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화 하인 세드릭(Cedric) (4) - 이 하인은 참 잘합니다 아이제른 제국 금운궁. 황태자가 열심히 서류 작업에 몰두하는 사이, 세드릭의 그림자를 통해 그의 행동을 지켜보던 루시드라는 떨떠름한 얼굴로 황태자에게 물었다. “…그, 이번 컨셉은 하인 맞지?” 황태자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대답했다. “그렇네. 기왕이면 더욱 세분화해서 집사, 주방장처럼 뚜렷한 개성이 있는 편이 더 취향이긴 하네만, 고용 측에서 어떤 일을 맡길지 알 수 없었던 만큼 꽤 광범위한 컨셉을 잡았으니까.” “아무튼 남 밑에서 일하는 건 똑같잖아. 근데, 저걸로 되는 거야?” 아무리 봐도 하인이 아니라 하인의 탈을 쓴 다른 무언가 같은데. 차마 내뱉지 못한 그녀의 뒷말을 아는지 모르는지, 황태자가 태연히 대답했다. “말했잖는가. 금운궁의 하인들은 할 말 다 하고 산다고.” “아니, 내가 여태까지 본 느낌으론 저 정도로 맛이 간 건 한 명도 없었던 것 같은데.” 황태자는 흠, 하고 잠시 생각한 후 말했다. “뭐 내 이미지가 적잖이 섞여 들어 간 만큼 원본과 ‘다소’ 차이가 있을 수는 있겠군.” 이 인간의 머릿속에 있는 하인이란 대체 어떤 존재지. 혹시 고용주를 엿 먹이는 걸 지상과제로 삼고 있나? 본인도 고용하는 측이면서? 루시드라는 어이없음을 느끼면서도 다시 그림자를 통한 관측에 몰두했다. 아무튼 어디 가서 보기 힘들 구경거리이긴 했으니까. *** “음, 만족스러운 계약이로군요. 앞으로도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가씨!” “그래….” 방안의 분위기는 참으로 미묘했다. 세드릭은 얼굴 가득 환한 미소를 짓고 있었으나, 그에 반해 클라우디아는 온몸에서 진이 빠지기라도 한 듯이 소파에 축 늘어져 있었으니까. 그녀는 내심 이를 갈았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일을 거슬러 올라가자면, 본래 집사장인 베스티앙이 담당하는 하인들의 근로 계약을 이번에는 클라우디아가 직접 해보겠다며 나선 게 그 원흉이었다. 클라우디아가 평생 고용 협상 따윈 해본 적도 없다는 걸 아는 집사장은 기겁하며 그녀를 말렸지만, 한 번 고집을 피우기 시작한 클라우디아의 막무가내는 도저히 막아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물론 클라우디아는 클라우디아 나름대로 계획이 있긴 했다. 세드릭이 빈번히 ‘그건 계약에 없어서 안 된다’라든가 ‘계약상 이렇게 해도 문제 없다’ 같은 이야기를 해댔던 것에 원한을 품은 만큼, 그녀가 원하는 계약 내용을 마구 집어넣은 뒤에 그를 뜻대로 좌지우지하려고 한 것이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참으로 부질없는 꿈이었다. 「여기 이 ‘고용주가 요청한 잡무를 수행할 의무를 지닌다’라는 항목 말입니다만, 지나치게 범위가 애매한 느낌입니다. 잡무의 내용을 명확히 지정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그게 어렵다면 적어도 거부권이 필요합니다.」 「근로 시간 24시간? 이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아가씨. 적절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 근로자는 정신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피폐해지며, 이는 근로자 개인에게도 직장에 있어서도 불행한 일이니까요.」 「아가씨가 누구인지 아냐고요? 레드벨 가문의 클라우디아 아가씨 아니십니까. 후환이 두렵지 않냐니, 제가 죄를 지은 게 없는데 어찌 두려울 일이 있겠습니까!」 