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마검 포르테(Forte) (15) - 낙차 영웅의 일대기에는 그 영웅을 대표하는 상징적인 무언가가 있는 법이다. 절대로 부러지지 않는 무훼의 명검. 사용자를 보호하는 마법의 반지. 물을 치유의 약으로 바꾸는 특별한 축복. 성인 남성 수십 명을 완력으로 압도하는 강대한 체질 등. 같은 맥락에서, 용사 페르난도 발레스티아를 상징하는 것은 다름 아닌 기술이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처럼 피어오르는 특수한 오러로 적을 격멸하는, 용사의 절기(絶技). 지금보다 더욱 어리고 세상 물정을 몰랐던 시절. 피나는 용사의 ‘꽃보라’를 무척이나 좋아했다. 수천수만의 꽃잎을 아름답게 흩날리며 사람들을 돕는 용사의 이야기는, 소녀의 동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했으니까. 언젠가 자기도 저렇게 되겠다며 가슴을 펴고 웃는 소녀의 모습을, 가문의 어른들은 기특하다는 듯이 귀여워했다. 하지만, 늘 그렇듯이 세상이란 그리 낭만적이지만은 못한 법이다. 피나가 아무리 열심히 검을 휘두르고 노력을 반복해도, 그녀는 전설에 나오는 것 같은 꽃보라를 피워낼 수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신의 능력이 부족해서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더욱 열심히 단련을 거듭했다. 놀고 싶은 것을 참았고, 쉬고 싶은 것을 참았고, 먹고 싶은 것도 꾸미고 싶은 것도 다 참았다. 그렇게 해서 남들보다 빠르게 실력을 쌓았다. 그리고 그 노력은, 어느 날 그녀의 아버지가 건넨 한마디로 인해 끝나버렸다. -딸아. 꽃보라라는 기술은 그저 허상에 지나지 않는단다. 그러니 그걸 구현할 수 없다고 초조해하진 말렴. 만약 피나의 가족들이 ‘제 삶을 축내든 말든 자발적으로 노력하고 있으니 좋은 일’이라고 여길 수 있는 이들이었다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허나 그녀의 가족들은 제대로 된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그들은 피나에게 진실을 알려주었다. 발레스티아 가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비전 검술 중, ‘전설 속의 꽃보라’의 원본이라 여겨지는 기술이 없는 건 아니다. 허나 그 기술은 마력 낭비가 지나치게 심한 주제에 위력은 형편없는 수준이라, 실전성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용사의 기술 중에는 그보다도 훨씬 실전적이면서 훌륭한 것이 많고, 세간에 널리 알려진 꽃보라는 그저 음유시인의 과장과 왜곡 탓에 생겨난 환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 아빠의 설명을, 피나는 멍하니 듣고만 있었다. 혹여 딸이 지나치게 충격을 받진 않았을까 염려하는 아빠의 눈빛을 보고, 어린 소녀는 그럴 리가 없다며 부정하거나 떼를 쓰는 일을 멈추었다. 피나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고, 그 뒤에도 평범한 일상을 이어 나갔다. 그렇다. 그것은 말 그대로 ‘평범한’ 일상이었다. 피나는 더 이상 아득바득 전설을 재현하기 위해 노력하지 않았다. 전처럼 손바닥의 가죽이 벗겨지도록 검을 붙잡지 않았고, 잠을 줄여가며 시간을 아끼지도 않았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 혀를 차지 않을 정도로만 노력하고, 지켜보는 눈이 없으면 게으름을 피우고, 고결한 헌신 대신 부담되지 않을 정도만의 선의를 품었다. 