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1화 거지 그리츠(Gritz) (7) - 전설의 이면 지금도 그런 경향이 없잖아 있지만, 옛 시대에 곡물이란 그 자체로 식량이자 화폐이자 권력이었습니다. 먹을 것이 많다는 건 더 많은 사람을 거두어 부릴 수 있다는 뜻이고, 사람이 많다는 건 그만큼 많은 땅을 소유할 수 있다는 뜻이지요. 그런 상황에서, 경쟁자들의 농사를 모조리 망하게 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겠습니까? 그것이 대체 어느 정도로 강력한 힘이겠습니까? 만약 선조께서 가진 것 없는 일개 개인에 불과했더라면 경쟁자들이 죽자 살자 덤비는 꼴에 그대로 당해버렸을지도 모르지만, 카닐리안은 그 시점에서도 독보적이지 않았을 뿐 이미 손꼽히는 가문 중 하나였습니다. 경쟁자들의 발악을 견뎌내고, 이를 역으로 먹어 치울 만한 역량을 이미 갖추고 있었다는 뜻이지요. 카닐리안보다 넓은 땅을 가졌어도, 질 좋은 땅을 가졌어도, 풍부한 수원과 재주 좋은 농부들을 데리고 있었어도, 그런 건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경쟁자들은 저들의 세력을 온존하지 못한 채 뿔뿔이 흩어지거나 무너져 내렸고, 그 세력을 흡수하며 카닐리안은 점점 더 몸집을 키워나갔습니다. 최초로 그것의 힘을 이용했던 선조께서 영면에 빠지시고, 그 후계가 새로운 가주 자리에서 활동할 무렵에는, 더는 그 누구도 카닐리안이 이 땅 최고의 권세가임을 부정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아비의 뒤를 이어 가문을 통치하게 된 새 가주는 그것으로는 부족하다고 여겼습니다. 더 많은 것을 가지길 원했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저 지금 상태로는 이미 손에 쥔 권력을 유지하기가 어렵다고 여겼을 뿐이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한두 번이야 우연이라 쳐도, 카닐리안과 맞서려고 하는 이마다 때마침 농사를 망쳤습니다. 이에 대해서 사람들이 어떤 의심도 품지 않는다면, 그거야말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카닐리안의 권세가 드높으니 대놓고 떠드는 이는 없었지만, 이런 인식이 계속 남는 것 자체가 좋을 게 없었습니다. 지금은 작은 불씨라고 한들, 언제 카닐리안 전체를 불태울 업화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당대 가주께서 처음으로 생각한 것은, 제 아비가 그러했듯이 ‘그것’의 힘을 빌리는 것이었습니다. 땅과 물을 말라붙게 하는 게 가능하다면, 혹시 반대로 풍요롭게 하는 것 역시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말이지요. 가능한지 불가능한지를 따지면, 가능한 일이기는 했습니다. 그것의 힘을 써보니, 농사의 수확량이 분명히 늘어나기는 했으니까요. 하지만 당대 가주께서는 이내 이걸로는 부족하다며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벨라리아가 이미 충분히 풍요로운 땅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척박하고 메마른 곳에서 풍년이 난다면 언뜻 봐도 한눈에 들어오겠지만, 이미 충분히 농사가 잘되는 곳에서 조금 더 잘 된다고 한들 엄청난 성과는 아니었습니다. 물론 남들이 열을 수확하는 동안 열둘을 수확하는 게 꾸준히 누적된다면 무시할 수 없는 효용을 보이겠지만, 막상 그렇게 써먹기에는 ‘그것’이 지닌 힘의 한계가 명확했습니다. 농사를 망치는 것은 쉽게 해내던 그것이, 막상 농사를 잘되게 하는 방향으로 힘을 쓰게 하니 곧바로 지쳐서 퍼져버린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했습니다. 흉작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농사의 기나긴 과정 중 아주 짧은 시기에만 그 능력을 활용하면 충분했습니다. 허나 풍작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농사의 그 기나긴 과정 중 여러 번 힘을 쏟아야만 했습니다. 무언가를 성공하게 하는 것보다 망치는 쪽이 더 쉬운 만큼, 효율이란 면에서 애초에 비할 바가 아니었던 것입니다. 거기서, 당대 가주께서는 생각을 바꾸셨습니다. 풍작보다 흉작이 쉽다면, 쉬운 쪽으로 행동하면 된다. 땅이 본래부터 기름져서 풍작의 가치가 뒤떨어진다면, 기름지지 않은 것이 기본이 되면 된다고. …마,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저질러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당대 가주께서는 저지르셨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기름졌던 땅 곳곳을 메마르게 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풍부했던 물줄기를 메마르게 했습니다. 사람들이 자포자기하며 단체로 들고 일어나지 않을 만큼, 마치 천에 물을 스며들게 하는 것처럼 이 땅에 대한, 농사에 대한 기대치를 낮췄습니다. 그리고 세대가 바뀌어, 과거의 풍요롭던 벨라리아에 대해 알고 있던 이들이 줄어들 만큼 줄어들었을 때, 마찬가지로 세대가 바뀐 벨라리아의 새로운 가주는 선대에게 들었던 계책을 실행했습니다. ‘수호신’에 관한 이야기를 퍼트린 것입니다. 메마르고 척박한 땅을 풍요롭게 하는 신. 