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괴도 도팽(Dauphin) (14) - 그럴듯한 변명거리 “지금부터 경비대는 도팽 소탕 작전에서 발을 뺀다.” 보베르 경비대장이 내린 명령에, 레브루크의 소대장들은 하나같이 당혹을 금치 못했다. “발을 빼다니요? 저희보고 도팽을 붙잡지 말란 말씀이십니까?” “여태까지 도팽과 맞서 싸운 건 저희 경비대입니다!” 소대장들의 반발에, 보베르 경비대장의 눈이 찌푸려졌다. 그는 레브루크에 도착한 이후 줄곧 기분이 좋지 않았는데, 본래 본가에서 중대장들에게 지시를 내려야 할 자신이 여기까지 끌려와 웬 무능한 중대장 놈의 빈자리를 메워야 한다는 게 어지간히도 불쾌한 기색이었다. 고로, 그는 딱히 돌려 말하는 것도 없이 대놓고 고했다. “사르노스 기사단장님의 지시다. 어차피 있어 봐야 방해가 되니 아예 비키라더군. 내가 이 이상 설명을 해줘야 하나?” “…….” 소대장들의 입이 딱 하고 다물어졌다. 기사단장은 기사단의 대표. 경비대장은 경비대의 대표. 둘 다 똑같이 한 집단을 책임지는 위치지만, 귀족 출신들이 주류가 되는 기사단과 평민 주축인 경비대는 그 위상 자체가 다르다. 경비대가 아예 뒷전 취급당하는 현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건 보베르 대대장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일개 평기사도 아니고 기사단장이 직접 명령한 이상은 보베르 입장에선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모두가 침묵하는 도중, 달리아만이 조용히 손을 들었다. 대대장이 반응했다. “뭔가?” “기사단만으로 경계를 서려 한다면, 인원이 부족할 겁니다.” “현재 그 도적놈의 ‘표적’은 50명도 남지 않았을 텐데? 현재 이 지역에 온 평기사가 딱 백 명이니, 한 사람당 두 명씩 붙여서 밤낮으로 호위하면 충분하겠군.” “부족합니다.” “…뭐?” “기사 한 명으로는 놈을 막을 수 없다고 말씀드리는 겁니다. 거기에 그런 구조라면 각 기사들 사이의 간격이 넓어 외부에서 지원이 오는 데도 시간이 걸립니다. 호위 대상의 옆에서 놈을 기다릴 게 아니라, 꾸준한 정찰과 경계로 도팽이 호위 대상 곁에 도달하기 전에 알아채고 지원을 부를 필요가 있습니다.” “잠깐, 잠깐 기다리게.” 보베르 대대장은 달리아의 말을 가로막은 뒤, 이해가 안 간다는 듯한 얼굴로 짜증을 냈다. “자네, 사르노스 기사단에서 견습 기사(Squire)를 넘어 평기사가 되기 위한 조건이 뭔 줄은 아나?” “정확히는 알지 못합니다.” “여러 세세한 조건도 있지만, 제일 핵심은 이걸세. 검기를 뽑아낼 것. 즉, 저들은 하나하나가 전부 4등급의 강자란 뜻일세.” 4등급의 인재는 귀하다. 비르카 내에서도 그 나름대로 거대한, 그러니까 ‘도시’라고 취급받을 만한 영지를 가진 영주가 비장의 수로 한 명 데리고 있으면 다행일 정도고, 왕국 전역에 세력을 뻗치고 있는 모험가 길드에서 인재를 박박 긁어모아도 모험가 등급이 아닌, 진짜 의미로 4등급 수준인 건 오십여 명 안팎이다. 그런 의미에서 구성원 전부도 아니고 일부를 파견했을 뿐인데(과반수이긴 했지만) 무려 백 명의 4등급이 튀어나오는 사르노스 기사단은 명실상부 비르카 최강의 무력 집단임을 자부할만했다. “그런 강자들이 지금 겨우 도적 상대로 패배한다는 뜻인가? 심지어 지원군이 도우러 올 때까지 혼자서는 버티지도 못할 거라고?” “도팽은 기습과 기만에 능합니다. 심리의 허를 찌르는 놈에게 선수를 빼앗기고 나면,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고 해도 본래 실력의 반도 발휘하지 못하고 그대로 당해버릴 수 있습니다.” 