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화 ??? 포르테(Forte) - 용사의 후손 마계의 세 지배자들은 각자 특성과 특기 분야를 지니고 있다. 『혈배(血杯)』는 피를 다루는 능력과 강력한 조직력을 자랑으로 여긴다. 『광아(狂牙)』는 짐승 같은 직감과 원초적이고 물리력인 폭력을 자랑으로 여긴다. 그렇다면 『기만(欺瞞)』은 어떤가? 그는 모든 사이한 것들의 왕이다. 누군가를 속이고, 사실을 왜곡하고, 보이는 것을 착각하게 하며, 진실을 알 수 없게 덮어 가린다. 마계에서 살아남은 세 지배자 중에서도 가장 모략에 특화된 대악마. 그런 군주의 성향에 영향을 받은 걸까, 아니면 애초에 그런 놈들이 알아서 기만 휘하로 모인 것일까. 근묵자흑과 유유상종 중 어느 쪽이 정답인지는 몰라도, 어찌 됐든 기만 세력에서 꾸미는 음모를 알아채는 건 매우 난이도가 높은 일이었다. 자존심이나 투쟁심, 정정당당 따위의 개념은 개에게 던져버린 그들은 일단 마주하기가 어렵고, 마주한 뒤에도 붙잡기가 어려우며, 설령 붙잡았다고 해도 그 입에서 진실을 듣기는 더더욱 어렵다. 하지만 여기, 모든 조건을 완벽하게 충족한 이들이 있었다. 앞에 잘 나서지 않는 기만 세력의 악마를 유인하고, 도주하기 전에 붙잡아, 거짓말을 할 여유도 없이 그냥 홀라당 잡아 먹어버린 콤비가. “─용사의 후손을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한 뒤, 천공 학원의 봉인을 깨트리고 그 안에 숨겨진 유물을 가로챈다라.” 황태자의 중얼거림에, 루시드라가 고개를 끄덕였다. “용사의 후손에게 접근해 잘못된 방향으로 유도하는 역할이 하나. 유물의 위치를 파악하고 봉인이 깨진 뒤 회수하는 역할이 하나. 마지막으로 학원의 다른 보물에 손을 대 주변의 시선을 끌고, 진짜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도록 돕는 역할이 하나. 이렇게 세 악마가 투입된 모양이야.” “발자레스는 마지막이었겠군.” “그래, 애초에 미끼로 쓸 생각이었으니까 다루기 쉬운 놈을 계약자로 고른 거겠지.” “흐음.” 입가에 손을 댄 채 고민에 잠긴 황태자를 향해, 루시드라가 상체를 스윽 들이밀었다. 풍만한 두 언덕이 황태자의 어깨에 닿아 형태가 일그러지고, 달콤한 방향 같은 체향이 확 피어올랐다. 평소라면 이 상황에서도 ‘더우니까 떨어지게나’ 같은 소리나 지껄일 황태자였지만, 이번에는 루시드라를 쉽게 밀쳐내지 않았다. 그 사실에 내심으로 미소를 지으며, 루시드라는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발자레스와 동격, 자칫하면 그 이상으로 강력한 악마가 둘이나 끼어 있는 판이야. 당신이 아무리 강력해도 분신의 힘만으로 해결하기는 쉽지 않을걸?” 마치 동성 친구처럼 편하고 친근하게, 하지만 이성으로서의 요염함과 색기를 담아, 루시드라가 속삭였다. “어때? 이번에는 내가 한번 제대로 도와줄까? 여태까지는 뒤에서 가볍게 무대를 조율하는 정도로 그쳤지만, 당신이 원한다면 앞에 나서줄 수도 있는데.” 오랜 봉인으로 인해 크게 약체화한 루시드라이지만, 그건 반대로 말해서 성장 고점, 아니 회귀 고점이 아득히 높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동안 황태자의 분신 곁을 따라다니며 자잘한 영혼이나 정기를 흡수하고, 이번에 그럭저럭 중상급 수준은 되는 악마를 먹어 치운 그녀의 매력과 마력은 과거보다 강해진 상태. 예전이 평범한 남자를 말 몇 마디와 눈웃음으로 홀릴 수 있는 경지라면, 지금은 그럭저럭 닳고 닳은 남자조차 홀릴 수 있는 경지였다. 즉, 아무리 황태자가 허니트랩에 익숙하다고 해도 이번만큼은…! “루시드라.” “왜?” “내 스승 중 한 명이 최근 감지 능력 강화랑 거리 무시 공격에 몰두하는 중이라네. 자네의 존재를 알아차리는 순간 원거리에서 공간 절단 참격이 날아올 것 같군.” “…….” 루시드라는 무언으로 은은하게 내뿜던 마력을 모두 컷 했다. 