「뺨 좀 때리게 해달라니, 아가씨의 성적 취향은 존중하겠습니다만 신성한 일터에서 그런 사욕을 드러내시는 건 그리 좋지 않은 행동입니다. 은화 15개를 금화 15개로 바꾸시겠다고요? 하하, 그래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 *근로 계약서* -근로자는 고용주에게 성실히 봉사하며, 가문 내 집안일과 고용주가 요청한 잡무 등을 수행할 의무를 지닌다. -근로자는 고용주가 별도 요청한 잡무에 대해서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다. 단, 한 번 승낙한 내용에 대해서는 반드시 해내야 한다. -근로자가 본인의 업무를 제대로 해내지 못할 경우, 고용자는 근로자에게 적합한 처벌을 내릴 수 있다. -근로 시간은 하루 16시간으로 하며, 정해진 휴식 시간은 제외된다. -고용주는 근로자에게 음식, 숙소, 의복을 제공하고, 보수는 월 비르카 은화 15개로 지급한다. -계약 기간은 3개월로 하며, 고용주는 계약 기간 내에 임의로 근로자를 해고할 수 없다. -근로자는 고용주의 비밀을 은닉할 의무를 지니며…(후략) …………… ……… … 서명: 고용주: [클라우디아 레드벨] 근로자: [세드릭] =================================================================================================== 테이블 위에 놓인 계약서를 바라보며, 클라우디아는 치를 떨었다. 말을 교묘하게 꼬아서 독소 조항을 삽입하려 해도, 레드벨의 이름을 이용해 압박을 가하려 해도, 막대한 보수를 통해 유혹을 해보아도 세드릭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오히려 클라우디아는 생각도 하지 않았던 부분까지 하나하나 계약서에 적어넣는데, 그 분량이 무려 다섯 장 분량에 이르렀다. 진짜 하인 하나 붙잡겠다고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싶어 몇 번이고 상을 뒤엎고 싶었던 클라우디아였지만, 어쨌든 이걸로 계약은 완료. ‘어쨌든, 이제 이 녀석은 내 하인이야. 철저하게 괴롭혀 주겠어…!!’ 그녀는 눈을 부릅뜨며 세드릭을 노려보았다. “야.” “네, 아가씨.” “길게 말해서 목이 아프니까, 홍차 좀 타와.”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기운차게 인사를 건넨 뒤 그대로 슝 하고 방에서 떠나는 세드릭. 홀로 남겨진 클라우디아는 그 뒷모습을 못마땅한 듯이 바라봤지만, 이내 그 입가에 사악한 미소가 맺혔다. 사실 그녀는 차를 그리 좋아하는 편이 아니었다. 사교회 같은 곳에서는 일종의 허세용으로 입에 대기는 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이걸 대체 무슨 맛으로 먹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맛은 쓰고, 향은 미묘하고, 여하튼 맛대가리라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그게 더 좋았다. 세드릭이 얼마나 완벽한 차를 타오건 간에 단번에 내쳐버릴 수 있을 테니까. 이딴 구정물을 어떻게 마시냐며 찻잔의 내용물을 세드릭의 손에 부어버릴까? 만족스러운 결과물이 나올 때까지 다시 타오라며 몇 번이고 같은 일을 반복시키는 것도 유쾌하겠지. “후, 후후, 후후후후. 흡.” 홀로 즐거운 망상에 빠져 실실 웃음을 흘리던 클라우디아는 문에서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재빨리 자세를 정돈했다. -아가씨, 들어가도 괜찮겠습니까? “그래, 들어와.” 언제 웃고 있었냐는 듯 차가운 얼굴로 돌아온 클라우디아. 카트를 밀고 들어와 차를 우려내는 세드릭의 일거수일투족을,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꿰뚫어 보듯이 응시했다. 