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음악가 하멜(Hamel) (6) - 과거와 미래 한 남자가 있었다. 번영한 도시의 그림자에서 나고 자라, 온갖 추악함과 더러움을 제 양식 삼아 살아온 남자가. *** 한 여자가 있었다. 번영한 도시의 햇빛 속에서 나고 자라, 온갖 아름답고 깨끗한 것을 제 양식 삼아 살아온 여자가. *** 쓸데없이 식량만 축내는 애새끼가 늘어났군. 그리 말하며 저를 내려다보는 부모의 눈이, 남자의 가장 옛 기억이었다. *** 오오, 나의 보물. 어쩜 이리도 사랑스러울 수가. 그리 말하며 저를 내려다보는 부모의 눈이, 여자의 가장 옛 기억이었다. *** 남자는 천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천박한 이였고, 세상을 구분 짓는 보이지 않는 천장 아래에서 진흙탕을 뒹구는 자였다. *** 여자는 귀족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고귀한 이였고, 세상을 구분 짓는 보이지 않는 천장의 위에서 여유롭게 뛰노는 자였다. *** 남자는 항상 무언가를 빼앗아야만 했다. 빼앗지 않으면 무엇 하나 손에 쥘 수 없었으니까. 그가 살아가는 무대는 더러운 뒷골목이었고, 사람들은 그를 무뢰배라 부르며 경멸했다. *** 여자는 무엇 하나 빼앗을 필요가 없었다. 따로 요구할 것도 없이 많은 것이 제 손에 주어졌으니까. 그녀가 살아가는 무대는 아름다운 무도회였고, 사람들은 그녀를 한 떨기 꽃처럼 여기며 사랑했다. *** 그러던 어느 날, 남자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을 기회가 찾아왔다. 억압하고 착취할 뿐 무엇하나 베푸는 일 없던 탐욕스러운 왕이 시민들의 정당한 분노 앞에 매달리고, 국왕 밑에서 악덕을 다하던 귀족들이 함께 쓸려나갔다. 남자는 더 이상 참지 않았다. *** 그러던 어느 날, 여자에게 있어서는 둘도 없을 악몽이 찾아왔다. 백성들의 어버이이자 국가의 근본이신 폐하께서 무지몽매한 반역도들에게 시해당하시고, 폐하를 지키려던 명예로운 귀족들 역시 함께 명을 다하고 말았다. 여자는 두려워 몸을 떨었다. *** 남자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지나가기만 해도 혐오를 숨기지 않던 메이드. 실력도 없고 노력도 부족한 주제에 오직 가문의 힘으로만 그럴듯한 장비와 칭호를 얻어낸 기사. 본인이 저지른 온갖 치부의 뒤처리를 남자에게 떠넘겼으면서, 그 대가를 요구하면 사냥개에게 잔반이라도 던져주듯 반응하던 영주. 그들을 몸소 베고, 짓밟고, 유린하며 남자는 자유를 느꼈다. *** 여자에게 항상 웃는 얼굴을 보이며 말벗이 되어 주었던 메이드. 아가씨의 안전은 제가 지키겠노라며, 듬직한 얼굴로 가슴을 펴던 기사. 가족을 사랑하고 항상 좋은 것만 주려고 노력했던, 하나뿐인 소중한 아버지. 그들이 눈앞에서 베이고, 짓밟히며, 유린당하는 모습을 보고 여자는 절규했다. *** 남자가 전리품을 바라보았다. 훗날 미스트헤븐을 암중에서 지배할 조직의 초대 보스가 승자로서 그 권리를 행사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아이가 태어났다. *** 여자가 원수를 노려보았다. 과거 미스트헤븐을 통치하던 가문의 마지막 생존자가 패자로서 눈물과 저주를 토해냈다. 그리고, 둘 사이의 아이가 태어났다. *** 남자에게 있어서 아이의 존재는 자신의 승리를 상징하는 훈장이었다. 남자는 자신을 닮아 뛰어난 재능을 타고난 딸을 기꺼워했다. *** 여자에게 있어서 아이의 존재는 인생에 새겨진 더러움이자 낙인이었다. 여자는 자신을 닮아 아름다운 미모를 타고난 딸을 혐오했다. *** 남자는 딸에게 자신이 어둠 속을 전전하며 손에 넣은 전투 기술과 영주 가문에게서 빼앗은 연공법을 가르쳤다. 사람을 죽이는 법. 고문하는 법. 이간질하고 배신하고 협박하는 방법이 그가 딸에게 베푼 것이었다. *** 여자는 제정신일 때는 딸에게 저주를 퍼부었고, 마약에 취해 있을 때는 딸을 망각함으로써 그 존재를 부정했다. 