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화 사서 에른스트(Ernst) (7) - 대마법사의 새로운 제자 대마법사의 제자. 그 수준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제자는 언젠가 스승을 뛰어넘는 법이라고 하니, 당장 비슷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그 아래 등급 정도는 되지 않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렇지 못했다. 적어도 델피나리스 웨인하트의 제자들은, 스승에 비해 다소 아쉬운 실력을 지닌 게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델피나리스 본인의 실력은 6위계. 하지만 그녀의 제자 중 과반수는 3위계였고, 개중 뛰어나다고 평가받는 이들도 4위계에 그쳤다. 스승과 같은 6위계는커녕 5위계에 조차 발을 들여놓지 못한 것이다. 혹자는 델피나리스의 제자가 지나치게 많은 것을 그 이유로 들었다. 혼자서 수십 명을 넘는 제자를 가르치려고 하니 한 사람당 쏟을 수 있는 시간과 관심이 제한되어 있고, 그 탓에 제자들이 높은 경지에 오르지 못한 것이라고 평가한 것이다. 타국에서는 그냥 델피나리스가 스승으로서는 능력이 없거나, 자신을 뛰어넘는 제자가 나오면 본인의 지위가 위험해질지도 모르니 의도적으로 제자의 성장을 방해한다는 악의적인 추측마저 돌아다닐 정도였다. “웃기는 소리입니다.” 그리고 사서 에른스트는, 이러한 세간의 평가를 단호하게 부정했다. “델피나리스 님은 기초를 매우 중요하게 여기시는 분입니다. 그분의 제자들이 얼핏 느리게 성장하는 것처럼 보이는 건, 그만큼 기반을 튼튼하게 다지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하기 때문이지요.” 전사들이 검기의 발현이 가능한 4위계를 초인과 일반인의 경계로 삼듯, 마법사들 역시 마력 그 자체에 고유한 성질이 생겨나는 4위계를 특별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인식에 아예 근거가 없는 건 아니다. 똑같은 철검을 휘둘러도 검기로 강화된 쪽은 그렇지 않은 쪽을 칼질 몇 번만으로 파괴할 수 있고, 고유 성질을 각성한 마법사가 사용하는 주문은 그렇지 않은 쪽의 주문보다 빼어난 효력과 효율을 자랑한다. 그래서 일부 스승 중에는, 오직 제자의 위계를 끌어올리는 일에만 집중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기사라면 체계적인 검술이나 육체 단련보다 마력 연공법을 통한 기공 수련에만 몰두하게 하고, 마법사라면 불이나 얼음처럼 특정 속성에만 몰두하게 한 뒤 마력 성질을 고정해 버리는 식. 허나 델피나리스는 이런 식의 위계 성장에 급급한 대신, 제자들에게 가능한 다양한 주문을 습득하게 하고, 각 주문의 효용과 원리를 깊이 탐구하도록 요구했다. 설령 특정 속성에 특화된 마법사가 된다 해도 그건 일단 이거고 저거고 다 탐구하고 체험해 본 뒤에 결정할 일이지, 위계 좀 빨리 올리겠다고 다른 주문은 쳐다도 보지 않는 건 어리석은 일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마법을 단순히 ‘쓰는’ 게 전부가 아니라, 진짜 의미로 자기 것으로 삼도록 하는 교육 철학. “이런 교육법은 단기적으로는 성장이 느려 보일지 몰라도, 마법사로서 기량이 오르면 오를수록 그 효과가 극대화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단단하게 다진 지반 위에 집을 세워야 더 크고 안정적인 집을 세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죠.” “흐응.” 에른스트의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 있던 대악마가 콧소리를 냈다. “설령 네 말이 맞다고 해도, 그걸 제대로 알고 인정해 주는 전문가가 과연 몇이나 될까?” 