이러고 있으면 하인들이 잔뜩 긴장하며 곧잘 실수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경험으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그녀는 내심으로 혀를 차야 했다. 클라우디아가 아무리 매서운 눈으로 바라보아도, 세드릭은 조금도 동요하는 일 없이 담담하게 차를 준비하기 시작했으니까. ‘하여간 마음에 안….’ 속으로 이어지던 클라우디아의 불평이 멈추었다. 차를 우려내는 세드릭의 동작에 무심코 눈을 빼앗긴 탓이었다. 본디 전문가의 동작이란 어느 경지 이상에 오르면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힘이 있다. 세드릭의 기술적 모티브는 다름 아닌 금운궁의 하인들이며, 그 실력과 숙련도는 명실상부 업계 최고를 자부할 만한 정도. 화려함과 절제. 서로 모순되는 개념을 동시에 품은 세드릭의 동작은,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예술품인 것처럼 클라우디아의 시선을 붙잡은 채 도통 놓아주지를 않았다. 홍차가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주전자 속에서 깊어져 가자, 세드릭은 그 내용물을 조심스레 찻잔에 담은 뒤 클라우디아의 앞에 내놓았다. 너무나도 매혹적인 붉은빛의 액체가, 흰색 찻잔 안에서 영롱하게 흔들렸다.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향과 색에 홀린 듯이, 클라우디아는 찻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과하게 뜨겁지도, 미지근하지도 않은 온도. 일반적인 홍차보다는 조금 더 새콤함과 달콤함이 강한, 그렇기에 클라우디아의 입맛에 꼭 들어맞는 풍미. 향기는 쾌감이 되어 머리를 뒤흔들고, 목구멍을 통해 흘러 들어간 열기는 잔뜩 곤두세워져 있던 신경을 다독이듯이 전신으로 퍼져간다. “후우.” 클라우디아의 입에서 나지막한 한숨이 새어 나왔다. 반쯤 잠에 취한 듯이 그 여운을 즐기던 클라우디아는, 그제야 “핫!”하고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목각 인형이라도 된 것처럼 삐걱거리는 동작으로 고개를 돌렸다. 싱글벙글. 보는 사람마저 기분 좋아질 만큼 밝고 활기찬, 허나 클라우디아가 보기에는 가증스럽기 짝이 없는 미소를 만면에 지은 채, 세드릭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음에 드신 것 같아, 실로 다행입니다.” “시끄러워!!” 얼굴이 빨개진 클라우디아는 찻잔을 내던졌다. 세드릭은 아무렇지도 않게 찻잔을 붙잡은 뒤, 그대로 당연하다는 듯 테이블 위에 돌려놓았다. 찻잔을 공으로 삼은 위험한 캐치볼은 클라우디아가 기진맥진이 되어 뻗어버릴 때까지 이어졌다. *** “청소를 해. 어디 청소냐고? 당연히 저택 전체지! 끝내기 전까지 쉴 생각 따윈 하지도 마!!” “뭐? 다 끝났다고? 하! 장난해? 여기 이렇게 먼지가… 없네. 저, 저기에 낙엽이… 없네. 창문에 물 얼룩이… 왜 없는데!?” -청소로 트집 잡기. 실패. 세드릭을 향한 하인들의 존경심이 올랐다. “고기, 달걀, 생선, 우유를 쓰지 않고 내가 만족할 만한 요리를 가져와. 코스 요리도 제대로 못 하는 실력이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잠깐, 이거 고기 아니야? 아니라고? 버섯이랑 두부? 하, 겉보기만 조잡하게 흉내 낸 가짜라는 거잖아? 참나, 겨우 이딴 쓰레기로 내 입을 만족시킬 수 있을 리가…. ……. 그 뜨뜻미지근한 눈은 뭔데!! 저리 안 치워!?” -요리로 트집 잡기. 실패. 클라우디아의 식사량이 늘었다. “내 혈마수들을 돌봐줘야겠어. 미리 말하지만 때리거나 힘으로 윽박지르는 건 금지야. 동물을 패서 키우는 걸 제대로 된 사육사라고 할 수는 없잖아? 