한 느낌이었습니다. 다른 건 둘째 치고 일단 말투가 원형을 유지하고 있더군요. 불필요한 정보는 안 흘러 나간 것 같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성녀는 본인의 캐릭터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보다도, 본인의 과거가 드러나지 않았다는 사실에 더 안심한 듯한 반응을 보였다. 물론 현자에게는 그 또한 매우 아니꼬운 일이었다. “말도 안 돼. 이딴 바보 멍청이가 그런 신화 속 영웅처럼 묘사되고 있다니. 이 무슨 끔찍한 재앙이란 말인가.” “거참 너무하네. 나도 하려고만 하면 저 정도는 할 수 있거든?” “차라리 개가 하늘을 난다고 지껄이지 그래.” “호오? 한번 증명해 볼까? 내가 할 수 있는지 없는지?” 용사는 씨익 웃은 뒤, 이내 막사 한구석에 있는 높은 구릉 위에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주목!!” 우렁찬 호령에, 각종 준비나 휴식으로 바삐 움직이던 병사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자신을 향한 수많은 눈빛들을 확인한 뒤, 용사는 말했다. “우리들은 승리할 거다.” 그리고 이어 말하기를. “음, 아, 이게 아니지. 앞에 건 취소하고. 어흠, ─여러분 우리들은 승리할 겁니다!” “……?” 병사들의 머릿속을 전부 물음표로 뒤덮는다는 위업을 이뤄낸 용사는, 계속해서 어울리지 않는 말투로 대사를 속행했다. “마왕은 저의 검 앞에 쓰러질 것이고, 우리들은 고향을 되찾을 것이며, 이곳에 있는 모두가 영웅으로서 대접받을 겁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먼 훗날 자라난 아이에게 이 여정을 동화처럼 들려줄 수 있을 테고, 아직 짝을 찾지 못한 분들은 연인 후보에게 제시할 떳떳한 경력을 얻게 되겠지요. 아, 취직도 잘될 겁니다! 무려 마왕 토벌 경험자인데 설마 백수로 굶어 죽기야 하겠습니까!” 말투는 여전히 그럭저럭 고풍스러운 형식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 외에는 이거고 저거고 죄다 엉망진창인 용사의 모습을 보며 현자가 평가했다. “저 병신 같은 놈.” “음.” 그 말을 옆에서 들은 성녀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는 평생 죄책감과 의무감에 쫓겨 살았을 자신을 구해준 용사를 경애하고, 은밀히 연모하기도 했지만, 그것과 이건 별개였다. 그 뒤에도 장수가 어쩌니 운수대통이 어쩌니 온갖 잡소리를 떠들며 사람들의 황당함을 수집하던 용사는, 본인도 이건 좀 아니다 싶었는지 껄껄 웃어젖혔다. “음, 어울리지 않는 짓은 하는 게 아니군! 부족한 언변으로나마 결전 이전에 그럴듯한 이야기를 떠들어 볼까 했는데, 잘 못하겠다! 대신, 내 특기 사항으로 너희들의 눈을 즐겁게 하는 정도는 가능하지! 잘 봐라!” 스릉. 무척이나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검을 뽑아 든 용사는, 이내 그것을 부드럽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검이란 살육을 위한 도구이며, 실제로 용사는 본인의 검으로 수많은 적들을 매장해 왔다. 허나 지금 용사의 모습은 너무나도 천진난만하여, 그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이 무거운 철 덩어리가 아닌, 마치 가벼운 나뭇가지처럼 느껴지게 했다. 나뭇가지의 끝에 짙푸른 색의 꽃봉오리가 피어나고, 꽃봉오리가 만개하며 꽃잎이 흩날렸다. 용사가 발을 내디디면 꽃잎은 앞으로 날아갔고, 용사가 손목을 휘저으면 꽃잎은 소용돌이를 일으켰다. 아름다운 꽃보라는 용사의 곁에 머무는 데 그치지 않고, 막사 전체를 휘감으며 병사들의 머리 위로 떨어져 내렸다. 최후의 결전을 앞두고 내심 긴장하고 있던 병사들은, 초목 하나 없는 황야 속에 피어난 꽃잎을 반가워하며 그를 향해 손을 내뻗거나, 아예 손바닥에 올려놓고서 그 감촉과 향기를 즐겼다. “허.” 현자는 그 모습을 보며 어처구니없음을 느꼈다. 그는 용사의 꽃보라가 강대한 악마들을 처참하게 갈아버리는 광경을 몇 번이나 목격한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 용사와 함께하는 이들은, 그 어떤 부상도 고통도 호소하지 않은 채, 마치 정말로 꽃놀이라도 하듯이 이 상황을 즐기고 있었다. 5위계의 오러는 그저 물질화된 마력일 뿐이다. 허나, 6위계의 오러는 개인의 심상을 품는다. 용사가 동료들을 상처 입히고자 하지 않기에, 그가 바라는 것이 수많은 이들의 웃음이기에, 오러로 만들어진 꽃잎들은 마치 진짜 꽃잎 같은 감촉과 향기를 품은 채 동료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현자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두컴컴하고 음침하다고 여겼던 풍경을, 푸른 꽃잎이 가득 메우는 풍경은 놀랍도록 아름다웠다. 피 냄새와 시체 냄새로 가득하던 공기가, 향긋한 꽃향기로 뒤바뀌는 감촉은 전율마저 들게 했다. 흩날리는 꽃잎 사이에서 껄껄 웃고 떠드는 동료들의 모습은, 이루 말하기 어려운 빛처럼 여겨졌다. 지금 이 몸을 통해서 느끼는 오감은 무엇하나 진짜에 비해 뒤처지는 게 없을 텐데도, ‘직접’ 이를 느끼고 싶다고 생각할 만큼.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대면서도, 현자가 그들의 곁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