델피나리스의 교육 방침이 얼마나 착실하든, 대외적으로 봤을 때 그녀는 5위계의 마법사 하나 배출하지 못한 스승일 뿐이다. 대마법사의 위명이 있는 만큼 노골적으로 비난이나 비웃음을 떠드는 어리석은 자는 극히 적겠지만, 뒤에서 은근한 말이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당사자는 상당한 압박과 불편함을 느낄 터. 처음에는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간다고 해도, 그게 수십 년 이상 지속된다면? “인생의 황혼을 준비하는 노인이 ‘그동안 내가 고집해 온 방식은 다 틀렸어!’라며 방침을 수정하는 건 어렵지. 하지만, 본인의 이론이 맞다는 걸 증명해 줄 무언가, 혹은 누군가를 찾는데 안달복달한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아. 안 그래?” 루시드라의 말을, 에른스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저 담담한 눈초리로 그녀를 응시했을 뿐이었다. “뭔가 알아낸 게 있습니까?” 변함없이 눈치가 빠르다며, 루시드라는 감탄했다. 그리고 말했다. “동족의 냄새가 나.” *** 델피나리스의 웨인하트의 저택은 무척이나 정석적이다. ‘대마법사가 살 것 같은 저택’이라고 했을 때 사람들이 흔히 떠올릴 것 같은 모습에 가깝다는 뜻이다. 도시를 먼 곳에서 내려다볼 수 있는, 높고 넓은 푸른 언덕. 나무와 벽돌이 뒤섞인 웅장하면서도 신비로운 외관. 굴뚝 위로 피어오르는 회색빛의 연기. 빈말로도 접근성이 좋다고 하기 어려운 입지이지만, 그런데도 델피나리스의 저택을 찾아오는 이들은 끊이지를 않았다. 가문의 일원 중 한 명을 제자로 들여보내기 위해서든, 여차할 때 마법사로서 힘을 빌리기 위해서든, 그녀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손님들도, 델피나리스의 제자들이 스승의 집에 방문하는 오늘만큼은 저택 주변을 어슬렁거리지 않았다. 라벨로시아의 인간 국보가 제자들을 무척이나 아끼고, 그런 제자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각별하게 여긴다는 건 왕국 내에서 모르는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오랜만입니다, 사형. 요즘 모피 장사로 꽤 잘나가신다고 들었는데, 그것 때문인지 신수가 훤하시군요.” “잘 나가기는 뭘. 필리프 너희 가문이야말로, 새 철광을 발견했다고 하던데 잘 됐구나.” “어라, 사매. 그 장신구… 기욤 아틀리에 작품이잖아? 꽤 구하기 힘들었을 텐데. 너무 무리한 거 아니니?” “에이, 겨우 이 정도로 무리랄 게 있겠어요? 언니야말로 장신구에 품격이 있네요. 역시 오래된 물건은 다른가 봐요.” 이는 당사자들도 마찬가지라서, 바깥에선 서로 악연으로 얽힌 제자들도 스승의 저택 안에서만큼은 적대 행위를 자제했다. 서로 은근한 비아냥과 비꼬기를 시도하기는 했지만, 이 정도야 가벼운 잽으로 넘어갈 수 있는 수준. “에리스, 졸업 후에 천공 아카데미로 가겠다는 생각은 여전하니? 졸업생 수가 입학생 수의 절반도 안 된다는 위험한 곳인데, 다시 한번 생각해 보는 게 어때? 마침 우리 가문 쪽에서 마법사를 모집 중인데….” “괜찮습니다. 선배님. 이미 결정한 일이라서요.” 에리스의 담담하면서도 확고한 대답에, 권유의 말을 내뱉던 이의 눈에 분노와 짜증의 감정이 담겼다가 곧바로 숨겨졌다. “그렇니? 나중에라도 생각이 바뀌면 말해주렴.”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말을 남기고 떠나가는 동문 선배의 모습을, 에리스는 덤덤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런 에리스의 어깨를 메리 교수가 가볍게 두드렸다. “고생이 많네. 