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거지 그리츠(Gritz) (8) - 너만 아는 그레이스라는 소녀에게, 카닐리안의 가주는 감히 어떻게 항거할 수 없는 절대자였다. 그는 이 벨라리아라는 영지의 왕이다. 그가 누군가를 죄인이라고 결정하면 그자는 죄인이 되고, 반대로 무죄라고 선언하면 그 어떤 죄도 무죄가 된다. 그레이스가 아무리 대담하고 세속의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는 면모가 있다고 한들, 감히 가주에게 대놓고 맞서는 건 불가능하다. “…이상입니다.” 고로, 그 가주가 그리츠의 눈치를 슬슬 살피며 조곤조곤 옛 조상들의 이야기를 떠드는 광경은 그녀에게 있어서 가히 초현실적일 수밖에 없었다. 아니, 그녀뿐만 아니라 이 벨라리아 땅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럴 터였다. 평소 그토록 위엄있고 위풍당당한 모습만 보이던 가주가, 일개 거지를 상대로 마치 개새끼처럼 비굴한 태도로 굽신거리고 있는 걸 누가 믿을 수 있겠는가. “그래, 어떠냐. 네가 짊어지려 했던 책무인지 뭔지가, 모두 어떤 병신들의 병신 짓거리의 결과라는 걸 알게 된 기분은?” 반면, 그 어마어마한 위업을 이뤄낸 그리츠의 태도는 너무나도 시큰둥했다. 가주가 지닌 권위나 사회적인 지위 따윈 그의 앞에서 어떤 의미도 없다는 것처럼. 하기야 애초에 그런 걸 신경쓰는 인간이었다면 저런 오크통 하나를 집 삼아 돌아다니지도 않았을 것이다. “어떠냐고 물어도….” 그레이스는 난감함을 느꼈다. 그건 그녀가 특별히 자애로워서 그렇다기보다는, 그냥 이 상황에 현실감이 없어서 그런 면이 더욱 컸다. 아마 이 이야기를 꺼낸 대상이 그리츠였더라면 그레이스는 그걸 진지하게 받아들이기보다는 반쯤 허구로 여겼을 것이다. 그리츠도 그걸 예상했으니 구태여 가주의 입으로 그레이스에게 상황 설명을 하게 한 걸 테고. 하지만 그런 그레이스의 난감함과 곤혹스러움이 가주에게는 사뭇 다른 의미로 보였는지, 그는 필사적으로 고개를 조아렸다. “미, 미안하다. 내 진심으로 사죄하마. 하지만, 나에겐 선택권이라는 게 없었다!! 내가 가주 자리에 올랐을 때는, 이미 저 괴물에게 가문 전체가 지배당한 뒤였단 말이다!” “쯧쯧, 사죄가 끝나기도 전에 변명부터 내뱉는 꼴 하고는.” “…….” 옆에 있던 그리츠가 빈정거리자, 가주는 묘하게 기가 죽은 태도로 입을 다물었다. 가주의 얼굴에는 억울함과 절박함이 한가득 담겨 있었는데, 아이러니하게도 그레이스는 그 표정에서 고아원의 동생들을 겹쳐보았다. ‘…정말로 본인은 피해자라고 생각하는구나.’ 누군가에게 꾸짖음을 받아, 그걸 이기지 못해서 사죄를 할 뿐, 내심으로는 자기가 잘못했다고 생각하지 않는 어린아이. 그런 어린아이와 지금 가주의 얼굴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선조들의 실수니까, 자기는 그 뒤처리를 떠맡았을 뿐이니까.’ 가주 본인의 입장만을 생각해 본다면 제법 그럴듯한 변명이기는 했다. 그 가주의 명령 때문에 제물로 바쳐질 뻔했던 그레이스 앞에서 저런 표정을 짓는다는 건 여러모로 답이 없지만. “하아.” 새삼 머리가 지끈거리는 기분에, 그레이스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츠 씨.” “오냐.” “잠깐 재워주실래요?” 뭘, 이라는 질문은 되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퍽! 하는 소리와 함께 뒤통수를 지팡이로 두들겨 맞은 가주가 그대로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을 뿐. “그래서, 이 뒤는 뭘 어째야 할까요?”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이게 내 일이냐? 니 일이지?” “와, 상황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고 나머지는 알아서 하라고요? 양심이라는 게 있어요?” “양심이 있으니까 밥 한 끼 얻어먹고 이 정도로 해준 거지. 너무 날로 먹으려 하면 탈 난다.” 참으로 성격 나쁜 노인네 같은 이죽거림이었다. 평범한 마을 처녀였다면 벌컥 화를 내거나 울먹여도 이상하지 않았을 정도. 