꽃보라는 허상이었다. 그녀가 용사의 상징이라 여겼던 기술은 사람들의 상상력과 입담 속에서 만들어진 가짜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다른 용사의 전설이라고 해서 다르리란 보장이 있을까. 절망이니 배신감이니 거창하게 떠들만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저 세상 물정 모르던 아이가 현실을 알고, 조금 성숙해졌을 뿐. 그랬을 텐데. 《꽃보라? 호오. 좋은 기술이로군. 멋진 심상이야.》 어느 날 피나와 호흡을 맞추던 마검은, 그런 말을 내뱉었다. 피나는 그런가요, 하고 애매한 웃음으로 그 칭찬을 받아넘겼다. 그녀는 포르테에게 꽃보라에 얽힌 과거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다. 애초에 이 기술이 포르테에게 알려진 것도 그냥 함께 합을 맞추는 과정에서 이런 기술도 있다고 알려졌을 뿐, 피나는 거기에 어떤 첨언도 덧붙이지 않았으니까. 헌데 그 웃음이, 포르테에게는 불신으로 받아들여진 모양이었다.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로군.》 “아, 아뇨. 그럴 리가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로군.》 “믿는다니까요.”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로군.》 “…….” 마검은 집요했다. 특히 피나의 지적으로 ‘후후, 힘이 필요한가?’ 같은 말투를 쓰지 못하게 된 뒤에는 더욱 그런 면이 있었다. 고로, 피나 역시 아주 살짝 그의 말을 반박했다. “그, 그게 말이죠. 일단 오러라는 건 마력 소모가 어마어마하게 크잖아요? 몸에서 떨어지거나, 그 형태가 복잡하면 더욱 그렇고요.” 오러. 검사들은 흔히 검강이라 부르는 그것은, 알기 쉽게 말해 ‘마력을 물질화하는 경지’다. 마력으로 몸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마력으로 검을 강화하는 것을 넘어, 오로지 마력 그 자체만으로 물질적인 힘을 발휘하는 힘. 그리고 이렇게 물질화된 마력에는, 출력의 한계라는 것이 없다. 신체 강화가 신체 그 자체의 한계에 귀속되고, 검기가 검의 한계에 귀속되는 것에 반해, 그 자체가 힘의 덩어리인 오러는 마력을 불어넣으면 넣을수록, 압축하면 할수록 그 성능이 끝도 없이 올라간다. 5위계가 되어 오러를 휘두르는 검사가, 오러에 도달하지 못한 검사들의 검이며 갑옷 따위를 쉽게 잘라버리는 것 역시 이러한 이유였다. 따라서 오러를 습득한 검사는, 이론적으로는 무기도 갑옷도 들고 다닐 필요가 없다. 마력을 검의 형상으로 만들어 휘두르면 그것이 절세의 명검이요, 몸 주변에 옷처럼 입으면 그것이 지고의 갑옷일 테니까. 하지만 현실에서는 오러를 다루는 검사라도 항상 명검을 찾고 좋은 갑옷 따위를 입고 다닌다. 그리고 오러를 발현할 때도 아예 허공에다가 새로 검을 만드는 게 아니라, 그냥 기존의 검 위에다가 덧씌우듯이, 혹은 검기와 오러를 뒤섞어서 사용한다. 왜냐하면 그편이 효율이 좋으니까. “손에 들고 휘두를 수 있는 검을 만들어내는 것만으로도, 어지간한 기사는 그대로 마력 고갈 상태에 빠진다고 들었어요. 하물며 그걸 무수한 꽃잎으로 만들어서 전장을 휩쓰는 건 불가능하고, 만약 선조님에게 그게 가능할 정도의 마력이 있었다고 해도 같은 마력으로 다른 기술을 쓰는 게 훨씬 효율적이겠죠.” 일찍이 피나 자신을 설득했던 어른들의 말. 그 말에 따라, 피나는 포르테에게 설명했다. 고로 꽃보라는 가짜이거나, 과장이거나, 아니면 선택받은 자만이 쓸 수 있는 낭비에 지나지 않는다고. 