그러자 어딘지 모르게 핑크빛으로 물드는 듯했던 주변 공기가 단숨에 정상으로 돌아왔다. 그녀는 얌전히 의자 하나를 꼬리로 끌어온 뒤 거기에 착석했고, 황태자 역시 자세를 바로 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야기를 개시했다. “그래서, 어쩌려고? 일단 개입하긴 할 거잖아?” “자네 말에 따르면 악마들이 손에 넣으려고 하는 ‘유물’이라는 게 정확히 뭔지는 발자레스도 모르는 모양이지만, 그 천공 학원에 봉인된 물건이라면 악마 손에 넘어가서 좋을 건 없겠지. 막는 건 확정이지만 개입 방법이 문제로군.” 황태자는 펜을 들어 올린 뒤 그것을 손에서 굴렸다. “과거 용사의 동료였던 『천공의 현자』가 만들어낸 영토이자, 건축물이자, 하나의 마도구. 그것이 바로 천공 학원일세. 7위계의 초월자였던 천공의 현자가 남긴 유산인 만큼, 같은 초월자가 아닌 존재는 그곳에 발을 들이민 순간 학원의 법칙에 구속되지.” 발자레스가 직접 학원에 쳐들어가서 난리를 치는 대신, 굳이 입학 자격이 있는 인간을 계약자로 만들어 이용하려 한 것도 이 때문일 터였다. 일개 교육 기관에 지나지 않는 천공 학원이 중부의 여러 ‘국가’와 대등한 위치를 거머쥐는 게 가능할 만큼, 천공 학원을 지배하는 법칙은 강력하고도 까다로운 것이니까. “천공 학원은 정식 입구로 들어가는 게 아니면 출입이 거의 불가능에 가깝네. 그리고 정식 입구로 들어갈 수 있는 건 학생과 교수, 그리고 학원 측에서 허가한 손님뿐이지.” “네가 가겠다고 말하면 손님 자격으로 들어갈 수 있는 거 아니야?” “가능 불가능을 따지면 가능하겠지만, 그 경우 자유로운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겠지. 애초에, 천공 학원이랑 제국은 별로 관계가 좋지 않아.” “왜?” “수백 년 전 용사들이 한창 활동할 무렵, 당대 제국 황제가 그들에게 민폐를 좀 많이 끼쳤다고 하더군. 왜, 그 있지 않나. 영웅 이야기에 나오는 저게 아군인지 적인지 구분이 안 가는 이웃 나라의 높으신 분.” “…….” 아이제른 제국은 그 역사가 상당히 길다. 그리고 한 나라의 역사가 길어지면 개중에는 다소 상태가 좋지 않은 군주도 튀어나오는 법. 아이제른 측 역사서에는 당대 황제가 끼친 민폐가 상당수 은폐, 축소되어 기록되어 있었지만, 용사들과 인연이 깊은 대륙 중부 쪽 사서에는 관련 내용이 꽤 상세하게 기록되어 전해 내려오고 있었다. 사서 에른스트는 그런 내용들을 꽤 눈여겨보았는데, 당대 황제가 저지른 일 중에는 상당히 병맛 같은 것이 많았다. “마왕…. 아, 그러니까 현세에 무사히 강림한 대악마가 사람들을 문자 그대로 갈아버리고 있는데 어차피 대륙 중부의 일이라며 제대로 지원도 안 해준다든가, 지원의 대가로 땅이나 여러 불평등 조약을 요구한다든가, 용사 파티의 일원이었던 성녀에게 치근덕거린다든가, 거참 대단하신 분이더군.” “그 황제는 어떻게 됐는데?” “본인이 사약 내려서 죽인, 정확히는 죽였다고 생각한 선왕의 어린 아들 겸 자기 조카에게 죽었네.” 참 코멘트가 곤란한 가정사였다. “뭐, 이미 수백 년이나 흐른 일이니 직접적인 원한 관계는 거의 없지만, 은근한 거부감이나 불편함은 남아 있는 모양이라서 말이지. 게다가 너무 화려하게 움직였다가 악마들이 뭔가 낌새를 눈치채고 숨어버리면 그건 그것대로 귀찮아질 걸세.” “그러면 학생이나 교수가 돼서 들어가는 건?” “천공 학원은 입학 조건이 까다로워. 브라운 상회의 조력이 있다고 해도 이 시점에서 거기에 들어갈 만한 신분을 급조하는 건 어려울 걸세. 교수는 애초에 천공 학원 졸업생이 아니면 불가능한 듯하니 말할 것도 없고.” “…길이 막힌 거 아니야? 차라리 그 에른스트 모습으로 그 에리스라는 애한테 부탁하는 게 편했겠다.” “에른스트가 천공 학원에 같이 들어가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몰라도, 신분적으로도 능력적으로도 적재적소와는 거리가 멀지 않은가.” 