허나, 그레이스는 그레이스대로 보통과는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아, 그러세요? 그러면 그냥 가세요.” 그녀는 그리 말한 뒤, 대뜸 바닥에 떡하니 드러누웠다. 그런 그레이스를 보며, 그리츠가 물었다. “너 뭐하냐?” “어디 사는 대단한 거지 씨는 아는 것도 많고 힘도 세서 자기 멋대로 할 수 있지만, 멍청한 데다가 힘도 없는 계집아이는 그럴 능력이 없거든요! 그러니 뭐 어쩌겠어요. 잠이나 한숨 자야지. 일어나기 전에 목이라도 잘리면 호상이려나.” “…….” “뭐해요? 안 가고? 아, 저 불경죄로 처형당하는 거 구경하시려고요? 뭐 그건 그리츠 씨 자유니까 알아서 하시면 되겠죠.” 배를 째라고 입으로 뻗대는 수준을 넘어, 아예 뱃가죽을 칼날 앞에 들이미는 것 같은 대담함에, 천하의 그리츠 역시 잠시 말문이 막혔다. “거 계집년 성격하고는.” 작게 투덜거린 뒤, 그리츠는 심드렁하게 말했다. “알았으니까 일어나라.” “그냥 누워서 계속 이야기하면 안 돼요? 막상 누우니까 꽤 편한데.” “나도 도달하지 못한 진정한 개의 경지에 이르렀으니 참으로 감탄한 일이군. 근데 거지들이 개를 좋아하는 이유가 뭔지는 아냐? 훌륭한 단백질 공급원이라서 그런 거다.” 그레이스는 단백질이라는 게 무슨 의미인지 굳이 캐묻지 않았다. 지팡이를 슥슥 움직이는 모양새만 봐도 대충 뜻이 통했기 때문이다. 개처럼 두들겨 맞고 냄비에 들어가기 싫었던 그녀는 얌전히 정좌 자세를 취했고, 그리츠가 입을 열었다. “결국 남은 문제는 그 수호신인지 뭔지 하는 놈이다. 결국 그걸 어떻게든 하지 않으면, 이 땅의 문제는 해결되질 않으니까.” “때려눕힐 수는 있는 거예요? 아니, 때려눕혀도 괜찮은 거예요? 혹시 수호신이 사라진 뒤에, 농사도 같이 망해버리면 어쩌죠?” “글쎄다. 이놈의 설명에 따르면 이 땅은 수호신이 없던 시절부터 풍요로웠다고 하니 아무 일도 안 생긴다고 보는 게 타당하지만, 또 모르지. 수호신의 성질이 점점 바뀐 것처럼, 그 영향을 받은 이 땅의 성질도 바뀌었을 가능성이 없진 않아. 근데 그게 뭐 중요하냐? 네년 목숨이 경각에 달린 판에?” “당연하죠. 괜히 농사 쪽에 큰 문제라도 생겼다간,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 죽거나 하루하루 말라깽이로 살아가게 될 텐데, 그 원망과 원한이 다 어디로 가겠어요?” “모조리 저기 저 가주 놈에게 덮어씌울 수도 있다.” “그래도 안 돼요.” “…뭐, 선조의 죄니까 이놈은 책임이 없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지껄이려는 거냐?” “거기까지 머리가 꽃밭은 아니거든요? 그냥 그런 사태가 벌어졌을 때, 가장 먼저 버려지고 낙오되는 게 누구일지를 생각했을 뿐이에요.” 그레이스가 자라난 곳이자 그녀의 가족이 있는 고아원은, 이 땅의 풍요가 있기에 존재할 수 있는 곳이다. 사람들이 당장 자기 앞가림 챙기기에도 버거운 시기가 오면, 아직 홀로 자립할 능력이 없는 아이들은 가장 먼저 내쳐지게 될 터. “거 참 한결같기도 하군.” 그리츠의 말투는 비아냥거리는 식이었으나, 그 안에 담긴 뜻은 감탄에 가까웠다. 그가 봤을 때, 그레이스라는 소녀는 절대로 산 제물 역할 같은 걸 순순히 받아들일 성격이 아니었다. 되려 얌전히 사육당해 죽느니 차라리 이판사판으로 탈출 시도를 벌이고도 남을 성질머리였지. 그만한 끼도 있고, 과감함도 있다. 그런데도 그레이스가, 매일 같이 갑갑함과 우울함을 참아가면서까지 순순히 제물 역할을 받아들인 이유는 명확하다. 그러지 않으면 가족들이 피해를 볼 테니까.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고통스러워할 테니까. 그런 그레이스가 도박수를 던지도록 부추긴 것은 결국 그리츠였으니, 그 책임 역시 외면할 수는 없으리라. “뭐, 농사에도 아무런 영향을 안 주면서, 수호신만 깔끔하게 없애버리는 방법도 없는 건 아니지.” “오, 그게 뭔데요?” 반짝반짝 눈을 빛내는 그레이스에게, 그리츠는 입꼬리를 비죽이며 대답했다. “너, 신이 돼 볼 생각은 있냐?” 그레이스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옆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말했다. “그게 무슨 개소리죠?” *** 자네 그 소문 들었나? 