이에 포르테가 대답했다. 《그렇다면 보여주지. 용사의 전설이 허상인지 아닌지, 직접 체험하게 해주마.》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지금 이 순간. 피나는 눈앞에서 펼쳐진 광경에 무심코 넋을 잃었다. 꽃잎이 흩날렸다. 꽃잎이 흩날렸다. 그녀의 머리카락 색 같은 꽃잎이 흩날렸다. 그렇게 흩날린 꽃잎이 벽이나 바닥에 접촉할 때마다, 그 주변 일대가 통째로 베여나갔다. 그 아름다우면서도 치명적인 광경에 위협을 느꼈는지, 악마의 그림자가 꽃잎과 닿지 않으려는 듯 그 형태를 일그러트렸다. 그리고 그를 예측하기라도 한 듯, 피나의 손에 쥔 마검에게서 의지가 전해져 왔다. 마검이 인도하는 경로에 따라, 피나는 몸을 움직였다. 발끝을 옮기고, 허리를 펼치고, 어깨를 비틀고, 팔을 휘둘러, 손목으로 자아낸다. 그 사소한 풍랑 하나하나에 검은 오러가 흔들렸다. 작은 산들바람에 꽃잎이 흩날리듯이, 오러의 꽃보라가 새로운 궤도를 그리며 도망치는 그림자에게로 날아들었다. ──────! ! ! ! 꽃잎 한 장에 닿을 때마다, 그림자가 소리 없는 절규를 내질렀다. 그림자는 어떻게든 꽃잎의 궤도를 간파해 회피하려 했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꽃잎은 더욱 요란하게 흩날리며 방안을 가득 메웠다. 이 대륙에 살고 있는 인간 대다수를 발밑에 깔아두고 농락할 수 있을 만큼 강대한 악마가,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압도당하고 있었다. 《계약자여. 네가 말한 대로 오러란 연비가 좋지 않은 기술이다. 흩날리는 꽃잎의 오러라니, ‘기술’로서 이를 구현하고자 한다면 틀림없이 낭비와 비효율로 가득한 무언가가 탄생하겠지.》 《하지만 세상에는 비효율적이기에 되려 효율을 압도하는 것이 존재한다. 사람의 마음이 바로 그러하지.》 《7위계란 세상을 자신의 의지로 덮어쓰는 초월의 경지다. 그리고 6위계란, 그 초월에 오르기까지 자신의 심상을 더듬더듬 세상에 표현하는 과정이고.》 《‘꽃보라’는 필시 너의 선조가 마음에 품은, 그의 의지이자 삶이었을 것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그저 효율만을 추구한다면, 그 기술의 본의에는 닿을 수 없을 터.》 《물론 이는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 이건 제대로 된 심상이라기보다는, 그저 용사가 검술에 남긴 그의 의지를 껍데기 삼아 흉내 내는 것에 가깝지. 아마 원본은 좀 더 심오했을 거다.》 《허나, 흉내일 뿐이라도 멋진 광경 아닌가.》 피나는 무심코 수긍했다. 반복해서 새겨넣은 기술에 따라 움직이는 신체와 별개로, 그녀의 마음은 지금이 전투 도중이라는 걸 잊을 만큼 깊은 감동으로 떨리고 있었다. ‘…정말로, 되는 거였구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피나 본인이 스스로 펼쳐낸 광경이다. 의심할 여지 따위는 더는 없을 텐데, 피나는 지금 이 상황에 현실감이 없었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포르테와 만난 이후로 줄곧 그러했다. 자신의 몸 속에 흐르는 피를 이용하기 위해 악마들이 음모를 꾸민다는 것도, 포르테처럼 강력한 마검이 자신에게 힘을 보태준다는 것도, 하나같이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기에 줄곧 장난스럽게, 익살스럽게, 그리 진지하지 않은 태도로 상황에 몸을 맡겼다. 본래라면 당연히 의문으로 여겨야 했을 포르테의 정체에 대해서도 딱히 물어보지 않았고, 그의 목표에 대해서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게 편하고 쉬운 길이었으니까. 