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화 사서 에른스트(Ernst) (9) - 쌓아 올린 것의 차이 선선히 불어오는 바람. 흩날리는 꽃과 풀. 구름에 태양이 가려 살짝 흐릿하지만, 그렇다고 우중충한 느낌은 아닌 하늘. 산책하기에 너무나 훌륭한 날씨와 풍광 속에서도, 에리스는 그것을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그녀의 머릿속은 이미 혼란 상태였기 때문이다. 에른스트는 왜 여기에 있는 걸까. 산책이라는 말은 사실일까, 아니면 거짓일까. 우는 걸 봤나? 눈물을 흘리진 않았으니 괜찮지 않을까? 하지만 바닥에 쭈그려 앉아 있던 건 사실이잖아. 물어보면 뭐라고 대답하지? 무시할까? 속여 넘길까? 그러고 보니 저번에 본 이론서도 아직 제대로 반납하지 못했는데. 우중충한 얼굴로 한참 끙끙 앓는 것도 잠시. 흘끗흘끗 에른스트의 눈치를 살피던 에리스는, 이내 이상한 걸 깨달았다. …근데 이 인간은 왜 나한테는 시선도 안 주는 거지? 에리스가 옆에서 안절부절못하든 말든, 옆에서 쳐다보든 말든, 에른스트는 일절 관심을 보이지 않고 그냥 제 갈 길만 걷고 있었다. 맑은 공기를 크게 들이마시고, 주변 풍경을 눈에 담고, 하늘도 좀 바라보면서. 그야말로 더할 나위 없이 산책을 즐기는 모양새. “…….” 무척이나 복잡했던 에리스의 머리가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신하듯, 영문 모를 짜증이 치솟았다. “…이봐요.” 에른스트의 눈이 에리스에게로 향했다. “왜 그러십니까.” “저한테 뭐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부른 것 아니었나요?” 에리스의 날카로운 지적에, 에른스트는 “흠.”하고 한 텀을 둔 뒤 말했다. “아뇨, 딱히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건 아니었습니다만.” 울컥. 에리스의 뺨이 파르르 떨렸다. 그녀 본인조차도 왜 이렇게까지 열이 받는 건지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분노였다. 그녀는 짜증스레 쏘아붙였다. “그러면 뭐예요! 딱히 용건도 없으면서 사람을 왜 부른 건데요!” “하고 싶은 말이 없다고 했지, 용건이 없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용건이 뭐냐고요! 말을 해야 들어주든 거부하든 할 거 아니에요!” “이미 들어주고 계십니다. 함께 걷고 계시잖습니까.” 상상도 못 했던 대답에, 에리스는 눈을 끔뻑거렸다. 조롱당했다는 생각에, 그녀는 이제 배신감마저 느끼고 있었다. “뭐야, 그게… 그런 시간 낭비를 위해서….”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에른스트가 에리스의 말을 잘라냈다. 타협의 여지조차 없다는 듯한 그 단호함에, 에리스는 순간 당황했다. “몸을 움직이고, 맑은 공기를 마시고, 주변 풍경을 눈에 담는다. 몰랐던 길을 알아내고, 뜻밖의 사람과 조우한다. 그 모든 행위에 가치와 의미가 있습니다. 이건 시간 낭비도 아니고, 부질없는 행동도 아닙니다.” “그런 건, 혼자서라도 할 수 있잖아요.” “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가끔은 함께하는 것도 나쁘진 않습니다. 혼자 느긋하게 책을 읽는 것도 즐겁지만, 가끔은 누군가와 그 감상을 나누는 게 즐거운 것처럼.” “…….” 에리스는 침묵했다. 에른스트의 말을 부정하는 건 간단했다. 나는 그 행위가 즐거워서 한 게 아니다, 책을 읽는 것도, 감상을 말한 것도, 모두 마도서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것뿐이다. 그저 그렇게 선언만 하면 되는 문제였다. 허나 에리스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기분을 노골적으로 해치면 새로운 책을 받는 데 지장이 있을까 봐? 그래, 그런 이유도 없지는 않겠지. 