황태자가 눈을 번쩍였다. “게다가, 그게 아니라도 방법은 있네. 천공 학원의 까다로운 검열을 통과하면서, 동시에 악마들이 노리는 그 ‘용사의 후손’ 곁에서 그녀를 지킬 수도 있는 방법이 말이지.” 잘 들어보게, 라고 말한 뒤. 황태자는 이내 본인의 ‘계획’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흥미진진한 기색으로 경청하던 루시드라는 이내 눈을 껌뻑거리더니, 나중에는 헤- 하고 입을 벌렸다. “어떤가, 완벽한 계획 아닌가?” “그게 무슨 개소리, 아니 개한테 실례되는 소리니 황태자야.” *** 선조의 이름값이란 후손에게 많은 영향을 끼친다. 널리 알려진 범죄자, 배신자, 무능력자의 후손들은 단지 그 핏줄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두고두고 욕을 먹는 것이다. 하지만 이와 반대로, 선조의 명성이 지나치게 드높으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된다. 대륙 중부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전설의 주인공. 사악한 마왕을 토벌하고 수많은 이들을 구원한 영웅, 페르난도 발레스티아. 그 후손으로 태어난 소녀, 피나 발레스티아(Fina Valestia)는 그 이름값을 처절하게 실감하고 있었다. “으어어. 어쩌지, 어떻게 해…!” 하얀 셔츠와 검푸른색의 가죽 멜빵 반바지. 길게 땋아서 늘어트린 검은 머리 사이사이에는 천연인지 염색인지 모를 파란색 머리가 섞여 있고, 개중에서도 앞머리 한쪽에 가지런히 뭉쳐 있는 파랑은 그 색이 무척이나 선명했다. 금색의 눈동자가 반짝이는 얼굴은 아름답다는 말보다는 귀여운 인상이 강했지만, 그와 상반되게 체형 자체는 상당히 굴곡이 심한 편이었다. 본래라면 아래로 축 늘어져야 했을 크라밧(Cravate)이 하얀 셔츠 위로 얹혀 있는 모습은 비슷한 또래의 사내들에게는 자칫 눈에 독일 정도. 누구나 시선을 빼앗길 절세 미녀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어디 가서 못났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만한 외모. 허나 그런 미모가 있다고 한들 정작 당사자가 머리를 움켜쥔 채 침대 위를 데굴데굴 구르고 있어서야, 별다른 의미는 없었다. “천공 학원이라니…! 거기 입학시험 치르다가 죽는 사람도 나온다는 이상한 곳이잖아! 가기 싫어…!” 호에엥, 하며 떼를 쓰는 모습은 사람들이 ‘용사의 후손’이라는 말을 듣고 떠올릴 환상을 무참히 깨부술 만큼 처절한 것이었지만, 사실 피나에게도 할 말은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천공 학원에 가는 데 피나 본인의 의사는 단 1%도 영향을 끼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허허허, 우리 귀여운 딸. 요즘 내가 챙겨주질 못해서 미안하구나. 요즘 국경 상황이 영 개판이라서 말이야! 나날이 몬스터들을 쳐 죽이고 있으면 쉴 시간이 안 나질 뭐냐.」 「아, 아니에요. 신경 안 쓰셔도 괜찮아요.」 「흠, 흠, 그래. 너 역시 자랑스러운 발레스티아의 일원이건만 내가 너무 어리게만 봤구나. 검술 수련은 잘하고 있느냐?」 「아, 네.」 「생활에 불편한 건 없고?」 「아, 네.」 「그래 다행이야. 아, 맞다. 일주일 뒤에 천공 학원 입학시험이 있으니 준비하거라.」 「아, 네. …네?」 「본래 그쪽에서는 몇몇 우등생들과 함께 시험 면제를 해줄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발레스티아의 이름이 있는데 어찌 그런 편법을 쓰겠냐. 정정당당하게 시험을 치르고, 네 실력에 의문을 품은 이들에게 보여주거라! 이것이야말로 영웅이 남긴 검이라고!」 「…어, 그, 저기.」 「어이쿠,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군. 