꿈을 포기한 뒤로 자신은 계속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아니, 이제는. 스르르르륵. 계속해서 이어지는 피나의 상념을 끊어내듯이, 검은 꽃보라가 그 자취를 감추었다. 남겨진 것은 수천수만의 군세가 검을 들고 내려친 것처럼, 빼곡한 검상으로 가득한 방과 유일하게 흠집 하나 나지 않은 현자의 석상. 남겨지지 못한 것은 한때 ‘섀도르’라 불렸던 악마. 그 강대함과 능력에 비하면, 어처구니없을 만큼 허무한 최후였다. 물론 그 대가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으음.” 피나의 몸이 비틀거렸다. 아무리 포르테의 조력이 있었다고 해도, 결국 꽃보라를 펼쳐낸 주체는 피나 자신. 100층에 올라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만전이었던 몸은 기진맥진했고, 마력 역시 아슬아슬한 수준까지 고갈되어 있었다. 도주와 은신에 능한 섀도르에게 만에 하나의 기회조차 주지 않기 위해, 철저하게 그를 몰아붙이고 마무리를 지어버린 후유증이었다. 이대로라면 다시 1층까지 내려가는 일도 고되겠지만, 그 또한 대책은 충분했다. 이럴 때 쓰려고 악마 디바나를 퇴치하는 대신 계약으로 묶어서 협력자로 삼은 거니까. “마, 마검님. 팔다리가 덜덜 떨리는데, 조금은 쉬어도 괜찮겠죠?” 《그래. 카일런과 디바나는 아래층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 큰소리로 부르면 찾아올 거다. 휴대 식량을 먹고 어느 정도 기력을 되찾은 다음 내려가면 되겠지.》 “봉인은 어떻게 할까요?” 《나중에 풀긴 풀어야겠지. 교수진에게 정식으로 맡기든, 파괴하든, 악마들이 알지 못하는 새로운 장소에 봉인하든 해야 할 테니.》 늘 그렇듯, 포르테는 피나의 질문에 척척 대답을 돌려주었다. 그 안심감에 왠지 모를 푸근함과 온기를 느끼면서 피나는 생각했다. ‘그동안 내가 너무 무관심하고 불성실했던 것 같아.’ 조금 더 포르테에 대해서 알아보자. 그리고 포르테가 시키는대로 무조건 끌려갈 게 아니라, 주도적으로 나서서 합을 맞춰보자. 힘들지도 모르지만, 해야 할 일이 많겠지만, 그 역시 즐거울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피나가 포르테에게 감사의 말을 건네려 한 그 순간. 【위대한 업적을 확인했습니다.】 【악마 ‘디바나’의 굴종을 확인했습니다.】 【악마 ‘섀도르’의 토벌을 확인했습니다.】 그 소리를 멍하니 듣고 있던 피나는, 순간 무언가를 깨닫고 오한을 느꼈다. 왜. 어째서. 시스템이 악마들의 존재를 알고 있지? 본체를 드러낸 섀도르야 그렇다쳐도, 디바나는 한 번도 현실에서 몸을 구현한 적이 없는데? 【‘피나 발레스티아’가 은닉 퀘스트를 통과했음을 확인.】 【‘피나 발레스티아’를 정식으로 ‘차기 용사’로 인정합니다.】 【용사 후보생에게 정식 퀘스트, ‘용사의 길. 첫 번째’를 부여합니다.】 【퀘스트: 용사의 길. 첫 번째】 【클리어 조건: ‘임시 저장소’의 토벌 작업을 50% 이상 완수】【현재 진행도: 0%】 【제한 시간: 무제한】 【보상: 다음 퀘스트 개방】 【특이 사항 1: 학원 곳곳에는 진정한 용사를 위해 준비된 임시 저장소가 활동 중입니다. 그들을 토벌하고 그들이 축적한 ‘자원’을 회수하십시오.】 【특이 사항 2: 원활한 자원 회수를 위해 퀘스트가 종료될 때까지 임시 저장소들은 전원 수면 상태에 돌입합니다.】 【특이 사항 3: 안심하시길 바랍니다. 용사시여. 우리들의 모험은 이번에야말로 성공할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