그렇지만, 정말로 그게 전부인가? 실용성 따윈 없다며 외면했던 책을 읽고, 그 내용을 눈앞의 남자와 공유하고, 토론하는 시간은 정말로 괴로울 뿐이었나? 거기에는 아무런 즐거움도 없었나? 그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줄곧, 스승이 인정할 만한 위대한 마법사가 되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렸던 에리스가, 아주 잠시나마 그 불안감과 초조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을 만큼. “항상 노력하고 의무를 다하려는 자세는 고귀한 겁니다. 하지만, 저는 그저 ‘그것뿐’인 인생은 단호히 부정하고 싶군요.” “어째서죠?” “너무 서글프지 않습니까. 재미도 없고.” 에른스트의 목소리에서는, 짙은 진심이 가득 묻어나왔다. 단순한 겉치레 말 따위가 아닌, 그가 평소에도 그런 생각을 지니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을 만큼. 그런 본심을 들어서였을까. 에리스는 문득, 이런 말을 내뱉었다. “당신은, 제게 하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고 했죠.” “그렇습니다.” “그러면, 제 이야기를 들어주실 수는 있나요?” “얼마든지.” 그 허락이 계기가 된 듯, 에리스는 자신의 속에 있던 말들을 하나둘씩 털어놓기 시작했다. 델피나리스를 부모이자 스승으로서 경애한 것. 우연히 그 스승의 본심을 알게 된 것. 스승의 평가를 바꿀 만큼 굉장한 마법사가 되기 위해 노력해 왔던 것. 그 노력이 허망하게도,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천재’가 나타난 것까지. 에리스의 이성은 잘 알지도 못하는 상대에게 대체 무슨 말을 떠드는 거냐고 지적했지만, 한번 입 밖으로 꺼낸 말은 꼬리에 꼬리를 문 것처럼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것은 한탄이었고, 격앙이었고, 분노이자 절망이었다. 에리스가 그토록 중요시하던 실용성이나 합리성 따윈 눈곱만큼도 없는, 아이의 울부짖음 같은 푸념. 듣고 있는 것만으로 신경에 거슬릴 부의 감정들을, 에른스트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들어주었다. “완벽한 초인 황태자…? 음, 뭔가 오해가 있는 듯하군요. 제가 아는 제국의 황태자는 생각보다 놀고먹기 좋아하는 인간입니다만.” “자나 깨나 황태자의 의무를 다할 생각밖에 없는 나머지 다른 길에는 한눈조차 팔지 않는 인간이라니, 대마법사께서 착각하신 듯합니다.” “빈말이 아니라 진짜입니다. 그 인간을 그렇게까지 높게 평가하면 실체와의 괴리를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유달리 황태자에 관한 이야기를 격하게 부정하긴 했지만, 에리스는 개의치 않았다. 사서가 진짜 황태자에 대해 잘 알고 말하는 게 아니라, 그 나름대로 에리스를 위로하기 위해 꺼낸 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야 황태자를 직접 만나고 가르치기까지 한 대마법사의 평가와 먼 변방 나라의 일개 사서 중 누구의 말이 더 신빙성이 있냐고 묻는다면 전자일 수밖에 없었다. 한바탕 이야기가 끝난 후. 어쩐지 자기 그림자를 바라보며 눈썹을 꿈틀거리던 에른스트는, 이내 입을 열어 말했다. “그러면 뭐, 결론은 간단하군요. 어차피 강습소 대항전에서 놈과 싸우게 될 테니, 그때 철저하게 박살을 내버리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에리스는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말은 간단하지만, 행동은 간단하지 못해요.” 당시에는 순간적인 충동으로 결투에 나서려 했던 에리스였지만, 머리에서 김이 빠진 지금은 알 수 있었다. 처음 본 주문을 즉석에서 카피하고 사용할 정도의 압도적인 센스, 그리고 그걸 몇 배로 강화하면서 난사하고도 태연자약한 마력량. 