얘들 중 하나라도 불만을 표하면 그땐 네가 동물 우리에 들어갈 테니까 각오해.” “칫, 생각보다는 얌전하네. 뭐 적어도 낮잠 정도는 잘 재우는 것 같긴 한데, 이런 건 굳이 네가 아니어도 날씨만 좋으면, 뭐? ‘손’이라고 해보라고? …손! 오른손! 왼손! 오른발! 왼발! 배 뒤집어! 하하하! 뭐야 이거! 야, 말해봐. 다른 재주는 또 뭐가 있…… 이게 아니잖아!!” -동물 사육으로 트집 잡기. 실패. 이후, 가끔 혈마수들한테 이것저것 명령을 내리면서 놀고 있는 클라우디아의 모습이 하인들의 눈에 종종 목격됨. *** “대체 뭔데 저건!!” 클라우디아는 침대 위에서 베개를 상대로 마구 주먹질을 해댔다. 어지간한 평민은 전 재산을 바쳐도 살 수 없을 최고급 침구가, 그녀의 손 아래에서 무참하게 너덜너덜해졌다. 하얀 깃털이 펄럭일 정도로 베개를 쥐어뜯은 그녀는, 이내 그걸 아무렇게나 내팽개친 후 이를 갈았다. “세드릭, 세드릭!!” 고작 평민 하나의 이름을 이렇게나 열렬히 불러본 경험 따위, 클라우디아의 인생 속에서는 단 한 번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 평민 하나를 뜻대로 휘두르지 못해 분통을 터트린 경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는 이질적인 존재였다. 하인으로서 능력 그 자체는 누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거나 압도할 정도로 우수한데, 정작 그 태도는 공손한 듯하면서도 묘하게 불손하다. 계약에 따라 클라우디아에게 봉사하기는 하지만, 정작 평민이 응당 갖춰야 할 귀족을 향한 무조건적인 공포나 경외는 전혀 느껴지질 않는 것이다. 침대를 데굴데굴 구르며 고민에 잠겨 있던 클라우디아의 눈이, 문득 방 한쪽에 있는 거대한 거울을 향했다. 어지럽게 흐트러진. 허나 그렇기에 남자를 매혹하기에 충분한 모습을 보고, 클라우디아의 뇌리에 어떤 아이디어가 스쳐 지나갔다. 그녀는 복장을 구태여 고치지 않고, 이불로 몸만을 슬쩍 가린 채 세드릭 전용 벨(하도 그녀가 세드릭을 찾는 일이 많다 보니 따로 만들어졌다)을 흔들었다. -부르셨습니까, 아가씨. 노크 소리와 함께 들려오는 세드릭의 목소리에 클라우디아는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그를 불러들였다. 그리고, 오만한 태도로 고했다. “베개가 망가졌으니까, 치워. 주변도 정돈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침대 여기저기에 어지럽게 널린 깃털을 치우기 위해서는 당연히 침대 쪽으로 시선을 향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말은 즉, 평소 이상으로 흐트러진 클라우디아의 모습을 눈에 담게 된다는 뜻. 도드라진 피부색에 세드릭이 잠시라도 눈이 팔려 멍해진다면 당연히 불경죄. 어떻게든 클라우디아를 눈에 담지 않기 위해 쭈뼛거린다면 그건 그것대로 놀림거리가 된다. 클라우디아는 그리 생각하며 웃었고. “알겠습니다, 아가씨!” 이내 웬 빵 봉투(눈구멍 안 뚫림)를 머리에 뒤집어쓴 채로 청소 작업에 돌입하는 세드릭을 보고 무심코 휘청거렸다. “뭔데! 그건 또 뭐냐고!” “하하하, 혹시 이런 일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리 보지 않고 업무에 몰두하는 훈련을 해놨습니다. 일상 중에는 써먹을 길이 없었는데 아가씨 덕분에 이렇게 써먹을 기회가 생기는군요! 아아, 아가씨, 그 자애에 깊은 감사를!” 클라우디아는 베개의 잔해를 집어 던졌다. 빵 봉투 괴인은 쓸데없이 신사적이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그걸 받아낸 뒤, 이내 웬 가죽 포대에 집어넣고는 청소를 이어 나갔다. 클라우디아는 울상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