어머니가 자신을 사랑해 줄 것이라는 기대. 깨진 유리병에 내려 찍힌 한쪽 눈의 시력이 그녀가 딸에게서 빼앗은 것이었다. *** 남자가 죽음을 맞이했다. 마약 매매를 통해 손에 넣은 재화에 둘러싸여, 인신매매를 통해 취한 여자들을 대동한 채, 피와 공포로 세운 악의 왕국을 유산으로 남긴 채. 추레하고 추악한 죽음이었다. *** 여자가 죽음을 맞이했다. 미스트헤븐의 마지막 푸른 피로서 유지를 남기지도, 인생을 빼앗긴 피해자로서 복수를 다하지도, 한때 아름다웠던 미모를 유지하지도 못한 채. 허망하고 비참한 죽음이었다. *** 남겨진 딸은 생각했다. 아비는 증오와 탐욕을 물려주었고, 어미는 절망과 허무를 물려주었다. 자애 대신 폭력을 배웠고, 사랑 대신 공포를 학습했다. 맑고 투명한 물은 무언가를 말끔히 씻어내고 깨끗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태어날 때부터 더러움을 타고났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타고난 본질이 더럽고 질척거리는 진흙탕이라면, 그래서 만지는 것도 행하는 것도 모두 더러울 수밖에 없다면. 혹여 깨끗한 것에 접해도 그것을 더럽게 만들 뿐이라면. 그런 삶에는 과연, 의미가 있을까? *** “연주를 배워보실 생각은 없으십니까?” 그것은 몇 번째의 만남이었을까. 하멜이 건넨 제안에, 히스티아는 눈을 껌뻑였다. “…연주라니, 내가?” 처음에는 잔뜩 긴장한 상태로 마치 깨지기 쉬운 유리라도 다루듯 하멜을 대하던 히스티아였지만, 그 태도가 자연스러워지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 수수께끼의 길거리 악사는 자신의 음악이 무시된다고 느꼈을 때는 제법 까칠하고 고고한 자세를 보였지만, 그 외에서는 무척이나 서글서글하고 친근한 성격이었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는 저와 당신밖에 없으니 당연히 히스티아 당신에게 하는 말이지요. 아, 혹시 기척을 죽이고 숨어 있는 제3의 인물 같은 게 있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야. 그냥 조금 당황스러워서.” 히스티아는 무어라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이내 솔직한 본심을 털어놓았다. “나는 연주 같은 건 전혀 할 줄 몰라. 악기를 다뤄 본 적도 없고.” “그야 처음부터 잘하는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하멜은 깃털 달린 모자의 챙을 손가락으로 치켜올리며 씨익 웃었다. “원래 입문이라는 건 다 그런 겁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다가 나도 이런 거 만들어 볼까 하는 생각해 요리를 시작하는 거고, 멋진 그림을 보고 나도 저런 작품을 그려보고 싶다는 생각에 붓을 쥐는 거죠.” “…반대의 경우도 있지 않아?” “오! 물론이지요. ‘내가 해도 저것보단 잘하겠다!’ 역시 좋은 입문 동기니까요. 아주 잘 아시는군요!” 하하하! 하고 과장된 태도로 웃어 보이는 하멜의 모습에, 히스티아의 입꼬리에도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처음에는 하멜이라는 악사의 음악에 매료된 그녀였지만, 그와 어울리면 어울릴수록 이제는 하멜이라고 하는 남자 그 자체에 매력을 느끼는 중이었다. 길거리를 전전하는 유랑 악사. 제대로 된 집 하나 없이 숙소를 빌리거나 노숙을 오가는 떠돌이이면서도, 그는 항상 유쾌했고 얼굴에 미소를 잃지 않았다. 그녀의 삶을 가득 메우던 피와 더러움을, 그는 자신의 음악과 밝은 천성으로 깨끗하게 씻어내고 있었다. “그래서, 어떻습니까?” “으응, 흥미가 있냐 없냐를 묻는다면 있긴 하지만….” 히스티아는 망설였다. 하멜과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고, 그에게 음악을 배우는 것은 틀림없이 행복한 일이 될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고개를 끄덕일 수 없었다. 