그리고 그 신의 가호를 받은 카닐리안 가문. 증거는 명확했습니다. 다른 농부들이 모두 형편없는 수확을 거둘 때, 오직 카닐리안과 그 손을 잡은 이들의 땅만이 풍작을 이루어냈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노인들이 말하는 ‘진실’ 같은 건, 당장의 배고픔과 카닐리안이 베푸는 식량 앞에서 쪼그라들었습니다. 그렇게, 선후가 바뀌었습니다. 본래 풍요로웠던 땅에서, 카닐리안과 적대한 이들만 흉년을 맛보는 것에서. 본래 척박했던 땅에서, 카닐리안과 우호적인 이들만 풍년을 맛보는 것으로. 수호신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신과 관련된 이야기는 점점 구체적으로 변했습니다. 여러 일화가 추가되었고, 카닐리안은 단순히 신의 가호를 받는 가문이 아닌, 신의 핏줄을 이은 가문이 되었습니다. …계획대로였다면, 거기서 끝나야만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끝나지 못했습니다. 첫 이상 사태는, ‘그것’의 언동이 점점 기이하게 변하기 시작한 것이었습니다. 본래 그것은, 일종의 얌전한 백치 같은 존재였습니다. 하루 종일 멍하니 제자리를 지키다가, 당대 가주가 찾아가 말을 걸면 그때야 드문드문 반응하고는 했지요. 헌데, 어느 시점부터 그것이 먼저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또 과일이니 의복이니 하는 것들을 요구해 오기 시작했지요. 가주들은 크게 개의치 않았습니다. ‘그것’이 요구하는 것들이 대개 별것도 아니었던데다가, 요구를 무시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생기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나의 자손아,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예를 갖추지 않는 것이냐? 허나 어느 시점부터는 더 이상 그럴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역대 가주를 자신의 자손이라고 불렀습니다. ‘그것’은 이전처럼 아이처럼 칭얼거리는 게 아니라, 위엄있는 말투와 표정으로 자신의 요구를 말했습니다. ‘그것’의 외모는 여전히 여기저기가 망가지고 짓물러져 있었지만, 그것이 내뿜는 금색의 가루 같은 광채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렬해져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것은 마치, 전설 속에 등장하는 ‘수호신’ 같았습니다. 그 사실을 깨달은 당대 가주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다른 사람들이야 어찌 되었든, 카닐리안의 역대 가주들만큼은 수호신의 이야기가 가짜라는 걸, 그들이 만들어낸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호신의 핏줄 같은 게 아니었습니다. 그들의 영광은 그들 자신의 모략으로 이루어낸 것이었습니다. 고로 당대 가주는 반발했습니다. 수호신을 부정하고, 수호신의 요구를 묵살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 카닐리안이 소유한 모든 토지가 가뭄이라도 일어난 듯 말라붙었습니다. -나를 공경하지 않는 자손에게, 내가 어찌 가호와 축복을 내리겠느냐? 그리 말하며 웃는 수호신을 보며, 당대 가주는 얼굴을 창백하게 했습니다. 그는 그제야 무언가가 절망적으로 잘못되었음을 깨달았지만, 너무나 늦은 깨달음이었습니다. 힘으로 수호신을 억압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 한때 그저 침상에 누워 있는 것이 전부였던 병자는, 어느새인가 자신을 위협하려는 병사 수십을 여유롭게 도살할 수 있는 괴물로 변해 있었습니다. 당대 가주는 필사적으로 용서를 구했습니다. 이미 영지는 혼란으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한번은 그동안 쌓아온 권위와 권력으로 무마했지만, 이대로 계속해서 흉년이 이어진다면 그 권세마저 무너질 것은 너무나 분명했습니다. -무녀가 필요하겠구나. 신이라면 무릇 그래야지. 그렇고말고. 수호신은 무녀를 요구했습니다. 자신을 공경하고, 자신에게 봉사하고, 자신을 보다 ‘신답게’ 해줄 부속품이자 제물을 바치라고, 그리하면 다시금 풍년의 가호를 내려주겠노라고. 신이 가진 힘의 원리를 생각해 본다면 가호를 내리는 게 아니라 그저 농사를 망치고 있던 힘을 거두는 것에 불과하겠지만, 감히 이를 지적하는 건 불가능했습니다. 아니, 어쩌면 수호신에게 그 두 가지는 같은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수호신이 그런 존재라고 소문을 퍼트리고, 사람들의 인식 속에서 규정한 것은 다름 아닌 역대 가주들이었기에. 수호신과 가주들의 입장은 뒤바뀌었습니다. 이제 가주들은 수호신을 자기들 입맛대로 통제할 수 없었습니다. 되려 수호신이 요구하는 내용을 충족하기 위해, 수호신이 저지른 일의 뒷수습을 하기 위해 가문이 힘을 써야만 했습니다. 주민들 사이에서 무녀를 선별하고 수호신에게 바치는 일이 통치에 있어서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는 걸 그들도 알았지만, 따르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수호신의 뜻이었기에. 카닐리안은 그저 수호신의 후손이자, 그 뜻을 받드는 종에 불과했기에.