네가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동문들하고 굳이 얽히지 않으려는 이유도 알겠어.” “아뇨, 뭐. 그래도 여기서는 다들 끈질기지 않고 깔끔하니까요.” “그야 스승님 앞에서 밉보이긴 싫어서 그렇겠지.” 제자 중 가장 어린 에리스이지만, 그 실력은 모든 제자 중에도 열 손가락 안에 든다. 그녀 위에 있는 실력자들이 하나 같이 나이 50을 넘은 이들이라는 걸 고려하면, 이제 스물 초반에 불과한 에리스의 경지는 실로 드높은 것이었다. 어쩌면 델피나리스의 제자 중에서 유일하게 5위계를 노려볼만하다고 평가받는 인재인 만큼, 에리스를 아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이들은 무척이나 많았다. 개중에는 이미 출세가 보장된 거나 다름없으면서 굳이 위험한 길을 가려고 하는 에리스를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물론 에리스는 그런 사람들의 만류에 코웃음을 쳤다. 정치적인 권력이라든가, 안온하고 편한 출세길이라든가, 하나같이 불필요하고 쓸모없다. 그녀에게는 마법사로서 높은 경지에 오른다는, 그래서 스승에게 인정받는다는 명확한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언젠가 5위계에 다다를 게 확실하다고? 그런 것으로는 한참 부족하다. 적어도 6위계. 그러니까 스승과 같은 경지 정도는 올라 줘야 진정 인정받았다고 할 수 있을 터이니. 웅성웅성. 에리스가 한참 생각에 잠겨 있을 무렵, 저택 한쪽이 소란스러워지더니 안쪽 방에서 한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온화하고 사려 깊은 인상의 갈색 머리의 여인. 대마법사 델피나리스는, 단상 같은 곳에 올라가 연설을 시작하는 대신 곧장 제자들 곁으로 다가가 한명 한명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려무나, 론. 아내 건강은 괜찮니?” “스승님께서 보내주신 약 덕분에 많이 나아졌습니다. 직접 찾아오진 못했지만, 대신 인사를 전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키올. 전에 비해 배가 많이 나왔구나. 너무 책상 위에만 있지 말고 좀 돌아다니라고 했을 텐데?” “아이고 스승님. 저도 이제 나이가 있습니다. 전처럼 혈기 왕성하게 움직이긴 힘들죠.” “비올라! 실력이 올랐구나. 노력한 성과가 나온 것 같아서 기쁘단다.” “스승님께서 열심히 도와주신 덕분입니다. 앞으로도 노력하겠습니다.” 저마다 나름의 속내와 생각을 품고 있던 제자들이었으나, 스승 앞에서는 온순한 양처럼 순한 모습을 보였다. 정치적인 의도나 계산이 전혀 없는 행동은 아니었다.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경애를 바치기에, 그들은 이미 나이를 먹을 만큼 먹은 어른이었으니. 허나 그들이 오로지 이해타산만을 따져가며 스승을 대했냐고 묻는다면, 그 또한 아니었다. 그들 또한 그녀의 밑에서 젊은 시절을 보내며 추억을 쌓던 시절이 있었기에. 여기까지만 본다면 모임 때마다 반복되는 연례행사에 가까웠지만, 이번 행사에는 평소와는 다른 점이 있었다. 델피나리스의 옆. 에리스와 비슷하거나 그보다 조금 더 연하로 보이는 소년이, 마치 어미 새를 뒤따르는 아기 새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당연히, 델피나리스와 인사를 나눈 제자들 역시 소년에게 관심을 표할 수밖에 없었다. “호오, 이 아이가 그 새로운 제자입니까?” “그래, 무척이나 훌륭한 자질을 품고 있지.” 델피나리스의 거침없는 단언에, 제자들은 살짝 놀란 기색을 드러냈다. 그들이 아는 스승은 제자들 앞에선 누가 더 뛰어나니, 누가 더 재능이 있니 하는 표현을 가급적 사용하지 않으려 하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어쨌든 새 막내가 들어왔으니 어른으로서든 선배로서든, 여기서는 환영의 말을 건네는 것이 옳을 터. “반갑구나, 앞으로 잘 부탁한다.” “아, 네.” “?” 