하멜이 그 영혼과 본성부터 깨끗하기에 이토록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반대로 수많은 더러움과 함께 살아온 자신의 연주는 어떨까. 어쩌면 차마 듣기 괴로울 만큼 추악한 것은 아닐까? 그 해답을 확인하기가 두려워, 히스티아는 차마 긍정의 말을 내뱉을 수가 없었다. 그녀가 에둘러 거절을 입에 담으려던 그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원래 연주라는 게 합주가 되면 그 다양성이 훨씬 늘어나는 법이니까요.” 합주. 그 단어가 입 밖으로 나오려던 거절의 말을 다시 집어삼키게 했다. “합주라니, 너랑 내가?” “그렇습니다! 양쪽 모두 바이올린을 드는 것도 좋고, 히스티아는 바이올린에 저는 피리, 혹은 그 반대도 나쁘지 않군요. 아, 적절한 무대를 빌릴 수만 있다면 피아노도 활용해보고 싶군요. 실로 꿈이 넘쳐나는 일 아닙니까!” 마치 그런 미래가 바로 눈앞에 보이기라도 하는 듯, 아이처럼 들뜬 말투와 눈빛으로 하멜은 그녀를 설득했다. 그 열정이 너무나도 순수했기에, 히스티아 역시 조심스레 그 광경을 상상해 보았다. 아직은 막연하고, 곳곳이 흐릿한 이미지. 하지만, 그런데도. “…멋지네.” 여전히 자신의 연주가 추악할지도 모른다는 불안은 남아 있다. 하지만 하멜과 함께한다면, 그의 힘을 빌린다면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언제 올지 모르는 비를 기다리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세상의, 사람들 마음속의 더러움을 씻어낼 수 있다고 한다면. 그 어렴풋한 상상만으로도, 히스티아는 가슴이 떨리는 것을 느꼈다. “하핫! 좋습니다. 사실 1순위였던 히스티아가 안 된다고 하면 동네 아이들을 상대로라도 시도해 볼 계획이었거든요.” 본인이 1순위여서 좋다고 여겨야 할까, 아니면 자기 외에도 다른 선택지가 있었다는 사실에 아쉬워해야 하는 걸까. 일단은 전자라고 생각하면서, 히스티아는 입을 열었다. “그렇게나 합주가 하고 싶다면, 꼭 누군가를 새로 가르치는 거 말고도 본래 있던 악사와 협력하면 되는 거 아니니? 혹시 따돌림이라도 당하는 거야?” “그런 문제는 아닙니다. 사실 합주도 합주지만, 누군가를 가르친다는 행위 그 자체가 중요한 것도 있거든요. 그 자체가 제 실력을 키우는 데도 도움이 되니까요.” “…그래?” “이런, 의외라는 표정이시군요.”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하멜 네 연주는 이미 완벽하다고 생각했거든.” “좋게 평가해 주시는 건 감사한 일이지만, 저는 아직 부족한 부분이 많습니다. 제 목표는 아버지를 넘어서는 거니까요.” 하멜의 눈이 번쩍이며, 그 얼굴에 악동 같은 기운이 머물렀다. “제 형제들은 저마다 특기 분야가 다릅니다만, 그 능력은 대개 아버지의 하위 호환, 기껏해야 동위 호환 정도가 한계입니다. 헌데 제가 아버지를 음악이라는 분야로 넘어선다면, 유능한 형제들도 하지 못한 위업을 달성하는 셈이지요!” 여러 가지로 호기심과 수많은 추측을 불러일으키는 말이었다. ‘길거리 악사면서 수많은 악기를 자유롭게 다룰 줄 안다는 것도 그렇고, 역시 평범한 태생은 아닌 것 같네.’ 히스티아는 그렇게 생각했지만, 구태여 하멜에게 가족이나 과거에 대해 질문하지는 않았다. 하멜 역시 히스티아의 기이한 강함이나 의문스러운 정체에 대해 캐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서로는 그저 음악을 좋아하는 두 사람이면 충분했다. “아, 그래도 F형님은 빼야겠군요. 비교는 인간끼리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아주 조금은 호기심에 그냥 넘어가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충동이 들긴 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