달리아는 호흡을 가다듬고 논리적으로 대대장을 설득하려 했다. 문제는 논리적인 이야기라고 해서 상대가 반드시 들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 실제로 대대장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으며 달리아의 말을 끊었다. “됐네. 이미 결정된 일이니 왈가왈부하지 말게. 쓸데없는 짓을 했다간 항명으로 알고 바로 벌을 내리겠네.” 이야기를 이어갈 생각이 전혀 없어 보이는 대대장의 모습에, 달리아는 내심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어쩌면 괜한 걱정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아무리 그래도 명색이 비르카 왕국 최강의 기사단이 그리 허무하게 당하기야 하겠는가. *** 한편, 그 시각 사르노스 기사단. “솔직히, 이게 우리가 이렇게 우르르 몰려올 정도의 일인가?” “경비병 놈들이 무능한 거야 하루 이틀도 아니지. 뭐, 매일 하는 훈련 대신 나들이 하는 거라치면 그리 나쁠 것도 없잖아?” “쳇, 모처럼 검을 휘두를 기회가 왔다고 생각했는데, 겨우 도적 하나라니. 이왕이면 화끈하게 수백쯤 되는 도적단이면 좋을 것을.” 백작의 지원을 받으며 나날이 실력을 연마하는 기사들이었지만, 정작 그들이 그 무력을 휘두를 기회는 거의 없었다. 전쟁? 현재 레드벨과 치열한 경쟁 중인 사르노스지만, 아무리 그래도 대뜸 기사들을 보내 무력 항쟁을 벌일 정도로 막 나가진 않는다. 여차할 때는 몰라도. 치안 유지? 그런 천한 일들은 경비대가 하는 거지 기사단이 나설 업무는 아니다. 비루한 닭을 잡는데 어찌 소 잡는 칼을 쓰겠는가? 뭐, 상대가 어느 정도 규모가 있는 도적단이라면 한번 고려해 볼만하지만, 도적단들도 생존 본능이라는 게 있는 만큼 굳이 사르노스 백작가의 영역을 얼씬거리진 않는다. 전체적인 치안이 개판인 비르카 왕국이라면, 다른 곳에도 털 곳은 많으니까. 호위? 왕국 최고의 권력자이자 본인도 4등급의 기사인 사르노스 백작을 노릴 인간도 드물지만, 설령 암살 위험에 대비한다고 해도 그게 세 자릿수를 넘는 기사단이 총력을 기울일 업무는 아니다. 중요도가 낮다는 게 아니라, 인력 과잉이라는 의미로. 고로 사르노스 기사단의 단원 중에는 은근히 큰 전투나 공훈을 세울만한 사건을 기대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사르노스 백작은 기사들을 크게 우대해 주는 편이라서 대우 자체는 불만이 없지만, 한참 끓어오르는 혈기와 공훈을 향한 욕심을 해소하는 일은 또 별개니까. 그리고 그런 기사들에게, 이번 임무는 솔직히 말해서 무척이나 흥이 안 나는 것이었다. 그야 백여 명이나 몰려와서 하는 게 겨우 도둑 한 명 붙잡는 거라는데 이에 어떤 기대와 흥미를 품을 수 있으리. “그래도 나름 실력이 좋다는데, 싸우는 맛은 있지 않을까?” “실력이 좋아 봤자지. 일개 경비병하고도 일진일퇴를 거듭하는 수준이면 뻔하잖아?” “하긴 그것도 그런가.” 물론 이들 역시 사르노스 백작이 추려낸 정예 중의 정예. 흥미나 의욕이 별로 없는 것과는 별개로, 맡겨진 임무 자체에는 지극히 충실했다. 왕국에서도 손꼽히는 기사들이 전담 호위로 붙어 밤낮으로 곁을 지키자, 표적이 된 귀족들 역시 큰 만족을 표했다. “역시 기사가 곁에 있으니 안심감이 다르군! 그동안은 매일 밤을 설쳐야만 했다네.” “하하, 안심하십시오. 제가 남작님의 곁에 있는 한, 도적놈 따위는 감히 근처에도 오지 못할 것입니다.” “나야 기쁜 일이네만, 자네들은 곤란한 거 아닌가? 놈이 겁을 먹고 튀어나오지 않으면 붙잡을 수도 없지 않나?” “이런, 그건 맹점이었군요!” “하하하하하!” 