그리고 그렇게 인사를 건넨 이들은 하나같이 곤혹과 당혹을 금치 못했다. 소년은 무척이나 말이 짧았다. 그것도 처음 만나서, 상대가 높은 사람이라서 긴장 탓에 말수가 적어진 그런 게 아니라, 노골적으로 귀찮아하는 듯한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그들은 조금 의문 어린 눈으로 델피나리스를 바라보았지만, 그들의 스승은 꿀이 뚝뚝 떨어지는 눈으로 소년을 바라볼 뿐이었다. 늦둥이 손자가 무엇을 하든 귀엽게만 보이는 어르신 같은 얼굴이었다. 다소 어처구니가 없긴 했지만, 제자 중 대부분은 구태여 그걸 내색하진 않았다. 상대를 사춘기 애송이라고 생각하면 불쾌할지언정 이해하지 못할 일은 아니었다. 굳이 스승이 보는 앞에서 나쁜 사람 역할을 하고 싶지도 않았고. 하지만, 그렇게 적당히 흘려넘길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자네, 그림룬 백작님의 양자라고 했던가? 아까부터 보아하니 태도가 좀 그렇군.” 라페르 체펠린. 스물 후반의 나이로, 델피나리스의 제자 중에는 비교적 젊은 편에 속하는 청년이 앞으로 나섰다. “아무리 어려서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해도 한도가 있는 법이다. 너의 그런 무례한 언동이 스승님의 명예까지 더럽힐 수 있다는 걸 명심하도록.” 정곡을 찌르는 지적에 델피나리스가 조금 당황하는 기색을 드러냈지만, 다른 제자들은 내심 통쾌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허나, 소년의 반응은 색달랐다. “제가 스승님의 명예를 더럽혔다고요? 아닌 것 같은데요.” “지금 그 태도가 문제라는 뜻이다. 이해를 못하겠나?” “아저씨처럼 스승님 밑에서 배웠으면서 겨우 그 실력밖에 안 되는 게 더 명예 훼손 아닌가?” “뭐, 뭣?!” 라페르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르고, 다른 제자들 역시 얼굴을 찌푸렸다. 델피나리스 역시 이건 과하다고 여겼는지, 소년을 제지했다. “그쯤 하려무나, 선배에게 너무 과하구나.” “…음, 죄송해요 스승님. 제가 순간 울컥해서 실수를 했나봐요.” 갑자기 풀이 죽은 것처럼 어깨를 늘어트리는 소년. 허나 라페르는, 그리고 라페르와 같은 방향에 있던 에리스는 분명히 볼 수 있었다. 델피나리스에게는 보이지 않는 각도에서, 소년이 라페르에게 비웃음을 날린 것을. 라페르가 폭발했다. “스승님, 말리지 말아주십시오! 저와 제 가문의 명예를 걸고서라도, 여기서 이놈의 버르장머리를 단단히 고쳐놔야겠습니다!” “진정하렴 라페르. 아직 어린아이야.” “아니, 괜찮아요. 스승님.” 소년은 스승에게는 공손하게, 하지만 그 안에 음흉함과 오만함을 담아 선언했다. “선배께서 가르침을 주신다고 하니, 기꺼이 받아들여야죠.” “……! 그 말, 나중에 바꾸지 말아야 할 거다. 스승님. 당사자도 이리 말하지 않습니까, 모의전을 허락해 주시지요.” “그렇습니다, 스승님. 선배와 후배가 함께 어울리니 이 또한 좋은 일 아니겠습니까.” 당사자들이 서로 나서겠다고 하고, 다른 제자들 역시 동조하니 델피나리스 역시 이를 막아 세울 수 없었다. *** 에른스트가 물었다. “그건 즉, 당신 이외의 악마가 이 근방에 있다는 뜻입니까?” “당사자는 아닐걸? 냄새가 옅으니까. 아마 계약자 같던데.” *** “커헉!” 소년이 발사한 마력의 탄환에 얻어맞고, 라페르가 입에 거품을 물고 바닥을 뒹굴었다. 모두가 경악한 도중, 소년이 순진무구한 척을 하며 라페르에게 말했다. “가르침은 이걸로 끝인가요? 잘 배웠습니다.” 잘 배웠다는 말이 그저 조롱에 지나지 않는다는 건 너무나도 자명했다. 에리스의 눈동자가 크게 떨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