나는 폐하를 알현한 뒤 그대로 다시 국경으로 향할 테니, 나중에 뭐 필요한 거 있으면 집사장에게 말하거나 편지하거라! 그러면 이만!」 그야말로 폭풍 같은 전개였다. 뭐라고 항변할 기회조차 없이 피나의 아버지는 떠나갔고, 의자에 앉아 눈만 껌뻑거리던 피나는 대략 한 시간이 흐른 후에야 상황을 온전히 파악하고 내심으로 절규했다. 피나에게 있어서 더욱 슬픈 사실은, 아버지의 저 행동이 악의라고는 조금도 없이, 그저 순수한 신뢰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이었다. 발레스티아의 피를 이은 자라면, 그 ‘용사’의 후손이라면 당연히 이 정도는 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 당장 아버지 본인이 그렇게 자라났고, 아버지의 형제도, 할아버지도, 아무튼 가문에 속한 이들 대부분이 다들 그러했다. 어릴 때부터 당연하다는 듯이 검을 배웠고, 당연하다는 듯이 천공 학원을 졸업했으며, 당연하다는 듯이 왕국의 군부에서 활약했다. 다른 선택지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일부 저항자들이 무관 대신 문관에 지원하는 등 자기 인생을 새롭게 개척하기 위한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가문의 어르신들과 왕국의 높으신 분들은 서로 합이라도 맞춘 듯 그 도전장을 찢어버린 뒤 ‘응, 너 무관’ 낙인을 찍어버렸기 때문이다. 물론 선천적으로 신체가 병약하다든가, 마력을 타고나지 못했거나 하는 경우에는 저 정해진 코스를 벗어날 수 있었지만, 안타깝게도 피나는 어느 쪽에도 해당하지 않았다. “어쩌지, 진짜 어쩌지.” 피나는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차라리 마음 편히 떨어질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걸 실제로 시도하기에는 용사의 후손이라는 이름값은 지나치게 무겁다. 하지만 그렇다고 사람들이 기대하는 것 같은 활약을 보여줄 자신도 없다. 그녀가 한참 고민에 빠져 있던 그때였다. 덜컥! 피나의 방 한구석. 입학시험 대비용으로 구매하거나 선물 받은 여러 장비가 모여 있는 곳에서 묘한 소리가 들려왔다. 잘못 들었나 싶어 상자 더미가 쌓여 있는 곳을 응시하던 피나는, 이내 상자 중 하나가 또다시 덜컥! 하고 흔들리는 모습을 보고는 기겁하며 뒤로 물러났다. ‘뭐, 뭐야. 무슨 동물이라도 들어 있나? 아니면, 설마, 사람? 하인들이 확인을 안 했을 리가 없는데?’ 어느 쪽이든 일단 도망치는 게 좋을 것 같다. 그리 판단한 피나가 슬금슬금 방문 쪽으로 기어가려던 그때였다. 퍼엉! 하는 소리와 함께 상자의 문이 열리더니, 그 안쪽에서 은은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무심코 그 마력의 정체를 확인한 피나는 중얼거렸다. “검?” 그것은 한 자루의 검이었다. 은색과 흑색이 뒤섞인 몸체와 폼멜에 박힌 파란 보석. 아무리 봐도 범상치 않은 외형의, 뭔가 이야기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검을 피나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순간 검의 마력이 마구 일렁였다. 《힘을… 원하는가…?》 머릿속으로 직접 울리는 것 같은, 위엄으로 가득 찬 목소리. 《나는 마검 포르테(Forte)… 자격을 갖춘 소녀여… 나를 손에 쥐도록 하거라… 그리하면 나는 그대의 힘이 되어, 그대를 위협하는 이들로부터 그대를 지키리라….》 자아를 지닌 마법의 검. 특별한 계약의 순간. 영웅담의 시작 같은 상황에서, 피나가 대답했다. “…저기, 그. 마검님?” 《말하거라….》 “죄송한데, 배송이 잘못된 거 같아요.”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