기사들도, 귀족들도, 일반 시민들도, 모두가 사르노스 기사단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았다. 일개 경비병조차 막아낸 도적을 어찌 제대로 된 기사들이 당해내지 못하겠는가, 라고. “…이상하군. 왜 스테이지가 다음으로 넘어갔는데 난이도가 더 허접해진 거 같지? 일 잘하던 경비대는 왜 다른 곳에 치워두고? 내가 미처 알아내지 못한 고도의 함정인가?” [그래서, 포기하게?] “괴도의 자존심을 걸고 그럴 수야 없지! 상대가 이렇게 도전을 해 온다면 더 크고 강렬한 한 방으로 되갚아 줄 수밖에!” 그로부터 약 3일 뒤. 남은 표적 중 6명이 도팽의 손에 납치되어 인간 피라미드 모습으로 전시되었고, 그들을 호위하던 기사들은 전부 의식불명 상태로 골목길에 나자빠져 있다가 지나가던 행인들에게 발견되었다. 도시가 발칵 뒤집어졌다. *** 사람에게는 기대치라는 게 있다. 허름한 가게에서 푼돈을 주고 살 수 있는 음식이 맛없다고 해도, 사람들은 그렇게까지 분노하진 않는다. 하지만 최고급 레스토랑에서 비싼 가격을 치르고 구매한 음식의 맛이 형편없다면, 사람들은 크게 분노할 것이다. 사르노스 기사단의 현 상태가 정확히 이에 부합했다. 왕국 최강의 무력 집단. 최소 4급 이상의 강자들. 사르노스 백작가에서 지닌 힘의 상징. 온갖 화려한 수식어들이 그들을 향한 기대치를 끌어올렸고, 그들이 무언가 대단한 것을 보여주리라 여겼지만, 정작 그들이 보여준 결과는 너무나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처음 여섯 명 동시 처벌이 발판이라도 된 것처럼, 도팽은 거의 하루 간격으로 습격을 반복하며 범행을 성공시켰다. 맨 처음 한 방 먹은 것은 방심이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두 번째로 당한 것도 아직 적응이 덜 돼서라고 변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도팽에게 농락당하는 것이 세 번째에 이르자, 사르노스 기사단은 어떤 변명도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변명을 말해도 주변에서 들어주질 않았다. “경비대는 그나마 어찌어찌 대응이라도 했지, 이쪽은 그냥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잖아?” “경비대가 일을 제대로 못 해서 자기들이 왔느니 어쩌느니 떠들었던 주제에, 정작 진짜 일을 제대로 못 하는 건 본인들이네.” “처벌이라면서 경비대 중대장을 반병신으로 만들어 놨는데, 정작 본인들은 아무 처벌도 안 받는 게 기가 막히군.” 사람들이 기사단 앞에서 대놓고 저런 소리를 떠들어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들을 향한 은근한 시선이나, 먼 곳에서 수군거리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지금 레브루크 내에서 자기들이 어떤 처지인지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머저리 같은 놈들…!!” 기사단장은 격노했다. 그건 이때라는 듯이 날뛰기 시작한 도적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형편없는 실태를 보여준 부하들을 향한 분노이기도 했다. 뭔가 대단한 것을 바란 것도 아니다. 그냥 도팽이 오면 자기에게 알리는 것, 그리고 자기가 현장에 도착할 때까지 버티는 것. 이 두 가지가 그렇게도 어렵단 말인가? 단원들이 내뱉은 변명도 가지각색이었다. 물속에서 갑자기 뻗어 나온 손이 자기를 끌고 들어갔다, 분명 벽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사람이 튀어나왔다, 놈이라고 생각하고 베어냈는데 그냥 인형이었다 등등. “일개 경비대 소대장조차 해냈던 걸, 비싼 돈으로 키워낸 부하 놈들이 못 해내는군.” 