이번 축제 말이야, 사실은 무녀님이 수호신님 곁으로 가는 걸 축하하기 위해서가 아니라고 하더군! 무슨 소리냐고? 이 사람아, 애초에 수상하지 않았나? 여태까지는 무녀들을 떠나보낼 때 아무런 소란 없이 조용조용히 진행했는데, 이번에만 갑자기 축제니 연회니 떠들썩한 것 자체가 이상한 일 아닌가. 내가 카닐리안 저택에서 일하는 친구에게 들은 건데, 사실 요즘 수호신님의 몸 상태가 영 좋지 않다고 하더군. 그분의 수명이 거의 끝날 무렵이라는 거야. 신에게 수명 같은 게 있냐고? 없을 건 또 뭔가? 당장 내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의 할아버지가 계실 때부터 이 땅은 수호신님의 가호를 받고 있었네. 그 정도로 오랜 세월을 견디셨다면, 신님이라 하신들 수명이 다해도 이상할 거 없는 일 아니겠나. 그렇지. 자네 말대로 참으로 큰일이지. 수호신님께서 떠나시면 이 땅이 다시 척박하고 메마른 땅으로 변할 테니까. 헌데 우리 같은 놈들도 생각할 수 있는 걸, 수호신님께서 생각하지 못하셨을 리가 없지. 그분께서는 이미 다 대책을 세워놓으셨네. 어떤 대책이냐고? 어흠, 그러고 보니 목이 좀 마른 데…. 아니 아니, 한잔 사달라는 의미는 아니었네만, 그래도 성의를 무시할 순 없으니 받도록 하지. 쓰읍, 캬아! 좋군. 수호신님께서는 자기 수명을 대비해서, 인간 모습으로 속세에 나와, 어느 여인과 아이를 만드셨네. 그리고 그 아이를 직접 데리고 키우는 대신, 평범한 사람들과 어울리게 하셨지. 그래야 세상의 고통이나 고민을 잘 알 수 있다고 하시면서 말이야. 그 아이는 무척이나 활발하고 호기심이 많아, 날이면 날마다 주민들의 시시콜콜한 이야기를 경청했지. 누구 떠오르는 사람 없나? 그래, 자네도 눈치가 없진 않군! 이번 무녀님, 그분이 바로 수호신님의 따님인 걸세! 알겠나? 이번 축제는 무녀가 수호신의 곁으로 가는 걸 축하하는 축제가 아니야. 옛 수호신을 떠나보내고, 새로운 수호신을 맞이하기 위한 하나의 의식이라고! 그러면 왜 다른 사람들에게는 이런 중대한 사실을 숨기는 거냐고? 예끼, 이 사람아. 지금 자네 반응이 바로 그 정답일세. 수호신님이 돌아가신다고 알려지면, 그리고 새로운 수호신님이 우리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서 자라났다는 게 알려지면, 다들 혼란에 빠져 난리를 치지 않겠나. 카닐리안 가문은 그 혼란을 막기 위해서 사실을 숨기고 쉬쉬하려고 한 걸세. 지금의 무녀님이 정식으로 수호신 자리를 물려받고 나면, 그때 가서야 공표할 예정이었겠지. 그러니까 자네도 이 이야기, 어디 가서 함부로 떠들거나 할 생각은 꿈도 꾸지 말게. 내 특별히 자네에게만 알려주는 거니까. 알겠지? 그래, 그래, 알았으면 됐네. …음. 수호신님이 바뀌면, 달라지는 거? 글쎄, 이건 추측일 뿐이지만… 일단 무녀가 없어지지 않겠나? 어째서냐고? 이건 내가 할아버지에게 들은 이야기인데, 아주 옛날에는 사실 무녀 같은 직위가 아예 없었다고 하더구만. 그런 거 없어도 이 땅은 충분히 풍요롭고 기름졌다고. 근데 어느 시점부터 본래 없었던 무녀가 떡 하니 생겨났다는 이야기야. 그 이유가 뭐겠나? 바로 수호신님의 수명이 점점 가까워져, 전보다 힘이 떨어져서 그랬던 거 아니겠나. 예전에는 혼자서도 멀쩡히 이 땅을 건사할 수 있었는데, 나중에는 혼자서는 힘이 부족해 무녀니 제물이니 하는 것의 힘이 필요했던 셈이지. 반대로 말하자면, 이제 막 신이 된 분은 파릇파릇한 새싹 같은 존재이니, 괜히 그런 요령을 피울 필요가 없다는 뜻일세. 하하! 그래! 좋은 일이야, 실로 좋은 일이지. 솔직히 무녀로 뽑힌 당사자와 그 가족만 하겠냐마는, 주변에 있던 우리들도 속 불편하고 꺼림직하기는 매한가지 아니었던가? 근데 앞으로는 그럴 일이 없어졌으니 이 어찌 경사가 아니겠나. 우리는 뭘 해야 하냐고? 따로 할 게 뭐 있겠나! 그냥 본래 있던 수호신님 가시는 길 외롭지 않게, 그리고 새로 오신 수호신님을 환영할 수 있게, 그저 떠들썩하게 먹고 마시면 되는 일이지! 새로운 수호신님 만세! 그레이스님 만세! 어이쿠, 흥겨워서 목소리가 커져 버렸군. 씁, 누구 들은 사람 없겠지? 아무튼, 자네. 이건 자네에게만 들려주는 이야기니까, 부디 입조심하게. 다른 이들에게 이 비밀은 알려주면 안 돼. 알겠지? 허허! 그래! 자네만 믿겠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