상대는 에리스가 감히 범접하지 못할 영역에 있는 천재였다. “지금부터 결투 때까지 휴식 한번 없이 실력을 갈고닦는다고 해도, 저는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없어요. 심지어 상대는 준비 시간 동안 스승님 밑에서 더욱 실력을 키울 테니, 결과는 말할 것도 없죠.” “휴식 한번 없이 실력을 갈고닦을 필요는 없습니다. 아마 쉬엄쉬엄해도 당신이 이길 테니까요.” “네?” 말을 이해하지 못한 에리스에게, 에른스트는 무덤덤하게 선언했다. “그 ‘천재’라는 인간과 당신의 스승께 증명해 보도록 하죠. 당신이 그동안 노력한 성과를.” *** 마리크의 친부모는 상인이었다. 그것도 그럴듯한 뒷배나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자본 없이, 맨바닥에서 거상의 경지에 오른 자수성가 타입. 상인치고는 드물게 금전적 이익보다 도리나 신의를 중시했기에 세간의 평판도 나쁘지 않았고, 상회의 직원이나 고용된 하인들도 두 부부를 존경했다. 하지만 그런 부부에게도 단 하나 오점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망나니 같은 아들놈의 존재였다. 공부를 싫어하고, 이기적이며 베풀 줄 모르고,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대하는, 그야말로 부모의 성품을 반대로 뒤집어 놓은 듯한 성격. 저 멀쩡한 부모 밑에서 어찌 저런 인간이 태어날 수 있냐며, 혹시 요정이 다른 아이로 바꿔치기를 한 건 아니냐며 부하 직원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부는 어떻게든 아들을 바른 사람으로 이끌기 위해 노력했지만, 마리크의 반성은 언제나 일시적인 것이었다.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게 아니라, 눈물 콧물로 부부의 마음을 약하게 한 뒤 나중에는 또 사고를 치는 반복. 부부는 점점 지쳤고, 직원들은 점점 진절머리를 냈지만, 마리크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짜증을 냈다. “어차피 아빠랑 엄마가 잔뜩 벌어놨잖아? 그러면 그거 쓰면 되는데 왜 자꾸 귀찮게 이것저것 시키는 거야?” 마리크를 태어나게 한 건 부모다. 두 사람에게는 마리크의 삶을 책임질 의무가 있고, 그러니 두 사람이 남긴 걸 자기가 가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부부가 들었다면 쇼크로 쓰러질지도 모를 사고방식이었지만, 마리크는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가지지 못한 것에 짜증을 냈다. “아빠랑 엄마는 왜 평민으로 태어난 거지? 귀족으로 태어났어야 나도 귀족이 됐을 텐데!” “대체 기부니 뭐니 하면서 왜 쓸데없는 돈을 쓰는 거야! 저런 거지새끼들한테 적선할 돈이 있으면 나한테 한 푼이라도 더 남겨줘야지!” “아아, 좋은 부모를 가지고 태어난 녀석들은 좋겠다. 나도 어디 왕자였으면 잔소리 같은 건 안 듣고 매일같이 즐겁게 놀기만 했을 텐데!” 인간의 인격 형성은 자라난 환경에 막대한 영향을 받는다. 허나 세상에는 가끔, 딱히 불우한 것도 불행한 것도 아니면서 기이할 정도로 추악한 인간이 존재했다. 그리고 그 추악함에 이끌리기라도 한 듯, ‘악마’는 마리크의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케케케! 삶에 불만이 많은 모양이구나! 내가 좀 도와줄까? 응?” 빼빼 마른 체구에 어딘지 모르게 시정잡배 같은 분위기를 품은 악마는, 마리크에게 ‘특별한’ 힘을 주었다. “정말로, 연습 같은 거 하나도 안 하고 마법을 쓸 수 있다고?” “아주 약간, 마력을 좀 더 집어넣는 정도의 요령은 배워야겠지. 하지만 그게 전부야! 나머지는 그냥 상대가 마법을 쓰는 걸 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악마가 마리크에게 건네준 능력은 두 가지였다. 