기사단장의 한탄에, 부단장이 반응했다. “그 부분에 대해서 말입니다만, 살짝 수상한 정황을 파악했습니다.” “수상한 정황?” “예, 저희가 오기 전 도팽과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는 8소대장입니다만, 다름 아닌 ‘아르크의 반역자’가 남긴 딸이더군요.” 아르크의 반역자. 그 이름을 들은 순간, 기사단장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그게 사실인가? 그 남자의 딸이, 이곳에서 경비병 노릇을 하고 있다고? 어떻게?” “그 반역자가 저항 없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조건으로 당시 반란에 참여했던 백성들이나 관련자들을 사면한다는 왕명이 있었잖습니까. 그 덕에 처형되지 않고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이곳에 정착한 모양이더군요.” “아무리 그래도 무지렁이들을 현혹해서 귀족들에게 검을 향한 이의 혈육을 경비대에 받았다고? 아, 혹시 정체를 숨겼나?” “아뇨, 경비대 가입 시에 본인 입으로 털어놓았다고 합니다. 덕분에 어느 정도 연식이 있는 귀족들은 최근까지만 해도 그녀를 꺼림직하게 여겼고요.” “당연한 일이지. 오히려 왜 멀쩡하게 경비대로 활동할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야. 허가를 내려준 놈은 병신인가?” “어, 그, 기록상으로는 당시에 우연히 레브루크에 들셨던 백작님께서 재미있을 것 같다면서 허락하셨다고….” “…흠. 어흠! 역시 백작님이시군. 실로 자비가 깊으신 분이 아닌가.” 기사단장은 방금 본인이 내뱉었던 욕설을 없던 일로 하려는 듯이 굴었고, 부단장 역시 그런 기사단장을 굳이 지적하지 않았다. “그러면, 설마 그 경비병은 백작님께서 관심을 기울이고 계신 상대인 건가?” “아뇨, 그건 아닙니다. 막 경비대에 들어올 당시만 해도 다들 그런 의혹을 품고 노골적으로 배척하진 않았던 모양입니다만, 몇 년이 지나도록 아무런 언급도 지시도 없었다고 하니까요.” 치밀하고 계획적인 행동보다는 즉흥적인 행동을 선호하는 사르노스 백작인 만큼, 달리아의 존재 그 자체를 잊어버렸을 가능성 역시 충분했다. 상황을 파악한 기사단장은 입가에 묘한 미소를 품었다. “확실히 공교롭기는 하군. 백성들의 권리니 뭐니 하는 헛소리를 주워섬기며 귀족들에게 칼을 겨눈 반역자의 딸. 그리고 마찬가지로 천것들을 위해서라며 미쳐 날뛰는 도적놈.” “그 도적이 아르크 사건의 관련자로, 당시의 리더였던 남자의 딸에게 의리를 지켜 의도적으로 공훈을 몰아주고 있다고 해도 이상할 게 없겠군요.” “참으로 무서운 일이로군. 치안을 지켜야 할 경비병과 시민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도적이 사실은 한 패거리였다는 뜻 아닌가?” 모든 것은 그저 음모론일 뿐, 그럴듯한 증거는 아무것도 없었다. 허나 두 명은 개의치 않았다. 자랑스러운 사르노스 기사단이 일개 경비병보다 못하다는 평가를 막기 위해서라도, 달리아는 자신의 명예를 위해 도적에게 협력한 배신자여야만 했으니까. “백작님께 연락드려야겠군. 만약 그 병사를 따로 챙기라는 말씀이 없으시다면, ‘올바른 대처’에 나서야겠어.” 폭력에 의한 권위는 사람들의 두려움을 잃는 순간 무의미해진다. 그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일개 경비병 하나의 무고함 같은 것은 아무래도 좋은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