눈으로 인식한 마법을 똑같이 사용할 수 있게 되는 능력과 흘러넘칠 만큼 방대한 마력. 상대가 사용한 주문을 그대로 카피한 뒤, 상대보다 압도적인 마력으로 출력을 강화해 찍어 누르면 마법사 상대로는 무적에 가깝다. 설령 상대가 마법을 쓰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그때는 예전에 베껴 뒀던 주문으로 압도하면 되니까. 누군가가 습득을 위해 피땀 흘려 노력한 주문들을, 마리크는 그 어떤 노력도 없이 너무나 간단하게 습득할 수 있었다. 부모님을 졸라 다양한 마법사 스승을 초청한 마리크는 그들의 주문을 복사해 자기 것으로 만들었고, 이내 천재 마법사로서 영주의 눈에 들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본래 자기를 위해 애써왔던 친부모를 버렸지만, 마리크는 후회 따윈 하지 않았다. 뛰어나고 우수한 자신이 더 높은 신분으로 올라가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니까. 당연하게도, 이런 마리크에게 지금 자신을 가르치는 ‘스승’을 향한 존경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쳇, 빌어먹을 늙은이 같으니. 내가 대체 뭘 잘못했다고 사죄 같은 걸 시키는 거야? 그놈들이 먼저 시비를 걸었잖아! 아오!” 델피나리스의 저택에서 제법 거리가 떨어진 곳에 세워진 백작의 별장. 마리크는 방에 있는 가구 따위를 발로 퍽퍽 차면서 신경질을 냈다. 그는 곁에 있는 악마를 향해 말했다. “야! 발자레스, 꼭 이렇게 돌아가야 하는 거야? 저 늙은이 밑에서 차근차근 마법 같은 걸 배울 게 아니라, 그냥 한판 붙어서 주문 죄다 털어내는 게 빠르지 않아?” 마리크의 생각 없는 말에, 악마, 발자레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그건 좀 어렵겠는데! 주문의 카피야 어찌 됐든, 대마법사를 압도할 정도의 마력을 건네주는 건 불가능하지! 애초에 그 마법사가 나보다 더 강하거든!” “뭐?” 솔직하게 실력 부족을 인정한 발자레스의 발언이 의외였는지, 마리크의 얼굴에 당혹이 담겼다. “그 늙은이가 너보다 더 강하면 안 되잖아! 혹시 그러면, 내 힘이랑 네 존재도 깨달은 거 아니야?” “오, 친구. 안심해! 그럴 일은 없으니까!” 발자레스는 키득거리며 말을 이었다. “일류의 전사라고 해도, 순수한 후각은 사냥개에 비할 바가 아니지. 몇 백을 넘는 손님을 완벽하게 기억하고 대응하는 접수원이라도 상자에 가득 담긴 병아리의 외모 하나하나를 구별하진 못해! 인간이 우리 악마를 감지한다는 건 그런 영역이라고!” 만약 델피나리스가 작정하고 ‘악마를 감지하기 위한’ 주문이나 마도구를 사용한다면 마리크에게 남은 악마의 흔적을 찾아낼 수도 있겠지. 달리 말하자면 애초에 마리크가 악마 계약자라고 의심하고서 조사하는 게 아닌 이상은, 발자레스의 흔적은 드러나지 않는다. 발자레스의 설명에, 마리크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면 인간은 너희를 못 찾는다 이거지?” “글쎄, 너희 인간들이 말하는 ‘7위계’라는 놈들은 예외겠지. 애초에 인간이라고 부를 수 없는 놈들이니까. 그 외에는… 같은 악마라면 비교적 쉽게 찾을 수도 있겠군.” “괘, 괜찮은 거 맞아?” “케케케! 안심하라고 친구! 세간에 알려진 7위계는 우리도 유심히 기색을 살피고 있고, 설령 다른 악마가 있다 해도 주군께 ‘증표’를 받은 나를 방해하진 못해!” 발자레스는 본인의 팔뚝에 새겨진 기이한 뱀 문양을 과시하듯이 보여주었다. “왜냐하면 내 주군이신 『기만』께서는 악마의 세계를 다스리는 세 절대자 중 한 분이시니까! 어지간한 악마 놈들은 이 증표에서 느껴지는 기운만 봐도 자빠져서 벌벌 떨어댈걸? 그러니 안심하라고!” 발자레스의 자신만만한 단언에, 마리크는 다시금 얼굴에 웃음을 꽃피웠다. 그렇다. 자신은 승리자였다. 앞으로도 자신의 앞을 가로막을 존재 따윈, 그 어디에도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